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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굿은 발생 시초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된 한국의 토착신앙이다. 2005년 김수남 선생의 독일 전시에 맞춰 현지 잡지 ??Korea Forum??에 실리 독일 함부르크미술대학 교수인 요헨 힐트먼의 글에도 ‘한국 샤머니즘의 문화사’를 조명하는 김 수남 선생의 굿 사진들이 지닌 중요성은 무속이 천대받기까지의 역사를 통해 부각되어 있다.
“서구의 학자들이 오늘날 한국의 샤머니즘이라 일컫는 것은 한국의 전근대적 시골의 여성 문화이다. 이 문화는 유교와 불교적 특징이 우세한 사회에서 구전서사 전통과 고유한 종교를 지니고 있었다.(중략) 샤머니즘은 한국의 오랜 옛날부터 나타난다. 신라 금관들은 샤머니즘적 우주론을 시사하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왕릉에서 발견된 이 금관들은 기원후 6세기의 것이다. 또한 불교를 기반으로 한 고려 왕조에서도 샤머니즘을 억압하지 않았다. 불교는 4세기경 한국에 도입되었는데, 자연정령과 산신을 믿는 원시종교의 지역마다 다른 관습과 형상들을 교체하거나 말살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유교가 자리 잡으면서 샤머니즘은 억압을 받게 되었고, 남녀 샤먼들은 이제 사회의 낮은 계급에 속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보고들은 경멸과 편견에 가득 차 있다. 한국 문화를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일본 총독부는 식민지 지배 초기에 한국의 무당이 하는 의식들을 폭력적으로 폐지시켰고, 그들을 체포했다. 이후 1970년대, 남한에는 서구 모델에 따라 지역의 산업화 과정이 도입되고, 이른바 ‘새마을 우동’이라고 불리는 근대화의 파도 속에서 샤머니즘은 근대적 농업을 방해하는 미신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혼, 김수남 사진굿??,66~68쪽에서 재인용, 현암사)
이번에 굿과 함께 전시된 고인의 생전의 업적들은 ‘사진 밖으로 나온 예인들’이란 제목 아래 크게는 1981년에서 86년 사이에 작업한 우리나라 각지의 무인들과 예술인들을 담은 사진들과 1988년 이래 김수남 씨가 관심의 폭을 넓혀 우리나라의 무속 제례인 굿과 구조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무속 제례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사진 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새 발의 피’이다. 작년 6월에 발족된 김수남 추모 위원회가 고인이 정리해 둔 사진들을 꼬박 한 달이 걸려 개수해 본 결과, 무려 16만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8만점은 우리나라의 굿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는 아시아의 무속을 담은 사진이라고 한다.
1981년 6월 23일 서울 석관동 김금화 만신 집에서 있었던 채희아의 내림굿 현장에서 김수남 씨를 처음 만난 이후 4반세기 동안 함께 굿판을 다니는 동료로서 우리나라의 굿을 연구한 학자 황루시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번 오구굿의 첫 장은 큰무당 김금화씨가 자비를 들여 맡겠노라 했다고 한다. 김금화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기능보유자로, 국내외로 우리의 굿을 알린 유명인이다. 그녀는 꿈속에 자주 보이는 김수남씨가 안타까워 고인의 고를 풀어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이번, 연이은 굿판의 오프닝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같은 굿판의 식구처럼 김수남을 아꼈던 김금화씨는 집에 술을 담아놓았으니 들나물에 밥이나 먹으러 오라며 청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인데, 아마도 그녀의 ‘사자얼름’으로 김수남씨도 혹시라도 다 풀지 못한 이승에서의 아쉬움을 다 달래지 않았을까 싶다.
장산도는 전라도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 작은 섬에도 문명의 전수는 빠르게 이뤄져 교회가 무려 7개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굿판인 장산도 씻김굿을 주례하는 자는 여든 나이의 당골 이귀인씨이다. 8대째 가업을 물려받은 세습무 이귀인씨는 신명있는 상쇠이자 판소리와 그림에도 능한 예술인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이자 역시 세습무인 강부자씨도 그와 함께 서울까지 김수남씨의 넋을 씻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이귀인씨의 말에 따르면, 죽은 자를 세 번 씻겨야 원한 없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이 당골네들은 1980년 8월 당시 목포에서 배를 타고 씻김굿을 보러온 김수남씨를 맞이했던 현장에 있던 자들인데, 다행이 아직 건강해서 고인의 유족이 사는 서울까지 올라와 씻김굿을 선보일 수 있었다. 본래 씻김굿은 보통 4시간에서 6시간 동안 펼쳐지는 굿판으로 노래와 춤과 사설(말)이 곁들어진 종합 예술이다. 일반적으로 조왕석, 성주굿, 초가망석, 손굿, 제석, 넋올리기, 고풀이, 씻김, 질닦음, 오방신장, 해원굿 순으로 행해지는 내내 당골들은 깔끔하게 흰 색의 한복을 입고 굿을 진행한다. 그러나 살아 남아있는 유족들의 머리 숫자만큼의 초를 밝히고 발복을 기원하는 제석에서만은 주무가 머리에 하얀 고깔을 쓰는데, 전체적인 복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한 요란한 굿판의 무당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전라도 지역의 굿에는 상징적으로 삶의 원한이 맺힌 매듭인 ‘고’를 풀어지는 고풀이의 의식을 치른다. 이 날도 하얀 광목의 매듭을 주무가 망자의 부인과 장남과 함께 푸는 절차는 보는 이로 하여금 후련함이 쏴하게 느껴지게 하는, 그러면서도 신성함이 가슴에 와 닿게 했다.
1981년 4월,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동김령 바다 끝 작은 집에서 제주도에서 내노라하는 심방(제주도에서는 무당을 심방이라고 한다)을 모두 모시고 초신질을 바른 서순실 무당의 신굿을 열흘이나 지켜보았던 김수남은 결국 동아일보에 시말서를 썼다고 한다. 제주 한림읍이 고향인 김수남씨에게 제주의 시왕맞이는 그래서 보다 깊은 뜻이 있다하겠다. 김수남을 삼촌처럼 여기며 지냈던 심방 서순실이 이번에는 서울까지 올라와, 요량을 들고 그의 넋을 달랬다. 원래 사흘 이상 걸리는 큰 굿이지만, 서울굿판에서는 ‘질침’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소미(小巫)들은 대양(혹은 대영이라고도 한다. 징에 해당)과 북과 장구를 두드리며, 밥그릇 모양으로 생긴 설쇠란 특이한 악기로 분위기를 돋우는 가운데, 시왕맏이굿이 시작된다. 반복되는 리듬에 금방이라도 도취되어 버릴 듯한데 거기에다 심방이 흔드는 요량(요령) 소리는 짐짓 섬뜩한 느낌까지 느껴질 정도로 귀기 서리게 들려왔다. 시왕(十王)이란 지옥 10계를 다스리는 신들을 가리킨다. 제일에는 진광대왕에서부터 시작되어, 제십에는 전륜대왕에 이르기 까지 사람이 죽으면 이 문을 거치면서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굿판에서 하이라이트는 ‘질침’이라는 절차로서, 육지의 ‘길닦기’에 해당되는 무례(巫禮)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무당들이 문을 찢는 것과는 달리, 제주 심방은 세워둔 10개의 문을 통과하면서 위무만 했다. “이 세상의 일 년은 저싱(저승) 십년이랩니다. 이 세상을 떠낭징 하낭, 기나깅 고통이래구낭~”라고 육지 사람인 내가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제주 방언으로 이어지는 무가는, 고인이 된 김수남씨의 평소 업적과 고인이 남기곤 간 유족들의 한을 달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운율이 규칙적으로 변주되는 것을 제법 예리한 귀를 가진 나는 깨치게 되었지만, 정확히 어떤 변주 양식을 갖춘 무가인지는 한 번 듣고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선율의 높낮이는 타도를 타듯 출렁였고, 휘감고 풀기를 거듭하는 장단을 제주 앞 바다의 물살을 여상시켰다. 심방이 질침을 놓아, 시왕문 위에 흰 창호지를 덮어 놓으면, 상주들과 손님들이 망자를 위해 노잣돈을 올려주고, 이윽고 상주들과 함께 심방이 긴 목면을 덮어 깔아 놓은 질침을 말아 거둔다. 망자가 편히 저승길을 갈 수 있도록 낮게 패인 곳은 솟게 하고, 볼록 튀어 나온 것은 발로 다져 평평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질침 놀이에서 들려준 무가는 참으로 애달프게 다가왔다.
“얼마낭 애달곱고 얼마낭 가신 님 무상함이 맺힌맵까?
아들형제 섭섭한 것 다 풀렁
(중략)
저승인낭 3천 7백리 질(길)이어구나!“
의식에서 심방 서순실씨는 저승처사가 되어, 전배지를 등 뒤에 붙이고 시왕길을 떠났다. 죽은 자의 넋과 산 자의 아쉬움을 달래는 의식은 마지막으로, 신명 나는 서오제 소리로 마무리를 맺게 된다. ‘얼랑 얼랑’이란 물결 넘는 모습이 소리로 표현된 4*4조의 음율 속에 며칠 씩 끈 긴 굿판 뒤의 흥취가 느껴진다.
굿은 이처럼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한 우리의 민속 제례이다. 만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일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미신적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우리의 많은 노래와 춤이 굿에서 비롯된 것임을 굿판을 지켜본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무조건 내가 믿는 종교가 뱉어낸 샤만적 주술행위라고 배척해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은 헤야려야 한다. 민속학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근간을 되살려 현대화시켜야 하는 작업을 위해서도, 굿은 생활 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관과 유리해서, 굿 자체의 유희적 속성(종교적 속성이 일차적이지만)을 탐구하며, 우리의 정신문화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때이다. 나 역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굿이니 무당이니 하는 무속에 대해 거부감이 적다. 물론 내가 굿판을 열거나 점을 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우리의 무의식 속에 명백한 뿌리를 두고 있을 무속 문화를 관찰해야할 대상으로서 바라보지 않는다. 김수남 씨가 무속의 현장을 사진 속에 담으며 견지했던 태도를 김인회 교수가 전하는 말로 이 글의 서두를 마치고, 다음에는 ??바리공주??를 통해 그림책 속에 나타난 무속 신앙의 보편성을 살펴보도록 할까 한다.
“김수남은 여느 사진작가나 학자 호사가들이 촬영대상을 객관화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전문가적 위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행태로 작업에 임하는 작가이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몰입하고 대상이 속해 있는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무의미한 상황을 체험함으로써 열광하고 감동하는 자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감추려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진가이다. (중략) 그러니까 사진작가 김수남의 남다른 마력의 정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의 인간적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흡인력의 정체인즉 남들을 내게 끌어들이기에 앞서 내가 먼저 남들에게 끌려들어가는 능력, 남들의 무의식 속으로 자기가 먼저 뛰어들어가는 그의 피흡인력 내지는 감정이입 능력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위의 책 49,50쪽)
강신무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다 고통의 극한에 닿는 무병을 앓고 강신무가 된 파란만장하고 가슴 아픈 사연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강신무들이 <바리공주>를 구송할 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픔이 배어들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공주’는 지옥에서 헤매이는 귀신들을 극락왕생하도록 빌고 이승으로 오면서 강을 지날 때 극락가는 배, 지옥으로 가는 배, 떠도는 배를 보면서 사령들이 극락왕생을 하도록 빌어주고, 생명수로 죽은 자를 살릴 수 영험한 생명수를 갖고 있는 초월적 존재이므로, 특히 서울과 중부권의 진오기굿의 ‘본풀이’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이야기는가상의 왕국에서 시작되는데, 저승 세계인 서천서역국에 대립되는 이승의 공간 쯤 되는 이 왕국의 오귀대왕은 딸만 내리 낳아 일곱째 딸에게 ‘버렸다’는 의미에서 ‘바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바리는 울대숲에 던져져 겨울에는 얇은 무명옷으로 견디고, 여름에는 두툼한 솜옷을 입은 채 더위와 씨름하나, 모질고 질긴 아이의 목숨은 숲 속 정령들에 의해 보호 받는다. 세월이 좀 지나 바리의 생존 소식을 전해들은 오귀대왕은 신하들을 시켜 바리를 옥함에 담아 열두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처량 맞고 불쌍한 꼴로 떠내려 온 바리공주를 살린 이는 태양서촌이란 마을에 사는 아이가 없는 늙은 노부부였다. 총기 있게 자라난 바리공주가 7살이 되던 해, 막내딸을 버린 오귀대왕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그림책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산 무녀 배경재의 구연본(口演本)에 따르면, 이 태양서촌은 서천서역국과 유사한 공간일 것이고 공간적 배경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한 번 버렸으면 다시 찾은 뒤에는 뻔뻔하지는 말아야 할턴데, 오귀대왕은 수양산 큰 바위 밑에 있다는 전설의 생명수를 구해오라는 부탁을 금이야 옥이야 키운 여섯 딸들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하자, 자신이 오래전 버린 바리를 수색한다. 신하가 수소문해 만나게 된 바라는, 그러나 신하가 내미는 이레안 저고리를 보고도 자신이 일곱째 공주란 것을 믿지 못하자, 신하는 그 길로 한걸음에 궁궐로 달려가 왕와 왕비의 피를 받아 바리에게 다시 찾아온다. 왕과 왕비의 피에 바리의 넷째 손가락에서 피를 받아 합쳐보니, 곱게 엉겨 붙자, 바리는 입궐하게 된다. 김승희씨가 재화한 그림책 ??바리공주??에서는, 자신을 버린 후 찾아낸 이후 고작 아비 오귀대왕이 저승으로 혼자 가서 생명수를 구해오라는 것임을 알고는 처음에는 울며 거절을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여섯 언니들 어디 두고 쑥대밭에, 천리 바다에 죽으라고 던졌던 버리데기, 저더러 가라 하십니까? 나는 못 갑니다, 나는 못 갑니다.” 하지만 바리는 마음을 고쳐먹고, 열 달 자신을 뱃속에서 키워준 부모 은공을 헤아려 가겠다고 한다. 이제 바리는 머리를 풀어 남자처럼 쌍상투를 틀고 여자 옷을 벗고 남자 옷으로 무쇠 옷을 차려 입고, 무쇠 신발을 신고, 무쇠 지팡이 세 죽과 쇠 패랭이 세 죽을 지닌 채 구약(求藥) 타계여행을 떠난다.
가는 길에 부처님으로부터 금주령을 받고 락화(모란) 세 송이를 받은 공주는, 위험한 상황에서 락화를 던져 바다의 물을 가르고, 가시밭길을 헤치고, 앞뒤로 몰려오는 귀신들을 물리치고, 약수 근처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약수 앞에는 구 척이나 되는 무장승이 지키고 서 있다가 약 값과 길 값과 산 값을 요구한다. 이승을 떠날 때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바리공주는 무장승의 요구대로 삼 년간 밑 바진 독 꽃밭에 물을 길어 주고, 불씨 없는 불을 삼 년 때어 주고, 일곱 아들까지 나아주며 9년 세월을 보낸다. 어느 날 밤 불길한 꿈을 꾼 바리 공주가 얼어나 무장승에게 어서 약수를 달라고 요구하자, 무장승은 숨살이 꽃과 피살이꽃과 살살이꽃과 함께 목숨을 살리는 생명수를 내어준다. 도저히 혼자 남기는 외로웠던지 무장승은 일곱 아이까지 대동해서 바리를 따라 길을 나선다.
바리가 돌아온 이승에는 아비의 상여가 북망산천을 넘고 곡을 하는 상여꾼들의 소리가 온 나라에 시끄럽게 들려왔다. 바라는 무장승에게서 받은 목숨을 살리는 세 가지 꽃과 생명수를 아비의 목숨을 되돌리는데 성공하고, 죽음에서 깨어난 아비가 내미는 땅과 재물의 유혹을 마다하고 스스로 무조신이 되기를 자청한다. 한편 김승희 편의 ??바리공주??재화에서는 바리가 아비가 내주는 선물을 받고 무장승과 아들들과 살다, 후일에 일곱 아들은 북두칠성이 되어 하늘에 오르고, 바리 공주는 저승길 혼령들의 길을 잡아 주고, 저승길로 못 가는 혼령의 넋을 씻겨 길을 인도하는 무조신이 되었다고 ‘바리공주’의 신화를 풀어쓰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많은 무속인들이 진오기굿에서 바리공주의 구송을 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져 몇몇 자료를 살펴보던 중,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인 조현설 선생님이 쓴 한겨레21의 컬럼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13 - 바리공주 무조신이 되기까지>를 검색하게 되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무속신화 <바리데기>가 무조신의 ‘본풀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 바리데기는 무당들의 조상신이 되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바리데기의 저승여행이 무당이 접신 상태에서 체험하는 천상, 지하 여행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라는 해답이 마련되어 있다. 바리데기 자신이 신화 속에서 무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건국대학교에서 서사 무가를 연구 중이신 김환희 선생님이 ??어린이와 문학?? 과 가진 세미나에서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저승세계에도 가고, 생명수도 구하고, 저승에서 신음하는 존재들을 금주령으로 구원도 하는 바리공주는 만신의 인위왕, 만신의 몸주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신화이다.”(??어린이와 문학?? 2006년 10월호, 168쪽)
이제 새해 이틀 날 있을 ‘서울 진오기새남굿’에서는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한 큰 굿이 열릴 예정이다. 본래대로라면, 서울지역에서는, ‘지노귀새남굿’이라 칭하는데, 이 굿은 전국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죽음의 의례라고 한다. 지노기는 대체로 탈상 전후에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라도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할 때도 하기도 한다. 저승으로 가야할 망자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다니면 산 사람들, 특히 망자와 가까운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여기지는 민속 신앙에 따라, 살아있는 사람들은 망자의 저승길을 닦아 고이 보내주는 의례를 치르는 것이다. 즉 망자를 위함이 곧 산 자를 위한 의식인 셈이다. ‘지노귀새남굿’에서도 바리공주 일대기를 노래하는 말미를 드리는 의식이 있다. 무당들이 모시는 큰 무당 무조신 바리공주를 불러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해 달라고 청하는 의식인 것이다. 무당이 공수를 내리듯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수많은 무속인을 만나온 김수남 씨는 벌써 바리공주를 만나 한 상 질펀한 술상을 차려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넉살 좋고 붙임성 좋다는 그 분이 그 좋아하던 술 이승에서 채 못 마시고 갔으니 얼마나 한이 되었겠는가? 김수남씨보다 먼저 떠난 우리나라 무속 연구가의 대표 학자 임석재 선생과 술판 앞에서 ‘바리공주’와 ‘바리데기’의 신화를 놓고 입씨름을 하고 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사라져가는 우리 무속의 현장을 사진 속에 담아 후학들을 위해 길을 터준 김수남씨야 말로, 또 다른 무당이 아닐까 싶다.
망부가 - 눈물이 진주라면
평소 작업실에서 사진을 정리할 때 김수남씨는 고인이 된 성금연씨가 작곡하고 연주하는 ‘눈물이 진주라면’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김수남씨의 평생 자랑 중 하나가 성금연씨로부터 권주가와 함께 받은 한 잔의 술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제 성금연씨와 그의 부군인 지영희씨와 함께 술과 음악을 원도 없이 즐기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성금연씨(1923~1986)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여섯 살에 민속 음악계에 입문하여, 최막동, 안기옥, 조명수에게서 가야금 산조를 익히고, 우리나라 최고의 국악이론가 중 한 분이었던 지영희 선생과 결혼하여 부부가 함께 민속 예술의 세계를 개척하는데 일생을 바친 분이다.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가 된 성금연 선생님은 1970년대 국악계 최고의 가야금 산조 연주자로 꼽혔다고 한다.
성금연씨는 국악계의 오해로 남편 지영희 선생과 함께 1974년 미국 화와이로 이민을 떠나, 그 곳에서 지영희씨와 사별하게 된다. 그 후 남편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담어 작곡한 사부곡이 바로 ‘눈물이 진주라면’이다. 딸들에게 선물로 준 녹음 테이프에는 “눈물이 진주라면 모았다가 나눠줄 텐데, 눈물은 자국도 남지 않으니 가야금 소리로 옮겨 준다.”는 육성이 담겨 있다고 한다. 15현의 가야금과 철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하곤 했더 성금연 선생은 이 곡 ‘눈물이 진주라면’ 역시 명주실 가야금 대신 울림이 크고 여음이 긴 철가야금으로 연주했다고 전한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처럼 느리고 한없이 슬픈 가락을, 김수남씨를 기리는 1주기 때 성금연씨의 딸인 지성자씨가 어머니의 철가야금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연주했다. “혹시 가야금 줄이 끊어져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의 말을 잊지 않고 시작했던 연주에서, 그녀의 예상대로 구슬프게 울어 대던 가야금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급히 지성자씨의 가야금으로 바꾸려 조수가 대기했으나, 이미 깊은 정한에 빠져 소리를 뜯고 있던 지성자씨는 어머니의 철가야금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굿판 내내 검은 옷을 입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여인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김수남씨가 80년대 중반에 잘 나가던 동아일보사 사진부 차장직을 그만 두고, 아시아 오지를 돌아다니며 무속현장을 사진기에 담아 오겠다고 했을 때 그를 믿고 앞으로 십 년간은 두 아들을 키우고 가계를 꾸리를 일을 맡아 하겠다고 그를 독려했던 그녀였다고 한다. 하지만 술 좋아하는 김수남씨가 카메라 하나 메고 굿판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갈 때, 그녀의 마음은 어찌 허전하지 않았을까? 일에 중독된 김수남씨가 중국에서 스파이로 쫓겨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를 훗날 영웅담처럼 들을 때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조마조마 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술과 과로로 망가진 몸으로 쓰러졌을 때, 김수남씨 자신이 3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 점으로 미뤄봐서, 그녀가 겪어야 되었던 예술가의 부인으로서의 삶은 인고로 점철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처음 내가 굿판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내 우려와는 달리 담담해 보였다. 그러나, 굿판이 절정에 다다를 때 혹은 무당의 입을 통해 김수남씨의 넋두리가 시작될 때면 고개를 숙이고 애써 쏟아지는 슬픔을 억누르려던 그녀는 무거운 표정까지전부 가릴 수 없었다.
남편이 평소 좋아했던 곡이 ‘눈물이 진주라면’이란 사부가라니. 이 노래가 운명의 쳇바퀴처럼 작곡자 성금연 선생의 가야금에서 대를 물려 그녀의 따님이 가야금에서 튕겨져 나오다니? 가뜩이나 곡 전체가 진계면조로 되어 있어 한과 애틋함이 가득한 곡이건만, 목울대를 떨며 간신히 올라오는 울음을 참던 여인이 목청 놓아 울어 버리듯, 철가야금의 줄이 끊어졌을 때의 비장함이란 말해 무엇 할까? 최근 들어 나는 KBS FM 1 방송에서 하루 세 차례 하는 국악 방송을 자주 듣게 된다. 이상하게도 내가 라디오만 틀었다하면, 국악 방송 시간이다. 이런 절묘한 인연이 비단 사람과만 맺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이다. 사실 김수남씨 1주기를 맞아 인사아트센터에서 굿판을 벌인다는 소식도 국악 방송 시간에 들었다. 모든 것과의 인연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사연이 숨어있다. 부쩍 국악 방송을 듣게 된 나는 이렇게 정해져있는 수순대로 우리의 문화 속에서 넋과 혼과 교류하게 된 것이다. 굿을 통해 망자의 넋만 씻긴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내 넋이 깨끗해진 느낌이 든다. 이제 ‘바리공주’를 서울지노귀새남굿판에서 만나야 할 차례이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인연이 준비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 다음에는 더욱 내밀한 인연이 다가올 것임을 막연히 느끼게 된다.
첫댓글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오늘 신동흔 샌님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거기에 있더라구요. 김수남 유작전은 2월 20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하고 2월 19일 2시에 이애주 넋살풀이가 남아있는데요. 관심있는 분들 보러가세요. 이애주 굿은 설 다음날이라 못볼 것 같아요. 보고 싶은데, 친정가야되서요.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