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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강원 무비스님의 증도가 강의(6)
『증도가』 오늘은
降龍鉢解虎錫으로
(항용발해호석으로)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호랑이의 싸움을 말린 석장으로
항용발해호석(降龍鉢解虎錫) 거기부터 할 차례지요. 우리가 일상에 쓰고 있는 이 발우도 아주 전통 있고, 의미가 있고 상징성이 있는 그런 발우다 그런 뜻입니다.
또 해호석(解虎錫)이라고 하는 석(錫)은 이제 스님들이 행각할 때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하는 거죠.
그 지팡이, 발우대를 지니고, 지팡이를 짚고 하는 그 지팡이 또한 상당히 의미 있고, 어떤 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지팡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가 밥 받아먹는 발우지만은 이것은 이승이나 외도를 그리고 이교도, 다른 사상, 다른 종교, 우리 부처님의 정법과 다른 모든 사상과 주의 주장들을 전부 항복시킬 수 있는 그런 밥그릇이다 이 뜻입니다.
‘용을 항복 받았다’라고 하는 말은 용을 신앙하는 그런 종교단체 사람들을 제도하는 과정에서 용을, 화룡(火龍)이죠 그것도, 불을 뿜는 용을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발우대에다 집어넣어서 조그만한 벌레가 되도록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어떤 법력을 방편으로, 보여줘서 그 용을 신앙하는 이교도들을 전부 제도를 했다 하는 그런 뜻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단순하게 식사만을 위한 그런 발우대로 알면 안된다 이 뜻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발우대에 밥을 받아먹는 것도 또한 외도나 이승이나 또는 부처님의 정법과 거리가 있는 그런 모든 주의 주장이나 사상가들을 전부 제도해서 정법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그런 발우대고 또 그를 위해서 우리가 발우대에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다, 이렇게 까지 의미 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장자를 짚고 다니는 것도 이 주장자는 그냥 주장자가 아니라 모든 시시비비를 전부 풀어주고, 또 날리고, 또 이해시키고 하는 그런 주장자다 그래요.
그래서 이건 이제 유래가, ‘호랑이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주장자로써 그 싸움을 말렸다’ 하는 그런 데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호랑이의 싸움을 풀어준 그런 주장자다’ 글을 새기자면 그렇죠.
그런데 이것은 시시비비의 논란을 말하자면 없애는 전부 그것을 풀어주는 『장자』와 같은 데서는 제물론(齊物論) 그래요. 물론(物論)을 가지런히 한다.
모든 사물에 대한 어떤 그 입장과 주의주장을 전부 동일하게 해준다, 이런 뜻으로 이제 가지런할 제(齊)자를 쓰지만 이런 데는 이제 싸움을 말린다, 또 풀어준다 하는 그런 뜻으로 해(解)자를 쓰고 그래요.
주장자를 짚고 다니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 이겁니다.
그래 이게 이제 수행자가 발우대에 밥을 먹고 주장자를 짚고 행각을 하는 데는 그런 큰 의미를 가지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 주장자를 볼 것 같으면
兩鈷金鐶鳴歷歷은
(양고금환명역력은)
두 고리에 달린 여섯 고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은
양고금환명역력(兩鈷金鐶鳴歷歷)이죠, 양고, 두개의 고리가 있고 그 고리 하나에 세 개씩 또 작은 고리가 있어요.
주장자가 이렇게 있다면은 거기에 양쪽에 이거 다리미 고(鈷)자인데 다리미처럼 생긴 고리가 큰 고리가 이렇게 양쪽으로 이렇게 내려와 가지고, 고 양쪽 고리에서 또 세 개가 요렇게 있어, 그럼 그게 이제 여섯 개가 되니까 보살행 육바라밀을 말하는 거죠.
그 두 개는 뭐냐 하면은 진제 속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주장자 중심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면 양쪽에 두 개씩 내려오는 것은 진제 속제를 말하는 것이고 세 개씩 세 개씩 붙은 것은 육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를 제대로 만들면은 그렇게 만들어야 돼요.
우리 어릴 때 본 그런 주장자로써는 청담스님께서 항상 주장자를 그런 주장자를 짚고 다녔습니다, 항상.
그래서 그것이 택시에 잘 안들어가 가지고 아주 애를 먹고 그랬어요. 주장자가 또 길어가지고, 키보다 조금 크거든요. 사람 키보다 조금 길게 한다고, 모양은 좋지. 그런데 차를 탈라니까 보통 거추장스러운게 아니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청담스님은 꼭 그 주장자를 짚고 다니셨어. 그리고 항상 가사장삼을 입고, 가사는 꼭 오조가사를, 오조가사를 입어요.
지금도 오조가사를 고집하는 스님들이 간혹 보입니다마는 청담스님은 꼭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건 이제 대승에서 그렇게 육환장(六環杖), 그래서 육환장 그러죠, 고리 환(環)자 육환장을 짚고, 또 이제 소승들은 뭐 실지로 그런 걸 하는지는 몰라도 사고십이환이라 그렇게 이제 만든다 그래요.
양쪽으로 내려온 것이 두 개가 아니라 네 개로 하고 네 개에서 삼사십이 세개씩 세개씩 해서 작은 고리가 열 두개가 되도록 하는 그런 주장자도 있다고 그래요.
그건 이제 무슨 뭐 사성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십이환은 십이인연을 뜻하는 것이다, 그건 이제 성문이나 연각들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다.
그리고 또 육환장은 보살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다, 보살행을 하는 사람의 주장자다 그렇게 이제 하나하나 상징하는 것이 있지요.
우리도 장삼도 보면은 불필요하게 이거 멀쩡한 천을 이렇게 중간에 나눠가지고 이렇게 열 십(十)자를 만들잖아요.
양쪽으로 전부 열 십자가 다 있는 거라, 이거 이제 일부러 잘라서 만들기도 하고 하여튼 이거 열십자를 이렇게 만들어서 쪼가리 내놓은 것 이것도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래 십신은 안들어가는, 보살계위 중에서 십신은 안 넣고 계산하는 경우가 또 많아요. 사십이위나 이런 걸 말할 때는 십주부터 쳐.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그걸 뜻하는 것이라. 이 장삼을 입고 말하자면 그런 그 보살의 지위점차를 하나하나 닦아 올라간다 하는 그런 뜻에서 장삼도 굳이 그렇게 만들고, 또 우리가 가사도 쪼가리를 내서 이렇게 하는 것도 잘 아시다시피 복전을 뜻하잖아요, 복전을.
그와 같이 발우대나 주장자도 그런 의미를 갖는다 하는 것입니다.
두 고리의, 두 개의 등고리에서 쩡쩡울리는 소리여
不是標形虛事持라
(불시표형허사지라)
모양을 나타내자고 헛되이 가진 것이 아니라
불시표형허사지(不是標形虛事持)라, 형상, 폼 잡자고 하는 게아니라 이거야.
폼 잡자고 해서 헛된 일로 가지는 것이 아니다, 형상 갖추자고, 모양새 내자고 헛된 일로 가지는 것이 아니다.
如來寶杖親蹤跡이로다
(여래보장친종적이로다)
여래의 보배 주장자를 친히 본받음이로다
여래보장친종적(如來寶杖親蹤跡)이로다, 여래 보장, 장자가 지팡이 장(杖)자라야 돼요. 나무 목 변에 지팡이 장자.
여래의 보배 지팡이로 친히 보인 종적이로다.
말하자면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온 그런 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뭐 부처님이 그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하자면 그런 그 일상생활 도구에도 부처님의 정신이 스며있다. 이걸 알라고요.
발우대나 주장자나 가사나 장삼 이런 것이 전부 여래의 보배로운 어떤 친히 행하신 그런 종적이다.
그걸 뭐 가지고 다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의 정신, 부처님의 사상,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 속에 스며있다.
그래 그걸 알고 우리는 사용해야 된다는 그런 의미가 있죠.
不求眞不斷妄하라
(불구진부단망하라)
진리도 구하지 말고 망상도 끊지 말라
불구진부단망(不求眞不斷妄)요지이법공무상(了知二法空無相)이라, 그 여래의 진정한 정신, 여래의 진정한 사상이라고 하는 게 뭐냐?
그건 결국 이제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을 가지고 하는 소리인데 부처님의 깨달음을 간간이 뭐, 중점적으로 사실 이야기 하고 있죠.
『신심명』도 그랬지만은 특히 『증도가』도 더욱더 그런거라. 그런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들을 후세인들이 경전을 본 사람이든지, 아니면 뭐 깨달은 사람이든지 간에 각자 취향대로 그것을 이제 말하자면 역설해요.
어떤 그 진심(眞心), 여래장(如來藏)사상이라고 할까, 그 진심 입장으로 역설하는 그런 그 조사스님들이 있는가 하면은 또 여기 저 영가스님의 입장에서 보면 진망(眞妄)을 가지고 역설을 많이 해요, 진망을 가지고.
저 처음에도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閒道人)은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라, 진과 망을 가지고 이야기 했고, 여기도 또 불구진부단망 그랬어요.
또 조금 더 내려가면 사망심 취진리(捨妄心取眞理) 진과 망을 상대로 해서 어떤 중도의 이치를 드러내려고 하는 데, 여기에 주로 영가스님은 초점을 맞췄고, 이것을 주로 역설을 합니다.
경전을 우리가 보더라도 전부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은 똑같애요, 모든 경전, 모든 어록이.
똑같은데 그 경전과 그 어록이 어떤 부분을 역설하느냐,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있느냐, 하는 거, 요건 조금씩 다르죠 색깔이. 그게 다르다고요.
이를테면 뭐 보조스님 『진심즉설』 두고 이야기 하는데 그거는 진심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거야.
그렇다고 영가 『증도가』가 진심을 이야기 안 하는 바는 아니지만 같은 진심을 이야기해도 진과 망을 배제하고 어떤 중도의 경지를 중도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을 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걸 이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 여기 보면 여래보장친종적(如來寶杖親蹤跡)이다,고 해놓고는 여래의 보장이라는 깊은 의미가 뭐냐?
불구진부단망(不求眞不斷妄)이라 이거지
진도 구하지 아니하고 망도 끊지 않는다, 거짓도 끊지를 않는다. 진과 망을 쌍차 쌍조한다 이거예요.
진도 망도 같이 부정도 하고 그것을 같이 긍정도 해야 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해.
그래서 능살, 능활이라 이런 말을 잘 쓰죠 우리 불교에서는.
살린다 죽인다 하는 그 말은,
살린다는 말은 그것을 쌍조, 비춘다 이거예요. 그걸 말하자면 드러내서 활용한다 이 뜻입니다. 진도 활용하고 망도 활용해.
그것을 죽인다 하는 것은 진도 부정하고 망도 부정해버려. 나도 부정하고 너도 부정하고, 주관도 부정하고 객관도 부정해.
그러면서 또 살린다 하는 말은 나도 살리고 상대도 살려, 그래 주관도 살리고 객관도 살려. 주관도 활용하고 객관도 활용해.
활용이라는 말을 우리가 잘 의미 있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다 주관도 객관도 나도 너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을 전부 우리가 인정하고 그것을 활용할 때 이게 좋은 거예요. 그건 이제 쌍조의 경지다 그렇게 이제 이야기 하는데.
대개 보면은 쌍차, 부정적인 입장을 제일 많이 합니다.
제일 그 표현을 많이 해요.
그건 이제 그게 첫째, 부정이 일차 단계이기 때문에 부정을 하게 되면 그다음에 긍정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 우리가 제일 그 저기, 이 현상을 깨달은 안목으로 보고, 깨달은 사람이 본 대로 정리한 낱말이, 제일 간단명료한게 진공묘유예요.
모든 존재는 공이야. 진공이라구요.
그러면서 단순한 공이 아니라 묘유야. 공한 가운데서 묘하게 있는 거야.
또 있으면서 또 공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나 뭐 진공묘유란 말이나 다 이제 같은 의미인데 그러면서도 이제 공한 걸로 보기가 어려운 첫 단계라, 쌍차의 입장이 첫 단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전부 쌍차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부정 쪽으로 나가는 거라.
그래 부정이 일단계이기 때문에 그게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정적인, 부정하는 표현이 긍정하는 표현보다 훨씬 많아요, 몇 배가 많습니다. 그 저기 어록이나 경전을 이렇게 보면은.
『치문』에도 뭐 봤제? 무무 무가 여러 번 반복되는 그런 글이 있죠, 어떤 조사스님 글에.
그래서 부정의 표현이 긍정의 표현보다 훨씬 많다.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이제 보면 됩니다.
여기도 보면은
了知二法空無相이라
(요지이법공무상이라)
두 가지 법이 공하여 형상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았도다
요지이법공무상(了知二法空無相)이라, 두 가지 법이 진과 망이죠, 두 가지 법이 공해서 형상이 없다는 것을 요지한다.
진도 상이 없고, 망도 상이 없어. 너도 상이 없고 나도 상이 없어. 주관도 객관도 눈에 보이는 나나,
나나 나 이외의 모든 삼라만상이나 모두가 무상이다 이거야.
無相無空無不空이여
(무상무공무불공이여)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음이여
무상(無相)이면서 또 무공(無空)이야 공도 아니야,
또 무불공(無不空)이라 공하지 아니함도 없어.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어.
그러니까 이제 중도를 쌍차, 쌍조의 그 이치를 아주 여실히 나타낸 거지. 아주 여실히 아주 간단명료하게 참 잘 나타낸거야.
그러면은 이게 이제 우리가 현상이, 늘 우리가 생각하고 읊조리고 또 논의하고 하는 그런 내용이지만은,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은 이 현상이 그대로 우리의 눈에 비친 그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거야.
공한 것으로 존재한다 이거지.
그러면서도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고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연기의 그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내용은 공한 것이다. 실상은 공한 것이다.
그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참 모습이라는 것은, 제법실상, 제법의 참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공하면서도 있는 것, 있으면서도 공한 것, 이게 제법실상이예요.
그래서 그런 것을 아주 중점적으로 여기서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다 이거예요.
卽是如來眞實相이로다
(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그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즉시여래진실상(卽是如來眞實相)이다.
여래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이치다, 그러한 진리다 이 말이예요. 무슨 절대신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법당에 버티고 앉아있는 그것이 여래가 아니고 존재의 실상, 존재의 실상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 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다. 진실한 모습이다 이거야.
진리로 보는 거죠 부처님을.
대승불교에서나 선불교는 여래라고 하면 그 진리 그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여래(如來)라고 하는 낱말도 여래여거(如來如去)그러지요 여래여거(如來如去).
어떤 아주 존경스럽고 아주 권위로 가득 찬 그런 어떤 그 신격화된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그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리 그 자체다.
그럼 진리 그 자체를 조금 풀어서 이야기 하면 뭐냐?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이다 이거야, 쌍차쌍조다 이거야. 또 한마디로 하면 중도다. 중도다.
그걸 이제 우리 깨달음의 안목으로 척 봐버리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은, 그렇지 못한 우리 입장에 있어서는 그건 어떤 물리학적인 그런 그 이론을 동원을 해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 무엇도, 우리는 뭐 ‘중도 공식’이 뻔하잖아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또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하고 저것이 멸하면 이것이 멸한다’
이게 중도 공식이잖아요.
마치 갈대의 두 단과 같아서, 두 단을 요렇게 갈대를 묶어서 두 단을 이렇게 서로 의지해 놓으면은 서있지만은, 이게 하나를 빼 버리면 상대인 그 단, 마지막 단도 넘어져 버린다 이거야.
그러면 이렇게 세워 놓은 갈대단은, 갈대의 단은 없어진다 이거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의지 했을 때 이렇게 의지한 모습이 존재한다.
이겁니다.
이게 아주 중도 공식의 철칙이예요.
이쪽 오른 쪽 단이 있음으로 왼쪽 단이 있고, 왼쪽 단이 있음으로 오른쪽 단이 있다, 그러면 오른 쪽 단이 넘어지면 왼쪽 단도 넘어진다, 그리고 왼 쪽 단이 넘어지면 오른 쪽 단이 넘어진다.
이게 중도 공식이잖아요.
불교이론에서 여러분들 많이 접했을 줄 압니다만은 이게 중도 공식이거든.
그러면 그 어떤 존재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전부 서로 인과 연에 의해서 결합돼서 어떤 하나의 물질을 이루고 있다.
자동차 그거 우리가 얼른 보면 한덩어리 같지만은 대충 우리가 계산해도 이만 개의 부품이 조립이 돼서 하나의 자동차가 됐잖아요.
또 이 볼펜 하나도 그래. 볼펜 하나도 여러 개의 부품이 이루어져서 비로소 이 하나의 볼펜이 된다.
또 이런 것은 크니까 그렇다 치지만은 제일 그 물질의 최소단위라는 게 근래에 말하자면은 발견된 것이 무슨 뭐 원자니 무슨 중성자니 양자니 분자니 이런 걸 다 거쳐 가지고 지금은 퀴크라고 하는 그것이, 작년에 노벨상을 받은 그 실험에 의해서 비로소 밝혀졌다고 해서 노벨상을 주고 한, 그 퀴크 라고 하는 물질의 최소단위 그것도 홀로 독립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은 두 개 이상 세 개, 네 개의 다른 어떤 그 물질이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두 개의 물질이 결합을 해가지고 두 개 이상의 물질이 결합 해서 물질의 최소단위 그 퀴크라고 하는 물질은 얼마나 작으냐?
머리카락, 머리카락이 있잖아요. 머리카락을 아주 작게 잘라놓고 그것을 1조분으로 나눴을 때, 1조분으로 나눴을 때 그 1조분의 1이 1퀴크예요. 대강 이야기해도 대강.
그보다 더 사실은 더 아주 미세한 것인데 대강 이야기 해도 머리카락 1조분의 1이 1퀴크라고.
그렇게 미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에 의해서, 다른 어떤 그 물질과 함께 의지하고, 해서,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와 같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어. 이 세상에.
그것이 부처님이 꿰뚫어 본 존재의 원리라.
‘존재의 원리’는 말하자면은, ‘공한 것이고 연기에 의해서 우리 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이제 우리 전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건 휑 하게 알아야 돼. 이 공식에 대해서는.
이건 정말 깊이 잠든 사람 두드려 깨워가지고도 중도 공식, 불교의 존재이론이 어떻게 되느냐? 라고 하면은 아주 그거는 거침없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된다고 이게.
이게 이제 깨달은 사람이 인생과 세상을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존재 원리를 분석해 낸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 『반야심경』이니 600부 반야부 경전이 전부 그 얘기고, 지금 뭐 깨달은 분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그 얘기거든. 사실은,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이니 불구진부단망(不求眞不斷妄), 그러니까 진도 구할 수도 없고 망도 구할 수도 없어.
육조스님께서도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선도 없고, 악도 없어, 그러니까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어디에도 치우친 견해는 맞지 않다. 왜냐? 그건 잘못 본 거다, 존재의 실상을 잘못 본 것이기 때문에 바로 봐라, 바로 보면 선도 악도 우리가 논할 수가 없는 입장이다.
그러니까 첫 법문, 육조스님의 첫 법문이 그 도명스님에게 이야기 한 것이 선도 구하지 말고,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모든 법문이요, 그거 하나로 전부 이렇게 꿰어집니다.
그 한 줄로 전부 안 꿰어지는 법문이 없어. 거기에 안 꿰어지면 이건 깨달은 사람의 법문이 아니야.
깨달은 사람은 그 중도 공식에 의해서 이야기 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는 어떤 그 경전과 어떤 어록을 보든지 바로 그 맥락에서 정리하고 또 이해하고 분석해내고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봐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잖아 모든 게.
이게 여래진실상(如來眞實相)이라 했으니까.
존재의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한 그 이치가 여래의 진실상이다. 이건 뭐 이치 입장에선 아주 분명하게 잘 나타낸 말입니다.
스님들로서 불교 이야기를 할 때, 어떤 그 설화 같은 것, 뭐 인과 법문 같은 것, 또 공부하는데 대한 아주 간절함, 간절함 같은 것, 이런 것을 이야기를 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긴 해요.
그렇지만은 이치를 설명하는 게 빠져버리면은 이것은 안 됩니다.
꼭 이치를 설명해야 돼요. 이치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거기에 뒤따라 줘야지.
대개 이제 유명한, 뭐 법문 잘한다 하는 스님들 법문을 가만히 들어 보면은 인기 있는 법문은 대개 보면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이야기, 그런데 알맹이가 또 없어.
너무 이런 이치만 이야기 하면은 또 사람에게 감흥은 또 못 줘. 이런 뭐 너무 이런 이성으로써만이 이제 이해가 가능한 것이지 어떤 감정적인 문제는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것이 조화를 잘 이뤄야 돼, 이성과 감정이 조화를 잘 이루는 것, 이것이 참 어려운 것이기는 한데.
어디 가서 법문을 할 때라든지 강의를 할 때 이런 것들을 감안해 가지고, 너무 그냥 뭐 인과 이야기만 해가지고 재밌게 하고 무슨 또 우습게 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그것도 바람직하지는 못해요.
꼭 그 알맹이, 다시 말해서 이치를 설명해 주는 것, 이게 있어야 돼요.
그런 것들도 우리가 이제 뭐 화엄반들은 포교 일선에 나갈 사람들도 있고, 여러 경우가 많잖아요.
스님들은 아무리 뭐 한달 된 사미라 하더라도 신도들은 전부 프로로 봅니다. 전부 스님들로 보고, 불교 잘 아는 사람들로 보고 수행 잘 된 사람들로 보는 거예요.
이건 뭐 어떻게 할 길이 없어, ‘나는 뭐 초보자입니다’ 그게 안 통한다고.
그러니까 이런 이치를 꿰뚫고 있어야 된다, 이론적으로라도.
그 말입니다.
心鏡明 鑑無碍하야
(심경명감무애하야)
마음의 거울은 밝고 비치는 것이 걸림이 없어서
심경명감무애(心鏡明鑑無碍)확연영철주사계(廓然瑩徹周沙界) 마음 거울이 환히 밝아서 그 살펴보는 것이 비춤이 걸림이 없다. 이 저 깨달은 사람의 어떤 그 마음이죠.
마음 거울이 환히 밝아 가지고서 그걸 비추는데, 그냥 사물을, 존재를 보는 데 환히 꿰뚫어본다 이거야.
투시안 같이, 사물을 투시하고 보는 거지. 그야말로 깨달은 사람의 눈은 투시안이야.
廓然瑩徹周沙界로다
(확연영철주사계로다)
확연히 밝게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하도다
확연영철주사계(廓然瑩徹周沙界)라
확연히 밝게 사무쳐서 어디 한 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천 대천 세계, 황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두루 한다.
두루 다 그 마음의 밝음이 다 통한다 이거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어느 분야는 알고, 어느 분야는 모른다, 어떤 존재는 이게 그렇게 공한 걸로 이해가 되는데 어느 분야는 도대체 그렇게 이해가 안 된다 하면 그건 이제 말이 안 되는 거죠.
물질은 되는데 마음은 안 된다 또는 뭐 마음은 되는데 물질은 안 된다. 그것도 안 맞는 말이라.
물질의 문제든지 마음의 문제든지 색의 문제든지 수상행식의 문제든지 간에 전부 확연영철주사계, 환히 꿰뚫어 봐야, 볼 수 있어야 된다.
萬象森羅影現中이요
(만상삼라영현중이요)
삼라만상이 거울속의 그림자처럼 나타나 있고
만상삼라영현중(萬象森羅影現中)에 일과원광비내외 (一顆圓光非內外)로다
삼라만상을 아주 재밌게 표현 했죠, 만상삼라 이렇게도 이제 표현을 합니다.
만상삼라가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가운데, 홀로그램을 내가 가끔 이야기 하지.
홀로그램이 그림자처럼, 그림자로 나타나 있잖아요. 만져 보면 없다고. 분명히 눈에 환히 보이는데 실재하진 않거든. 그러면서 있다 이거야.
우리가 한 눈 더 뜨고 보면은, 눈앞에 보이는 이런 모든 존재들이, 또 우리가 뭐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뭐 기쁘다슬프다 밉다 곱다 하는 이런 모든 감정들이 전부 그래, 홀로그램에 비치는 그 가상처럼 그렇게 보인다는 거야.
그게 만상삼라영현중(萬象森羅影現中)에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가운데
一顆圓光非內外로다
(일과원광비내외로다)
한 덩어리 원만한 광명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일과원광비내외(一顆圓光非內外)라
그 가운데 그것을 살펴보는 주인공이 있어. 그게 일과원광이야, 한 덩어리의 뚜렷한 그 광명이 안도 밖도 없어.
안도 밖도 없다고 하는 것은 한덩어리의 뚜렷한 광명이라고 하니까 어떤 실재하는 구슬 덩어리처럼 그렇게 착각할까 염려스러운 거지 사실은.
말인즉슨 일과원광이라고 이렇게 했지만은, 한덩어리의 둥근 광명 이렇게 했지만은, 이것은 한덩어리의 둥근 광명이 아니야.
편의상 표현하자니 이렇게 멋있게 표현을 했어도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요 이게, 어떤 물질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비내외(非內外)지, 안도 밖도 없어요 이건. 안도 바깥도 아니야.
이 삼천대천 세계에, 또 삼라만상에 전부 다 스며있어. 전부다 거기에 안 미친 곳이 없는 거라.
그것이 일과원광이라. 우리의 마음이지.
우리의 마음 작용이 그렇게 모든 삼라만상과 삼천대천세계에 꽉 차게 이렇게 비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어떤 실재하는 것으로 존재하진 않는다.
그래 마음이 있느냐? 하면은 있다고 하는 말도 안 맞고, 또 없다고 한 말도 안 맞아.
그러니까 그건 이제, 요런 이제, 내가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바로 중도공식을 가지고 이해 하면은 물질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마음도 그래.
불생불멸의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은 중도공식으로 존재하는 거야. 역시 연기로 존재하는 거야.
연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일과원광(一顆圓光)에 비내외(非內外)라.
이 참, 음미해 볼수록 아주 깊이 있는 그런 그 표현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만히 좀 사유를 해봐야 돼요, 이런 것은.
사유를, 일과원광이, 이 삼라만상이 그림자처럼, 이 삼라만상 우리가 지금 느끼고 보고 듣고 하는 이것 가운데서 우리의 한 마음이 거기에 함께 스며 있으면서 저 서까래도 아니고 또 나도 아니야.
그러면 나면서 서까래고 내 마음이면서 서까래고 내 마음이면서 객관이고, 그렇게 존재하는 거지.
일과원광비내외.
안도 밖도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이. 안이면서 바깥이고 바깥이면서 안이다. 안이라는 것은 나고, 바깥이라는 것은 객관이다 이런 말이죠.
주관도 객관도 아니다, 그러면서 주관도 되고 객관도 된다.
豁達空 撥因果하니
(활달공발인과하니)
아무것도 없이 텅 비워 인과를 부정하니
활달공발인과(豁達空 撥因果)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를 가끔 해가지고서 활달한 공으로 인과를 무시해, 아예 없다, 이렇게 보는 거지 그걸 이제 단견, 단견에 떨어졌다.
아주 없다는 그런 소견에 떨어졌다. 그래서 활달한 공으로 인과를 무시하면
茫茫蕩蕩招殃禍라
(망망탕탕초앙화라)
어둡고 아득하여 재앙을 불러오도다
망망(茫茫)하고 탕탕(蕩蕩)해서 앙화(殃禍)를 불러 온다.
아득하고 아득하다 이거야.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
진공묘유가 돼야 할 텐데. 완공이 돼 버리는 것이지.
완악한 공. 아주 굳어진 공으로 그렇게, 그런 존재는 없어요. 그런 존재는 없다고.
그런데 우리가 의식이 잘 못 돼 가지고, 우리가 이해가 잘 못 돼 가지고, 망망 탕탕한 그런 공으로, 활달한 공으로, 텅 비어버린,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공으로 그렇게 오해를 한다 이거예요. 그러면은 앙화를 불러온다고요.
棄有着空病亦然이니
(기유착공병역연이니)
있음을 버리고 없는데 집착하면 그 병도 또한 같으니
기유착공병역연(棄有着空病亦然) 환여피익이투화(還如避溺而投火)라
유를 버리고 공에 집착하는 것, 그것도 병역, 유에 집착하는 것하고 똑같다. 병역연이요, 또한 그러하다.
있다고 하는 데 집착하는 것이나, 없다고 하는 데 집착하는 것이나 집착하기로 하면 똑같다 이거야.
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있는 데 집착하느냐? 왜 없는 데 집착하느냐?
표현이 이중 삼중 뭐 사중 오중 아주 중중첩첩으로 이렇게 존재의 실상을 아주 극명하게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유착공병역연(棄有着空病亦然)이라.
없다는 것, 일단은 우리가 점령해야 할 고지야. 없다고 보는 것.
그럼에도 거기에 집착하면 유에 집착하는 거하고 똑같다.
나에 집착하는 것은, 남에게 대상에게 집착하는 거하고 똑같다. 대상에 집착하나 나에 집착하나 똑같은 병이다 이거야.
還如避溺而投火라
(환여피익이투화라)
물 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환여피익이투화(還如避溺而投火)라 비유컨대 마치 물에 빠지는 것을 피해 가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하고 똑 같다
그거 어리석은 짓이다 이게.
물에 안 빠져 죽을라고 불 속에 들어가면 안 죽나? 더 뜨겁지. 그거 죽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유에도 집착하지 말고, 무에도 집착하지 마라.
그러니까 속제(俗諦)라고 하는 것, 우리 세속적인 그 안목은 ‘있다’고 하는데 아직은 다 머물러 있죠.
그런데 거기서 이제 한 걸음 나아가면 ‘없다’고 하는 것을 이제 알아야 되는데, 없다고 하는데 나아가서 없는 데 없다고 하는 거기에 이제 집착을 하게 되고, 그것이 궁극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건 큰 병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런 표현을 한 거죠.
물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捨妄心 取眞理여
(사망심 취진리여)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는 것이여
사망심취진리(捨妄心取眞理)취사지심성교위(取捨之心成巧僞)라,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다.
저 앞에도 있었죠.
불구진부단망, 또 절학무위한 도인은 부제망상 불구진.
이런 것들을 잘 이렇게 추릴 줄 알아야 돼요.
또 체(體) 체에 대해선 아주 좀, 많죠, 이런 것들이 이제 이 스님이 중점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죠.
取捨之心成巧僞로다
(취사지심성교위로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는 도다
취사지심성교위(取捨之心成巧僞)라, 취하고 버리는 것, 이것이 취사지심이 성교위라, 교위를 이룬다.
교(巧)는 여기야 말로 이게 익숙하다는 뜻이 아니고, 아주 교묘한 거짓을 이룸이로다.
취하고 버리는 그 마음이 거짓을 이룬다.
그러니까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도 아니야.
왜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야. 그러니까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진도 아니고 망도 아니야.
그래 무명도 아니고 보리도 아니야,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야. 그냥 공한 자리일 뿐이야. 이 공간이,
우리가 불 켜 놓으니까 밝지, 불 끄면 어둡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둠과 밝음이 실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착각하는데, 이 공간은 어둠도 아니고 밝음도 아니야.
이 공간의 실상은 어둠도 아니고 밝음도 아니라구.
그래 이제 그렇게 꿰뚫어 본 분들이니까 그렇게 이제 망심도 버리고 진리도 취하지 않는 거지.
그래 불구진 부단망이 되고.
그래서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는 것은, 취하고 버리는 일이 거짓을 이룬다. 잘못된 것이다
學人不了用修行하니
(학인불요용수행하니)
공부하는 사람이 그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수행을 하니
학인(學人)은 불요용수행(不了用修行)진성인적장위자(眞成認賊將爲子)라
지금 이제 공부하고 있는, 공부 도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를 못하고 불요(不了)하고 수행을 한다 이거야.
수행을 쓴다 수행을 한다 이말이예요 그냥.
그런 이치를 모르고 수행을 한다 이거야.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삶이 수행이야 사실.
그리고 참선을 하든, 경을 보든, 이런 이치를 알고 참선을 해야 그게 제대로 된 참선이고 제대로 된 간경이고 제대로 된 염불이고 제대로 된 삶이다 이 뜻입니다 이게.
학인은 깨닫지 못하고 수행하므로
眞成認賊將爲子로다
(진성인적장위자로다)
참으로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음이로다
진성인적장위자(眞成認賊將爲子)라, 참으로 인적(認賊) 도적을 오인해서 장차 아들을 삼는다. 아들 삼음을 이룬다, 인적위자(認賊爲子), 인적위자 이게 고사성어죠.
말하자면, 밤에 집에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서 얼핏 잠결에 보니까 아들이 물 떠 먹으러 나온 걸로 그렇게 이제 오인한 거야. 사실은 도적이 들어와 가지고 물건을 훔쳐가는데 아들인 줄 착각한거지.
그러니까 그런 입장이 돼 버린다 이거야.
우리가 요러한 이치를, 존재의 실상에 대한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론적으로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라도, 뭐 확철대오하면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이론적으로라도 제대로 알지를 못하고 수행하는 것은 마치 인적위자(認賊爲子)야.
도적을 오인해서 자식이라고 여기는 거하고 같다.
損法財 滅功德은
(손법재 멸공덕은)
법의 재산을 손상시키고 공덕을 소멸하게 하는 것은
손법재멸공덕(損法財滅功德)은 막불유사심의식(莫不由斯心意識)이니 법재를 손상시키고 공덕을 소멸하는 것은
莫不由斯心意識이니
(막불유사심의식이니)
이 심,의,식을 말미암지 아니함이 없으니
심의식(心意識)을 말미암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심의식을 말미암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전부 이 심의식 때문에 이것이 이제 심의식이 사량을 분별하는 마음작용이죠.
그러니까 뭐 6식, 7식, 8식이라고 이렇게 변별을 하는데 굳이 그렇게 6식, 7식, 8식이다 이렇게 말 할 거 없어.
우리의 의식작용, 그걸 뭐 통 털어서 심의식이다 그렇게 하면 돼요. 사량 분별하고 사료하고 하는 그런 것. 그것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으니
是以禪門了却心하고
(시이선문요각심하고)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심,의,식을 떨쳐버리고
시이(是以)로 선문(禪門)에 요각심(了却心)하고 돈입무생지견력(頓入無生知見力)이라
그러므로 이 선문에서, 선문이라는 게 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 설명을 하는 것은 교라면은, 사과를 덥썩 깨물어 먹어서 그 사과 맛을 보는 것, 그건 좌선을 하다가 맛을 보든지 경을 보다가 맛을 보든지 간에, 불법의 진수를 맛을 봤다 하면 그것은 경에서 맛을 봤거나 좌선을 하다가 맛을 봤거나 기도하다 맛을 봤거나 염불하다가 맛을 봤거나 맛을 제대로 봤으면 그건 선이야.
이론으로 거치면 그건 교라고.
선과 교를 고렇게 나눠놓고 봐야지, 경학 하는 것을 교라고 하고 좌선한다고 앉아있는 것을 선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건 오산이야 잘못 안거야. 절대 그건 잘못 안거야.
무엇을 하던지 불법의, 진정한 불법의 맛을 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야 그건, 하나의 수단이라고,
무엇을 하다가도, 경을 보든지 좌선을 하던지 간에 무엇을 하다가도 ‘아, 이게 진짜 불법이다’ 하고 딱 이렇게 맛을 보면 그건 선이야.
그전엔 전부 교라, 전부 방편이고.
그야말로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니라고.
맛을 봤을 때 그건 달이야.
그래 참선도 경학도 이게 전부가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니라고, 우리가 목표한 진리 그 자체는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맛을 탁 봤을 때 그건 그야말로 선이야, 그걸 선이라고 한다 그렇게 알아야 돼요.
앉아있는 게 좌선이라면 뭐 절구통은 좌선 제일 잘하는 사람이겠네? 절구통,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에 턱 절구통은 앉아 있잖아. 그게 아니야.
진리를, 진정한 불법을, 확실하게 이것이다 라고 맛을 봤을 때 그것이 선이야.
그걸 일러서 선이라 한다고.
그 전엔 전부 교야, 방편이고,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그전엔 전부 손가락이야 방편이야.
달은 아니다 이거야.
달을 딱 말하자면은 우리가 봤을 때 그건 진리야. 그건 이제것 그대로 맛을 본 것이고 그것은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여기서 말하는 선은 최소한도 그런 입장입니다.
시이(是以)로 선문(禪門)에 요각심(了却心)
선문에서 요각, 마음을 요각했다 이 말이야.
요각을 물리칠 각(却)자에다가 중심을 두어서 해석하지 말고 요(了)자에다가 중심을 두고, 각자는 요자에 보조 하는 것으로 그렇게 봐야 돼요.
마음을 요각했다 이 말이예요.
마음을 깨달았다. 심의식을 깨달아 버렸다 이러해도 좋아 그냥 마음이라 해도 좋고. 심의식의 본체를 깨달아, 그리고 마음을 깨달아 버렸다. 선문에서 마음을 요각하면
頓入無生知見力이로다
(돈입무생지견력이로다)
생멸이 없는 지견의 힘에 몰록 들어가도다
돈입무생지견력(頓入無生知見力)이라.
몰록 무생 지견력에 들어가느니라, 생멸이 없는.
또 무생이라는 말을 처음 육조스님하고 만났을 때도 썼지만은 여기도 자주 나오죠.
그러니까 그분이 말하자면 즐겨 쓰는 그런 낱말이 있어.
그리고 주로 이제 이야기를 하는 그런 그 내용들이 있어. 역설하는 것이 있어.
법사스님들 법문 가만히 들어봐도 아주 자기가 즐겨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다고.
불교라고 하는 큰 바다 속에서 자기가 즐겨 이야기 하는, 자기의 그게 취향이야 그건 또, 자기의 관심사고, 그게 다 달라 사람들이 말하는 게.
자기 관심 가는 부분을 주로 이야기 잘 하는 거야.
똑같이 진리를 깨달았어도, 그건 개인의 취향이고 성격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여긴 무생지견력(無生知見力)이라. 생이 없는 지견의 힘에 몰록 들어가느니라.
이건 뭐 우리가 한 두 번 이렇게 살펴보고 또 이렇게 한두 번 강의하고 하는 것으로 체득될 일이 아니고 이걸 좀 써야 돼. 자꾸 써.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고 사유하고, 쓰고 사유하고.
쓰면은 한 번 쓰는 게 열 번 읽는 거보다 나.
한 자 한 자 쓸 때 요건 무슨 자다 라고 생각이 들고, 고 앞 뒤 자하고 또 저절로 새겨지고 저절로 해석이, 자기도 모르게 의식이 따라가.
사람을 보면 떡 볼 때 어떻습니까? 누군질 알잖아. 저사람은 누구고 이름은 누구고 이렇게 분별 안하잖아. 볼 때 알잖아.
마찬가지로 이렇게 쓰면은 말하자면 새김과 그것을 가지고 있는 그 뜻이 자기가 노력한 만치 저절로 거기서 되살아 나거든.
그래서 쓰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사경사경 사경을 정진에서 서사서사 사경사경 자꾸 이걸 이제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자꾸 쓰고 또 사유하고 이런 그 노력에 의해서 더욱더 이해가 깊어집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_()()()_
心鏡明鑑無碍하야 廓然瑩徹周沙界로다...마음 거울이 환히 밝아서 그 살펴보는 것이 비춤이 걸림이 없어서 확연히 밝게 사무쳐서 삼천 대천 세계, 황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두루 하더라.(두루 그 마음의 밝음이 다 통한다)... 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無相無空無不空卽是如來眞實相 _()()()_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여! :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음이여! 卽是如來眞實相(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 그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 一顆圓光非內外(일과원광비내외)로다 : 한 덩어리 원만한 광명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 取捨之心成巧僞(취사지심성교위)로다 :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는 도다 眞成認賊將爲子(진성인적장위자)로다 : 참으로 도적을 오인해서 아들을 삼음이로다 ..... 감사드립니다! _()()()_
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여 卽是如來眞實相(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ㅡ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음이여 그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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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