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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최종 수정) 2009-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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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 (UNTAC)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 : UNTAC)는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캄보디아에서 활동한 UN 평화유지활동의 주체였다. 또한 이는 국제연합(UN)이 개별 회원국을 통치하면서, 직접 선거를 조직하여 실행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적극적 개입은 일반적인 감시와 감독기능에는 배치되는 것으로, 당시의 UNTAC은 독자적인 방송국과 감옥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전국적으로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활동은 현재까지도 대단히 포괄적인 “차세대” UN 평화유지활동의 전형으로, 미래의 활동에 수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1. UNTAC 개요
1991년 10월 체결된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992년 2월 UNTAC이 조직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수년 간 강도높은 외교적 활동이 수반됐다.
1.1. UNAMIC
평화유지군 소속 병사의 모습 (사진: Simon Woolley)
UNAMIC는 "국제연합 캄보디아 평화유지선발대”(United Nations Advance Mission in Cambodia)의 약칭이다. UNAMIC은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된 직후부터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가 설립되기 이전의 기간동안, 캄보디아 내 분쟁정파들 사이의 정전을 유지하고, 민간인 요원들에 대한 지뢰 탐색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파견된 조직이다. 1991년 10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 조직은, 후에 지뢰 제거 및 지뢰 제거 교육까지 담당하는 것으로 권한이 확장됐다. UNTAC의 창설과 함께, 1992년 3월 이 조직 및 그 기능은 UNTAC으로 흡수되며 이관되었다.
악따울 까림(A.H.S. Ataul Karim: 방글라데시) 수석연락관과 선임군사연락관인 미셸 로리동(Michel Loridon: 프랑스) 준장이 이끈 이 조직은, 처음에 116명의 군 병력(연락장교 50명, 지뢰탐색요원 20명, 군사지원요원 40명)과 각각 75명씩의 외국인 및 캄보디아인 직원으로 구성되었다. 후에 군 병력은 1,090명까지 증가했고, 민간인 직원도 34명이 증원되었다.
○ UNAMIC에 병력을 파견한 국가
알제리, 아르헨티나, 호주, 오스트리아, 벨기에, 카나다, 중국, 프랑스, 독일, 가나, 인도, 인도네시아, 아일랜드,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파키스탄, 폴란드, 러시아연방(1991년 12월 24일 이전까지 소련 국적), 세네갈, 태국, 튀니지, 영국, 미국, 우루과이 [총 24개국] |
1.2. UNTAC
UNTAC의 임무는 오랜 내전으로 피폐한 캄보디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민간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새로운 헌법에 따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고, 국가 재건의 토대를 놓아주는 것이었다. UNTAC은 또한 외교, 국방, 재정, 공공질서, 공보 등을 포함한 정부의 모든 영역에 대해 “감독”(supervision) 혹은 “조정”(control)하는 기능도 가졌으며, 외국군대의 철수와 복귀에 관해 관리, 감시, 보장을 했다. 그리고 캄보디아 내 분쟁 정파들에 대해 무장해제와 군대해산 및 무기은닉처 탐색에 관한 일들을 했으며, 인권을 증진하고 보호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군사적 안보와 법질서의 유지는 물론이고, 난민들의 송환과 재정착, 지뢰 탐색과 제거를 위한 교육과정의 개설, 경제 재건과 개발에 필수적인 사회기반시설의 복구 및 지원을 하는 일도 임무에 포함됐다.
시하누크 국왕(좌로부터 3번째)과 함께 한 아카시 특별대표(우로부터 3번째). 캄보디아
주재 한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재임 중 시하누크 국왕 측의 파견요청에 따라, 북한에서
30명 정도의 경호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의 경호원들이 일반 캄보디아인들과는
달리 한국적 모습을 지닌 점이 이채롭다. (1993년 촬영) 사진은 역자가 추가한 것임.
[사진출처] 일본잡지 "쿄"[Kyo, 鄕]
아카시 야스시(明石 康: 일본) UN 사무총장 특별대표와, 호주 출신의 평화유지군 사령관 존 샌더슨(John Sanderson) 중장이 이끈 이 조직에는 캄보디아에서 채용한 직원과 통역요원들 외에도, 외국에서 온 15,900명의 군인과 3,600명의 경찰, 2,000명의 민간인 및 450명의 UN 자원봉사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총 예산은 15억 달러였고, 예산과 일정에 맞춰 임무를 수행했다.
2. 1993년의 제헌국회 선거
(사진) 1991년 "국제연합캄보디아과도행정기구"(UNTAC)가 들어오면서 1975년 이후 자취를 감췄던 자본주의 문화가 다소 영세한 모습으로 다시 캄보디아에 몰려왔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는 캄보디아 문학계에도 영향을 주어, 1993년부터 1994년에 걸쳐 일간 신문에 연재된 오욱 분토은(Aok Bunthoeun)의 <스러이 바 끄러몸>(Srey Bar Kramom: 처녀 바걸)과 같은 화제작을 산출하기도 했다. 이 사진은 캄보디아의 "밀랍민속박물관"(Wax Museum of Cultural Village)에 전시된 당시 모습의 재현이다. ☞ 확대사진
1993년 5월 열린 총선에서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민주 캄푸치아”(PDK)는 선거를 보이콧했다. 그들은 무장해제와 군대해산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일부 국민들의 선거참여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에서 400만 이상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 이는 총 유권자의 9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의 아들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끈 “푼신펙당”(FUNCINPEC, 훈신펙)이 45.5%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었고, 훈 센(HunSen)의 “캄보디아인민당”(CPP)이 제2당, 그리고 손 산(Son Sann) 전 총리가 이끈 불교자유민주당(BLDP)이 제3당이 되었다. 푼신펙 당은 선거에 참여한 다른 정당들과 함께 연정을 추진했다. 각 정당에서 선출된 120명의 국회의원들이 새로운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승인했다.
1993년 9월 24일, 마침내 새로운 헌법이 선포되었다. 이 헌법은 입헌군주제의 틀 속에서 다원적 자유민주주의를 인정했고, 전 왕자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를 국왕으로 옹립했다. 또한 "푼신펙당"(FUNCINFEC)과 "캄보디아인민당"(CPP)이 연립해 “캄보디아 왕국정부”(RGC)를 구성했다. 그리고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가 제1총리, 그리고 훈 센(Hun Sen) 전 총리가 제2총리를 맡았다. 이 헌법은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을 보장했다.
3. UNTAC의 영향
시하누크 국왕은 전반적인 UNTAC의 활동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의 눈에는 급격한 매춘의 증가(주2) 와 AIDS가 보급되는 등 외국의 군대가 캄보디아 여성을 모욕하거나 비하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 당시 AIDS가 보급됨으로써 캄보디아는 아시아 최고의 AIDS 감염국이 되었다.(주3) 1991년 6만명 선이던 매춘부의 수는 1992년 UNTAC 본진이 도착할 무렵에는 2만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국제보건기구"(WHO)의 추산에 따르면, 1995년경 캄보디아의 AIDS 보균자는 5만-9만명에 이르렀다.(주4)
(주2) Milton Osborne, Sihanouk, Prince of Light, Prince of Darkness. Silkworm 1994
(주3) Cambodia. Lonely Planet
(주4) Soizick Crochet, Le Cambodge, Karthala, Paris 1997, ISBN 2-86537-7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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