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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유토론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하늘208
<삼국사기>에 의하면 계림숲 높은 나무위에 황금 궤짝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 밑에서 흰닭이 울고 있어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렇게 돌연 탄생한 인물이 김알지다.
서기 65년, 계림숲에서 홀연히 등장한 김알지의 금궤는 어디서 온걸까?
신라 김씨 족보에 첫머리에 올라있는 김알지.
유방(劉邦)이 세운 중국 고대 통일국가 한(漢)나라를 복속해 조공을 받던 북방유목제국 흉노. 그러나 한나라의 영주(英主) 한무제에 의해 패하고 와해되고,
그 흉노제국의 태자였던 김일제는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투후 라는 관직을 하사받고 대대를 이어오다가,
중국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신(新)나라의 왕망과 외사촌간인 김일제의 후손 김당(金當). 그러나 신(新)은 건국후 30여년도 안돼 전한의 후손인 유수(劉秀)의 후한(後漢)에 망하게 되니, <후한 말기가 바로 우리가 잘아는 조조,유비가 나오는 중국 삼국시대이다>
왕망의 신(新)건국에 협력했던 흉노계 김씨가들은 생존을 위해 흩어지고(정치적 망명)바로 신라김씨가 되는 김알지,가야의 김수로계가 중국 산둥성(山東省)에서 당시 발달한 해안무역로를 통해 한반도 남해안을 거쳐 김수로계는 지금의 김해로 김알지계는 김해를 거쳐 경주로 들어오게되고,
중국대륙에서 정치적 망명을 한 김알지계는 진한(후의 신라)의 구성원이 되었다가,세력을 키워 박씨계 다음으로 집권한 당시 신라의 석씨(昔氏)왕조를 몰아내고,집권한다(최초 김씨왕 미추왕)
김씨 흉노족의 유입으로 신라의 석씨왕조가 몰살되어 일본열도로 쫓겨나게 되고, 가야세력(변한+마한.김수로 흉노세력)도 결국 신라에 의해 패망하여 일본열도로 ?겨나게 되고, 나당연합군의 협공으로 패망한 백제왕족과 고구려세력들이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재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실체입니다. 일본이란 나라는 일찍 일본열도에 거주하여 정착하고 있던 마한세력과 이후 신라 흉노족과 직접적으로 원한관계에 놓인 가야.백제.고구려세력들로 구성된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중국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백제를 멸하고 다시 한반도에 영토적 야심이 있던 당시 세계최강제국 당(唐)나라를 20여년간의 전쟁끝에 물리친 문무왕은 자신의 조상은 한때 역시 세계최강 중국 한(漢)나라를 복속시켰던 북방 흉노제국의 주인이었고 자신은 그 흉노제국의 마지막 태자였던 김일제(金日?)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문무왕비에 세겨놓았던 것입니다.
김일제-김알지(성한왕)-미추왕-태종무열왕(김춘추)-문무왕(김법민)? |
1. 투후 김일제, 성한왕, 그리고 김알지...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문무왕비문에 '투후'라는 글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투후'라고 하는 것은,
'흉노족의 태자였던 김일제를 위해 만든 한나라의 제후 관직'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투후 김일제'는 중국에서 최초로 김씨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는
신라 김씨 왕족의 뿌리를 밝히는 대목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또 한 명의 낯선 인물, 성한왕(星漢王).
이 성한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헌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어떤 관계일까요?
지금부터 문무왕비문에 암호처럼 적혀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주 대릉원.
우리는 모든 비밀의 출발점, 신라 김씨 왕족의 무덤부터 찾았다.
2008년 9월23일 미추왕릉 추향제.
때마침 김씨 왕족의 무덤에서는 추향대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 후손들이 해마다 가을이면 첫번째 올리는 추향대제.
그 첫번째 대상은 신라 미추왕이다.
미추왕은 신라 김씨 왕족의 역사에서 분기점을 마련한 특별한 존재다.
김씨계에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미추왕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을 시작으로 김씨왕을 열어간 신라 김씨 왕조.
그 뿌리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문문왕비문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분명히 비문에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김씨 왕조의 후손들은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계림세묘.
김씨 왕조의 시조를 모셔둔 사당에는
계림숲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진 '계림대보공(鷄林大輔公) 김알지'의 위패만 있었다.
경주 계림.
김알지(金閼智)는 우리 역사에 나오는 낯익은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계림숲 높은 나무위에 황금 궤짝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 밑에서 흰닭이 울고 있어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렇게 돌연 탄생한 인물이 김알지다.
서기 65년, 계림숲에서 홀연히 등장한 김알지의 금궤는 어디서 온걸까?
신라 김씨 족보에 첫머리에 올라있는 김알지.
알지의 이름위에는 아무도 없다.
"성한왕이라고 하는 (표현이)
문헌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는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어떤 학자든 함부로 이걸 말해서는
박씨네 숭덕전에서도 엄청난 문제가 되고 파장이 될 수 있는 거지.."
- 김병호 숭혜전 참봉
"거, 아까 김누구라 했지요?
(김자 일자 제자입니다)
김일제가 문무왕의 비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날까지 배운 것도 그렇고,
기록을 봐도 그렇고 처음 듣는 소리예요.
그것을 우리가 맞다고 인정해 버린다면,
경주 김씨 내에 큰 혼란이 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없어요."
- 김하규, 미추왕릉 참봉
그 뿌리를 밝힌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이 나온다고 하자
김씨 왕조의 후손들은 더욱 당혹스러워 했다.
2. '투후제천지윤 전칠엽(투후祭天之胤傳七葉)'
문무왕 위패.
누구보다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김씨 왕조의 후손들조차
받아드리기 꺼리는 문무왕비문의 진실은 무엇일까?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
그는 왜 후손들마저 당혹케하는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이란 낯선 인물을 기록해 둔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의혹이 시작된 문무왕비문에 또 다른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비문을 살피던 중 다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투후와 연이어 등장하는 '제천지윤 전칠엽'이었다.
'투후제천지윤 전칠엽(투후祭天之胤傳七葉)'
제천지윤(祭天之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전칠엽(傳七葉), '칠대를 전하였다'는 뜻인데,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걸까?
"'투후'는 김일제 밖에 받은 적 없습니다.
그후에 아무도 '투후'를 받은 적 없죠.
한 무제가 창안한 새로운 관직입니다.
그 식읍의 이름이죠, 오늘날 산둥성이구요.
'투후'와 '제천지윤'은 같은 뜻이거든요.
'제천한 사람의 후손'이란 말이죠.
이것은 글자 그대로 뚜렷하게
'우리는 투후의 후손이다, 즉 제천지윤이다', 이 뜻입니다."
- 김병모 원장, 고려문화재연구원 인류학 박사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7대를 전하여 이어졌다는 것일까?
"투후제천지윤(투후祭天之胤),
투후의,
하늘에 제사 지내는,
그 다음에 전칠엽(傳七葉),
'엽(葉)'은 '잎'이란 뜻도 있지만,
여기선 '세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 7대를 전해 왔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우리는 비로소 투후와 성한왕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투후가 나오는 글자와 성한왕 사이에는
판독이 불가능한 두세글자 밖에 없다.
복원한 비문을 다시 확인해보자.
"투후祭天之胤 傳七葉以( )
( )( )焉 十五代祖星漢王"
:투후제천지윤 전칠엽이( )
( )( )언 제15대성한왕
비문의 흐름으로는
성한왕을 투후의 7대손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문무왕릉비에 보면
분명히 신라 김씨들이
흉노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겼던
그런 조상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그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죠"
- 최병현 교수, 숭실대 사학과
우리보다 200년이나 앞서 이를 고민한 유득공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투후제천지윤 전칠엽 운운하는데...
그 아래 위 문장의 뜻을 보면 세대수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신라 김씨는 김일제의 김씨가 아니겠는가?"
놀랍게도 문무왕비는
신라 김씨 왕조의 뿌리가
'흉노 김일제'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흉노! 흉악한 북방의 오랑캐?
"투후 김일제(金日제),
이것은 비문에 사용하는 단순한 수식 용어는 아닐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당혹스런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는 것은
적어도 '통일신라 사람들은 당시에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흉노족이라고 하면,
'한족에 의해 몰락 당한 북방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흉노(凶奴)'라는 글자는
'오랑캐 흉'에 '노예노'자까지 써서,
'흉악한 북방 오랑캐'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문무왕비문은 이러한 흉노족이 자신들의 선조라고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아 중국의 최북단 내몽골자치구로 찾아갔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바야노얼시 남서쪽 110킬로 지점.
흉노의 활동 무대로 알려져 있는 음산산맥 협곡.
우린 이곳에서 양떼를 먹일 풀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던 흉노족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깍아지른 암벽에 바위그림이 새겨져 있다.
내몽고 음산암각화 지구.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을 무대로 살아온 흉노족이 남긴 바위그림이다.
이 지역 암각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말을 타고 달리는 흉노인의 모습'이었다.
바위그림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흉노족은
말위에서 태어나 말위에서 생활하며 달렸던 북방 유목민족이다.
변방의 유목민에 불과했던 흉노족이
중국 본토를 위협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다.
산서성 대동시 북쪽 30킬로 지점
산서성 대동시 외곽에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나라때 쌓은 만리장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제때부터 쌓은 만리장성도
흉노를 막지는 못하였다.
중국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입구 백등산 자락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중국 역사상 가장 쓰라린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기원전 200년,
흉노의 위협에 시달리던 한나라 고조유방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유방의 군대는
40만 기병을 앞세우고 만리장성을 넘어온
묵돌 선우의 흉노족에게 포위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백등산 전유지
백등산 정산으로 밀려난 유방은
결국 흉노 선우에게 화친을 애걸한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북방 오랑캐라 부르던 흉노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우리는 사마천이 쓴 '흉노열전'에서
유방이 맺은 화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흉노 선우에게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조공을 바친다는 굴욕적인 내용이었다.
"공주를 (흉노) 선우의 왕비로 삼다."
왕소군 묘 - 내몽골자치주 호화호특시
내몽골자치주 왕소군 무덤도
흉노가 단순한 오랑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4대 미인 중에 한 명인 왕소군은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간 한나라 황실 여자다.
왕소군의 빼어난 미소에 반한 흉노 선우는
한나라와의 싸움을 멈췄다고 한다.
내몽골자치구 박물관 - 호화호특시
그런데 내몽골자치구 박물관을 둘러보던 우리는
예상치못한 낯익은 유물을 만났다.
단숨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청동솥.
흉노 오르도스형 동복.
내몽골 흉노 오르도스족이
말을 타고 싣고 다니던 사용했던 동복이다.
순간 한반도에서 출토된 동복이 떠올랐다.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출토된 동복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머나먼 흉노 오르도스족이 사용한 동복이 어떻게 한반도 남단까지 온 것일까?
우리는 몽골공화국 국립박물관에서도
김해 대성동고분과 같은 동복을 다시 만났다.
몽골 노인울라의 흉노 지배층 두덤에서 발굴된 동복이다.
물과 풀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흉노족은
말등에 항상 동복을 달고 다녔다고 한다.
동복은 중앙아시아를 누비던 대제국 흉노의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동복이 출토된 지역은 김해 대성동고분만이 아니다.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
신라인들이 빚은 신라 무사의 말등에 실린 것도
흉노족의 동복과 비슷하다.
"이제까지는 간과해왔던 인물의 말등의 그것,
물을 따르거나 담는 단지 같은 그것이,
미세한 장식이 좀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그것이 바로 동북아시아 유목민족의 필수품인 동복으로 해석하면,
이것이 스키토 시베리아문화의 일환으로써
우리나라에 흘려 들어온 문화의 아주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 민병훈 박사,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 부장
그렇다면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의 핏줄에 흉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동복이 흉노 추장에서 흉노 추장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동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수장이 살았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신라 김씨가 흉노와 직접 연결되었다'고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 김병모 원장, 고려문화재연구원, 인류학 박사
4. 투후의 땅 '금성'!~
신라의 수도 '금성'!~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이 기마인물형토기를 보면
말잔등에 동복, 청동으로 만든 솥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 동복은 세계 고고학계에서 흉노족의 상징으로 통하는 것인데요,
한때 흉노족은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며
중국 한나라로부터 조공까지 받았던
대제국을 형성했던 민족입니다.
어쩌면 이 신라 왕족의 무덤에서 발굴된 '기마인물형토기'는,
신라 김씨 왕족이
한나라로부터 조공까지 받았던
대제국 흉노족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로 건너오게 된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로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땅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김일제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우리는 뜻밖의 정보를 입수하고 산동성으로 향했다.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에
투후 김일제의 유적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중국의 여느 농촌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원래는 김일제가 한 무제로부터 하사받은 투후땅이다.
고투성유적지(古투城遺跡址)
성무현 입구에 세워진 투성유적지 비문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이곳이 투후 김일제의 땅이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김일제의 유적으로 남아있는 투성유적이
우리의 수수께끼를 풀어줄지도 모른다.
하택시 고대문명연구회장이 우릴 어느 숲으로 인도했다.
성무현을 에워싸고 있는 숲이었다.
숲 바닥에는 곳곳에 벽돌과 기와편이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 파놓은 구덩이마다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벽돌이 나왔다.
"풀을 섞어서 저으면 이런 모양의 벽돌이 됩니다.
이것은 한대의 특징입니다.
(당시에 투후국은 다 지하에 묻혀 있습니까?)
이 지역 유적지들을 봤을 때는
지하 3미터에서 4미터에 있어요.
여기 지대가 비교적 높기 때문에
보통 3미터 밑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럼 다 지하에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판지엔룽 회장, 산동성 하? 고대문명연구회
황하강의 범람으로 투후족의 유적은 다 지하에 매몰되었지만
그들은 지금도 이곳에서 김일제를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건 매년 여기 백성들이
김일제를 기념하여 만든 것입니다.
여기 백성들은 '투성(투국의 성)'이라 하지 않고
'금성(金城)', 김일제의 김을 따서 '금성'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금성'이라 하고
우리 관리부에서는 '투성'이라고 말하지요."
- 판지엔룽 회장, 산동성 하? 고대문명연구회
금성(金城).
김일제의 성을 따서 지금도 금성이라고 부른다는 놀라운 증언.
우리는 순간적으로 신라의 수도도 '금성'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국의 금성'과 '신라의 왕도, 금성'.
수천 킬로나 떨어진 두 지역의 이름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걸까?
"원래 이곳에 휴도성(김일제의 고향인)에서 살던 흉노인 5만 명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사기>에는 5만 명이라고 적혀 있고,
<한서(漢書)>에는 3만 명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최소 2~3만 명이
김일제를 따라서 이 지역에 왔을 겁니다.
2~3만 명의 흉노족이
이곳 투후의 땅에 와서
현지의 한족들과 어우러져 함께 '투국'을 세웠습니다."
- 판지엔룽 회장, 산동성 하? 고대문명연구회
현재는 숲으로 바뀐 이곳에
김일제의 금성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86년.
3만여 명의 흉노족이 뿌리를 내리면서 이곳은
김일제의 흉노족이 생활문화를 정착 시킨 그들의 왕국이었다고 한다.
5. 왕망의 신(新) 패망!~
"김일제 후손들은 떠나야 했다!~"
만약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로 이주했다면 왜 그들은 투국을 떠난 것일까?
<한서>에는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까지 투후가 이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 전한과 후한을 가르는 대격변이 일어났던 시기.
갑자기 투후 김일제가(家)가 중국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김일제 가문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왕망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웠다가 패망한 직후다.
우리는 <한서>에서 놀라운 기록을 찾았다.
"김당(김일제 증손자)의 어머니는
왕망(王莽)의 어머니와 친자매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왕망이
김당과 이종사촌지간이었던 것이다.
"왕망이 패망하고 난 뒤 투후도 끊겼다"
(王莽敗 絶- 왕망패 절)
- <한서 공신표> '투후 조'
'왕망이 패하고 투후도 끊겼다'는 것을 볼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엄청난 회오리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왕망이 패한 뒤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의 숙청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딘가로 피신한걸까?
김씨조당
우리는 최근에야 다시 세웠다는 김씨사당을 찾았다.
왕망의 난 실패 이후
뿔뿔히 흩어졌던 김씨 자손들은 자신들의 성까지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김씨종보(金氏宗譜)
몇 년전부터 뿌리를 찾기 위해
뜻있는 김씨의 후손들이 모여 다시 작성한 흉노족 김씨족보.
이들의 족보에도 왕망의 쿠데타 사건이 잘 나타나 있다.
"왕망의 왕위찬탈로 인하여 산동으로 거처를 옮김"
왕망의 난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김일제의 후손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격변의 시기, 그들의 최종 은신처는 어디였을까?
"왕망의 편에 섰던 김씨 후손들은 유수(후한 황제)의 복수를 두려워 했습니다.
특히 왕망과 김당은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김씨 후손들 일부가 조선 반도로 도피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 위에칭핑 교수, 북경대 역사학과
왕망의 패망과 함께
산둥성의 투국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흉노 일족의 안전을 위해
또 다시 이동해야만 했다.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 발기는 서기 65년입니다.
가야 김씨 왕조의 시조 김수로, 발기는 서기 42년입니다.
그런데 김일제의 마지막 후손, 7대손이 중국에서 사라진 때는
왕망이 죽은 해인 서기 23년입니다."
- 김병모 원장
6. '화천(貨泉)' 의 발굴!
- 김일제 후손들, 해상교역로 따라 김해, 경주로!~
요녕성박물관
우리는 중국의 화폐를 전시하는 요녕성박물관에서 새로운 단서를 찾았다.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화천'이라는 동전이었다.
몸통에 화천(貨泉)이라고 찍힌 동전.
이는 왕망시대, 21년 동안만 만들어진 화폐다.
그래서 화천은 출토 유물의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도 바로 그 화천이 출토되었다.
전남문화재연구원.
우리가 전남문화재연구원 수장고에서 확인한 것은
분명히 왕망의 화천이다.
뚜렷하게 남아있는 '화천'이라는 글자,
영산강 유역 나주 낭동지역에서 발굴 유물이다.
김해 봉황동 패총.
왕망시대의 화천은
고대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김해에서도 발견되었다.
가야왕국의 조개무지 유적에서도 화천이 발견된 것이다.
나주, 해남, 제주, 김해에서 화천 발견.
짧은 시기 사용한 화천이 발견된 것은
그 시기 사람들이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우린 중국의 기록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당시 중국은
김해를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고 일컫는데,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 항로상에
'구야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일본을 오가는 해상항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그 중간 기착지가 경주와 가까운 김해(구야한국)였다는 것이다.
"가락국은 해상왕국이었다.
중국과 물물교환의 단계를 넘어 화폐경제 단계로 들어갔어요.
즉, 중국에서 사라진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 남쪽에 당시 자기들의 무역 거점이었던 김해,
옛날 이름 가락국에 충분히 와서 살았을 수 있죠."
- 김병모 원장
만약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로 건너왔다면
김해를 거쳐 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김해 가락국도
역시 김수로왕이 세운 김씨 왕조였다.
그렇다면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김알지 세력은
김해를 거쳐 신라에 정착한 이주세력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왕망시대 제조된 돈, 화천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나주, 제주, 김해 등 당시 중국에서 한반도를 오가는 주요 기착지입니다.
왕망의 패망과 함께 김일제의 후손들이
아마도 이 해로상의 지역을 통해 신라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지는데요,
그동안 신라에서 나온 유물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나온 유물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나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라가 이주세력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7. 이주민이 세운 나라 신라!~
금, 적석목곽분, 언어, 하늘, 알...
신라의 독특한 문화는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 발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973년 황남대총의 지하세계가 열렸을 때
발굴단은 큰충격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없던 유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곡옥이 달린 화려한 금관이 수습되는 순간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신라 금관 중에서도 가장 장식이 많은 화려한 금관이었던 것이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발굴단이 손길이 닿는 곳마다 금제품이 수습되는 그야말로 '황금무덤'이었다.
화려한 황금 못지않게 발굴단을 놀라게 한 것은 무덤의 구조다.
무덤안 바닥부터 벽까지 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덤 구덩이를 판 다음 목곽을 설치하고,
그 아래 돌을 깐 뒤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과 부장품을 넣은 궤짝을 놓고,
그 위로 다시 돌을 쌓고,
그 위로 다시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사실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은
경주 일대만 존재합니다.
유사한 무덤은 경상북도, 원신라에서 약간씩 보이지만
아주 똑같은 적석목곽분은 경주에서만 보이죠."
- 최병현 교수
쏟아져나온 화려한 황금 유물과 무덤 양식까지
흉노 지배층의 무덤과 유사하다.
신라 무덤 중에서도 황금 유물이 나온 것은 김씨 왕족의 무덤뿐이다.
신라 김씨 왕족의 무덤은 황금으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신라 김씨 왕족의 황금 문화는 인접한 백제나 고구려와 너무도 다르다.
"유목민족은 재산을 전부 금으로 합니다.
이동하기때문에 전부 말에 싣고 다닙니다.
따라서 금을 숭상하는 민족은 전부 유목민족입니다.
농경민족은 금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정착해서 살기때문에.
중국은 농경민족이거든요, 그래서 황실에선 옥을 숭상했고,
백제도 금을 숭상하지 않았어요.
신라만 그랬거든요."
- 문경현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
그렇다면 신라의 황금문화는 신라로 이동해온 흉노의 흔적이 아닐까?
서기 200년대 씌여진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
여기엔 신라의 노인들이 스스로 중국에서 이주해 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망한 나라의 유민들이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
"한반도로 와서,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떼어줘서 살게 하였다고 했어요.
마한은 지금 충청도, 전라도 일대 아닙니까?
그 동쪽 땅이니까 경상도 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 당시 기록에 써 있으니 가장 신빙성 있는 내용입니다."
- 김병모 원장
더 놀라운 기록도 있다.
신라 땅에 사람들은
심지어 마한, 즉 백제 사람들과는 언어까지 달랐다고 한다.
"그 언어가 마한과 달랐다."
신라가 이주 세력이 세운 나라임을 말해주는 단서는
그 뿐만이 아니다.
경주 나정.
역사 기록엔 고구려와 백제는 그 뿌리가 분명히 밝혀져 있지만
신라의 시조는 어디서 왔는지 모호하게 남겨두고 있다.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세력들,
특히 초기에 왕을 배출했던 세력들은
박혁거세 후손하고, 석탈해 후손, 그리고 김알지의 후손 등 이 세 세력인데,
그 중에 탈해의 경우에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중국 배들이 오가는 물길, 수로를 따라서 경주까지 온 걸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이주민이었죠.
그 다음에 혁거세나 알지는 이주민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라든지,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라든지,
하늘이라는 곳,
'어딘가 다른 곳에서 신라로 이주해 온 이주민'이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죠.
그 이주민들이 세력을 키워
신라의 왕이 되고,
또 세 세력이 동맹을 맺어
왕위를 장악했던 걸로 볼 수 있겠습니다."
- 이종욱 교수, 서강대 사학과
흉노의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신라는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던 것이다.
8. 문무왕 15대조 세한 = 성한왕 = 김알지?
"신라의 문화와 풍속은 북방 기마민족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불렀다고 하는데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황금을 흉노족의 상징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라가 있었던 진한 지역은
이웃한 마한의 백제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달랐다고 합니다.
바로 이주한 세력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를 세운 이주민의 대표였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문무왕비문의 성한왕이 이주세력의 대표는 아니었을까요?
우린 과연 성한왕이 누구인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경주 숭혜전.
먼저 문무왕의 15대조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1대, 2대, 3대...15대 세한, 세자 한자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족보상으로
문무왕의 15대조에 나오는 인물은 '세한'이다.
'세한(勢漢)'은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지만,
<삼국사기>에도 실려있는 '김알지의 아들'이다.
"세한이 성한왕으로 추정이 되거든요.
왜냐면 '세(勢)'란 게 '성'이란 글자하고 같이 쓰이거든요.
'별성', '신성성'자로 쓰이는데,
당시 음이 '세'입니다.
세한 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가계도 하고,
문무왕비문의 성한하고 일치가 됩니다.
그래서 세한은 성한왕으로 보고,
알지는 시조로 올리기 위해서 하나 세운 것으로 봅니다."
- 문경현 명예교수
흥덕왕의 비문도 시조를 정확히 적어두고 있다.
태조 성한왕이 24대조로 나온다.
흥덕왕의 24대조에 해당하는 인물 역시 세한이다.
그렇다면 김씨 왕조는 왜 김알지를 신라 시조라고 한 걸까?
우리는 김알지의 신화와 비문에서
성한왕을 분석하던 중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성한왕의 등장이
김알지의 등장과 비슷하다.
문무왕비문 김알지
원궁(圓穹) 하늘 천(天)
상림(祥林) 수풀 시림(始林)
금여(金輿) 출현 금궤(金櫃)
<삼국사기>의 김알지는 시림의 금궤속에서 나온다.
비문에서 성한왕은 상림에서 금여, 즉 금수레를 타고 나온다.
"성한왕이 원궁, 즉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림이라는 성스러운 숲이 나옵니다.
그리고 금여라는 금수레에 좌정했다, 앉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양 설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성한왕이 김알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 이도학 교수, 한국전통문화학교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비문의 성한왕은 오히려 김알지에 가깝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가 문무왕비문을 해독해놓은
<해동비고(海東碑攷)>를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보다 200년전에 비문을 연구한 추사도
성한왕이 누군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추사선생님은 본인도 경주 김씨로, 사실은 김알지의 후손이잖습니까?
따라서 비문에서 성한왕이 누구냐는 것은 추사선생님께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박철상, 고문헌연구가
그런데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는
문무왕비문속에 성한왕은 김알지라고 결론지었다.
"성한왕은 김씨 시조인 김알지이다."
성한왕이 김알지라면,
돌연 등장한 김알지의 금궤는,
머나먼 중국땅에서 신라로 이주해온 투후 김일제의 후손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박혁거세로부터 이어온 신라의 정통성마저 부정하고
어쩌면 김알지일수도 있는 성한왕과 투후 김일제를 내세운 걸까?
혹시 미약한 세력으로 출발한 신라 김씨의 긴 여정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9. 삼국통일, 새로운 역사를 비문에 새기다!
"김씨 왕족의 피속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
신라 김씨는
문무왕때 이르러 비로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
660 백제 멸망
668 고구려 멸망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문무왕은 7년 동안 당나라와 싸워야 했다.
대당전쟁은 민족의 생존을 건 치열한 전투였다.
676 대당전쟁 승리
비문이 세워지기 6년전인,
676년에 신라는 당나라 대군 20만을 물리쳤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 왕족이
한반도 중심에 우뚝 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기록이다.
신라 김씨 왕족은
대당전쟁에서 승리한 자부심을 담아
한반도에 건설한 신라 김씨 왕족의 역사를 비문속에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 대당전쟁에서 호국의지를 담았던 사천왕사에 문무왕비문을 세우고
신라의 피속에 흉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밝힌 것이 아닐까?
"문무왕비문은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신라 김씨 왕족들의 당대 공식 기록입니다.
아직까지 풀어야 할 과제는 많습니다만 지금까지 추적한 결과를 종합해보면
신라 김씨 왕족은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렇다면 이주세력으로 시작해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당나라까지 물리친 신라 왕족의 피속에
흉노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속에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문무왕비문은
우리 역사를 스스로 한반도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는,
민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1,300년전 문무왕비문은 오늘 우리 앞에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린 누구일까?"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30대왕 金法敏, 즉 文武王의 陵碑 파편 하나가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그 전 조선 正祖 때인 1796년에도 陵碑 파편 두 개가 발견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拓本(탁본)은 淸의 금석학자 劉喜海에게 들어가 「海東金石苑」에 실렸다. 이 碑文(비문)은 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하였고,
중국의 경전이나 古事成語(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여구가 많이 들어 있다.
이 碑의 건립연대에 대하여는 문무왕이 죽은 서기 681년이거나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일부의 파편만 발견된 상태에서 파악이 어려우나,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新羅金氏의 내력,
太宗武烈王과 文武王의 治績,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碑銘 등이 적혀 있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의 屍身(시신)은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한 뒤 동해에 散骨(산골)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四天王寺(사천왕사) 근방에 擬陵(의릉·가짜 무덤)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창건한 이 절에 陵碑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 중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능)枝가 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侯 祭天之胤(투후 제천지륜)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下略)>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侯 祭天之胤傳七葉」이다. 侯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휴도)의 아들 金日(김일제)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金日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人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 스스로가 우리 조상은 匈奴人 金日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金日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 있고 中國 西安에는 金日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金日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흉노 제국의 황제인 單于(선우) 아래는 여러 왕들이 있었다. 혼야왕과 休屠王(휴도왕)이 다스리던 곳은 옛 秦나라 땅 지금의 甘肅省 草原이었다. 河西走廊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거쳐야 西域(중앙아시아)으로 갈 수 있었다. 漢武帝는 흉노가 장악하고 있던 이곳을 차지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열고 서방과 무역을 할 이유가 있었다.
漢書에 따르면 기원 전 121년 漢武帝의 명을 받은 청년장교 곽거병이 초원으로 쳐들어온다. 흉노 군대는 패배를 거듭한다. 곤야왕은 흉노제국의 황제인 單于로부터 문책을 당할까봐 두려워 休屠王을 꾀어 항복하자고 한다.
휴도왕이 거부하자 그를 죽인 혼야왕은 곽거병에게 항복하는데 휴도왕의 부인 閼氏(注-알타이=금을 뜻하는 閼智와 같다)와 아들 金日, 그의 동생 侖은 끌려와서 곽거병의 포로가 되어 漢武帝에게 인계된다.
漢武帝는 그때까지 姓이 없던 金日에게 姓을 내리는데 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한(祭天) 집안 출신이라고 하여 金氏라고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하여 金秉模 한양大 인류학과 교수는 좀 다른 견해이다.
그는 金人이란 「알타이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알타이가 고향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책임진 일종의 샤먼王 집안 출신이므로 알타이의 의미를 따서 金氏 성을 주었다는 것이다.
漢武帝의 경호실장이 된 金日石單
1998년 중국의 언론은 甘肅省과 山西省에 살고 있는 金氏들이 흉노족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문무왕이 金日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스스로 碑文에서 밝혔다면, 경주지방까지 金日의 후손들이 들어왔던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漢武帝는 소년 金日에게 말을 먹이는 일을 맡겼다. 당시 흉노와 싸우던 漢제국의 고민은 흉노와 대항할 수 있는 기병용 말을 기르는 일이었다. 잔칫날 漢武帝는 황실에서 사육하던 말들을 검열했는데 소년 金日의 말이 훌륭하고 소년의 얼굴 또한 준수했으므로 그를 중하게 쓰기 시작했다.
金日는 한무제의 수행 경호원이 되었다. 로마, 오스만 터키, 바티칸의 예를 보면 권력자의 경호부대를 외국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은 반역을 함께 도모할 패거리가 없으므로 권력자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金日는 한무제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암살기도를 현장에서 좌절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金日에게 주어 아내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궁중에선 『황제께서 망령이 들어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漢書를 읽어 보면 金日는 남자답고 아주 청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草原의 흉노를 무력으로 누른 漢族 황제인 한무제는 나들이를 나갔다가 병이 들어 죽을 때 金日를 포로로 데리고 왔던 곽거병(당시는 사망)의 동생 곽光(곽광)과 金日를 불렀다. 漢書 列傳에 적힌 대화이다.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에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후사가 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대는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金日보다 못합니다』
金日도 또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이요 곽광보다 못합니다』
황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金日를 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遺詔를 내렸다. 그 전에 병이 들자 한무제는 詔書(조서)를 봉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거든 글을 열어 보고 그대로 따라 시행하라』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金日를 侯(투후), 상관걸을 安陽侯, 곽광을 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金日는 새로 즉위한 임금 昭帝(소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昭帝의 즉위 1년 뒤 金日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金日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印綬(인수)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金日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金日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봉을 뜯고 열어 보니 한무제는 金日를 侯(투후), 상관걸을 安陽侯, 곽광을 博陸侯에 봉하라고 써두었다. 이는 그 몇년 전 한무제에 대한 반역음모를 분쇄한 공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의 비문에 나오는 侯(는 金日에게 주어진 영지의 지명이고, 侯는 王, 公 다음 가는 귀족 등급이다)라는 작위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金日는 새로 즉위한 임금 昭帝(소제)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侯의 직위를 사양했다. 昭帝의 즉위 1년 뒤 金日는 앓아누웠다. 곽광은 임금께 건의하여 金日는 죽기 전에 드러누워서 侯의 印綬(인수)를 받았다. 황실의 실력자인 곽광과 金日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金日가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들이 7대에 걸쳐 漢의 황실에서 중용되었다.
金日石單의 후손이 金閼智?
한편 곽광은 한무제를 이은 昭帝 시절엔 황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곽광은 昭帝가 죽자 다음 황제로 昌邑王을 맞아들였으나 음란한 일만 하자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가 새로 맞아들인 宣帝는 곽광이 황궁에 나타나면 용모를 가다듬는 등 조심하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곽광은 專權을 휘두른 지 20년이 되는 宣帝 6년에 죽었다.
당시 宣帝의 황후는 곽광의 딸이었다. 곽광이 죽자 이제 그의 非行이 터져나왔다. 곽광의 아내가 宣帝의 첫 번째 황후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앉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흉노人 金日의 동생 아들 金安上은 여전히 宣帝의 신임을 받으면서 황실의 요직에 앉아 있었다. 金安上은 큰아버지의 친구였던 곽광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있었다. 상황이 곽광 일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이혼해 버렸다.
宣帝는 마침내 곽광의 아내·아들 등 일족을 도륙해 버린다. 처형한 시체를 거리에 버렸는데 수천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농단한 權臣이 죽거나 실각하면 그 일족이 권력남용의 代價를 치르는 것은 동양정치사의 한 공식이기도 하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金日의 후손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번성했다.
그들이 匈奴人이므로 漢族 사이에 권력기반이 없어 오로지 황제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로로 붙들려온 흉노人 출신의 이런 성공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가진 인간성 덕분일 것이다.
金日 후손의 운명은 王莽(왕망)과의 인연으로 急轉(급전)한다. 王莽은 元帝의 황후 王氏 가문 출신이었다. 왕망은 또 金日의 증손자 當의 이모부였다. 王莽은 어린 황제를 독살하는 등 專橫(전횡)을 하다가 서기 8년에 漢을 멸망시키고 新을 세우면서 황제가 되었다. 王莽이 황제가 되자 외가인 金日 家門은 득세한다.
王莽의 新은 그러나 15년 만에 망하고 後漢이 다시 선다. 王莽 일가는 물론 金日 가문도 滅門之禍(멸문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金日의 후손들이 요서, 요동, 한반도, 일본 규슈, 오키나와로까지 도망갔고 그 일파가 경주로 들어온 金閼智라는 과감한 추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발견되는 王莽 시대의 五銖錢(오수전)을 들어서 王莽 세력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三國志 東夷傳에 실린 「辰韓의 秦人」은 바로 秦나라 출신 金日 후손들이 경주지역으로 도망쳐 온 사건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金日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문무왕은 慕華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그가 정말 慕華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漢에 반역했다가 도륙당한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볼 때
『나는 흉노人 金日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新羅金氏는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新羅金氏의 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新羅金氏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