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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릉 와릉 꿍아틀 (섬 과 가마니)
* 이글은 잊혀 지지 않으려 기록을 남기고자 하여 쓰는 글입니다*
2017 02 11일 음력 정원 대보름 즈음 하여
홍대입구에서 by k o kim
A. 벼바심-1962년
엊저녁 밤까지 노적가리를 쌓느라고 지친 아저씨(내게는 형님, 조카들에게는 아저씨) 들이 쩔쩔 끓는 사랑방 자리 방바닥 위에 대충 뉘어져 코를 골며 주무신다. 한 잔술 막걸리의 효력이 꿀잠으로 이어졌었나 보다.
부지런하신 할아버님은 벽에 걸린 괘종시계 소리가 덩~덩~ 울리면서 3시를 알리니 일어 나셔서 광목(면)으로 만든 하얀 바지와 저고리와 홑무명(면)적삼 입으시고 양말 신으신 발목 위에 댓님(ankle band) 치시고 고무신 신으시고 훠이 훠이 한 바퀴 문밖 큰 바깥마당을 도신다. 괘종시계는 매일 태엽을 손으로 돌려서 밥을 주어야 24시간 움직이며 매 시각마다 덩덩 소리 내며 밥값을 하며 산다. 더러 인간이 잊어버리고 밥을 주지 않으면 시계는 잠을 자곤 했다. 괘종시계 사실 때 회중시계를 덤으로 달라고 하셨다! 고 가끔 농담하셨는데, 회중시계(pocket watch)가 더 비쌌던 것이 맞는데..
조바심
가을녁에 벼바슴(심)날을 잡으려면, 새벽과 밤중에도 일을 하려면, 달이 뜨는 보름날 즈음해서 잡는 것이 우선순위이었다. 그러나 이 보름날마저 공히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이유라면 동네의 큰집서 부터 날을 잡다 보면 작은집은 여러 가지로 순서/차례 가 꼴지 일 수 밖에 없다. 꿍아틀이며 모탕이며 선풍기이며 모두 빌려야 하기에 내 차례가 아니 올까봐 조바심 할 수 밖에 없었다.
* 이 “조바심” 이라는 단어는, 좁쌀이 작고 낟알 털기(바심)가 원활치 않고 털면 날아가서 찾기 힘드니 불안하고 걱정되기에 조바심 이라는 어원이 생겼다 한다.
볏단
벼바심을 하려면 우선 각각의 일을 連動 하기에 좋은 간격 동선(動線) 거리가 짧아야 한다. 털려서 나온 벼가 쌓이는 장소, 탈곡된 볏단을 던질 장소, 볏단을 다시 겨우(울)내 쌓아 놓을 장소, 벼를 털어야 하는 모탕 놓을 자리, 반자동 벼털이기계(발로 밞는 꿍아틀/탈곡기) 놓을 자리, 털이 된 볏더미 속에 남은 검불(먼지/탑새기 및 볏짚)을 걸러낼 자리, 덜 털린 볏짚을 도리깨로 투두릴 자리를 잡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간혹 논에 있는 이미 말려 놓은 볏가리에서 볏단을 당일 직접 논에서 구루마로 실어 오거나 지게로 당일 지고 와서 부릴(unloading) 수 있는 자리까지 계산한다. 위치를 잘 잡아서 적은 일품으로 제때에 마칠 수 있게 해야 함이다.
이러한 동선과 위치 잡기는 우선 高宗시절 1881년 11월 2일(음) 신해년 출생 이신 할아버님 과 일잘 하신다고 뽑히신 동네 고참 아저씨와 큰일꾼 아저씨의 몫이었다.
새볔 닭
3시반경 새벽닭이 “꼬끼오” 하고 우니, 동네 아저씨들이 먼저 오시고, 품앗이 형님들도 오셔서 두런거리시면서 사람 인기척이 나면, 이제 사랑방에서는 꿀잠에서 깬 아저씨와 형님들이 일어나서, 펄펄 끊는 솥에서 물 한바가지 퍼서 세수를 하고 삼베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아침먹유! 진지드슈! 식사허슈! 하는 소리가 부엌에서 나오면 소고기무국에 밥 한술 대충 드시고 마당으로 나오신다. 멧줄(메칠 볏단을 묶는 줄)을 여러 개 준비한 것을 점검하고 모탕도 준비 하고 일명 “꿍아틀”이라는 수동탈곡기도 밟아보면서 윤활유도 넣고 바른다. 꿍아틀 바로 위에 줄을 매어 석유불(남포등/호롱불/호야불)을 달아 놓는다. 100촉(W) 백열전구 전기불을 1973년에야 볼 수 있었다.
벼 노적가리 위의 갑바(cover-이슬방지차 덮어 놓은 면포)도 걷어 내며 점검한다.
B. 모탕 과 꿍아틀
어이차! 영차! 볏단을 들어서 모탕(절구를 거꾸로 엎어 놓기도 한다)에 볏단을 메치시는 것으로 곡신(穀神)에 신고를 한다. 벼 소출 많이 많이 나고 바심 잘 끝나게 해주십시오! 토왕신님(土旺神任)! 막걸리 한잔 볏단 노적가리 위에 고시레! 세 번 뿌려진다.
“지금부터 아까 조를 짠대로, 한조는 모탕(볏단을 샛내끼/새끼로 감싸서 도리깨질 하듯이 어깨근육을 돌려서 벼를 터는 절구통이나 큰 소나무밑통)에서 바심 하고, 한조는 꿍아틀을 돌려서 바심 한다. (발로 밟아서 둥근 원형의 탈곡 통이 돌면서 탈곡통 위에 박힌 삼각격자 철사三角格子鐵絲에 부딪히면 아파서 벼 낟알이 떨어진다.) 그리고 나머지 무수리들은 볏단 잘 나르고 쪼개서 탈곡기 서게 하지마쇼! 라는 말에 모두들 상기된 얼굴이다. 일 년을 기다린 날이다. 아무리 일해도 힘이 다시 샘솟는 날이다.
모탕 - a woodenblock
모탕에 메질은 힘이 좋아야 한다. 메질은 어깨로 메친다. 네 번 정도에 벼 낟알이 많이 떨어지는 경우는 고참 아저씨 메질이고, 경험이 적으면 밤새 메쳐도 낟알이 대롱대롱 몇 개 남아서 힘도 들고 주위 동료들로 부터 장난스레 조롱도 받는다.
그리고 꿍아틀은 돌면서 꿍아 꿍아 와릉 와릉소리가 난다. 꿍아틀을 이용하여 탈곡하는 조의 사람들은, 꿍아틀과 연결된 널빤지 위에 놓인 묶였던 볏단을 옆 사람이 풀어서 세 쪽으로 나눠 주면 옆을 보지 않고도 한 움큼씩 움켜쥐고서 하늘로 쳐들고서 다시 천천히 탈곡 통에 내려놓는 연습 후에 한다. 위에서 볏단을 아래로 내릴 때 다른 생각을 하거나 손아귀에 힘이 없으면 손에서 볏짚을 놓쳐서 앞 멍석위의 날곡식/벼 앞으로 볏단이 통째로 던져 진다(딸려간다). 혹 무섭게 빨리 돌아가는 탈곡통에 볏짚들이 몇 개 끼이면 이때는 탈곡기를 세운(정지)후에, 탈곡 통에 심어진 격자쇠에서 이 볏짚을 하나씩 손으로 낫으로 끊어서 모두 빼낸 후에 다시 꿍아틀을 돌려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때 잃어버린 시간 때문에 혼났다. 이 쉴 틈에는 쌓인 벼 더미를 나무고무래로 당겨서 가래로 멀리 던져 이동시켜 다시 공간을 확보한다.
꿍아틀 – 와릉기 - 脫穀機 - a thresher
꿍아틀 시작작동 경우에는, 한발은 땅에 딛고 한발은 꿍아틀 발판(수동 액서레이터)에 올려 놓고서 한발로 눌러서 통을 돌려야 한다. 혼자서는 힘이 들어 못하기에 둘 내지 셋이서 동시에 밟아야 한다. 이때는 호흡이 척척 맞아야 한다. 우측으로부터 털던 볏단은 자동으로 좌측 사람에게 넘겨져서 마지막 사람이 벼가 다 털린 것을 확인 한 후 털린 볏짚을 좌측 옆에 던져 놓는다. 바닥의 한사람은 다시 이것을 다시 한단씩 묶어서 볏짚단을 멀리 실어다가 쌓아 놓는다. 이 볏짚/짚토매는 초가지붕을 덮는 이엉을 엮을 때 와 용마루를 틀 때 쓰기도 하고, 겨울철 농한기에 가마니, 멍석과 자리를 짤 때나, 새끼 꼴때나, 작두로 잘(짤)라서 소여물 또는 아궁이용 땔감으로 쓴다. 농사를 조금 짓는 농가 주인은 2년마다 혹은 3년마다 초가지붕 이엉을 갈아야(바꾸어야) 할 때 짚이 모자라므로 이 짚을 사기도 했다. 이후 새마을 스레이트로 지붕개량을 했다,
다시 꿍아틀 밟는 이야기를 하면, 다리가 아파서 쉬려고 빠질 때도 우선 바꾸자고 말로 한 다음에 후보가 생기면 올림픽 육상 경기의 릴레이 선수 교대 하듯이 교대를 잘 해야 한다. 안 쓰던 근육을 이용하여 일을 하다보면 다리가 지치기 마련이다, 힘들어서 다리만 올려놓고서 건성(공)으로 밟고 있노라면 금세 다른 사람이 알아채고서 소리를 지른다. 잘 좀 밞아! 힘 좀 줘!!! 그런데 이 작업은 새벽 4시부터 오후4시경 까지 밞고 또 밟고 진행되니 힘이 들 수 밖에 ! 빠져 나온 사람은 이때 잠간 숨을 돌리고서는 다시 볏단을 짜개/쪼개는 조로 들어가서 한 움큼씩 만드는 역할을 한다. 날씨만 도와준다면 계획된 인원 가지고 해지기 전에 마친다.
이때, 숨 돌려서 옆을 바라보면 며칠 전부터 쌓아 놓은 노적가리/볏단이 산만큼 커 보인다. 이게 빨리빨리 없어지라고 바심꾼은 염원을 한다. 이것을 쌓을 때는 무너지거나 미끌어 질세라 조심스럽게 쌓는다. 물론 바심하기 위해서 노적가리를 해체 할 때도 조심하여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은 숙련된 고참인 숙련자(요령꾼)가 한다.
이때 동이 트기 시작하여 얼굴 식별이 가능해 서로 쳐다보면 모두들 검은 칠을 한 도깨비 얼굴들 같다. 어깨로 메치는 조에 있는 사람은 얼굴이고 가슴이고 등짝이고 간에 땀범벅이고, 얼굴에는 먼지와 논흙이 묻어서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간다.
거시기 볼 새 읍(없)다
한 4시간 후 8시정도면 정식 아침을 먹는다. 먹자마자 쉴 틈 없이 일을 한다. 이때 등장하는 말이 “바뻐서 오줌 누고 거시기 볼 새가 없네 !“ 라는 말이다. 다시 열시 반 까지 투두리고 막걸리 곁들인 새참을 땡기고(먹고)서 다시 바심을 한다. 부엌의 아낙들은 지지고 볶고 새참과 식사 마련하기에 바쁘다. 이날은 동네잔치 날이다. 평소에 매일 새우젓국만 먹던 날에서 먹어보지 못했던 비저그니(비린생선) 먹는날이다. 갈치자반(소금에 절인물고기)에 김에 꽃게에 고등어무조림에 강낭콩밥에 고봉(高峯)밥. 이 비저그니는 5일장에서 미리 장을 봐 오거나, 가까운 시오리(6km) 길에 있는 천의장 옆 항구에 가서 생선을 사온다. 오징어와 조개도 사온다. 고깃배를 처음 본것도, 배 옆에 붙어 있는 어린이 머리통 굵기 만한 대나무통도 처음 보던 1965년의 기억이다.
C. 풍련초 – 봉초담배 와 권련-재건, 새나라. 파랑새 담배 250환
낮12시반 되면 점심을 거나하게 들고서, 나누어준 궐련(卷煙-말아논 담배)이나 풍련초(말아피는 豐年草-상표-한집에 일주일에 5갑 전매청 제한) 봉지를 열어서 쓸어놓은 잎담배를 신문지에 말아 물고서 핀 후 다시 투두린다. 권련담배 no filter-“재건“과 “파랑새”를 행사 예비로 사놓곤 했었다. 논 김매기때는 고무신 사다 나누어 주었다.
벼 털기/바심이 거의 끝날 즈음 되면 내기가 시작된다. 탈곡되어 쌓인 벼가 몇 섬이나 될까? 내기에서 이기면 벼 한말을 더 주거나, 새 고무신 한 켤레 주던 집도 있었다. “나는 올해 농사가 실하니 13섬!” “내가 보기는 올해 물이 모자라서 실하지 않으니 보이는 대로 10섬!” “나는 12섬!” 하면서 겐또(셈-추측 견적)를 하고는 적발이(적는 사람)가 멀리 빈 땅에 나뭇가지로 써 놓는다. 애들도 며꾸리/멱구리, 소쿠리에 벼를 담아서 머리에 이고 벼저장소 광/곳간으로 신나게 나른다.
D. 벼한섬, 쌀한석, 공양미 삼백석 ?
여기에서 만석지기는 뭐이고? 천석지기는 뭐이고? 섬은 뭐이고? 석은 무엇인가? 대략 지금의 kg으로 환산 해보면 한 섬은 벼120kg(전에 신라시대 기준으로는 15말-144kg)이다. 쌀을 1섬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냐 하면 섬을 만드는 재료가 볏짚이다. 가마니를 만드는 재료도 같은 볏짚재료이나 섬은 조금 엉글게 짠다(친다). 낟알이 큰 곡식과 고구마 등을 넣어 보관 하는 것이 섬이기 때문이다. 쌀은 옛날에는 자루(袋儿)와 푸대/포대(包袋)가 없었으므로 쌀이 빠져 나가지 못하는 촘촘한 가마니에 담아 두었다. 해서 벼 경우는 벼 한섬이라 부르고 쌀은 쌀 한가마니 라고 부른다. 물론 벼 한가마니 라고도 부른다. 즉 벼 1섬(120kg)을 정미소 방앗간에서 찧으면(정미하면) 쌀 한가마니(80kg)가 나온다. 왕겨와 쌀기울과 쌀눈으로 40kg 이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 쌀겨는 조선조에서든 6.25 전쟁전후에든 배 주린 사람들의 양식 이었다! 한다. 쌀겨는 조금 덜하나 거친 보리겨를 먹고서 죽기도 했으나, 얼굴이 부황이든 경우가 있었다 한다. 근자에는 이 쌀겨는 동물들의 먹이로 주곤 한다.
가마니(가마스かます라는 일본말)를 프랑스 언어로도 “가마니gamani.” 라고 발음한다. 쌀가마니는 웅가마니 ungamani. 라고 발음 한다고 프랑스사전은 말한다..
그리고 보름날 전에는 나무도 아홉/9지게 해야 하고, 밥도 아홉/9섬을 먹어여 한다는 설이 있는 것은 밥한끼를 큰 벼섬에 비례 해보는 당찬 희망의 구전이라 여겨진다.
천수답 & 다랭이논
그리고 천수답(天水沓)이라 하면, 비가 와야 그 빗물이 논에 내린 만큼을 가지고서 농사를 짓는 논을 천수답이라 한다. 대한민국의 지금 1985년~2017년 현재는, 거의 모든 논에는 수자원관리공사(k-water)와 농어촌공사에서 멀리 혹은 동네 저수지에 저장된 물을 돈 받고 대주기에 천수답 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옛날에는 비료도 있었지만 논밭에는 두엄/퇴비/적비를 사용했다, 산에 있는 풀을 베어다가 소꼴(hay)로 쓰거나 썩혀서 두엄으로 논밭에 뿌려서 사용하여 토심(토양의 양분)은 좋았으나, 도열병에 약해서 폐농사 하고 나면 그해에는 쌀이 없었다. 가뭄이 6월말까지 연속되면 천수답은 농사를 짓지 못해 울어야 했던 시절이다. 반대로 홍수가 나면 둑이 무너져서 나무를 베어다가 다시 방천(防川)하고 흙과 돌을 져다가 메운다. 모래 흙더미 속에 파 묻혀버린 벼포기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공무원도 학생도 더러 동원 되던 시절이다.
장려쌀 과 절미쌀 운동
단군이래로 되풀이 되던 장리(長利)시절에는 장려쌀을 꿔다 얻어먹어야 하는 악순환 이었다. 한가마니 꿔서 먹거나 돈하고 바꾸어서 쓰고는 일 년 뒤 쌀 한가마반으로 갚아야 하는 이자 50%내지 100% 고리채 이었다. 이러다 갚을 길이 없으면 사철 내내 품팔이(김매기-피살이 와 풀 뽑기 와 곡식 걷이등)를 하여 갚거나, 악순환 되면 논을 고리채 업자 또는 지주에게 모두 넘기는 사연의 연속 이었다. 1975년 정도까지 더러는 1980년도 까지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가게부채이다. 그리고 절미운동이 있었다. 어머님들이 밥하기 전에 식구 수만큼의 쌀 혹은 보리쌀을 쌀독에서 바가지로 퍼내어서 씻기전에 손으로 함움큼을 떼내서 작은 단지에 넣었다가 모아지면 이 절미쌀을 필요시 돈사서(내다 팔았다) 요긴 하게 썼다. 물론 쌀로 술을 만들면 세무서에서 조사가 나와 서 술이나 누룩이 발견되면 벌금을 매기고, 솔가지도 단속하던 시절...
아끼바리 vs 통일벼
그런데 이런 천수답 1마지기를 지금은 모두 200평으로 정했으나, 전에는 동네에 따라서 논이 생긴 모양 혹은 등재된 평에 따라서, 우리 논은 300평에 1마지기라고 하기도 하고, 우리 논은 200평 한마지기짜리야! 라고 했었다, 해서 200평 한마지기에서 벼 2섬이 나오면 쌀 80kg 2가마니가 소출 되던 것이 평균이었다. 부지런한 농부네의 비옥한 논에서는 쌀 3가마 나오던 곳도 있었다. 찬물나는 샘 논에는 벼가 안 자랐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중 농어촌 사업중, 하나가 소출 많이 나는 벼품종, 일본품종 찰진 쌀의 아끼바리 대신 힘없어 인기 없었지만 그러나 소출 많은 통일벼로 개량 하는 거여서 거의 쌀 3가마는 기본이고 지금은 쌀 4가마도 소출 된다 했다. 이때 통일벼의 벼대(몸통이)가 부실/약하여 여러모로 쓸모가 없어서 퇴비로 버려지던 시절이었고, 벼에 묻은 농약 잔류량 때문에 소도 주지 못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지금은 모든 농약이 잔류 기일이 짧도록 만들어서 별문제 없이 농산물을 사 먹는 시대이다.
매상, 수매
그런데 쌀은 나라 정부에서 매수(공공 매상)를 한다. 이리저리 벼를 잘 말려서 읍내에 구루마로 실어 가거나 리단위의 공관에 가지고 가면, 쇠로된 수매등급도장(자빡-品자)을 가진 군청에서 출장나온 공무원이나 임명받은 사람이 쑤시개(대나무나 쇠로 만든) 볏가마니를 찌른/쑤신 후 다시 꺼내면 홈이 파진 쑤시개 속에 벼가 따라 나온다. 이 벼를 손과 눈으로 검사 시 말린 상태와 쌀의 건강 상태를 보고서 등급결정 후 도장(자빡)을 가마니나 푸대에 찍어준다. 그걸 보고서 웃는사람, 퇴짜/빠꾸 맞아서 한숨 쉬는 사람, 다시 말려서 2차 수매 시 다시 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볼 수 있었다.
이 수매가 끝나면 전국적으로 쥐잡기를 벌였다. 닭 잡아가는 쪽제비도 잡고, 쥐약을 놓고 덫도 놓았다. 학교에서는 잡은 쥐에서 꼬리만 잘라서 모으던 시절 이야기이다.
E. 가뭄 과 물꼬 我田引水
그리고 봄철 4월5일 못자리 만들기서부터 5월말 모낼 때와 8월에도 적절히 비가 내려 주어야 하나 비가 내려주지 않으면 가뭄 속에서 논에 물을 보내주기 위해서 샘을 파고 두레박을 설치하고 내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다. 봇물/시냇물도 차례가 있어서 자기 차례/시간에 물고를 터놓지 못하면 이미 물을 대던 논에 물이 넘쳐도 대야 할 집에는 물을 못대도 물고 트는 차례는 제3순위로 넘겨지기에 어른이 없던 집은 어린이라도 낮과 밤으로 나와서 물꼬를 지켜야 했다, 이때 여학생이라도 만나면 서로 수줍던 힘든 시간의 국민학교 학생들의 애환 시간 이었다. 더러 나라에서 깊이 지하수 관정을 뚫어서 커다란 발동기를 설치하여 지하 지표수(*그때는 지하수 까지 이용 하던 때는 아니었고)를 끌어 올려 논에 대주던 때이다. 논에 논게(농게.찰게) 도 있었고 방개도 새우도 피라미 우렁도 미끄리(미꾸라지)도 물고랑에 있던 시절..
얀마(Yanmar)
한일 협정(1965년)이 체결 되기 전에도 무역이 되었던지, 일본의 물자가 들어오던 것 중 큰 발동기(2m*1m*0.7m높이) 대신에 조그만 펌프(0.5m*0.5m*0.5m높이)가 관정에 연결되어 사용되었다. 일본공업의 우수성을 처음 알게 된 때이다. 생각해보니 그 펌프 상표가 요즘도 전 세계에 수출되어 퍼져 있는 얀마(Yanmar) 펌프였다. 한국의 석학 이어령 교수가 21세기에 칭하던 “일본의 축소지향형 시대”가 이때부터 왔었다. 즉 무엇이든지 절대강국 미국의 제품에 비해서 조그마하게 만들던 축소형 일본품질관리시대. 현재 대한국에는 이것을 가끔 능가하는 한국인 현대,삼성,LG man들이 있다.
지금 그 시절의 가뭄 풍경을 되돌아보면, 대개의 논마다 우물/둠벙을 파고서 거기에 나무로 만든 긴 손잡이의 긴 부리모양 두레박을 네발(4다리)나무기둥에 걸어 놓고서 혼자서 물을 펐다. 아니면 둘이 마주서서 두레로 물을 펐다. 더러 물고기도 잡으면서.
F. 새경 - 연봉 쌀 6가마
그런데, 여기서 전에는 새경(사경-私耕=연봉) 받고서 일하는 분을 머슴 일군(꾼)이라 칭했다, 큰 머슴 상머슴 작은애기머슴 이라고 칭했다. 330일(11달) 일하고서 옷 세 번(봄 여름 추석) 혹은 네 번(겨울옷추가) 주어 입었다. 노는날은 칠월칠석날이고 추석날은 자기 본가에 가고져 하면 가고, 아니면 주인집에서 쉬곤 하였다. 머슴살이를 하는데 14세~16세부터 작은 머슴은 쌀 한 두가마니, 그 이상 어른 상머슴은 쌀 6~7가마를 주었고, 쟁기질, 써래질, 우.마차질을 할 줄 알면 한.두 가마니를 더 주던 때였다. 즉 일을 잘하면 논농사 2~3마지를 짓는 거와 같았다. 즉 세금 공제 후 경비 제외한 금액으로 치면 4~5마지기 농사짓는 연봉제 경우와 같았기에 새경일군을 쓰는 집도 흔치 않았고 큰일 잘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경우였다.
온양 현충사의 칼과 부여 부소산의 군량미
칠원칠석날은 노는 명절에 속했다. 마침 삼베용 삼을 찌boil(삼)는 시기라 놀자는 젊은이와 일하자는 애비 아저씨들과의 실강이 날이었으나 하여간 놀았다. 가까운 백제 고찰 면천 영탑사를 다녀오는 사람, 시집 온지 십년만에 친정 다녀오는 아낙등, 그날밤은 갔다 왔던 기행 무용담을 늘어놓는 날이었다. 지금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럴듯하게 현충사를 성역화 하여 웅장 하지만, 1960년대 당시에는 조그만 집에 이순신 장군이 사용하던 칼을 보관 하였는데 무거운 그칼을 들어 올리는 것에 대해 내기를 하였다 한다. 한 손으로 들기 두손으로 들기 壯士 등등. 그리고 부여 금강과 낙화암 고란사가 있는 부소산에는 백제 멸망시 당나라의 침공시 불타버린 군량미 창고 자리에 묻혀있던 군량미의 벼숯(벼가 타서 남은 재가/탄소-1700도c로 변하여)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국가에서 모두 흙으로 덮어 놓아 지금은 관람방문객은 볼 수가 없다.
소코뚜레
여기에서 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하련다. 송아지가 태어나면 천방지축 돌아다니면서 자라다가, 1년쯤 되면 이 송아지의 만행(행패)이 커지므로 단속차 목걸이를 달고서 끈을 달아야 하는데, 목에 맨들 힘이 쎄서 다룰 수가 없다. 해서 일찌감치 산에 있는 곧고 딱딱한 나무의 일종인 노간주나무 중 손가락만 한 굵기의 나무를 베어서 잘 구부려 질 때 타원형으로 구부려 놓았다가 일 년이 지나면 굳어진 것을 아기소/송아지의 코에 꿰어야 한다. 왜냐하면 코에 구멍을 뚫어서 코뚜레를 통과시켜서 그 코뚜레에 소고삐 줄을 묶는다. 고삐를 잡아당기면 소가 코가 아파서 말을 잘 듣는다. 마차나 쟁기를 끈(끄는) 소의 경우는 양쪽으로 고삐를 매어서 왼쪽을 당기면 소가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고삐를 당기면 소가 오른쪽으로 가도록 훈련이 된다. 그런데 이 코뚜레를 소의 코에 꿰기 위해서는 양쪽 콧구멍 사이를 불을 달군 쇠로 뚫어야 한다. 물론 마취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 짐승일망정 얼마나 아프겠나! 하는 안쓰러움이 있으나 조물주의 섭리 하에 있는걸! 하면서 농부는 코뚜레를 항상 예비로 준비한다. 이렇게 해야 코뚫린 송아지값도 소값도 더 나가고 쟁기질 훈련에도 임 할 수 있다.
멍에 와 멍에줄
구루마에 붙어 있어서 소와 연결 하는 부분이 찻대(車帶) 이다. 그런데 이 차대는 앞다리쪽 몸에 부착하여 안장과 연결 하여 몸에 묶는다. 이것 외에 중요한 것이 멍에 인데 이 멍에는 마차에 줄로 이어져서 소의 목덜미 윗등에 올려놓는다. 소마다 크기/ 길이가 다르므로 이 멍엣줄을 조정해야 한다. 같은 소라도 힘이 필요 할때는 목에 힘껏 매고, 빈수레 일때는 멍에를 느슨하게 하여 목이 아닌 몸으로 수레를 끌도록 한다. 즉 무거운 마차/수레를 끌때는 목에 힘을 주어 멍에줄로 끄는 것이다. 만약 무거운 것을 끌때 멍에 없이 차대로만 끌면 차대가 소에서 벗겨지는 사례가 있다. 소 목에서 멍에를 벗겨 놓는 것은 소에게 쉬라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고 멍에를 올려 놓으면 일을 하자는 의미다. 이멍에는 논.밭가는 쟁기질 할때나 물논에서 써래질 할때도 마찬가지다. 소고삐만 당기면 오른쪽, 목소리 쪄쪄는 왼쪽, 목소리 이랴는 쭉째(go straight)! 워 워 는 멈춰(stop) 이다. 이 약속대로 어린이가 몰아도 소는 별 의심 없이한다. 더러 소전(소시장)에서 팔린소가 며칠뒤 다시 돌아온 사례도 있다,
G, 말발굽 과 소발바닥의 쇠징
그런데 소와 말은 거칠은 신작로 자갈밭 길을 다니기 위해서는 말의 발에는 불에 다룬 말굽을 박거나 소의 경우에는 쇠징을 박아야 먼 길 자갈길을 수레를 끌며 다닐 수 있었다. 안그러면 소의 발이 다쳐서 피가 나고 절뚝거린다. 옛날에는 마방에서 이것을 수리 했다. 역내(영내)라고 불리우는 용연리 새말언덕에 있던 파발마 이름이 흥세역 興世驛인데 여기에 말이 15여필 남녀 노비 합6인 있었고 사람보다 말이 죽으면 더 문제였던 기록이 있다.
굴레방다리
서울의 마포구 아현동과 서대문구의 북아현동이 만나는 경계의 2호선 아현역 지역을 우리는 지금도 “굴레방다리”라 부른다, 사연인즉 조선조 시대에는 거기서부터 고양군 연희면과 한성으로 나눠지는 경계 이었는데, 커다란 내가 흐르는 곳이었고 나무로 된 나무다리가 있던 곳이었다. 양재동의 말죽거리가 경기도 과천면 과 한성의 경계였던 것처럼, 여기 아현동 굴레방다리에서도 말 과 소에게 여물을 주고 손님(객)도 머물고 특히 우.마차의 나무바퀴 위에 굴레를 두르고 있는 쇠를 바꾸는 곳이라 하여 “굴레방다리” 라 하였지만 지금은 복개천으로 개천을 볼 수가 없다. 바로 5호선 아현(兒峴) 애오개역의 유래는 애무덤의 애장고개이다. 어른장례는 을지로끝 光熙門 屍口門으로.
소가 외졌다.
그리고 소를 관찰 하다보면, 소는 언제나 앉아서 쉴 때나 혹은 먹었던 음식을 되새김질 할 때는 언제나 오른쪽 배를 땅에다 대고 앉아 있다. 이것은 소는 왼쪽으로는 앉지를 못하는 문제를 갖고 태어난다, 이리하여 혹 마차가 비탈길에서 냇가에서 넘어 질시에 왼쪽으로 넘어지면 마차를 부셔서라도 우선 왼쪽으로 넘어진 소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이때는 필히 소꼬리를 들고 해야 한다. 시간이 늦으면 소가 죽는다. 이런 위험한 경우에는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합세하여 모두다 전신 전력 도와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를 “소가 외져서 죽을 뻔 했었다 !” 라고 표현했다.
말은 뛰거나, 걷거나, 쉬거나 항상 서서 지낸다 한다. 소처럼 누워서 지내는 경우가 없고, 말의 다리는 통뼈로 이루어 졌다 한다. 제주도에서는 말뼈 와 말기름을 판다.
베어링(bearing)
그리고 말이 끄는 마차는 대개 바퀴가 두 개인 2륜마차이다. 그런데 우차는 이륜우차도 있고 부유한 집에서는 4륜우차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 4륜마차의 신비한 점은 뒤편의 큰바퀴에 얹혀있는 마룻바닥 부분과 앞쪽 차대에 붙어있는 앞부분과의 연결은 베어링을 축으로 하여 붙어 있어서 앞에서 말이 조금만 회전 하여도 쉽게 거꾸로 돌 수 있는 회전축을 가진 것을 보면 아마 베어링(bearing)이 수입 되던 일제 강점기 부터 만들어진 것이 4륜우차인것 같다. 이베어링은 꼬마들 다마(구슬)치기의 왕이었다.
자유계약(F/A)
다시 일군(머슴)의 이야기를 다시 하면, 겨울 동짓달 이후에는 살던 집에서 계속 머슴살이를 할 것인가? 혹은 다른 집으로 가든지 결정해야 한다. 돈 모았으니 장가가든지 집을 짓든지 하기 위해서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본인과 주인의 결정에 의해서 지금의 자유계약(F/A) 위치에 있기도 하였다. 더러는 결혼한 일꾼 경우는 아주머니(부인) 까지 합세하여 어린이 까지 사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도 일 잘하는 일군에게 새경을 좀 더 준다고 몰래 협상하여 옛주인과 새주인 사이에 불편하던 경우도 있었다.
쌀1석=벼1섬=쌀 한가니
다시 벼 섬과 쌀 석을 설명하면, 쌀1석은 쌀한가마니 벼1섬을 말함이다. 1,000석지기 라하면 지금의 500마지기의 논주인을 말함이다. 200평=661m2 정도가 500개 있는 것이다. 대충 말하면 반경 1km 정도(정확히는 500미터반경=πγ2)의 땅을 가진 것을 말함이다. 해서 옛 조상의 자랑거리를 하다보면 더러 “우리 할아버지 땅을 안 밟고는 동네를 다니지 못했다 !“ 는 1,000석지기 자랑도 일리는 있으나, 이야기책에 만 있어야 하고, 그만한 평야를 가진 곳은 다랭이논만 있는 산골동네에서는 아닌 듯하다.
H. 논농사 수지타산 – 오늘날(2016년경)의
수지타산 지금의 논 벼농사수지를 대략 분석 하면
예를 들어서 논 10마지기를 짓는다 하면 (10*200평=6,600m2)
못자리 대신 모를 사오는 경우 200모판/포트 * 3000원= 600,000원
모심기/이앙 작업 모두 +식비 = 350,000원
농약 2차례 * 300,000원= 600,000원
비료 등등 =40,000원
수확. 콤바인 운반등 = 600,000원
대략 지출 합계 =2,550,000원( 쌀 18가마정도)
대략 쌀값으로 나누면 2,550,000원/수매가 135,000원(120kg벼=쌀80kg)=18가마니
즉 쌀 80kg= 135,000원으로 수매 해 줍니다, 2016년에는 105,000원/80kg
9. 10마지기에서 쌀80kg짜리 30가마가 나온다면 30가마*135,000=4,050,000원 임
10. 여기에서 4,050,000원 빼기 2,550,000원하면 1,500,000원 남습니다, (최저 경우)
결과적으로 논 10마지기에서 지출 빼고 남는 돈이 일백오십만원입니다.(1,500,000원)
여기에 더해서 밭농사 특작물재배, 부업 알바 와 직불금을 받아서 생활 내지 학교 학생 가르치는 형편이다. 2000년 전 까지는 상대적 쌀 가격이 높았었으나 요즘은, 2010년 이후는 아주 어려운 농촌의 현실입니다.
I. 농촌 현주소 - 오늘날(2016년)의
뭘? 로 자식 키우고 교육시키고 먹고 사는지?. 애들 핵교 보내고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어떻게 들 사는지? 이제는 품앗이도 하고 더러는 알바 품도 팔면서 산단다...
그런데 밭을 조금 많이 가진 분들은 비닐하우스에 특작 물을 키운다. 지금은 도시에서만 맞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골 농촌에서도 부녀자들이 농한기에는 읍내의 식당등 동네공장 등에 나가서 품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한단다, 여기에서 더 큰 문제는 20년 전부터 대두 되어오던 농업인구의 고령화가 문제가 되었는데, 아무도 누구도 해결을 할 수가 없다. 열심히 백성을 위한다는 정부도, 국민을 대표 한다는 국회도, 사회기업을 위한다는 기업도, 노동자를 위한다는 노조도. 야당도, 전교조도, 경제를 살리자고 뭉친 전경련도 이 문제는 해결을 못한다. 시한폭탄 모양 재깍 재깍 농업인구소멸의 시계가 돌아간다. 2016년 농업 인구의 평균나이가 75세이다. 근력/힘이 없어서 이제는 경운기도 몰(운전) 수가 없다. 몰 수 있는데 언덕이나 커브를 돌 때 핸들이 휙 휙 돌아가면 이걸 억제 할 근력이 없으니 따라 달려 들어가서 사고를 낸다. 비닐하우스 에서도 더위 외에도 힘이 부쳐서 그만 한다. 그래도 마늘 캐는데 생강 캐는데 나이 80세 되신 할머님도 나와서 거드시고 일당 8만원 받아 가신다. 하던 일 지구력으로 요령으로 하시기에 다른 젊은이들 보다 일을 많이 하시기에 쓸 수 밖에 없다. 이 틈새를 메우고 시골 일을 하는 외국인 들이 있다. 인력회사에서는 등록된 외국인들을 승합차버스로 출퇴근 시키고서 12만원 받아다 2만원 떼고서 10만원을 외국인에게 준다. 무비자 무허가 근로자(no work permit)들의 공간/무대이다. 건설 노무자 역시 외국인 중국인(조선족아님)이 철근과 목수 일하며 점령을 했다 노가다 무대를...
물론 1975년부터 1995년까지 대한국민, 엔지니어와 근로자들이 외국에서 일했었다.
뜨거운 감자
이러한 우려는 대한민국만이 겪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30년 전부터 일본에서 경험 하고 있는 앞선 사례이다. 다른 것은 벤치마킹 하여 해결 하곤 했으나 이것은 일본에서도 해결 못 한 난제로 되어있다. 정부도 국회도 이 뜨거운 감자를 품으려 하지 않는다. 어느 위정자도 표출 못하고 있다. 임대농은 가능하나 산골은 농기계 출입 불가.
문제는, 식량은 자급자족이 되어야만 식량 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 인구 1억 이상이 되어야 생산 및 내수 및 국방 문제가 염려 없을 거란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농경작지가 매년 사라진다. 매년 빈집이 늘어난다. 100여 년 동안 일구었던 개간지가 1,000년 밟아온 농로가 사라진다. 산길이 없어진지는 벌써 오래다. 나무와 풀 땔감이 석유와 가스로 대체 되면서 밭과 산길이 없어지고 풀밭 나무 밭으로 변해 버렸다.
J. 조류독감 과 구제역 – 인간의 무리함
집단으로 좁은 장소에 가두어 가축을 기르니 병에 약해져서 AI 조류병 닭병 바이러스구제역 소병 돼지 병이 매년 계절 없이 창궐 한다. 놓아기른 닭은 AI 병에 무사 한 것을 보면 증명이란다. 자연은 인간에게 경고를 한다. 가축을 가둬서 스트레스 주면서 기르지 말라는 신호란다. 이런 가축 축산물도 자급자족이 아니 되어 때로는 사고시 직수입을 갑자기 하니 수입 값만 올라가고 소비 물가 만 올라간다.
천치 와 훑태
대략 60가호중 20~50마지기 이상 큰 농사터를 가진 집이 서너 집이거나. 10~15마지기 정도 가진 중농이 열 댓집이거나 하면 벼바심을 뻑적지근하게 한다. 그러나 대여섯 마지기를 짓던 20여 가구집 사람들은 “홀앗이”라 하여 구루마(우마차의 일본말-車)도 없거니와 구루마가 들어갈 수 없는 논들이라 지게로 혼자 혹은 가족이 아침저녁으로 일일이 져 날라다가 마당에 놓고서 바심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벼바심 전에 조금 먹을 양식 쌀이 필요하면 꿍아틀 대신에 조그마하게 생긴 “천치”라는 쇠스랑(현재의 포크를 구부린 모양) 처럼 생긴 벼 훑기(천치)라는 것을 세워 놓고서 거기에 벼를 대고 잡아당기면 짚대만 빠져나오고 알곡은 좁은 사이를 통과 못하니 나락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천치도 없으므로 나무를 반으로 꺾어서 젓가락이나 오늘날 전기 머리 고데기 처럼 모양을 만들어서 맨손 훑태기(훑기)로 이용한다. 더러는 쇠로 훑태를 만들어 쓴다. 이 벼를 절구통에 넣고서 절구로 내리 찧어서 왕겨를 벗겨내고 기울을 볏겨서 쌀을 만든다(정미한다). 꿍아틀은 동네 60가호에 대여섯 대이고 천치도 대여섯 대이니 나머지 50여 가구는 빌려 쓰는 것이다. 오늘날 1억 간다는 콤바인(복합영농기계) 서너 대 가 동네에 있어 임대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K.
맷길, 나무고무래, 나무가래, 쇠가래, 쇠살포
그런데 바심하기 전, 일 년에 두 번 마당을 정리한다. 황토 흙을 부어다가 마당을 고르게 하고 맷길을 한다. 그래야 여름내 빗물에 노출된 바닥에 있는 모래와 돌이 없어진다. 곡식을 널었을 시에 고무래(긁개) 작업이 수월하기에 양력 6월 보리바심 때와 10월 벼바심 때 마당은 고운흙 더러는 황토흙으로 분칠을 받는다. 추석에는 집벽도.
velcro(벨크로 불어)
여름 보리 바심을 할 때는 모두 죽을상이다, 보리껄이 아주 사납게 생겨서 온몸에 붙어서 상처를 낸다. 특히 이 보리껄(수염)은 후퇴 없이 전진만 하게 되어 있어서 옷소매로 들어가면 기어이 어깨로만 나올 때까지 죽을 지경이다. 여기에 까만 깜부기재(도열병으로 죽은 깜부기보릿재)가 얼굴에 붙거나 몸에 붙으면 까맣게 된 삼베적삼을 다시 빨아 입어야 할 정도이다. 이보리껄 과 옷에 붙는 도꼬마리 가시 와 강아지지털풀을 보고서 만들어서 특허(스위스 1941년연구, 1955년특허출원, 1978년 특허해제/소멸)를 내어 20세기 온 인류가 써먹는 것이 지퍼 대신 옷에 붙이거나 장비에 다는 일명 찍찍이 이다. 영어로 velcro(벨크로 불어)라는 상표명이다.
L. 막걸리 와 암바사 와 지랑물
그런데 인간도 그렇고 히말라야의 산 야크도 그렇고 모두 땀 흘리고 나면 소금을 섭취해야 한다. 안 그러면 염분부족으로 쓰러진다. 해서 한여름 건설 현장에는 소금정을 사다가 비치하면 근로자들이 언제나 하루 1정씩 먹어야 한다. 그런데 시골에서 날 소금을 타서 먹자니 입맛이 그러하니 지랑물을 타서 드신다. 즉 간장을 심심 하게 타서 마시면 힘이 좀 나셨다. 여기에 60년대에 유행하던 것이 사카린(영어:saccharin, 일본어:サッカリン-설탕의 300배당도)과 당원(요즘은 신당원 이라 한다) 이 있었다. 이것을 물에 타서 먹기도 하였다, 1990년도 까지 명절 선물리스트의 으뜸 품목이 15kg설탕 봉지 이었다. 여기에 막걸리를 주막에서 사오는 심부름 하던 학생들은 오다가 조금씩 마신 것을 보충하기 위해 물을 타던 시절도 있다 한다. 더러는 막걸리에 당원을 타서 먹으면 요즘의 암바사와 같은 청량음료 대신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고방, 곳간庫間, 헛간
바심의 절정 크라이막스는 바심된 벼 즉 탈곡된 벼가 저장소로 들어가기 까지 이다. 그런데 너무 마르지 않은 벼를 광속에 놓아두면 습기로 인해서 벼가 썩는다. 이리하여 잘 마른 벼라고 판명이 되면 말질(셈)하는 사람은 벼를 말에 담아서 멍석에 던지면서 한말이요! 두말이요! 세말이요! 열 말 하면 한가마니요! 하면서 소리치면 옆에 있는 적발이는 나무토막으로 다시 셈을 하던지 하여 헤깔리지 않아야 한다. 정 헤깔려서 몇 가마인지? 헤 깔리면, 광(곡물을 비롯한 각종 물건을 넣어두는 고방 또는 곳간)에 일단 넣고서 보면 과거에 기준했던 광의 벽에 표시해 놓았던 눈금을 보고서 다시 짐작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광의 문은 가로닫이 나무판자로 되어 있어서 밑에서 부터 한자로 一 二 參 四 五 六 七 八 九 土(십)정도를 까만 먹물로 써넣고서 항상 잘 순서대로 맞추어야 한다. 이유는 손으로 만들어진 널판자가 순서가 바뀌면 틈새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손을 들어서 여닫곤 하던 높이였다, 여기 광에 넣어둔 곡식이 습기가 있어서 누지면 다시 꺼내서 마당에 멍석을 펴서 깔고서 벼를 말린다. 그 후 물방앗간이나 발동기가 있는 정미소에 싣고 가서 찧어서 양식을 하거나 팔아서 돈을 마련 했었다. 출렁이는 피대(皮帶-feeder)줄에 다친 사람과 돌아가신분도 있었다.
한자(一子)의 거시기
도량형중 대대로 써오던 표기중 자, 말, 되, 평 등이 국제표준화(cgs,MKS)에 의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도량형(度量衡)중 부피 옛단위는 열 홉이 1되(2리터가량), 열 되가 한말이고 열말이 한가마니 이니 한말은 대략 8kg 정도로 환산된다, 2010년 까지 버티어 오며 사용 하던 아파트 평수도 이제는 32형 이라고 대신한다. 그중에서 길이를 재는 자(子)라는 단위의 기준설정 유래가 조금 재미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건강한 성인이 아침 처음 배변 시 나온 거시기의 길이가 1자의 표준이라고 정했다 한다. 1자=30.3cm. 마침 국내 유일한 도량형 박물관이 당진 시곡리에 있다.
농한기 農閑期
바심이 끝나면 다른 집 일이 내일 또 있기에 일찍 집에 가서 자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돼지 잡아서 동네잔치를 해주던 집도 있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서.. 그리고 긴 농한기의 휴식이 계속 된다. 부지런 한 사람들은 가마니를 치고(짜고), 조랭이(복조리)도 만들면서 부업을 하기도 하지만. 손장난 화투를 치는 백성도
M. 고두레 돌 과 고두레 쇳돌
농한기 때는 짚으로 가마니를 친다(짠다). 혼자 하는 수동의 가마니 치는 소리가 매우 규칙적 리듬을 탄다. 둘이 하는 수동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신 집에서는 자리를 짠다(친다). 그리고 더러는 왕골을 재배하여 돗자리도 짠다. 이때 자리틀(돗틀)을 앉은키만큼 세워 놓고서 자리를 짜는데 이 자리틀에 매달려서 달그락 달그락 쩡쩡 부딪치는 소리를 내던 것이 고두레(고드래) 이다. 이 재료는 돌로 둥글게 장구모양처럼 아기 주먹만 하게 만들어서 실패(노끈/칡끈/칡실을 감다)로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영구히 사용 하고자 하여 무쇠(연한무쇠)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이동용 철 제련소
태봉(泰峰) 할아버지께서는 어디서 철에 대해서 배우시고 깨우치셨는지는 몰라도 재주가 있으셨던지 여러 과학적인 생활 품목을 생산하시었다. 그중 원 철광석을 반입 하셔서 이걸 본격적인 공장의 로(爐)가 아닌 간편 방법으로 2000도의 온도를 장시간 유지 하셔서 쇳물을 이동용 무쇠솥 가다/금형/MOLD에 부셔서 솥을 만드셨다. 그 과정을 취학 전 아주 어려서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특수목적 외에 사용하다 남은 B급 쇳물은 돗자리 돗틀에서 사용 되는 쇠고두래를 만들기 위해서 흙주물을 사용 하여 만들기도 하셨다. 이때 원 철광석과 파쇠를 흙가다(틀) 속에 넣고서 온도를 높여 제련을 하면 순수 이 쇳물로 무쇠솥을 만드는 것이다. 이때는 왕겨에 불을 붙여서 장시간 때면 1500도~2000도에 이른 후 쇳물은 받아서 사용하고, 식은 후 현무암 같은 찌거기돌(Slag)을 버려서 본가 집터 냇가에 지금도 널려 있음이다. 이slag를 가지고 놀다가 아이들이 까까머리에 대고 긁어내리면 아프고 피가 나고, 머리가 뽑히던 하나의 악동들의 장난감 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친구와 하다 보니 당골의 쇠종고랑 에서도 친구 박의래의 조부께서도 제철 제련 쇠종(鐵鍾) 제작을 하셨었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1980년즈음 본가 개축시 출토된 “구룡리김찬호댁출토호병“ 백제유물이 공주 박물관에 있다. 동네에는 절터 이었던양 많은 기와편들이 보여 지고 불당골이름도 있다.
N. 태봉 할아버님은 넘치시는 과학자 이셨다.
3차원 + α 물레방아
보통 물레방아에는 물 한번 흘려서 물레를 돌려서 그축에 연결된 한곳에서만 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는데 한 차원 높은 + α 물방앗간을 만들어서 칼배산(刀岩山) 앞 국민학교 앞에서 손윗논(손오니) 방앗간도 잠시 운영 하시던 것을 보았다. 또 4륜 우차(마차)의 축을 개선하여 힘이 덜 드는 구루마를 끌고 다니시기도 하였다. 아마 이것이 면천면 사기소리의 사태말에서 어릴 적 배우셔서 응용 하시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1963년도에는 6.25때 어디서 수거하신 칼빈총 총알을 박스째 들고 올라가셔서 바위틈에 모두 뿌리셔서 손주들의 사고를 막고 져 하신 적도 있음이다. 그러나 빛나는 악동 같은 손주들은 며칠 걸려서 그 총알을 바위틈에서 다시 대충 수거 하여 뇌관을 부셔서 화약을 모아서 폭탄을 만들어 터트렸었다.
할아버님은 현재 손주들이 조성한 사태말 가족묘원에 유분(유골)으로 안치되어 계시다. “이비렁애들 늠들아!” 하시며, 찌렁 찌렁 울리시던 할아버지의 음성은 다시 들을 수 없슴이다!
어느 날 문득 보니 소인도 할아버님의 DNA 유전자 소유자로써, 할아버지를 감히 능가는 못해도 충분하게 닮지는 않았지만, 더러 몇 가지는 좋은 적성을 가진 엔지니어로써 몇십년 동안 다개국(多國家)에서 동가숙(東家宿) 서가식(西家食) 하면서 먹고 자고 빌어 먹는 국제적 시간의 소유자 였어라! 金나그네는....
할아버님이 늘 머리맡 벽에 붙여 두셨던
시조 두수가 생각이 나서 옯긴다.
청구영언(靑丘永言)중 남구만 어른의 싯귀를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들아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노니...
서자(庶子) 양사언 어른의 싯귀도,,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O. 구릉고개 九龍, 됫골, 道谷
언어(言語)는 성문(成文)일 때 표준화 표준어(標準語)가 된다. 역사(歷史)의 반대말은 선사(先史)다 라고 한다. 사(史)란 글자(文)로 남겼다는 말이다.
구룡리 대바위 검문소 삼거리에서 운산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이 좀 구불구불 하다. 걸어서 십리길 여미장에 가던 신작로 자갈 언덕길이다. 구렁이 기어가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표현 하던 것이 구릉(능)고개이다. 기록과 행정을 위해 필요한 지명을 표기 하고자 했던 글자 시대에 만든 이름 구룡, 한자 차음(借音-소리나는 글로 대신함)을 빌린 구룡(九龍)이다. 그 동네 이름이 구룡리의 원조라 하여 원구룡이라 불렀다. 차음借音과 신라 향가鄕歌를 적은 이두吏讀와 비슷하다. 國寶양주동박사의 향가번역이 있다.
그동네가 일명 사근절이다. 조선조 영조시절중 옛지도 1759~1765 여지도서 제11책에 있는 당진현의 옛지도를 보면, 전에 없던 砂斤寺(사근사) 라는 절 이름과 절모양의 그림이 표기 되어있다. 전설대로 “빈대가 많아서 버려진 삭은절” 이름이 아닌 모래사 도끼근 字의 사근절인데, 다른 전설의 형편이 되었나 보다. 그리고 원구룡(原九龍) 너머의 뒷골로 칭하여 부르던 동네, 됫골로 한글로 표기 하다가 여기도 한자 차음을 빌려 도곡(道谷)이라는 흔한 이름이 되었다. 아랫마을 또한 천주교 박해 시절에 천주교인(전씨이씨)들이 도피하여 기술을 지키던 시절부터 질그릇 과 옹기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다 하여 즘말(점마을) 이라 하였다. 이 가마는 1980년도 경 까지 불을 때다가 수지타산과 후계자 부재로 폐쇄 되었다. 한자차음은 도동(道洞)이라 하였다. 옹기가마 그 옆의 건물은 천주교성당(聖堂)이나 출석교인 감소로 지금은 공소(公所-공회당)라 부른다. 사기그릇 굽던 양쪽 옆동네는 사기소리(沙器所里)라 칭한다.
조선조의 당진현과 면천군의 옛지도를 총정리해서 당진군 문화원에서 발행 하신분이 신평면 금천리 출신 김추윤 이학박사님(신흥대교수 동국대강사-신한대 사회과학대학장 취임) 이시다.
도곡 동네는 도동 동네를 가로지르는 복간내 냇가를 경계(境界)로 하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마을의 고을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표기 한다.
유째(이웃재), 황토백이, 감나무골, 00골?, 큰골, 고라니묻은골. 불당골, 글치기, 지박골, 수미고개, 수청골, 원골입구, 산밭들, 00골?, 호지봉, 작은골, 집미티, 샘안집, 산밑, 모과나무집, 안내미, 방아다리, 오봉산, 과골(곽골), 사근절터, 구마바위, 쇠종고랑골, 당골, 당고개, 둠벙배미, 동미(용의여의주), 두루봉, 대바위, 구수밭집, 광술티, 오금이, 안배미, 승전목 이다,,,
어린이들의 신천지, 별천지 신문물의 동네 5일장으로 향했다.
최고의 선물 두세살 위 형이 입어도 될 크기의 꼬까옷 이 주어지던 5일장터,,,
1일, 6일 – 천의장(정미면) -이십리길 - 7.5km 110분 도보
2일, 7일 – 여미장(운산면) -십리길 - 4.0km 60분 도보
3일, 8일 – 틀모시장(송악면) -삼십리길 - 12.3km 210분 도보
4일, 9일 – 면천장(면천면) -시오리길 - 5.4km 80분 도보
5일,10일 - 당진장(당진읍) -이십리길 - 8.1km 120분 도보
국민 핵교 - 800m 13분 도보
중 핵교 - 8km 120분 도보(축지법으로 가면 1시간반)
고딩 핵교 - 3km 30분 북아현동에서 종로(축지로 20분)
P. 고아(孤兒, 孤子)가 된 지금
고려조 박인로 어른의 조홍시가(早紅柹歌) 가 생각 난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난다
규자 아니라도 품은즉 하다만은
품어가 반길이(님) 없으니 글로 설워 하노라....
홍대입구에서 by k 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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