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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하만물,애플릿,영상시,음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하만물
판소리 명창 金正文의 생애와 소리의 특징
김 기 형
<차례>
1. 김정문을 주목하는 이유
2. 김정문의 생애와 一家
3. 사승관계
4.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과 소리의 특징
1. 김정문을 주목하는 이유
남원은 동편제의 고향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유파를 넘나들며 소리를 배우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制를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하게까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制에 따라 소리의 법도가 달랐던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또한 개인적인 편차가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제에 대한 구분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소리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원이 동편제의 고향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원에는 동편제를 고수하는 소리꾼 강도근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 전인삼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制를 구분하는 의식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있다. 물론 강도근이나 전인삼이 지켜나가고자 한 동편제의 소리 법도가 우조를 중심으로 하여 이른바 대마디 대장단으로 짜 나가는 전통적인 동편 소리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각 制가 지니고 있는 소리 법도에 대한 원칙적인 구분은 가능하겠지만, 소리의 구체적인 구현양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지배적인 소리 법도에 변화가 생긴 것 또한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서편제를 지향하는 양상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산제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원에서는 동편제를 지켜내려 한다. 논자에 따라서는 강도근의 소리에 육자배기 가락과 계면 성음이 묻어 있어 동편소리라고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지적은 소리의 법도를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볼 때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소리의 법도가 지닌 변별적 특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오늘날에도 制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남원의 소리꾼 강도근 역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편제가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편제를 고수하려는 노력은 전통적인 소리를 지켜내려는 장인정신의 발로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원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명창들 가운데 동편제의 형성,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명창으로 권삼득,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 김정문, 이화중선 등을 꼽을 수 있다. 판소리의 비조라 할 수 있는 권삼득을 비롯하여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기량을 지닌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이들 명창 중에서 김정문만이 최초의 광대열전인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들어있지 않다. 김정문의 제자인 박녹주도 여류명창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박록주’ 조에서도 그녀가 송만갑과 정정렬의 敎鞭下에 여러 해 수련을 쌓았다는 사실과 <춘향가>와 <흥보가>에 長하다는 점만 기록해 두고 있다.1) 박녹주의 특장으로 소개된 <흥보가>는 김정문으로부터 배운 것인데,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를 배웠다는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김정문이 비록 근대 5명창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당대의 명창이다. 이런 그가 조선창극사에 빠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김정문이 완숙한 기량을 펼칠 기회를 그다지 많이 갖지 못 하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선창극사의 서술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이야말로 명창으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데, 명창은 명창이되 자신의 명성을 전국적으로 떨칠 기회가 짧았던 것이다. 김정문과 비슷한 이유로 조선창극사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이가 박봉래(1900-1932)이다. 박봉래는 깁정문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박봉술의 친형이다. 그는 송만갑과 김정문으로부터 소리를 배워 나중에는 김정문과 백중을 겨룰 정도의 기량을 쌓아2) 명창이 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남도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였지만 서울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구례를 중심으로 지방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3) 게다가 박봉래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역시 조선창극사에 소개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조선창극사의 저자 정노식의 견문에 한계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첫째로 지적한 이유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를 기술할 때 대부분의 정보를 전도성으로 부터 얻었다. 따라서 아무리 정노식이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고 조예가 깊었다 하더라도 정보의 수집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김정문이나 박봉래와 같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활동영역도 특정 지역에 치우친 명창에 대해서는 미처 정보를 수집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더욱 많은 것이다.
김정문은 판소리사에서 마땅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명창이다. 우선 그는 송만갑, 유성준 등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부터 소리를 배워 그 역시 명창으로서 손색없는 기량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는 박녹주, 강도근 등과 같이 뛰어난 명창을 제자로 길러내었다. 이 점은 그의 소리가 판소리의 전승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는 명백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근대에 들어와 변모하는 판소리사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명창이다. 따라서 그의 명창으로서의 활동은 근대에 있어서 판소리가 보여준 변모양상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로서 검토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본고는 몇 차례의 현지조사와 기존에 조사 보고된 사실 등을 바탕으로 김정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과 소리의 특징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김정문의 생애와 一家
김정문은 1887년 父 金俊萬과 母 劉俊 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原戶籍地가 전북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143번지인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4) 그는 1921년 전북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 672번지로 옮겨 왔다. 그가 남원군 주천면 상주마을에 온 것은 1931년이다. 그의 부인은 장봉선이며, 1919년 東先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그는 말년에 아편에 중독되었으며, 결국 1935년 5월 19일 경성부 관훈동 4번지 11에서 사망했다. 이 때 그의 사망을 신고한 이가 동거자 嚴錦珠로 되어 있는데, 엄금주는 관훈동 요정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양해인이라는 부자 한량이 그의 시신을 서울로 부터 남원으로 운반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하며, 그의 묘는 현재 상주 마을 뒷산에 있다. 대부분의 명창은 신분적인 이유로 천대를 받거나 혹은 평장을 한 까닭에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밝혀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歌王의 칭호를 받은 송만갑조차도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에 비해 김정문의 묘는 제법 커다란 봉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이례적이다.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정문이 남원에 거주한 시기는 호적상 4년 정도이다. 그런데 주천면 상주 마을로 오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상주마을에 정착하기 전에도 그의 형제가 살고 있는 고촌마을을 왕래하면서 남원, 운봉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상주로 오기 전에 고촌에서 살았다는 제보가 있었으나, 현지조사 결과 그가 고촌에 살지는 않고 자주 내왕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구룡폭포에서 독공하기도 하였으며, 상주마을에 거주할 때는 뒷산 ‘가매바위’라는 곳에서 주로 소리연습을 하였다. 그러니까 그가 기량을 연마하고 명창으로서 활동한 공간은 남원이었음에 틀림없다. 상주마을에는 대부분 진주 蘇氏가 살고 있는데, 김정문이 어떤 이유로 상주마을로 거주지를 정하게 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거주지를 여러 번 옮긴 이유는 소리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찾아서 혹은 신분적인 이유로 옮겨다녔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 거주지를 옮기면서 활동한 것은 대부분의 역대 명창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거주지를 옮기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또한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옮기는 이유도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판소리 명창의 경우, 득음을 위한 수련의 목적으로 옮겨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판소리 명창은 신분사회가 엄존하던 전통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최하층의 신분인 광대 출신으로서, 그 출신성분이 당골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때문에 명창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는 신분적인 차별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터이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거주지를 옮기게 되는 일이 잦았다고 생각한다. 김정문이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상주에 정착한 것은 이 곳이 판소리 공연 환경이 비교적 좋은 남원, 운봉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원이나 운봉은 옛부터 많은 명창을 배출하였으며, 또한 소리를 즐길 줄 아는 귀명창이 많았다. 특히 운봉은 지리산자락 아래에 위치해 있으면서 넓은 들이 있어 천석지기가 많았으며, 이들이 소리꾼들의 후원자 노릇을 하였다. 게다가 남원과 운봉은 지리산과 인접해 있어 수련하기에 안성맞춤인 폭포나 사찰이 주변에 많이 있다. 명창이 되기 위해 폭포나 사찰을 찾아가서 독공을 한 후 득음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일화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의 부인은 당골이었으며, 경제적인 형편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4칸짜리 집에서 그럭저럭 살았다. 현재 그의 집터는 밭이 되었다. 김정문은 다음의 세 가지 활동을 통해 소리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첫째는 협률사 활동이다. 박황에 의하면, 김정문이 김채만에게 <심청가>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도 1908년 송만갑 협률사에 참여하여 통영에 갔다가 그 곳에서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5) 둘째는 남원 권번의 소리 선생이다. 남원에 권번이 설립된 해는 1921년이다. 그런데 김정문이 언제부터 소리 선생을 하게 되었는 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원 주천면에서 거주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말년까지 소리 선생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뿐이다. 셋째는 생일 잔치나 요정 등에 불려가 소리를 하고 보수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문의 이와 같은 활동 양상은 당시 명창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 대부분의 판소리 唱者는 협률사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창극공연을 하였다. 이 때 창극은 판소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예술장르라기보다는 여러 배우가 등장인물의 역할을 분담하여 창을 한다는 정도의 변별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판소리는 창극의 형태로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대중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권번이나 고관대작 그리고 부자 한량 등이 또한 판소리 창자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남성의 경우 권번의 소리 선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성의 경우 권번을 통하지 않으면 명창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힐 정도였다. 그러니까 권번은 그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있어서 판소리의 전승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명창이 난 집안에서 또 다른 명창 나기가 정승난 집안에서 또 다른 정승나기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다. 명창을 배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宋氏 家系(송흥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와 鄭氏 家系(정재근정응민정권진), 그리고 金氏 家系(김성옥김정근김창룡)는 판소리로 일가를 이룬 대표적인 명문집안이다. 김정문은 이처럼 뚜렷한 계보를 형성할 만한 명문집안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의 일가 친척을 두루 살펴보면 그의 집안 역시 소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김준만씨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김정문은 유성준의 甥姪로서, 그의 어머니 劉俊은 유성준의 누이로 생각된다. 김정문의 형제로는 김정식과 김정근이 있다. 김정식이 형이고 김정근은 동생이다. 정식과 정근 형제는 남원군 주천면 고기리 고촌 마을 241번지에서 살았다. 김정식은 소리를 잘하는 편이 못 되었고 장단은 잘 쳤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당골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김영운은 남원과 운봉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고 한다. 고기리 고촌마을에 현지조사를 갔을 때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김영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김영운은 어려서부터 소리를 배운 것이 아니고 중년에 들어서 배웠으며, 특히 <흥보가>를 잘 불렀다고 한다. 김영운에 관해서는 그의 자손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김영운의 아들이 金寅煥(34세)인데, 그는 현재 광주 무등일보 편집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김정문의 후손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김인환씨는 작은 할아버지 김정문의 유일한 방계 혈족이기도 한 셈이다. 김인환씨에 의하면, 김영운은 호적에는 金奇淳으로 되어 있는데 강도근의 누이와 결혼을 하여 1남을 두고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고기리 고촌마을에 거주할 때, 작은 아버지인 상주 마을의 김정문에게 가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주로 고수로 활동했는데 안숙선씨도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적이 있으며, 그 역시 남원국악원의 소리선생을 하였다.6) 그는 1975년 59세 때 세상을 떠났다. KBS 라디오 방송국 ‘오작교의 밤’이라는 프로에 출연하여 소리한 적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7) 전국적인 지명도는 얻지 못 했지만 적어도 남원과 운봉에서는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는 사실을 고촌 마을 제보자의 제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정문과 비교해 볼 때, 김정문이 무대소리였다면 김영운은 목은 좋지만 방안소리였다고 한다.8)
3. 사승관계
김정문이 몇 살 적부터 판소리를 공부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처음 삼촌인 유성준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유성준(1874-1949)은 구례 출신으로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했다. 김정문은 그에게서 <수궁가>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문은 소리를 받아내는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원래 ‘괄음목’이었다. 목이 잘 쉬어 소리가 탁하고 상청이 나오지 않는 것을 소리판에서는 ‘괄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괄음목’은 목이 쌩쌩히 나는게 아니라 궂은 목이라는 뜻이다. 박봉술 일가도 ‘괄음목’이었는데, 기예를 연마하여 명창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김정문 역시 그다지 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판소리 공부방식은 스승이 한 대목을 하면 제자가 따라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김정문이 스승의 소리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자 유성준이 참나무 북채로 김정문의 목덜미를 후려갈겨 김정문의 목에 상처가 생겼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 인해 김정문은 유성준을 떠났다. 그는 송만갑(1865-1939)을 찾아가 그의 고수 노릇을 하면서 소리속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김정문은 김채만(1865-1911)에게서도 소리를 배웠다. 김채만은 피를 토하는 두견새 울음이 진달래 꽃잎을 빨갛게 물들이듯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였다는 서편제의 절창이다. 김정문이 송만갑의 협률사에 참가하여 통영에 갔을 때 그 곳에서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이에 반하였는데, 후에 송만갑의 협률사가 해체된 후 광주 속골로 김채만을 찾아가 그에게서 <심청가>를 배웠다고 한다. 김정문은 송만갑과 김채만의 소리를 비교하여, “송만갑의 소리는 금벽이 찬란한 高樓巨閣인데, 김채만의 소리는 문방사우 아정하게 맞춘 한옥의 품격과 같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니까 그는 동편소리를 주로 배웠지만, 서편소리도 함께 배운 셈이다. 김정문이 어느 정도 소리를 잘했는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동백 선생이 당시 최고 명창이었는데, 김정문 선생이 40무렵인가 부터는 대단했다 그러대요. 이동백, 김정문, 송만갑, 이진영씨 그리구 누군가 하나하고 다섯이서 원각사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대요. 그런데 송만갑 선생은 그때 그렇게 제자들한테 미루어버렸다 하데요. 김정문 선생때문에. “나는 소지하러 나왔습니다.” 그랬대요. 원래는 제자가 먼저하고 스승이, 연장자가 나중에 하는 게 소리판의 예의거든요. 그런데 송만갑 선생님은 제자앞에 소리를 꼭 하셨대요. 김정문 선생하고 같이할 때는, 김정문 선생이 소리를 잘했으니까요.9)
당시에는 이동백 선생이 최고명창이라고 그랬는데, 김정문 선생이 세번짼가 나와 소리를 했대요. 그런데 김정문 선생 소리가 끝나고 나서 삼창 사창을 받고 나갔는디, 이동백 선생이 나가니까 이동백 선생 들어가고 김정문 선생 나오라고 난리가 났었대요. 그렇게 대단했었대요.10)
과장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일화라고 해도, 김정문이 대중의 취향에 맞는 소리와 극적 표현능력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는 데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제자로는 김철원, 박녹주, 박초월, 강도근, 이소희, 장혜순(김혜순?)11), 김영운 등이 있다. 제자가 소리 공부를 하려면 학채를 지불하든가 아니면 그 집에 기거하면서 일을 해주면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박녹주는 학채를 내면서 공부를 했고, 강도근은 거의 머슴처럼 일을 해 주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운봉에서 온 장혜순은 운봉의 천석지기가 소리채를 대주어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남자 수제자는 김철원이고, 여자 수제자는 박녹주였다. 김철원은 스승보다도 소리를 더 잘한다고 할 만큼 출중하였는데, 중간에 목이 부러져 소리를 못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녹주는 김정문으로 부터 <흥보가>를 배웠는데, 2년 간 공부하였다. 그런데 정광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문의 <흥보가>에는 ‘제비노정기’가 없으며 박녹주는 이 대목을 김창환으로부터 배웠다.
<흥부전>의 제비노정기는 양화집에서 나왔다는 게 뿌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지기 쉬운 것이요. 지금 박록주씨한테서 배운 사람덜이 전부 제비노정기를 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김창환씨 집에서 가사와 곡조가 나왔다는 것을 잘 모르거든요. 박록주씨는 단성사에서 의관님을 모시고 소년시절을 보낼 적에 그 노정기허는 것을 보니 좋거든. 그래 이걸 영감님한테 배왔어요. 배왔으나 소년시절에 잠깐 배운 것이라, 그것이 똑바로 나갔다고 볼 수 없는 점이 있으나, 어쨌든지간에 서울서 박록주씨가 김창환씨한테 단성사에서 배왔기 때문에 그 흥보전에 대해서 그 제자들이 그걸 알죠. 박록주씨가 김정문 선생한테서 공부를 했다는디, 거기(김정문)는 제비노정기가 없어요.12)
실제로 박녹주 명창의 <흥보가>에 들어있는 제비노정기와13) 김창환제 <흥보가>의 제비노정기14)를 비교해 본 결과 사설이 같았다. 다만, 김창환제에서는 늦은 자진모리로 부르는 데 비해, 박녹주는 이 대목을 중중모리로 부르는 점만 다르다.
김정문은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칠 때 상당히 엄격하였다. 박녹주가 자꾸만 고개짓을 하면서 소리를 하니까 고개짓을 하지 못하도록 박녹주의 머리에 큰 돌을 올려놓고 소리를 가르친 것은 엄격한 김정문의 풍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김영운도 작은아버지인 김정문으로부터 소리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나곤 했다고 한다. 강도근(1917-1996)15)은 열대여섯 살 무렵 임실의 박중근으로부터 <네 그른 내력>, 단가 <공도란니> 등을 배우고 난 후 바로 주천면의 김정문을 찾아가 소리를 배웠다. 그가 김정문에게 간 이유는 박중근이 양성음이고 육자배기 성음이어서 이런 성음을 배워서는 안되겠다 판단하고 동편소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16) 그가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운 시기는 1933년 전후이다. 그는 김정문으로 부터 <심청가>와 <흥보가>, 그리고 <적벽가>를 배웠다. 그런데 <흥보가>의 경우, ‘놀부 박타는 대목’은 가르쳐 주지 않아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까지만 배웠으며, ‘놀부 박타는 대목’은 순천 인근에 있는 부용관이라는 요리집에서 부용이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던 이진영으로부터 배웠다. <수궁가>는 가르쳐 주지 않아 후에 유성준에게 배웠다. 강도근 역시 유성준의 성질이 고약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정문이 유성준에게 맞은 것과 유사한 경험을 강도근도 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강도근 역시 목덜미에 상처가 남아 있다. 강도근은 유성준이 가르쳐 주지 않은 대목을 임방울로부터 배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도근의 소리에 육자배기 성음과 계면조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4.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과 소리의 특징
김정문은 단가 <홍문연>을 잘 불렀으며, <흥보가>를 특히 잘 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소리가 지닌 특징은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유성기 음반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김정문은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음반도 그다지 많이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의 목록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28년 <흥보가> 박타령(上) Columbia 40027-A(20703-1)
<흥보가> 박타령(돈타령)(下) Columbia 40027-B(20704-1)
② 1934년 <춘향전> Chieron 501-512 (12장)
③ 1934년 단가 <홍문연 上, 下> <西漢演右> Chieron 189-A․B
<홍문연>은 초패왕이 홍문연 잔치에서 한나라 유방을 죽이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담은 단가로서, 대부분의 단가와 마찬가지로 우조에 중모리 장단으로 불리고 있다. 김정문은 단가의 분위기에 맞게 단아한 소리로 영웅들의 면모를 잘 그려 보이고 있다. 그런데 단가의 끝부분인 “장검을 어루만져 실수를 기다리던 홍포은갑 저 장사는 항장일시가 분명허다 ---” 이후 대목에는 계면가락으로 기교를 부린 흔적이 엿보인다. <흥보가>의 박타령과 돈타령은 이흥원의 장고장단에 맞추어 부른 것이다. 진양장단으로 흥보가 박을 타는 대목에서는 구성진 목으로 흥보의 원망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상청으로 쭉 뻗어주어야 할 부분에서 좀 밀리는 느낌을 주고 있다. 돈타령에서는 박을 탄 후 박에서 쌀과 돈이 나오자 어쩔 줄 몰라하는 흥보의 모습을 휘모리와 중중모리장단에 얹어 맛있게 부르고 있다. 씨에론판 <춘향전> 전집은 김정문이 신금홍과 배역을 나누어 소리를 하고 심영과 남궁선이 신파조로 해설을 하는 식으로 짜여져 있다.17) 모두 12매로 되어 있는데, 1926년 이동백, 김추월, 신금홍의 일축판 <춘향전> 이후 두 번째로 나온 <춘향전> 전집물이다. 12매의 구성은, 第一編 南原의 春色(上)(下), 第二編 廣寒樓의 佳緣 (上)(下), 第三編 鴛鴦枕에 사랑가(上)(下), 第四編 紅淚惜別(上)(下), 第五編 첫公事가 妓生点考(上)(下), 第六編 피에 젓는 十杖歌(上)(下), 第七編 獄中吉夢(上)(下), 第八編 李道令御使拜命(上)(下), 第九編 一刻千秋南原行(上)(下), 第十編 獄中相逢(上)(下), 第十一編 御使出道(上)(下), 第十二編 李花春風(上)(下)로 되어 있다. 각 대목마다 서두에 “춘향전 전집 제일편 광한루에서 이도령이 춘향이를 처음 만나는 데이올시다---” 하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사설의 짜임도 전체적으로 축약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에 나온 유성기 음반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먼저 발매된 일축판 <춘향전>과 비교해 볼 때, 일축판은 비록 분창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판소리로서의 <춘향전>의 본래 모습을 상대적으로 많이 갖추고 있는 데 비해서, 씨에론판은 분창형태에다가 아니리와 몇몇 대화부분을 심영과 남궁선이 변사와 같은 목소리로 재현하고 있어 극적 구성이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다. 같은 동편제에 속하면서 당시 김정문에게 소리를 가르치기도 했던 송만갑의 <춘향가>와 소리대목 구성을 비교해 보면, 씨에론판 <춘향전>의 특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송만갑판 <춘향가>는 박봉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18)
<송만갑판 박봉술 창 <춘향가>와 씨에론판 <춘향가>의 소리대목 구성>
송만갑판 박봉술 창<춘향가> 씨에론판 <춘향가>
기산영수 기산영수
나귀안장 나귀안장
적성가 적성가
앉었다 일어서 안젓다 이러나(‘백백홍홍 난만중’ 포함)
춘향화용 금옥사설
방자 춘향 부르러 가다 아주 짤막함
네 그른 내력 네 그른 내력
춘향 방자 따라 가는데 없음(방자가 춘향 대신, 춘향모 에게 허락
받음)
춘향 거동 없음(춘향은 끝내 가지 않고 이도령보고 오라고 함)
춘향집 가리키는데 없음
몽룡 동헌에 없음
천자풀이 없음
퇴령소리 길게 나니 퇴령소리 길게 나니
방자 춘향집에 없음
도련님 먼저 오르시오 없음
방치례 없음
달타령 없음
성등사또 자하골 성참판 영감
음식차림 없음
몽룡 꾀병 없음
긴 사랑가 없음
자진 사랑가(금옥사설 형식) 사랑가(자진사랑가 앞대목 + 음양가)
업기 타령 업기타령
정짜 노래 없음
궁짜 노래 없음
타기 타령 없음
말농질 타령 없음
이별차 가는데 이별차 가는데
춘향이 깜짝 놀래 춘향이 깜짝 놀래
이별가 이별가(간략)
춘향모친이 나온다 춘향어머니 이말 듣고 (간략)
춘향 이도령 이별 없음
신연맞이 신연맞이
긴 기생점고 긴 기생점고
자진 기생점고 자진 기생점고
군로사령 군로사령
갈까보다 없음
백구타령 없음
행수기생 없음
사또님 듣조시요 없음
춘향 내리는디 없음
십장가 십장가
열을 치고(남원골) 없음
여러 기생이 나온다 없음
옥으로 내려가는데 없음
옥중가 옥중가
과거장 과거장
어사남행 어사남행
어사행장 어사행장
긴 농부가 농부가(상사듸야 계열의 농부가)
자진 농부가 없음
젊은 농부 냅더서 없음
경전야숙 없음
방자 길소리 없음
방자 문안 없음
어사 탄식 없음
박석틔 박석틔
향단 기도 없음
어사와 장모 어사와 장모
춘향모 탄식 없음
향단이 밥상 차림 없음
바루 치는 데 없음
옥중 상봉 옥중상봉
이튿날 평명후의 이튼날 본관사또
벌떼같은 군로사령 금군나졸이 매달니고
수청하든 통인이며 없음
어사 술상 어사 술상
어사 출도 어사 출도
옥사정이 옥사정이
춘향이 아뢰다 춘향이 아뢰다
대상에 올라간다 춘향이 춤추고 노래하다
어디 가야 여기 있다 어디가야 여기 있다
춘향모 춤추는데 춘향모 춤추는데
뒷풀이 뒷풀이
이상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씨에론판 <춘향전>에는 많은 소리대목이 빠져 있다. 빠진 대목은 천자풀이, 방치례, 달타령, 음식타령, 정짜노래, 궁짜노래, 타기타령, 말농질타령, 백구타령 등과 같이, 대부분 사건전개에 있어서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이른바 ‘비고정체계면’19)에 해당하는 대목들이다. 그리고 방자가 춘향을 데리고 이도령에게 가는 대목이 빠진 대신 춘향이 방자에게 이도령보고 오라고 전하라고 말한 후에 집으로 가는 내용이 나오며, 이도령이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춘향이 편지를 가지고 한양으로 올라가던 방자를 만나는 대목도 씨에론판 <춘향전>에는 빠져 있다. 작품의 중간부분에서 사건전개에 필요한 대목을 중점적으로 수용하였으면서도, 서두와 결말부분은 대체로 충실하게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고정체계면에 해당하는 소리대목이 많이 빠진 이유는, 한 면에 2-3분 정도에 걸쳐 부르는 양만을 녹음할 수 있는 유성기 음반의 특성에 맞추기 위해 사설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로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기산영수, 적성가, 사랑가, 신연맞이, 기생점고, 십장가, 옥중가, 어사출도 등 <춘향가> 가운데 뛰어난 소리대목으로 꼽히는 대목은 모두 들어있다.
김정문이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에 오면 유파에 대한 구분의식이 약화되고 계면 위주로 소리를 짜는 서편제가 주도적인 창법으로 대두하게 된다. 송만갑이 가문의 소리법제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킨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일화는 판소리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송만갑이 유성기 음반에 남긴 소리는 오늘날 동편제로 일컬어지는 소리와는 또 다른 동편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송만갑은 목구성이 철성인데 상청을 내지를 때에는 끝까지 쳐올리며, 엇붙임을 별로 쓰지 않고 대마디 대장단에 古拙하게 소리를 짜나간다. 이러한 그의 소리는 동편제의 전통적인 모습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배연형은 송만갑의 소리를 판소리의 구심점이자 꼭지점이요 동편제의 기준이라고 말한다.20) 물론 송만갑 이전의 동편 소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송만갑의 소리가 동편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일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송만갑 역시 변모해 가는 동편제 소리의 한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오늘날의 동편소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古制 동편소리에 가깝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정문은 그의 스승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웠으면서도 송만갑과 비교해 볼 때 古制 동편소리에서 한 발 더 멀어져 있다. 송만갑은 꼿꼿하게 서서 소리를 했으며 구성진 데가 없었다. 송만갑의 이러한 특성은, “송선생님은 발림은 거의 안 하셨고 가끔 손을 들 뿐, 뻣뻣하게 서서 소리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김소희 명창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21) 이에 비해 김정문은 발림을 잘 했으며 구성지게 소리를 하였다. 김소희 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김정문씨의 소리는 송선생님의 소리보다 장식음이나 잔기교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문씨는 목청이 연하고 가벼워서 송선생님처럼 소리를 하면 힘이 모자라서 맛이 없으므로 좀 더 기교를 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22)
협률사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창극 형태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던 당대에 있어서 김정문의 이러한 면모는 대중들의 취향에 좀 더 부합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문이 <춘향가>를 할 때 춘향모 역할을 맡으면 수건을 쓰고 나가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고촌 마을의 한 할머니 생신잔치 때 김정문을 초청하여 소리를 시켰는데, 이 때 김정문이 <심청가>를 불렀다. 그런데 특히 봉사 흉내를 잘내어 진짜 봉사 같았으며, 소리를 듣던 노인들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23)
이처럼 김정문은 동편제의 계보에 속해 있으면서 그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좋은 소리가 있으면 유파를 가리지 않고 배우는 판소리 전승 환경에서 동편과 서편의 상호 침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대중의 취향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강산제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성음을 중시하고 사설이 단정하여 상대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24) 그리고 안숙선과 같이 배우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명창이 인기있는 것 역시 판소리가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적인 배경 때문이다. 이러한 판소리 전승환경 속에서 동편제를 고수하려는 노력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정문은 당시 많은 국악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편에 중독되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다. “만일 김정문이 5년만 더 살았어도 남원에 명창 여럿 났을 것이다”라는 양해인씨의 말은25) 그의 죽음이 남긴 아쉬움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