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시 29:1~2)
1. 시작하는 말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일반 신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있다.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이 되다보니 기독교 신자들에게 일반화한 보편적 상식이 되고 있다. 곧 기독교 신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을 영광스러운 분으로 ‘모시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언어에 대한 오해가 가져다준 과오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용어에 대한 잘못된 개념 규정은 신자들 상호 간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생활에까지 잘못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영광을 누리시도록 최선을 다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흠집을 내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이든지 영광스럽게 꾸미거나 만들어서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은 모두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부터 파생한 과오이다.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오해의 결과로 크고 작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구교는 더 말할 것도 없으나 개신교 역시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미명 아래 보기 사나운 일들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소위 성직자들이나 성가대원들이 성의라고 말하는 화려한 ‘가운’을 착용하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거액의 비용을 들여 신궁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놓은 교회당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소위 ‘헌당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에 대한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소위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 및 권사 등을 ‘성직’이라 해서 거창하고 화려한 의식을 만들어 안수례나 임직식 그리고 장로 장립식 및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는 의식절차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신궁(神宮)과 같은 건축물을 하나님께 헌당하는 일을 벌이거나 조잡스러운 형식 및 의식행위들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미명 아래 행해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순박하거나 어리석은 신자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소위 성전을 당연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해서 헌당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지도자들이 소위 성직을 세우는 각종 행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높은 벼슬을 하사받는 준엄한 의식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교계의 뜻있는 인사들은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나 관심을 가지는 자는 소수에 그치고 있다.
2. 영광의 어의
기독교는 가장 고상한 종교로서 세속적인 종교와는 완전히 차별화될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는 절대 진리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웅장한 신궁과 화려한 색채로 덧칠해진 조잡스러운 모형이나 형식 또는 의식으로 포장된 무속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그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오해를 지나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본 주제의 올바른 성경적인 해답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분야에서 남보다 탁월하게 성공한 자가 누리는 영예로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나가 ‘승리의 영광’이라든가 ‘합격의 영광’ 또는 ‘출세의 영광’ 등의 말들을 흔히 사용한다. 어떤 경쟁에서나 패배하는 자가 있으면 승리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국가고시에도 불합격자가 있고 합격한 자가 있다. 그리고 관료사회에도 관직에서 낙오자가 있는가 하면 높은 관직에 오르는 자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경쟁에서 승리한 자나 고시에 합격한 자, 또는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영예로움을 누리는 경우를 ‘영광’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영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영화스러운 현상’ 또는 ‘빛나는 영예’ 등으로 밝히고 있다. 성경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카보드(d/bK)’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영광’ 또는 ‘영예’, ‘풍부’ 등의 의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카바드(db'K)’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무겁다’ 또는 ‘존경하다’, ‘영화롭다’ 등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독사(dovxa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광채’ 또는 ‘영광’, ‘명성’ 등의 뜻이다. 그리고 동사로는 ‘독사조( dox avz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찬양하다’ 또는 ‘영화롭게 하다’, ‘칭찬하다’ 등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들은 단순한 사전적 견해에 지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 외에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품사를 달리하며 동일한 의미로 소개하는 용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미 앞의 사전에서 밝힌 것과 거의 방불한 의미로 보인다. 요컨대 지금까지 언급한 ‘영광’이라는 말에 대한 의미들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하는 상대적인 일반적 개념을 바탕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영광’이라는 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들이 이미 대중적으로 보편화하여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깊이 올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절대적인 개념으로 승화시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계시하실 때, 기자들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보편적인 용어를 절대적인 특수한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사용하여 영원한 뜻을 기록하도록 섭리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말 성경에는 ‘영광’이라는 말이 더러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는 그 문장의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충분히 분별할 수 있다.
3. 영광의 분류
‘영광이란 무엇인가’라는 본 주제에 대한 해답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영광’이라는 말을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주제의 핵심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기에 앞서 반드시 정리해야 할 과제가 있다. 곧 ‘영광’이라는 말을 성격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해서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영광’이라는 말에 대해 몇 가지로 분류해서 이해하도록 밝혀주고 있다. 곧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피조물의 영광과 타락한 피조물의 영광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은 영원자존하시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영상(映像)이 드러나는 영화로운 광채를 말한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며 시작한 날도 없고 끝나는 날도 없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은 영원한 빛의 근원이시며 빛의 본체이기도 하시다. 그 빛의 영화로운 광채가 드러나는 영상이 곧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이다. 이는 그 어느 무엇과도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드러나는 절대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빛의 영화로운 광채를 영원한 창조세계에 드러내신다. 2) 영원한 피조물의 영광 영원한 피조물의 ‘영광’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운 광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때에 영원한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스럽게 창조하셨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운 광채가 곧 ‘영원한 피조물의 영광’이다. 이는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에 의존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는 영화로운 광채를 발현할 수 없는 종속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비록 ‘영원한 피조물의 영광’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창조주의 영광’에 종속하여 영원토록 영화로운 광채를 드러낸다. 3) 타락한 피조물의 영광 타락한 피조물의 ‘영광’은 불순종으로 육체가 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타락한 세상의 영화로운 광채를 말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고 저주를 받아 영적으로 죽어 육체가 되었다. 이러한 인간이 누리는 것이 곧 ‘타락한 피조물의 영광’이다. 이는 누구나 혼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상대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곧 패자의 비참한 좌절감이 없이는 승자의 ‘영광’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타락한 피조물의 영광’은 타락한 인간이 저주 아래서 누리는 영광을 말한다.
4. 영광의 정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정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앞서 언급한 언어의 의미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전적 개념의 의미는 인간들이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절대적 개념을 지닌 계시적 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앞서 밝혀놓은 언어의 의미만 가지고는 그 정의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교회의 많은 부작용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언어의 혼란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 개념을 절대적 개념으로 그 차원을 달리하여 규정하는 과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누리는 상대적인 ‘영광’은 자기 스스로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누구나 상대와의 경쟁에서 진 자가 있어야 이긴 자가 승리의 영광을 누리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에게 패한 자의 비참한 좌절감을 안겨주지 않고는 승리한 자가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광’을 누리고 산다는 것은 상대자인 어느 누군가에게 비참한 좌절감을 안겨주는 비열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정당화되고 있는 ‘경쟁’은 결국 최종적으로 인류 최대의 비극인 ‘전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는 타락성에 의한 상대적인 ‘영광’을 추구함으로 필연적으로 자초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떠한 상대도 절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원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상에 의해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지니고 계신 절대적인 ‘영광’을 누리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 스스로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우주만물의 창조 및 섭리를 통해 스스로의 절대적인 영광을 나타내시며 존재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은 상대적인 피조물에게 비참한 절망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탄과 찬양을 불러일으켜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신령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는 그 영화로움에 감탄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비참한 절망감이 아닌 감탄과 찬양에 의한 행복감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의 근본 영상(映像)에 의해 비춰지는 영화로운 광채(光彩)>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되시는 하나님의 근본 영상에서 나타나는 찬란한 빛살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근본 영상에 따라 나타나는 계시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거듭난 자들은 신령한 눈으로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감탄하며 찬양한다.
5. 영광의 속성
‘영광의 속성’이라는 본 주제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속성에만 국한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이 외에 다른 ‘영광’에 대한 속성은 앞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속성도 앞서 약간 언급은 했다. 그러나 본 주제의 핵심 사안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세계의 ‘영광’과 달리 몇 가지 중요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절대성을 비롯해 영원성과 거룩성으로 언급할 수 있다. 1) 절대성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첫째 속성은 절대성이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 역시 절대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흠집을 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거나 덜할 수도 없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곧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스럽기 때문에 어떤 대상과 무관하게 영화로운 광채를 스스로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2) 영원성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둘째 속성은 영원성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 역시 영원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에나 무엇에도 하나님의 ‘영광’ 곧 영화로운 광채가 약화하거나 미치지 않거나 멈출 수도 없다는 뜻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모든 피조세계에 언제나 어디서나 그 무엇에도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일 뿐이다. 곧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 영화로운 광채 역시 영원무궁토록 드러내신다. 3) 거룩성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셋째 속성은 거룩성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 역시 거룩성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선·미 곧 참되고 좋으며 아름다움의 영화로운 광채가 충만하다는 의미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만물에도 역시 참되고 좋으며 아름다움의 영화로운 광채가 충만하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곧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 ‘영광’도 거룩할 뿐만 아니라 지으신 피조만물 역시 의존적으로 거룩하다는 것이다.
6. 끝맺는 말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존재와 창조 및 섭리를 통해 드러내시는 속성들의 ‘영광’을 영원토록 드러내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방식으로서 하나님의 존재확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신령한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한다. 반면에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은 신령한 눈이 밝아져 피조세계에 충만하게 비추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와 그 찬란한 빛살을 바라보고 감탄하며 찬양한다. 하지만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육신의 장막을 벗지 못한 상태에서 사는 동안, 때로는 육체의 소욕에 따라 세속적인 ‘영광’만을 바라보고 온갖 탐욕에 사로잡혀 불만의 노예로 살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피조세계에 나타나는 그 영화로운 광채에 의해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감탄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육체의 장막을 벗어버리기 전에도 감탄하며 찬양한다. 그리고 육체를 벗고 부활하여 신령한 영광의 옷을 입은 후에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감탄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시 145: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