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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41강-枝末法會, 海雲比丘]
오늘은 화엄경 70쪽입니다. 해운비구라고 하는 선지식을 친견할 차례입니다. 해운비구는 십주(十住) 가운데서 제2 치지주선지식(治地住善知識)에 해당됩니다.
경전 상에는 ‘치지주 선지식’, 이런 말은 없어요. 그러나 어차피 대승불교에서는 수행해 나아가는 52위의 지위 절차가 있고, 그 52위를 선지식에다 배대를 하면 그렇게 배대가 됩니다.
또 그 법문의 내용이라 할까 이런 것들을 과거 청?스님 같은 대가들이 면밀히 검토해 보니 해운비구는 제2 치지주선지식이다, 라고 하는 그런 연구결과가 있고 해서 이렇게 과목을 달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과목이 몇 개가 있는데 첫째는 의교취구(依敎趣求)라 그랬어요. 가르침에 의지해 나아가서 구하다 라는 뜻이지요.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과거 덕운비구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나아가서는 해운비구에게서 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모든 불교의 수행인을 대표해서 수행의 본보기를 보이는 그런 이야기인데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친견하는 데 있어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스승을 가리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선재동자는 자기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이러이러한 모습을 갖춰야 선지식이다 하는 그런 게 없어요. 누가 됐든지 과거 선지식이 소개만 하면 무조건 '그분이 선지식이다' 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다음 선지식을 만납니다.
경을 보면 초기의 선지식은 문수보살, 덕운비구, 해운비구, 선주비구 등 그런대로 외형이나 내면이 의심할 바가 없는 선지식이지만은 그 이후의 53선지식 중에는 별의별 선지식이 많습니다.
때로는 선지식답지 못한, 다시 말해 겉으로 보기에는 선지식답지 못하고 의심스런 면이 많은 그런 선지식도 만나게 되요.
또 그분들이 지시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용이 좀 이상하고 정법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선지식을 만나는 데도 불구하고 간혹 의심은 하지만 믿어 들어가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선재동자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믿음으로 해서 자신이 큰 소득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친견하는 것이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불교공부를 하면서 늘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인연들을 만나지요. 많은 사람과 많은 사건과 별별 일들을 직, 간접적으로 만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일, 또는 이웃과 친척들이 경험하는 일, 아니면 다른 동네에서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일, 다른 나라에서 경험하는 일, 이런 모든 일들이 사실은 또 선지식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선지식이고 나아가서 일체 삼라만상이 그대로 다 선지식입니다.
소나무에서는 늘 푸르고 꿋꿋한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바위에서는 굳건함을 배우고, 대지에서는 모든 만물을 감싸주고 생장시키는 그런 것을 배우는 것이지요.
옛날에 조사스님들이 다 말씀하신 바이지만, 나의 발전을 위해서 마음의 문을 열면 모든 사람이 다 선지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에게 무엇인가 교훈을 주고 가르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남북 정상회담을 보면서 경험을 많이 했지요. 그동안은 그 분이 전혀 얼토당토않게 소개가 되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의외로 얼마나 시원시원하고 패기 넘치고 소탈하고 멋있습니까? 아주 멋있는 사나이라, 회담모습을 보면서 참 깨달을 바가 많더라고요, 배울 점도 많고요. 기백이 넘치고, 정말 한 나라를 이끌만한 그릇이 충분히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너무 왜곡되게 선전이 되어 있었지요. 우리 나라가 또 그렇지요, 보도가 그렇고 다 그렇지요. 천하에 못된 놈으로 계속 선전을 해 왔는데 그동안 그렇게 선전해 온 사람들은 이번에 좀 부끄럽겠어요.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요.
그것이 꼭 진실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진실에 접근한 모습을 보고는 여러 사람들이 깨달은 바가 많겠지요.
그런 일들, 그런 사람들, 그런데서 일어나고 있는 상반된 생각들이 삶에 있어 좋은 교훈을 던져주는 선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말하자면 우리가 선재동자를 따라서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게 되는 큰 교훈 중의 하나예요.
내 나름의 틀과 격식을 딱 정해 놓고 이런 사찰, 이런 스님이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평생 좋은 선지식을 못 만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가르침을 줄 사람이고, 가르침을 준 사람은 누구든지 내게는 선지식이다 라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대했을 때, 그때 우리의 삶은 크게 발전하고 성장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선재동자가 53명이나 되는 선지식을 만나는데 이건 끊임없는 정진, 부단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끊임없는 정진은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만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특징이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큰스님 한분 또는 두 분을 몇 번쯤 친견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이제 선지식을 다 봤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중생들은 오만한 생각이 있어서 공부를 조금 했거나 선지식 몇 사람을 만나보고는 내 공부가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선재동자는 안 그래요. 부단한 노력으로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불퇴의 마음, 그것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선재동자는 저 끝에 가면 미륵보살을 만나게 되요. 미륵보살과 대화를 하다가 미륵보살이 이렇게 손가락 소리를 딱, 하고 내게 돼요. 그 순간 그동안 53선지식에게서 배운 모든 법문을 깡그리 잊어버리게 됩니다.
선재동자가 다 잊어버렸다고 말하자 미륵보살이 이렇게 말하지요. “네가 다 잊어버렸으니 문수보살에게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밟아 오너라” 하고 지시를 합니다.
선재 동자가 끝에 가면 미륵보살을 직접 만나는 거지요. 여러분들도 꾸준히 참고 나오시면 결국은 나중에 그분들을 만나게 돼요.
미륵보살의 말씀을 들은 선재동자는 한 번도 후회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힘들다는 마음이나 싫증내는 마음도 없이 미륵의 가르침을 받아서 두말없이 그대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처음 길을 떠날 때 남쪽으로 남쪽으로만 갔거든요, 거친 성이 110성이라고 해요. 성은 지금으로 치면 하나의 작은 나라예요. 남쪽으로 남쪽으로 110개의 작은 나라를 거치면서 선지식을 친견했는데 그 길을 이제 되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110개의 나라를 되돌아가서 처음부처 다시 그 선지식을 친견해 오리라는 각오를 하고 결국은 다시 돌아갑니다.
그랬을 때 문수보살이 신통력으로 110성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지금 막 미륵보살이 선재동자를 떠나보내고,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돌아서는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는 문수보살이 신통력으로 거기까지 오른 손을 쭉 뻗쳐서는 선재동자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훌륭하고 훌륭하다, 그대야말로 정말 진정한 구도자이다.” 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주 극적인 장면이지요.
그런 장면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가 하면 살아있는 동안 부단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지요. 끊임없는 정진, 그것이야말로 삶의 바람직한 모습이예요.
다 노력해서는 어쩔거예요? 잠만 잘거예요? 어쩔거예요? 잠도 계속 오는 것이 아니라고요. 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지요.
살아있는 사람은 부단히 정진하는 것, 끝없이 정진해 간다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만치 아름다운 것이 없어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 옆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옆에 뭐가 있든지 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여요.
정말 그렇더라고요.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자기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하여튼 자기 발전을 위해서 꾸준히 쉬지 않고 정진을 해야 한다는 사실, 이게 우리가 선재동자에게서 꼭 본받아야 할 두 번째 점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선지식을 분별하지 않는 것, 그 다음에는 부단한 정진, 불퇴의 정진,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거나 싫어함이 없는 불퇴전의 정진, 이 두 가지를 우리가 선재동자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드립니다.
三. 海雲比丘 -- 第二 治地住善知識
1. 依敎趣求
爾詩에 善財童子가 一心思惟善知識敎하야 正念觀察智慧光明門하며 正念觀察菩薩解脫門하며 正念觀察菩薩三昧門하며 正念觀察菩薩大海門하며 正念觀察諸佛現前門하며 正念觀察諸佛方所門하며 正念觀察諸佛軌則門하며 正念觀察諸佛等虛空界門하며 正念觀察諸佛出現次第門하며 正念觀察諸佛所入方便門하고 漸次南行하야 至海門國하니라
세 번째는 해운비구인데요,
이시(爾時)에, 본문에는 시(時)자가 어름하게 되어있지요? 때 시(時)자입니다.
그때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심사유선지식교(一心思惟善知識敎)하야, 선지식(앞에 나온 덕운비구)의 가르침을 일심으로 사유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이 사유(思惟)입니다, 생각 사(思), 생각 유(惟), 우리가 사유한다, 명상한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일심으로 깊이 생각하는 거지요.
정념관찰지혜광명문(正念觀察智慧光明門)하며, 바른 생각으로 관찰한다, 무엇을? 지혜광명을 바른 생각으로 관찰한다는 거지요. 여기에서 문(門)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제일 많이 주장하기도 하지만 불교 안에서 제일 많이 이야기 되는 게 지혜광명이라는 말씀을 늘 드렸지요. 불교에서의 등(燈)의 의미와 촛불을 켜는 의미 등, 밝음과 어둠의 관계를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을 많이 드렸었는데 여기에도 그래놓았지 않습니까.
지혜광명을 바른 생각으로 사유해서
정념관찰보살해탈문(正念觀察菩薩解脫門)하며, 또 정념으로 보살해탈문을 관찰한다, 보살이 어떤 해탈의 경지에 올랐는가를 정념으로 관찰한다는 거지요.
요건 앞에 나온 덕운비구에 대한 관찰이지요. 새로운 선지식을 친견하러 가면서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것입니다.
앞의 선지식에게서 배운 것을 되뇌어서 생각하는 거지요.
나는 이분에게서 이러이러한 것을 공부했다, 라고 정리하며 생각하는 거지요.
정념관찰보살삼매문(正念觀察菩薩三昧門)하며, 보살의 삼매는 어떤 것이라 하는 것을 정념 관찰하고
또 정념관찰보살대해문(正念觀察菩薩大海門)하며, 보살의 큰 바다와 같은 마음을 정념 관찰하고 또
정념관찰제불현전문(正念觀察諸佛現前門)하며, 모든 부처님이 앞에 나타난 것을 관찰하며,
결국 뭔고 하니 모든 사람, 모든 존재,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가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념 관찰하는 것이지요.
정념관찰제불방소문(正念觀察諸佛方所門)이라, 제불이 사시는 처소를 방소라 그래요. 방향과 처소이지요. 모든 부처님, 모든 깨달으신 분이 어느 곳에 있는가를 정념 관찰하고
정념관찰제불궤칙문(正念觀察諸佛軌則門)하며, 궤칙은 하나의 법도입니다. 부처님이 살아가는 하나의 규칙을 궤칙이라고 해요. 제불의 궤칙문을 정념 관찰하며,
정념관찰제불등허공계문(正念觀察諸佛等虛空界門)하며, 부처님의 세계는 저 넓은 허공계와 같은 그런 세계임을 정념 관찰하며,
정념관찰제불출현차제문(正念觀察諸佛出現次第門)하며, 부처님이 어떤 순서로 출현하시는가 하는 그런 문제를 정념 관찰하고
정념관찰제불소입방편문(正念觀察諸佛所入方便門)하고, 모든 부처님은 어떤 방편문에 들어갔는가, 말하자면 어떤 방편을 쓰는가를 바른 생각으로 되뇌이지요. 늘 생각하며 관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문 밖을 벗어나면 언제 공부했느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그렇게 돌아가실 게 아니라 되뇌어 보세요.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가면서 ‘아, 오늘 공부는 뭘 했지’ 하고 쭉 한 번 밟아보고 생각을 해 보는 거지요.
이것도 훈련을 해야 생각이 나지요. 생각을 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야 생각을 하지요. 평소에 생각하는 훈련을 안 해 놓으니까 생각이 안 나요. 그렇습니다, 이건 틀림없이 그래요.
여러분들은 돈 떼인 것은 생각이 잘 나지만 그 외의 것은 거의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냥 넘겨버리고 새로운 일을 맞이하려고 하지요. 계속 새로운 일을 맞이할 준비만 되어 있지,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검토를 잘 안하는 겁니다.
지나간 것 복습을 잘해야 됩니다. 공부는 예습도 중요하지만 복습이 중요합니다.
단어도 외운지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한 번 더 왼다고 그러지요? 그 방법이 단어를 잘 기억하게 하는 열쇠예요. 단어를 잘 기억하려면 한 번 외운 뒤 24시간 안에 한 번 더 외워두면 안 잊어버리는 겁니다. 공부방법이 그렇습니다.
그런 건 주부들이 더 잘 알지 내가 뭘 압니까? 애들 가르치니 잘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자세가 공부에는 제일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점차남행(漸次南行)하야 지해문국(至海門國)하니라. 점차 남쪽으로 걸어가서 해문국이라는 나라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2. 見敬諮問
向海雲比丘所하야 頂禮其足하며 右遶畢하고 於前合掌하야 作如是言호대 聖者여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欲入一切無上智海하노니 而未知菩薩이 云何能捨世俗家하고 生如來家하며 云何能度生死海하야 入佛智海하며 云何能離凡夫地하고 入如來地하며 云何能斷生死流하고 入菩薩行流하며 云何能破生死輪하고 成菩薩願輪하며 云何能滅魔境界하고 顯佛境界하며 云何能竭愛欲海하고 長大悲海하며 云何能閉衆難惡趣門하고 開諸大涅槃門하며 云何能出三界城하야 入一切智城하며 云何能棄捨一切玩好之物하야 悉以饒益一切衆生이니잇고
그 다음은 견경자문(見敬諮問)이라, 뵙고는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묻는다는 뜻입니다. 뵙고 공경하고 묻다, 라는 뜻이지요.
향해운비구소(向海雲比丘所)하야, 해운비구가 계시는 처소를 향해서 정례기족(頂禮其足)하고, 그 발에다 예배하고
우요필(右遶畢)하고, 오른쪽으로 도는 것을 마치다.
그러니까 예배는 부처님께 하는 것도 그렇고 탑에다 예배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만났을 때도 인도에서는 공경의 표시로 관례상 오른쪽으로 돕니다. 이왕 돌면 세 바퀴를 이렇게 도는 것이 예(禮)이지요.
오른쪽으로 도는 것을 마치고
어전합장(於前合掌)하야 작여시언(作如是言)호대, 그 분 앞에 합장하여 이와 같이 말하되
성자(聖者)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야, 성인이시여, 나는 이미 먼저 보리심을 발하여,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어서
욕입일체무상지해(欲入一切無上智海)하노니, 일체 무상 지혜에 들어가고자 하오니, 최상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고자 하오니
이미지(而未知), 아래의 것을 모릅니다. 무엇을?
보살(菩薩)이 운하능사세속가(云何能捨世俗家)하고, 세속에 사는 보살들이 어떻게 해서 세속의 집을 버리고
생여래가(生如來家)하며, 여래의 삶을 살려고 하는지, 여래의 집에 태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꼭 부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속에 살면서 세속적인 일에 물들지 않고 부처님 일에 종사하는 것, 그것이 생여래가(生如來家)입니다. 능히 세속의 집을 버리고 여래의 집에 태어났는가.
여러분들이 지금 전부 여래의 집에 태어난 상태예요. 세속 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세속 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여기서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출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화엄경에서는 비구라는 말이 붙었을 때 출가자를 뜻합니다.
보살은 거의 다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도 성불하고 나서는 머리를 깎은 적이 없어요. 부처님은 머리카락이 늘 있잖아요. 성자들 중에 머리 깎은 분은 지장보살님 한 분 뿐이지요.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로써 머리 깎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지장보살님만 머리카락이 없어요. 그 외에는 어떤 부처님, 어떤 보살도 다 머리카락이 있어요.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가 세상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서도 능히 세속의 집을 버리고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처럼 세속에 있으면서 불교공부를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어떻게 보살이 그런 일을 하느냐?
운하능도생사해(云何能度生死海)하야 입불지해(入佛智海)하며, 어떻게 해서 삶과 죽음의 바다를 건너서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 왔는가.
그래요, 지금은 세상이 모두 공개된 세상이기 때문에 불교공부를 하려면 쉽게 입문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그게 참 어려웠어요.
세속생활만 계속 하는 것은 생사의 바다에 빠져 사는 것이고, 생사의 바다를 건너서 부처님 공부, 불지해(佛智海), 부처님 지혜를 공부하는 바다에 우리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하냐?
운하능리범부지(云何能離凡夫地)하고 입여래지(入如來地)하며, 어떻게 범부의 경지를 떠나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운하능단생사류(云何能斷生死流)하고 입보살행류(入菩薩行流)하며, 어떻게 하면 능히 생사가 흘러가는 그 물결을 끊을 수가 있겠느냐,
우리는 전부 거기에 떠밀려 내려가고 있지요. 어떻게 하면 그것을 끊고 보살이 살아가는 그 삶의 흐름에 들어갈 수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생사의 흐름을 끊어버리고 보살들의 삶의 흐름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운하능파생사륜(云何能破生死輪)하고 성보살원륜(成菩薩願輪)하며, 어떻게 해서 능히 생사의 바퀴를 깨뜨려버리고, 보살의 원력의 수레바퀴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보살은 원력으로 사는 거예요. 누구든지 원력으로 사는 사람은 보살이고 업에 끄달려 사는 사람은 중생입니다. 업 타령만 하는 불교는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그러고, 원력으로서 자기의 삶을 바꾸려고 하고 원력으로서 자기 삶을 살려고 하는 그런 힘찬 자세를 대승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소승적인 삶과 대승보살의 삶은 업이냐 원력이냐의 그 차이예요.
‘나는 업이 많아 가지고...업이 많아서..’ 이렇게 말하는 건 완전히 소승적인 삶이지요. 내 업은 설사 그렇더라도 강한 원력을 가져야지요.
한 생각 돌이키면 중생이 부처도 되는데 왜 그런 소승적인 생각을 가집니까? 큰 원력을 가지고 살면 그것이 보살의 삶이라는 거지요.
어떻게 하면 보살의 원력의 바퀴를 이룰 수 있겠는가.
또 운하능멸마경계(云何能滅魔境界)하고 현불경계(顯佛境界)하며, 어떻게 하면 마구니의 경계를 소멸하고 부처의 경계를 나툴수 있으며
운하능갈애욕해(云何能竭愛欲海)하고 장대비해(長大悲海)하며, 능히 애욕의 바다를 바짝 말리고 큰 자비의 바다를 자라나게 할 수있으며
운하능폐중난악취문(云何能閉衆難惡趣門)하고 개제대열반문(開諸大涅槃門)하며, 온갖 어려움이 많은 악의 문을 막아버리고 모든 열반의 문을 활짝 열 수가 있겠습니까.
또 운하능출삼계성(云何能出三界城)하야 입일체지성(入一切智城)하며, 또 어떻게 하면 욕계·색계·무색계 삼계의 성에서 벗어나고 여래의 일체지혜의 성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여기 지혜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요.
운하능기사일체완호지물(云何能棄捨一切玩好之物)하야 실이요익일체중생(悉以饒益一切衆生)이니잇고, 완호지물이란 것은 일체 노리개꺼리입니다. 세상에는 놀 꺼리가 많지요. 불법공부 말고도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이 많지요. 아주 즐길 꺼리, 재미있고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이런 것들이 완호지물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것들을 다 버려버리고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일체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일을 할 수가 있는지, 그런 것을 나는 잘 모르옵니다.
저 앞의 미지(未知)가 여기까지 뜻이 먹히지요. 그런 것을 잘 모르니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질문을 선재동자가 해운비구에게 했습니다.
3. 讚示法界
(1) 發菩提心
時에 海雲比丘가 告善財言하사대 善男子야 汝已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耶아 善財가 言호대 唯라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이다 海雲이 言하사대 善男子야 若諸衆生이 不種善根이면 則不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要得普門善根光明하며 具眞實道三昧智光하며 出生種種廣大福海하며 長白淨法에 無有懈息하며 事善知識에 不生疲厭하며 不顧身命하야 無所藏積하며 等心如地하야 無有高下하며 性常慈愍一切衆生하며 於諸有趣에 專念不捨하며 恒樂觀察如來境界하야 如是乃能發菩提心이니라
찬시법계(讚示法界)라, 찬탄하고 법계를 보인다.
선재동자란 청년이 선지식을 한 분 한 분 친견하면서 이런 깊이 있는 질문을 해 오니까 해운비구가 찬탄을 하지요.
발보리심(發菩提心), 보리심을 발한다, 보리심은 깨달음인데요, 우리가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고 관심을 내는 그 문제를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時)에 해운비구(海雲比丘)가 고선재언(告善財言)하사대, 그때 해운비구가 선재에게 고해 말하되
선남자(善男子)야, 여이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야(汝已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耶)아, 선남자야, 너는 이미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는가
선재(善財)가 언(言)호대 유(唯)라, 선재가 말하되 예, 그렇습니다.
유(唯)라는 말은 예, 그렇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이다, 예, 나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습니다. 큰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내었습니다.
해운(海雲)이 언(言)하사대 선남자(善男子)야, 해운비구가 가라사대 선남자야
약제중생(若諸衆生)이 부종선근(不種善根)이면, 만약에 모든 중생이 선근을 심지 아니하면, 착한일, 어떤 착함의 근본을 심지 아니하면
불능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不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능히 보리심을 발하지 못하리니.
보리심하고 선근은 그러니까 직결되어 있는 거지요. 입으로는 깨달음 깨달음 하면서 악을 지으면 안 되지요. 악을 지으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요. 깨달음은 반드시 선(善)하고 연결되어 있는 거지요.
선근을 심지 아니할 것 같으면 보리심을 발하지 못하리니
요득보문선근광명문(要得普門善根光明)하며 구진실도삼매지광(具眞實道三昧智光)하며, 보문 선근의 광명을 얻어서 진실도의 삼매 지광을 갖추고자 하며,
우리가 보통 관세음보살을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지요. 경주에 가면 보문단지도 있지만 보문(普門)이란 말이 불교용어입니다.
넓은 문이라는 뜻은 사실은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문이든지 활짝 열려있어서 어느 문으로든지 다 선근을 심을 수 있는 그런 지혜의 광명을 말하지요. 보문선근광명을 얻으며 또 진실한 도의 삼매의 지혜광명을 갖추고자 하며
또 출생종종광대복해(出生種種廣大福海)하며, 가지가지 광대한 복의 바다를 출생시키며
장백정법(長白淨法)에, 희고 청정한 법, 깨끗한 법을 기르며
이것은 깨달음의 법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는 일은 전부 캄캄하고 어쩌면 더럽고 검고 그렇지요. 그렇지만 깨달음의 세계의 법은 백정법(白淨法)이라고 해요. 흰 백(白)자 깨끗할 정(淨)자이지요. 희고 깨끗한 그런 법을 키워내며,
이런 것이 전부 선근입니다. 저 위에서 선근을 심지 않으면 보리심을 발하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그럼 선근을 심는다는 게 뭐냐?
보문 선근광명을 얻고, 또 진실도 삼매지광을 갖추고 또 종종광대한 복의 바다를 출생시키고, 백정법을 키워내는 거지요.
선근을 심으매
무유해식(無有懈息)하며, 게으르거나 쉬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선재동자는 물러나지 않고 쉼 없이 꾸준히 정진을 하는데 그 점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했지요. 백정법을 키우는데 쉼이 없으며
사선지식(事善知識)에 불생피렴(不生疲厭)하며, 사(事) 자는 일 사(事)자인데 여기서는 섬긴다는 뜻입니다.
선지식을 섬기는데 피로해 하거나 싫어함을 내지 않으며
한 일 년쯤 선지식을 섬기다보니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해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때려치우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선지식을 섬기는데 피렴(疲厭), 피로해하거나 싫어함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고신명(不顧身命)하야 무소장적(無所藏積)하며. 신명을 돌아보지 않지요, 자기 힘든 것 돌아보지 아니하고 장적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쌓아놓지 않고 뭐든 다 갖다 준다는 거지요. 신명도 돌아보지 않는데 쌓아둘 게 뭐 있습니까? 장적하는 바가 없어요.
등심여지(等心如地)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하며, 마음 갖기를 저 편평한 땅과 같이 해서 고하가 없으며
어떤 때는 잘 하다가 어떤 때는 못하다가, 그러는 게 아니라, 높고 낮음이 없고 움퍽 질퍽하지 않고 꾸준한 한결같은 마음을 무유고하라고 해요.
등심여지(等心如地)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라, 참 좋은 말이에요.
불고신명(不顧身命)하야 무소장적(無所藏積)하며, 집에 좋은 거 쌓아두지 말고 다 갖다 주라 이거지요.
사선지식(事善知識)에 불생피렴(不生疲厭)하며, 불고신명(不顧身命)하야 무소장적(無所藏積)하며, 등심여지(等心如地)하야 무유고하(無有高下)라. 참 좋은 말들입니다.
성상자민일체중생(性常慈愍一切衆生)하며, 선지식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곧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롭게 여기는 것과 바로 통해요.
정말 선지식을 정상적으로 섬긴다면 분별을 해서는 안 되지요.
어떻게 자기가 섬기는 큰스님만 스님이고 딴 스님은 옆을 지나가도 인사도 안하는, 그게 무슨 선지식을 섬기는 자세예요?
내 그전에 어떤.... 바로 깨놓고 이야기 하지요, 뭐.
예전에 극락암 경봉스님 회상의 선방에서 제가 몇 철을 살았거든요. 아, 경봉스님을 찾아다니는 신도들은 우리가 옆으로 지나다녀도 인사를 안 해요. 그분들 보기에는 경봉스님만 스님이야.
여기도 보시면 선지식을 섬기는 마음은 다른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잖아요. 그것이 안 될 때는 선지식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심(私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섬기는 큰스님만 스님이고 그 외의 작은 스님은 스님도 아니라서 쳐다도 안 보는 그런 자세는 선지식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큰스님을 오히려 욕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경봉스님 보고 욕하지 보살들 보고 욕하는 줄 알아요? 절대 신도 보고 욕하지 않아요.
“아이고, 큰스님은 신도들을 더럽게 가르쳤다.” 이러지요. 당장 그래 버리지요.
신도들은 그런 걸 모르잖아요? 신도들이 압니까? 철없는 신도를 욕해서 뭐합니까. 바로 큰스님 보고 욕해 버린다고요. 그러니까 큰스님 욕 안 먹이려면 신도들도 잘해야 돼요.
이치가 그렇게 돌아갑니다.
여기 보면 그래놨지요. 선지식을 섬기는 것이 성상으로, 일체 중생을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자비롭게 여긴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연결이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어요.
어제유취(於諸有趣)에 전념불사(專念不捨)하며, 모든 존재의 갈래, 지옥·아귀·축생·인도·아수라·천도 등 모든 중생이 살아가는 갈래를 제유취라 그래요. 모든 존재의 갈래에서 전념불사, 오로지 생각해서 버리지 아니하며,
지옥중생이라 해서 멀리 여기거나 천당중생이라고 해서 가까이 여기는 그런 것이 없고, 천당의 중생이든 지옥의 중생이든 한결 같이 생각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항락관찰여래경계(恒樂觀察如來境界)하야 여시내능발보리심(如是乃能發菩提心)이니라, 항상 여래의 경계를 즐거이 관찰해서 이와 같이 해야 능히 보리심을 발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리심을 발할 조건이 참 어려워요. 우리가 ‘발심했다, 저 보살은 발심했다, 누구는 발심했다’는 이런 말을 쓰는데 불교에 관련된 야트막한 신심도 이를테면 발심일 수가 있고 고마운 마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화엄경의 입장에 맞추어서 생각한다면 발심의 조건이 이와 같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을 제대로 갖추어야 비로소 발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發菩提心과 餘他發心
發菩提心者는 所謂發大悲心이니 普救一切衆生故며 發大慈心이니 等祐一切世間故며 發安樂心이니 令一切衆生으로 滅諸苦故며 發饒益心이니 令一切衆生으로 離惡法故며 發哀愍心이니 有怖畏者를 咸守護故며 發無碍心이니 捨離一切諸障碍故며 發廣大心이니 一切法界에 咸遍滿故며 發無邊心이니 等虛空界에 無不往故며 發寬博心이니 悉見一切諸如來故며 發淸淨心이니 於三世法에 智無違故며 發智慧心이니 普入一切智慧海故니라
그 다음입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 저기 앞에서는 조건을 말한 것이고 보리심을 발했다면 그 내용은 도대체 무어냐고 하는 것을 이 단락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과 여타발심(餘他發心)이라고 그래요. 보리심을 발한 것하고 다른 데에 마음을 낸 것 하고의 관계, 그 차이점을 여기에서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발보리심자(發菩提心者)는 소위발대비심(所謂發大悲心)이니, 보리심을 낸 자는 소위 큰 자비의 마음을 낸 것이니,
우리는 자비(慈悲)할 때의 자(慈)자와 비(悲)자를 같이 쓰지요. 그런데 경전에서는 자와 비를 나눠서 생각합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지만 자(慈)는 어머니의 사랑이고 비(悲)는 아버지의 사랑이라 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들에게 매질을 한다고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을 못해요. 아들이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그냥 그것을 감싸주고 싶어 해요. 나중에 잘못될 값이라도 지금 감싸주고 싶은 그것이 자(慈)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이라고요. 그저 사랑만 부어주고 싶은 거지요.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야, 속으로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생각해요. 그래서 속으로 자신이 아파하면서도 자식에게 매질을 하고 모진 훈련을 시키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큰 비(悲)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
보구일체중생고(普救一切衆生故)며, 일체 중생을 널리 구제한다고 했지요. 비(悲)의 마음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잘못되면 두들겨 패서라도 바르게 살게 하는 그게 구제의 뜻이지요.
보리심이라는 것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지금 하나하나 설명해 가는 중입니다.
그 다음은 발대자심(發大慈心)이니 등우일체세간고(等祐一切世間故)며, 대자(大慈)의 마음은 일체 세간의 중생들을 평등하게 도와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우(祐)자와 구(救)자의 차이점이라 할까요. 여기에서는 단순하게 그렇게 차별화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발안락심(發安樂心)이니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멸제고고(滅諸苦故)며, 보리심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안락한 마음을 내는 것인데 그 안락한 마음을 낸다고 하는 것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소멸하게 하는, 그게 안락인 거지요. 편안하고 즐거운 거지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고통, 쓰라림을 어떻게라도 소멸하게 해 주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발보리심의 마음이지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불자들이 어디 길을 가다가 소나 말 같은 축생을 만나면 “발보리심 하라” 그러지요.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요?
그럼 그건 무슨 뜻인가 하니 바로 이 구절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축생이 되어 저렇게 고통을 받고 있으니 저 고통을 어떻게 하더라도 소멸해 줘야 되겠다,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그런 마음자세이지요.
발요익심(發饒益心)이니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이악법고(離惡法故)며, 그리고 이익한 마음을 내어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악한 법을 떠나게 하는 연고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그래야 이익한 일이 생기지요. 악한 법에 걸려있거나 악한 일만 자꾸 하면 당장에는 주머니에 뭐가 생길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손해를 보는 거예요. 중생들에게 결과적으로, 장기적으로 이익이 생기게 하는 것이 말하자면 악법을 떠나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 다음은 발애민심(發哀愍心)이니, 불쌍할 애(哀)자, 연민히 여길 민(愍)자 이지요. 불쌍히 여기고 연민히 여기는 마음을 내니
유포외자(有怖畏者)를 함수호고(咸守護故)라,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다 지켜서 보호해 준다.
우리가 살다보면 두려운 일들이 있지요. 뭐 호랑이가 나오고 어째서 두려운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게 두렵지요. 이런 저런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아요.
반야심경에도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란 말이 있지요. 사람이 살면서 공포가 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을 다 지켜서 보호해 주는 연고이다.
발무애심(發無碍心)이니 사리일체제장애고(捨離一切諸障碍故)며, 걸림이 없는 마음을 발하게 하는 것이니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일체의 것을 떠나는 연고이다.
그래야 걸림이 없지요. 뭐든지 장애가 있으면 걸려서 안 되지요.
발광대심(發廣大心)이니, 크고 넓은 마음, 통 큰 정치라는 그런 말을 하듯이 통 큰 마음이지요.
뭔 말인고 하니 일체법계(一切法界)에 함변만고(咸遍滿故)라, 모든 세계에 모두 두루두루한 그런 가득 찬 마음을 쓰고자 하는, 그게 광대한 마음을 발하는 것이다.
보리심을 발했다, 발심 했다 하면서도 마음이 조그마하고 소소한데 다 걸려 있어 가지고서야 그걸 어디 발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툭 터져서 넓어야지요.
그 다음, 발무변심(發無邊心)이니 등허공계(等虛空界)에 무불왕고(無不往故)라, 가없는 마음, 가장자리가 없는 마음이니 허공계와 같이 어디 안 가는 데가 없어요.
발심한 사람은 중생을 위해서라면 지옥이고 축생계이고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발심한 사람이지요. 어려운 데는 안 가려고 하고 좋은 데만 가려고 하는 것은 무변심이 못되는 거지요.
그 다음 발관박심(發寬博心)이니, 너그러울 관(寬)자 넓을 박(博)자, 너그럽고 넓은 마음을 발한 것이니 실견일체제여래고(悉見一切諸如來故)며,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다 친견하며
발청정심(發淸淨心)이니 어삼세법(於三世法)에 지무위고(智無違故)며, 청정한 마음, 훌륭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발하는 것이니 과거 현재 미래 삼세법에 있어서 그 지혜가 어김이 없는 연고이다.
상이(相異)되거나 상반(相反)되는 게 전혀 없다는 거지요.
발지혜심(發智慧心)이니, 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지혜심을 발하는 것이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보입일체지혜해고(普入一切智慧海故)니라, 일체 지혜의 바다에 널리 다 들어가는 것, 그것도 역시 발심입니다.
발심의 조건은 이처럼 참 많아요. ‘발심했다’라고 하면 열 가지가 넘는 이런 마음을 다 갖춰야 비로소 발심한 사람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첫댓글 본문 내용 보내주신 마니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혼자서 39강까지 녹취해 올리신 무우수님께 합장 올립니다. () 얼른 나으셔서 다시 이곳에서 무우수님의 바른 솜씨를 뵙고 싶습니다. 따라 하느라고 해 보지만 저는 아직 서툴기만 합니다. 강의 해주신 큰스님과 앞에 올려주신 분께 누가 되지않길 바랄 뿐입니다. 잘못된 점 있으면 바로 지적해 주시길 청해 봅니다. 많이 이끌어 주십시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6.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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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우 님! 대단하셔요..이렇게 빨리 올리시다니 놀라움이 앞섭니다..글씨가 커서 아주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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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은 부단히 정진하는 것, 끝없이 정진해 간다는 것,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만치 아름다운 것이 없어요. _()()()_
고맙습니다._()()()_
선지식을 분별하지 않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거나 싫어함이 없는 불퇴전의 정진, 이 두 가지를 우리가 선재동자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법 공양 고맙습니다.._()()()_
자기 발전을 위해서 꾸준히 쉬지 않고 정진을 해야 한다는 사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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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비구 ○약제중생(若諸衆生)이 부종선근(不種善根) 이면 불능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不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만약에 모든 중생이 선근을 심지 아니하면 능히 보리심을 발하지 못하리니 ○선근을 심음(種善根) -보문 선근광명을 얻고, 진실도 삼매지광을 갖추고, 종종광대한 복의 바다를 출생, 백정법을 키워낸다.
○발보리심자(發菩提心者)는 소위발대비심(所謂發大悲心)- 보리심을 낸 자는 큰 자비의 마음을 낸다. 1.발대자심(發大慈心)-일체 세간의 중생들을 평등하게 도와주는 연고 2.발안락심(發安樂心)-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소멸하게 하는 연고 3.발요익심(發饒益心)-이익한 마음을 내어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악한 법을 떠나게 하는 연고 4.발애민심(發哀愍心)-불쌍히 여기고 연민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다 지켜서 보호해 주는 연고
5.발광대심(發廣大心)-크고 넓은 마음으로 모든 세계에 모두 두루두루한 그런 가득 찬 마음을 쓰고자 하는 연고 6.발무변심(發無邊心)- 가없는 마음이니 허공계와 같이 어디 안 가는 데가 없는 연고 7.발관박심(發寬博心)-너그럽고 넓은 마음을 발하여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다 친견하는 연고 8.발청정심(發淸淨心)-훌륭한 마음을 발하는 것이니![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7.gif)
세법에 있어서 그 지혜가 어김이 없는 연고 9.발지혜심(發智慧心)-일체 지혜의 바다에 널리 다 들어가는 연고 ..... 정성 넘치는 보시에 감사드립니다.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3.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2.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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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끊임없는 精進 그것이야 말로 삶의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자기일에 몰두하고 자기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입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원력으로 사는 사람은 보살이고 업에 끄달려 사는 사람은 중생이라.어떻게 범부의 경지를 떠나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능히 생사의 물결을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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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는 자기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이러이러한 모습을 갖춰야 선지식이다 하는 그런 게 없어요. 누가 됐든지 과거 선지식이 소개만 하면 무조건 '그분이 선지식이다' 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다음 선지식을 만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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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중생(若諸衆生)이 부종선근(不種善根)이면, 만약에 모든 중생이 선근을 심지 아니하면,
불능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不能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니, 능히 보리심을 발하지 못하리니...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선재 동자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정진이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내가 경험하는 일,이웃,다른 나라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다 선지식이다
--모든 사람,삼라만상이 다 선지식이다
지장 보살을 제외하고 불보살님들 모두 머리를 길렀다
업 타령만 하는 것은 소승 불교,원력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은 대승 불교
선근을 심지 아니하면 발심을 하지 못한다
선지식을 섬기는 것은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
마음의 문을 열면 모든 사람이 다 선지식이다
生如來家;세속 생활을 하면서 불도를 닦는 사람
화엄경의 보살;재가자
화엄경의 비구;출가자
지장보살을 제외하고는 부처님을 포함해서 모두 머리를 깍지 않은 상태다-부처님은 성도후 기르심
聖者;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仁者;법화경
보살은 원력으로 산다
설사 업이 많더라도 강한 원력으로 살아야 한다
선근을 심지 않으면 보리심을 내지 못한다
普門;문이 없다는 뜻
발보리심이란
;發大悲心
;發大慈心
;發安樂心
;發饒益心
;發哀愍心
;發無碍心
;發廣大心
;發無邊心--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지옥이든 어디든 안 가는 데가 없음
;發寬博心 ---悉見一切諸如來
;發淸淨心 ---삼세법에 지혜가 어김이 없음
;發智慧心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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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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