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신펙당(Funcinpec, គណបក្ស ហ្វ៊ុនស៊ិនប៉ិច [훈신펙당])은 캄보디아의 왕당파(친-시하누크파) 정당이다. 2008년 총선 이전까지 "푼신펙당"은 "캄보디아 인민당"(CPP)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줄곧 집권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1998년 총선 이후부터는 당세가 크게 약화됐지만, 그래도 연립정권을 구성할 때는 언제나 "캄보디아 인민당"(CPP)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중심 인물이었던 노로돔 라나릿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도 제명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2008년 7월 선거에서 단 2석을 획득하는 데 그쳐 현재로서는 향후의 존속 여부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푼신펙당"(Funcinpec)이란 명칭은 프랑스어 "Front Uni National pour un Cambodge Indépendant, Neutre, Pacifique, et Coopératif"의 약칭으로, 이를 영어로 번역하면 "캄보디아 독립, 중립, 평화, 협동을 위한 민족연합전선"(National United Front for an Independent, Neutral, Peaceful, and Cooperative Cambodia)이란 아주 긴 이름이 된다. 공식적으로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긴 정당명으로 기록되었다고도 한다.
역 사
(사진) 푼신펙당의 정신적 지도자인 노로돔 시하누크 전임국왕 (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문판)
푼신펙당의 연원은 캄보디아 독립의 영웅인 노로돔 시하누크 전임국왕에서 시작된다. 1980년대에 푼신펙 세력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 후 세운 위성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에 맞서, 정치 및 무장 투쟁에 참여한다. 이 무장투쟁은 3개의 정파가 참여했는데, 가장 큰 무장세력은 정권을 잃고 서북부 산악지대로 후퇴해 근거지를 마련했던 폴 포트(Pol Pot)의 "크메르루즈"(KR) 반군이었고, 그 외에는 태국 국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푼신펙"과 전 총리 손 산(Son Sann)이 이끌던 공화파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이었다. 이 당시 무장투쟁에 참여한 것은 푼신펙 산하 군사조직인 "시하누크 민족군대"(Sihanoukist National Army: ANS)였다. 당시 미국은 시하누크의 ANS와 손 산의 KPNLF를 군사,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보기엔 이 두 세력이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소련과 베트남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고자 하는 "레이건 독트린"(Reagan Doctrine)의 중요한 축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크메르 루즈 반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3파는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라는 망명정부를 구성해, 국제사회에서 캄보디아의 합법정부로 지지를 받고 있던 터였다.
미국의 지원에 관해서는, 1987년 레이건 독트린의 주요한 이론가 중 한 사람인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의 마이클 존스(Michael Johns)가 손 산 및 ANS 진영을 방문한 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와 "크메르루즈"(KR) 반군을 대체할 제3의 세력으로서, 이 두 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워싱턴 정부에 강력한 설득작업을 한 사실이 알려져 있다.(주1)
1980년대 말, 동구권에 불어닥친 개혁의 바람은 소련으로 하여금 인도차이나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만들었고, 이에 경제 및 군사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철군할 것을 발표했다. 베트남 철수 이후를 대비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도 대화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캄보디아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결국 반군 3파와 당시 캄보디아 거의 전역을 실효지배하고 있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들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캄보디아국"으로 국호를 바꿈)의 4개 정파가 모두 동의하고, 국제사회의 여러 회원국들이 공동 서명한 "파리평화협정"이 1991년 10월 조인되어 캄보디아는 새로운 민주화의 길로 나아간다.
UN의 관리체제를 거쳐 1993년 실시된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푼신펙당이 제1당(58석)을 차지하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세력인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제2당(51석)을 차지해, 새로운 "캄보디아 왕국" 정부는 "푼신펙당"과 "캄보디아 인민당"의 연립정권으로 출범한다. 제헌의회에서 노로돔 시하누크 공은 국왕으로 재추대되었고, 그의 장남이자 "푼신펙당" 당수인 노로돔 라나릿 왕자는 제1총리에 취임했다. 라나릿 왕자는 이후 2006년 10월까지 이 정당을 이끌었고, 현재는 그의 뒤를 이어 께오 뿟 라스머이(Keo Puth Rasmey)가 당수를 맡고 있다.
(사진) 2004년 6월 15일, 총선을 치른 후 1년만에 어렵게 새로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이를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라나릿 국회의장(좌)과 훈 센 총리(우). [출처: 인민일보, 2004-6-16]
1997년에는 다음해에 개최될 제2차 총선을 앞두고 정국이 긴장했다. 캄보디아 인민당 측과 푼신펙 측은 상호 무력증강에 힘을 기울였고, 1997년에 들어오면서 사소한 무력충돌들도 빚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7월 5-6일, 훈 센(Hun Sen) 제2 총리 측이 쿱테타(쿠테타)를 주도하면서, 푼신펙은 2명의 장관을 포함해 수십 명이 처형당하고, 수백 명이 구속됐으며, 노로돔 라니릿 왕자를 포함한 주요 지도부가 해외로 도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헌정중단 사태까지 몰고 가지 않으려는, 훈 센 총리 측의 의도와 세계 여론 등으로 인해, 군사분야에서 이미 우위를 점한 캄보디아 인민당은 1998년 총선을 자유롭게 치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1998년이 되면서 야당 정치인들도 귀국하여 총선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1998년 7월에 개최된 제2차 총선에서 푼신펙당은 123석 중 43석만을 획득하는 데 그쳐, 제1당의 자리를 "캄보디아 인민당"(CPP)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CPP가 내각신임에 필요한 의석 3분의 2를 넘기지 못하자 다시 연립정권 구성에 참여했고, 2003년에는 26석으로 더욱 줄어들었지만, 역시 제2당으로 연정에 참여했다. 이 두 번의 연정 동안 라나릿 당수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2006년 여러 정치적 사정으로 이 정당은 라나릿 총재를 당적에서 제명하자, 라나릿은 새로운 정당인 "노로돔 라나릿당"(Norodom Ranaridh Party: NRP [노로돔 라나리드당])을 창당한다. 2008년 7월에 개최된 제4기 총선에서 이 두 정당은 각각 2석씩밖에 획득하지 못해, 심지어는 제1 야당 자리조차 "삼랑시당"(SRP: 26석)에 넘겨주었고, 정당으로서의 존립기반조차 흔들리는 상태가 되었다. 이는 심지어 소수 야당인 "인권당"(Human Rights Party: 3석)석보다도 적은 의석수였다.
2008년 총선 이후 부동산 관련 부정과 간통죄 고발 등으로 해외에서 머물던 노로돔 라니릿 왕자는 훈 센 정부와 국왕의 사면을 받아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공개적인 회견을 통해 총리와 국왕에 감사를 표하고, 더불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푼신펙당" 소속의 왕족 정치인들도 모두 은퇴하면서, 푼신펙 세력은 캄보디아 정계에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편역: 크메르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