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 (말라기3:6~12을 중심으로)
서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을 위한 모든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특별히 인간을 위하여 주신 모든 제도 속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으시며, 그것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라기서를 통하여, 구약 전반에 나타나 있는(레 27:30~33, 민 18:21~32, 신12:5~19; 14:28~29; 26:12~15)십일조 제도에 대한 부분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 제도를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접붙임바된 우리들에게 있어, 오늘 날 이 십일조 제도는, 존속이냐 폐지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치열하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십일조 제도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말라기 3장6~12절에 나와 있는 십일조에 대한 의미를 확인하고, 과연 오늘날 우리들이 드리는 십일조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온전한 제물이 되고 있는 것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Ⅰ. 역사적 배경
말라기서에서는 제사장의 직무태만(말1:6; 느13:4~9,30),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말3:8~12; 느13:10~13, 31), 이방인과의 결혼(말2:10~16; 느13:23~28)등 느헤미야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죄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말라기 선지자가 에스라, 느헤미야와 전반적으로 비슷한 연대에 활동한 것에 동의하게 한다. 말1:8절의 총독(폐하트)라는 단어도 페르시야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암시며, 1:4절은 에돔인들이 어떤 침입자들로부터 타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에돔인들이 이방인의 힘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암시도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 때(렘 49:7~10,25;9,21) 혹은 주전 5세기경 나바트 아랍인 들에 의해 일어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말라기는 포로 귀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1:10), 에스라에 의해 대각성 운동이 전개된 이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첫 번째 귀환하여, 성전예배가 소홀이 되고, 종교적인 타락과 악습들이 넘쳐나자 이것을 부분적으로 개혁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한 후, 페르샤(바사)로 귀환하였다가 돌아와서,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2차 개혁을 실행한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 선포 시기가,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재임해 있을 당시라면, 최소한의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느헤미야가 이와같은 정황들을 그대로 두었을리 없고, 그것들을 필시 개혁하였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총독에서 잠시 떠나있었을 때, 페르시야에서 총독을 파견하여, 그들의 관례대로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였는데(느13장) 느헤미야의 두 번에 걸친 총독 재임 기간 사이에, 느헤미야의 부재중이던 어느 한 시기에, 이 메세지를 선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전이 완공되었으나, 학개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기다려도 임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의심한다.(말2:17) 이러한 영적인 빈곤상태에서, 더러운 떡을 골라 제단에 드렸고, 눈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십일조와 헌물의 타락이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말1:8) 이같은 시대적인 암흑기와 종교적인 타락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슈브)고 촉구하신다.
Ⅱ. 양식
“대표적인 학자 파이퍼(Egon Pfeiffer)는 말라기서는 질문과 대답형식이 가미된 논 쟁적인 연설이라는 특유의 표현으로 말라기서의 본문을 표제 부분인 1:1과, 결론 부분인 3:22~24[한글 성경4:4~6]을 제외하고, 6개 단락으로 나누고 있으며, 대부분 의 학자들이 이 나눔을 수용한다.”
필자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3:6~12절은 백성과 야훼 사이의 회개에 관한 논쟁으로, 질문과 대답(Question-Answer Form)의 형식이 가미된 논쟁적인 연설(Disputation Speech)이다. 반복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죄를 회개하고 십일조와 헌물을 믿음과 사랑의 정신으로 가져 올 때, 축복하시겠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Ⅲ. 문학적 구조
1. 말라기 전체의 문학적 구조
서론: 말라기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1:1)
A 여호와의 공의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사랑하시나 에돔은 미워하심(1:2~5)
B 제사장과 백성들이 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여호와를 속임(1:6~14)
C 과거 레위는 여호와를 진실하게 섬김: 레위 사람들은 언약을 어김 (2:1~9)
D 핵심부분: 더 이상 불경건한 행위를 멈추라 (2:10~16)
C' 장차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레위사람들을 정결케 할 것임 (2:17~3:5)
B'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함: 그러나 만약 그들이 돌아서면 하나님께 그들을 복 주실 것임(3:6~12)
A' 여호와의 공의: 의인은 상을 주시나 악인은 벌하심(3:13~4:3)
결론: 마지막 경고(4:4~6)
말라기의 표제부분과 대칭구조의 틀을 벗어나 있는 결론 부분을 제외하면, 핵심 단원인 D를 중심으로, A와A', B와 B',
C와C'가 서로 대칭되는 구조이다. A와A'는 악한 자나 선한 자들을 동일하게 대하신다는 것에 대해 책망하는 내용이며,
B와 B'는 제사장, 백성들이 제물을 드릴 때 여호와를 속이는 것, 십일조, 헌물을 도적질하는 것을 책망하는 내용이고,
C와C'는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는 행위들을 바로 잡기 위해 레위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과 레위와 그 자손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2. 3:6~12절의 위치와 역할
말라기는 무책임한 헌물과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들과 그들의 잘못을 드러낸다.(1:6~14),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것과(2:1~9), 이방인과의 결혼, 이혼등을 정죄하며,(2:10~16) 이러한 범죄들로 인해 헌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게된 것을 경고하는데, 이에 대해 여호와는 자신이 정의를 입증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언약의 사자가 임하여, 그 분의 백성을 깨끗이 하여, 그들이 드리는 헌물이 받아들여지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2:17~3:5)
이러한 상황에서 3:6~12은, 이스라엘이 억지로 드리고 있는 헌물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온다. 즉 앞 부분의 불경건한
거짓 행위들 가운데, 그들이 무엇을 돌이켜야 하는지, 그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의 범죄행위로 인해, 헌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고, 헌물을 드린 자의 목숨까지 위태로와진 상태를 보여주어,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 헌물이 헌물답게 열납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선행되어야함을 말한다. 이것을 위해 변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소멸시키지 않으시는 여호와 앞에 속히 돌아오라는 것이다.(3:6)
이렇게 볼 때 3:6~12은 불경건한 행위들을 멈추어야 하는 것들을, 여호와의 공의(A와A'), 이스라엘의 올바른 삶(B와B') 과, 종교적인 삶(C와C')을 풀어서 설명하며, 헌물이 헌물로서 드려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거짓 행위를 멈추라는 핵심부분, D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B의 제사장과 백성들이 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여호와를 속인 것과 B'의 백성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한 것이 댓구를 이루고, C의 과거 레위인들은 진실하였으나, 현재 레위인이 언약을 어기고 있는 상황과 C'는 이러한 레위인들을 정결케 할 것이라는, 레위인에 대한 예언의 선포가 서로 댓구를 이루고 있다.
3. 6~12절의 절별 주해
본문 사역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김근주 교수의 2009년 2학기 말라기 주해 교안에 제시되었던 본문을 사용한다. 청자와 화자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의미 전달이 분명하며,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보다 선명히 밝혀, 감추어져 있는 뜻을 통찰하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6 나는 야훼니 나는 변하지 않노라 그리고 너희는 야곱의 자손이니 너희가 그치지를 않는구나
7.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로부터 돌아섰고 너희가 지키지 않았다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8.“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리이까? 이는 너희가 나(의 것)를 도적질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말함이라 십일조와 헌물이라
9.저주 가운데 너희가 저주 받았도다. 또 나(의 것)를 너희가 도적질하니 민족 모두로다
10.모든 십일조를 곳간으로 가져오라 그래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리고 이것으로 꼭 나를 시험하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하늘의 창문을 열고 너희에게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실지를
11. 또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포식자를 꾸짖을 것이고 너희를 위해 그것이 땅의 열매
들을 망치지 않을 것이며 너희를 위해 들의 포도가 결실 없지 않으리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12.그러면 모든 백성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이는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임이
라 만군의 야훼가 말씀하셨다 "
3:6절에 처음 나오는 왜냐하면(키)는, 이 절이 앞선 단락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앞 단락은 (2:17~3:5) 심판에 대한 선포였다. 그리고 3:6~12은 축복이 늦어지는 이유에 관해 설명하면서, 나와 너희, 야훼와 야곱의 후손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 나 – 너희”
“야훼 – 야곱의 자손”
“나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치지 않는다”
“야곱이라는 말은 ‘속이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카브”에서 유래한 것인데,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모든 것의 목적이 되시는 분이신 것에 반해,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서는 형과 부모까지 속이는 자이다. '야훼-야곱'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대조는, 야훼는 변하지 않으시나, '야곱은 여전히 죄를 짓고 행악을 멈추지 않는다'는 동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7 절은 너희 조상들의 날들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로부터 돌아섰고, 너희가 지키지 않았는데, 이러한 불순종과 거역은 일시적인 죄의 현상이 아니라, 조상대대로부터 흘러내려온 뿌리가 깊은 고질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돌아오라 명령하시는 것이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서는 모두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는데, 이는 성전의 회복은 물론이며, 성전에서 드려지는 합당한 제사와 헌물의 회복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는 죄의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경우 오랜 불순종으로 인해, 양심이 마비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영적인 빈곤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기대마져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황이었으므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이웃을 속이고, 부적절한 제물을 드리고 있었다.
8 절은 십일조와 헌물(투르마)의 도둑질에 대한 부분을 언급한다. 5절에서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고 과부, 고아,나그네를 압제하는 죄를 언급하며, 3절에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여 여호와께 공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의 선포는 십일조와 헌물이 본래의 기능대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을 증거한다.
“제사장들의 부양을 위하여 혹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재산이나 소득의 십분의 일 을 바치는 십일조 제도는, 고대 근동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관습이었다.”
“고대 근동에서 시행된 십일조 제도는 대부분 정치적,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백성들이 그들의 통치자에 대한 세금의 의미로, 또는 정복 국가가 피정복국가의 속국에 대하여 부과한 조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때로 종교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는데, 페르시야의 고레스는 군인들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제우스 신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는 신명기 6:4~9과, 신명기 14:28~29에서 뚜렷한 목적이 나타난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배부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고대 근동의 십일조처럼, 단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목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십일조 제도를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십일조는( 4643, מעשר 마아세르,구약에서 32회 사용)라 하며, 아세르(6237,구약에서 9회 사용), 즉 “십분의 일을 바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 ‘마아세르’와 관련이 있는 모든 단어들은, 히브리어 어근 ‘아세르’에서 파생되 었는데 아세르는 모으다(gather), 연합하다(unite)의 뜻을 가지고 있다. 십일조라는 단어는 ‘십’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는데, ‘십’은 ‘집합’과 ‘통일’을 나타내는 전체를 의미한다. 십일조는 전체에서 십분의 일을 가리키거나, 그 십분의 일을 어떤 대상과 관련하여 바치거나, 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나타난 아브라함(창14:17~20)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의미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원인과, 모든 재물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감사의 표시로서, 멜기세덱에 대한 왕같은 제사장 직분을 인정하는 표로 드렸으며, 야곱(창28:20~22)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헌신, 감사의 표시로 이전의 삶을 돌이키는 회개의 표시로서 드렸다. 하나님의 성전과 연관되어 있다.
레위기(27장)에서는 속죄와 봉헌을 보여주는 희생제물로 등장한다. 성물은 십일조 뿐아니라 처음 익은 열매, 서원의 예물, 자원의 예물,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이며(레27:26~40), 농산물의 십일조와, 가축의 십일조에 대해 언급한다. 땅의 모든 소산, 즉 사람이 수확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드려야 했다. 인간의 이기심을 제어하기 위하여 속할 수 있는 것과, 속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이 둘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 창세기의 십일조와 비교하여 볼 때, 그 항목과 의무 규정과 절차에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민수기(18장)에서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되었는데, 십일조를 받는 대상인 레위인과 제사장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레위인도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의 규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영원한 규례로 지켜져야 했으며, 십일조를 바치는 항목은 레위기에 나타난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고, 창세기나 레위기에 나타난 십일조보다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이다.
신명기(신12:5~7; 15~19; 14:22~29; 26:12)에서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등 그들의 생존권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책임질 것을 규정하였는데, 레위인들을 위한 부양적인 용도 및, 다른 예물들과 함께 성소의 성찬으로 사용되어졌다. 십일조를 바치는 장소의 구별, 사용 목적의 독특함이 나타난다. 레위기나 민수기의 십일조와는 달리, 여호와 앞에서 함께 먹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십일조가 등장한다. 이는 가족 관계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또한 십일조를 바치는 특별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었는데, 그 장소로 십일조를 운반하며, 현금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도 고안되었다. 또 새로운 종류의 십일조, 즉 3년마다 거두어진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는데, 레위인을 포함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십일조의 의미와 연계하여 말 3:8절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하나님의 것, 나의 것) 드려진 십일조는 하나님이 기업으로 삼은 레위인(수13:33)과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쓰여져야 했다. 이들의 보호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68:5; 146:9) 그런데 이것을 어겼을 때, 저주가 임하는 것이며, 9절에서는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개역한글판과 개정판이 지닌 “온전한 십일조”를 직역하면 ‘모든 십일조’인데 구약에서 규정되고 있는 대로 지켜지는 십일조를 의미 한다고 할 수 있다.”
10절의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집에 들여 양식이 있게 하라'는 명령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백성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전에 드려졌던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올바로 사용하지 못한,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하여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복을 붓는 것을 시험하라는 말씀에서 ריק(리크- 붓다) 라는 동사는
“히필 동사로서 사전적 의미는, 비우다(empty out), 따르다(pour out or down), 칼을 뽑다(draw a sword), ~을 주리게 하다(leave someon unfed) 의 뜻이 있다”
구약에서 리크는 ‘그릇, 자루 등을 비운다’는 의미로 5회, ‘비나 기름을 쏟다’의 의미로 3회 사용되고 있는데, 10절에서는 비나 기름을 따르거나, 쏟는(pour out or down) 의미로 사용되었다. 10절의 경우, ‘복을 부어주실지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복을 주다’라는 의미의 동사로는 ‘바락’이라는 동사가 있다.
그런데 ‘바락’ 동사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따르다’, ‘쏟다’의 의미인 ‘리크’의 사용은 흔히, 우리들이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님을 관찰하게 한다. 특히 ‘하늘 창을 열고’라는 표현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 창이 열림으로 비가 충분히 내려, 농작물을 비롯하여 땅이 풍요로와지고, 모든 만물이 비로 인해 생명을 얻고, 아름다워지므로, 그에 합당한 소출을 얻고, 가뭄과 흉년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면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십일조를 통해, 자신의 모든 탐욕스런 욕구들을,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하며, 물질의 복을 구하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95:8~1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들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할 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됨을 경고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하라'는 10절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회의적인 그들의 마음을 각성케 하여, 돌이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참으심의 사랑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행할 때에, 여호와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어, 소득에 손실이 없게 하실 뿐아니라, 그로인해 열방이 그들을 아름답다 복되다 칭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12절)
결론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현실 문제에 있어, 십일조와 헌물은 이스라엘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제사장은 물론, 많은 고아들과 과부들과 이스라엘에 개종하여 들어오는 유리하는 나그네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학자들 중에는 십일조에 대하여, 민수기 18장의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를 “제 1십일조(the first tithe)”, 하나님 앞에서 가족과 함께 먹을 수 있었던 신명기 12장,14장에 기록된 십일조를 “제2의 십일조(the second tithe)”, 신명기 14:28과 26:12에는 매 삼년 끝에 가난한 자를 위하여 사용되는 또 다른 십일조를 “제3의 십일조(the third tithe)”라 부르며, 독립된 새로운 형태의 십일조로 간주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선의 목적인 이 십일조를 새로운 십일조가 아닌, 제2의 십일조의 용도 변경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앞서 중요한 것은, 십일조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본래 취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놓으셨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처지에 얽메여, 율법을 범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십일조 제도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하신 안전장치라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땅의 곡식을 벨 때,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다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고(레 19:9~10),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에서 스스로 난 것은 곳간에 들이지 말며, 그 해의 소산은 이방인, 고아, 과부, 들짐승들이 자유롭게 먹도록 하고(출23: 10~11; 레 25:5), 노예를 풀어주고,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며(신15:13~14), 제 7년에는 빚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그 빚에서 해방시켜 주도록 하는(신15:9), 율법들을 통하여, 공동체를 유지하고, 기름부은 자를 먹이시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양육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그 목적을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온전히 사용할 때, 이러한 풍성함이 형성되며, 흘러가게 된다.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도 ‘가장 좋은 것을 선별’하여, 다시 십일조를 드렸으며, 축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서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가족처럼 교제를 나누며, 그것을 먹었던 것을 신명기를 통하여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말라기 본문도 바로 이와같은 공동체를 유지하여,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과의 친교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야할 장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소욕을 채우기에 급급하게 되었으며, 섬기고 보살펴야 할 이웃을 속이고, 억울하게 하고,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을 소외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십일조가 언급 되는 부분은, 마23:23, 눅18:12, 히7:2인데, 예수님께서도 율법에 정해진대로 십일조가 드려져야 함을 강조하셨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의 근본 정신인, 율법이 제시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린 것을 책망하셨다.(마23:2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렸지만(눅11:42),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렸다.(눅11:42이하). 이들이 종교에 대한 관념이 외면적 의식에만 있었을 뿐, 십일조의 근본 정신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탐심과 거짓과 위선, 시기, 교만으로 가득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는 온전한 것이다. 온전한 심령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부분이지만, 삶 전체를 올려 드려야 한다. 오늘 날 우리들의 십일조 생활은 오직 물질에 국한되어 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하고 구별된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 전체의 소득중, 불완전한 십분의 일을 단지 물질로 환원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드려진 십일조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따라 올바로 사용하지 못한다. 성공과 성장을 지향하는 목적과 부합하여, 교회는 국유지인 땅을 법을 어기면서까지, 교회 개척을 위해 불법으로 사유화하여 사용하고자 하며, 목회자들의 윤리와 도덕성은 이미, 세상의 기준보다도, 낮은 수준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신약성경을 비롯하여, 모세오경에 나와 있는 여러 종류의 십일조를 살펴보고, 말라기 본문을 살펴보아도, 오늘 날 우리들이 드리는 십일조와 부합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말라기의 본문은 ‘...그러면 모든 백성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이는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임이라(3:12)’ 선포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들을 도리어 혐오한다. 그러므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고, 그들을 연단하여,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될 것이라는(3:3) 말라기서의 예언적 선포는, 오늘 날 우리 시대를 향한 선포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인제사장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연단을 통하여서라도(3:2),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치게 된다면, 그것이 곧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십일조 폐지냐 존속이냐를 따지고 논쟁하기에 앞서,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물질만능주의, 맘몬이라는 우상을 깨뜨리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이것을 철저히 행하기 시작할 때,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내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 온전한 십일조, 내 삶 전체가 드려지길 원합니다.
아멘!
아멘! 할렐루야!
십일조에대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할롈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