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sia Times Online 2010-4-1 (번역) 크메르의 세계
캄보디아의 약화되는 아이콘 : 삼랑시 총재
An icon fades in Cambodia
기고 : Sebastian Strangio
(프놈펜) --- 작년(2009) 10월 베트남 국경 근처 마을의 논에서 베트남 당국이 설치한 임시 국경표식을 뽑아낸 일과 관련하여, 캄보디아 야당 지도자 삼 랑시(Sam Rainsy) 의원은 당국의 탄압 앞에서 다시금 가시밭길을 걷는 자신의 익숙한 역할을 담당하려 하고 있다.
금년 초 캄보디아 법원은 삼 랑시 의원의 국경표식 훼손에 대해 궐석재판을 통해 2년형을 선고한 바 있다. 게다가 "추가적인 기소절차"를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징역 18년형까지도 다시 부과될 수 있는 위기에 직면했다. 삼 랑시 의원은 작년에 2번에 걸쳐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박탈당한 상태이다.
(사진: Svan Philong) 삼 랑시 의원의 모습.
비록 삼 랑시 의원이 총재로 있는 '삼랑시당'(SRP)이 아직까지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가장 규모가 큰 정당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삼 랑시 의원은 스스로 프랑스에서의 망명생활을 선택했고, 베트남이 캄보디아 영토를 잠식하는 문제에 대한 선전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은 올해로 61세가 되는 이 정치인이 자신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그의 정당 역시 과거 정치적 격변 속에서 보여줬던 밀착성을 상실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1997년 7월의 유혈 쿠테타'를 통해 오랜 정치적 라이벌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를 축출시켰던 훈센(Hun Sen) 총리는, 캄보디아 정치의 중심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응축시켰다. 훈센의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2004-2007년 사이에 연평균 10%에 달하는 GDP 성장율을 보이면서 지속적으로 투표함 속의 승리를 차지했다. 이는 마치 캄보디아 국민들이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보다 권위주의적인 정권도 기꺼이 용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총 123석인 "캄보디아 국회"에서 26석을 차지하고 있는 SRP는 지난 수년간 동요에 휩싸여 있었다. 삼 랑시 의원의 베트남 국경표식 훼손사건 말고도, SRP 소속의 또다른 국회의원들인 무 소쿠(Mu Sochua, 무 소추아) 의원과 호 완(Ho Vann) 의원 역시 CPP 소속 고위관료들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박탈당했다.
캄보디아 내의 이러한 정치적 대치국면은 미국 의회와 브뤼셀에 있는 유엽연합(EU) 의회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SRP의 이러한 대치전략이 총인구의 잘반을 차지하는 24세 이하 인구인 캄보디아의 인구학적 지형 속에서, 중기적으로 정치적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이다.
일부 평가자들은 SRP가 2000년대 중반 그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쇠락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들은 2006년 왕당파인 '푼신펙당'(FUNCINFEC)이 분열한 후 그 지지자들을 SRP가 흡수하지 못한 탓으로 분석한다. "캄보디아 인권센터"(CCHR)의 오우 위락(Ou Virak) 소장은 "당시 이탈한 표가 SRP로 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우 위락 소장은 SRP가 구체적인 정책들을 결여함으로써 정부와 대립하는 인상만 주었고, 장기적 비전도 보여주지 못해 국회의원 총선에서 집권 CPP를 결코 이길 수 없는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적절한 분석이나 현실적인 정책이 없다. 만일 무언가 반대만 하거나 혹은 무언가 주기만 하는 입장이라면, 그게 뭐가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SRP가 시도하는 전략인, 훈센 총리 및 훈센의 절친한 동맹자로서 과거 캄보디아에 대한 침략자이자 점령군이기도 했던 베트남에 대한 반대투쟁은, 캄보디아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집권당인 CPP는 3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언론과 방송, 출판을 통한 대규모 선전을 통해 그 권력기반에 붕대를 더욱더 칭칭 감아대는 형국이다.
'2008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CPP는 58%의 득표율로 국회 총의석 중 90석을 장악했다. CPP가 얻은 의석수는 총의석의 3분의 2가 넘는 수준으로 마음대로 법률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이 총선에서 SRP도 의석수를 24석에서 26석으로 늘렸지만, 득표율은 22% 선에 머물렀다. 동일한 지난 5년 동안의 기간에, 한때는 FUNCINFEC 깃발 아래 캄보디아 정치권력의 중심지 역할까지도 한 왕당파 운동은 20.8%의 득표율에서 겨우 10% 수준의 득표율로 떨어지고 말았다. 왕당파에서 이탈한 표의 대부분은, 오랜 기간 왕당파의 적대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CPP가 앗아가 버렸다.
또다른 정치분석가는 SRP가 왕당파 운동을 흡수해 세력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의 베트남 국경표식 관련 사건 등 일련의 정치적 연출들이 "SRP를 정책정당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그들은 기소를 당한 정당 지도자들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 캄보디아 국민들은 배제된 일종의 밀실적 권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들은 캄보디아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기보다는 외부에 호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에 있는 "소피아대학"(Sophia University)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인 소뽕 뻬오우(Sorpong Peou) 씨 역시, 민주주의 증진과 바람직한 통치(good governance)에 관해 SRP가 외부의 국제기구들에 호소를 하는 것이 국내정치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훈센과 그의 집권당이 베푸는 "자비 덕분에" 생존하는 형국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집권 CPP는] 자신들 정권의 적법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일정 수준에서 야당의 존재를 허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의 적법성 때문에 훈센 정권이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당이 국제기구에 호소하는 것은 국내정치에서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삼 랑시 의원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힘은 분명 예전보다 감소했다. 그는 2005-2006년 사이에도 명예훼손죄로 면책특권 박탈 및 궐석재판에서 징역 18개월을 선고받자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한 바 있다. 그는 공개적으로 훈센 총리에 관한 발언을 취하하고,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의 사면령을 받은 후, 2006년 2월에야 캄보디아로 귀국할 수 있었다.
최근에 훈 센 정권이 역내질서에서 중국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캄보디아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삼 랑시 의원은 국제적으로 보다 주목을 덜 받고 있다. 지난 수년간 삼 랑시 의원은 캄보디아 정부에 대한 미국측의 대립적 자세에서 이익을 얻고 있었다. 1997년 프놈펜에서 발생한 "야당집회 수류탄 투척사건"은 평화적 집회 중인 군중에 대한 공격으로 16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이 '훈센 총리 경호부대'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우 위락 CCHR 소장은, 삼 랑시 의원이 너무 자주 반복적으로 국제기구들에 호소하는 것도 새롭게 부각되는 문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러한 호소는 정당 지도자가 사용할 수 있는 패 중 하나지만, 반복됨으로써 사람들의 귀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오우 위락 소장은 "한두번은 그런 패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반복되면 외국 정부들도 염증을 느끼고, 국제 기부제공처들 역시 염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일은 더 이상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만들 염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우 위락 소장은 "이제 삼 랑시 의원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즉 그러한 가능성 중 하나가 투옥되는 것이다. 그는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가 아니다. 그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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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euters) 2007년 11월 28일 "프놈펜국제공항"에서 왕실가족들의 중국행을 전송한 후, 훈 센 총리와 삼 랑시 의원이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두 인물은 현재 캄보디아 정치적 지형이 처한 양극을 대변한다. |
기부제공처들의 연인
삼 랑시 의원은 1992년 프랑스에서 귀국했고, 왕당파 정당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다. 그는 노로돔 라나릿 왕자와 함께 1981년 "푼신펙당"을 창당했고, 이후 당내 요직으로 승진하다가 유엔(UN)의 후원으로 치뤄진 1993년 제1차 총선거를 통해 국회로 진출했다. 이 선거에서 "푼신펙당"이 승리하여 그는 연립정부에서 재무부장관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승천은 매우 잛았고, 이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상징되는 그의 정치적 경력의 색깔이 하산길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1994년 10월 그가 장관에 임명된지 꼭 1년 후에 이뤄진 개각에서, 그는 실각했다. 이는 그가 당시 연립정권의 골병이었던 부정부패와 정실주의를 비판한 뒤에 이뤄진 조치였다. 수년간 그가 지속적인 비판을 해대자, 결국 당에서 출당조치가 이뤄졌고 국회의원 자격도 박탈됐다.
바로 그 무렵인 1995년 그는 현재 SRP의 전신인 자신의 정당 '크메르 민족당'(Khmer Nation Party: KNP)을 창당했고, 이 정당은 캄보디아의 정치적 지형 속에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집권 CPP는 1980년대에 정착시킨 기반조직 체계를 통해 유지되고 있었고, "푼신펙당"은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의 특권적 지위와 권위를 팔아서 장사를 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삼 랑시 의원이 창당한 새로운 정당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전선 및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에 대한 푼신펙당의 출당조치가, 동일한 이상을 공유한 "수백만명의 국민들을 움직이게 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SRP는 심지어 평등주의에 기반한 정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강세를 보이는 지역구들은 도시지역이 압도적인 형국이다. 2008년 총선에서 SRP는 총 26석을 획득했는데, 수도 프놈펜에서 6석, 도시지역인 껌뽕 짬(Kampong Cham) 도에서 5석, 그리고 수도권에 가깝고 인구밀집 지역인 껀달(Kandal) 도와 쁘레이 웨잉(Prey Veng) 도에서 각각 3석씩을 획득했다. 캄보디아의 24개 시도 중에서 절반에 달하는 가장 오지의 인구희박 지역에서 SRP는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호주 "머독대학"(Murdoch University) 행정학 겸임교수인 캐롤린 휴그스(Caroline Hughes) 씨는, 농촌지역에서 성과가 없는 것에 대해 SRP만을 비난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농촌지역에서는 집권 CPP가 협박을 동원하기도 하고 조직적 선거를 치른다는 것이다. 그녀는 삼 랑시 의원이 1990년대 초 "기부제공처들의 연인"(donors' darling)이었다가, 국제적 지원처들의 피로도, 캄보디아 노조운동과의 불화, 1997년 수류탄 테러사건을 비롯한 그 지지자들에 대한 협박과 폭력이 가해지는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점차로 변방화된 지위로 변해갔다고 보았다. 휴그스 교수는 "캄보디아 야당의 약화에 대해 SRP를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정부가 어떤 사안이든 그리고 어떠한 정당이든간에 그 정치적 입지를 감소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라 말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SRP의 영향력 감퇴가 지속적인 변절자의 발생 및 정부의 협박과 더불어, SRP 자체 내의 민주적 절차 문제가 겹친 것이라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오우 위락 소장은 SRP가 집권당의 침투위협에 마치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대처하면서, 새로운 이들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아는 바로도 SRP 내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당내에서 겉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SRP 운영위원회(Steering Committee) 위원이었던 껜 위락(Ken Virak)의 경우엔, SRP의 당운영 방식에 환멸을 느껴 2007년 자신의 정당 "국민의 힘 당"(People's Power Party: PPP)을 만들어 탈당했다. 껜 위락은 SRP가 "단계를 준수하는"(step by step) 민주적 야당이길 포기했다고 말했다. 또한 명목상으로는 정당의 의사결정기구인 "운영위원회"도 더 이상 실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껜 위락 당수는 "SRP 내에 민주주의가 없다. 소수의 당원이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 그들은 당내에서 권력을 갖고 있고 삼 랑시 의원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매번 선거를 할 때마다, 나는 정치적 의사결정 및 당파주의로 인해 항상 당원들이 분열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껜 위락 당수는 2013년에 실시될 차기 총선에서 CPP가 다수당이 되는 것을 막을 기회를 얻으려면, 자신의 정당인 PPP는 물론이고 SRP와 '인권당'(HRP) 등을 포함해 모든 야당들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단일 야당이 출현한다고 해도, CPP의 지배력을 위협하는 수준에는 여전히 거리가 먼 상태이다. 이미 SRP와 HRP, 그리고 남아있는 두 왕당파 정당들 사이에 통합에 대한 제안들은 있었지만, 지도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불일치하고 있다.
정치인 가문 출신
1949년 프놈펜에서 출생한 삼 랑시 의원은 유년기를 거칠고 파란많은 캄보디아 정치의 영향 속에서 보냈다. 그의 부친이었던 삼 사리(Sam Sary) 전 부총리는 시하누크 국왕의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정부의 실세였다. 하지만 1959년 시하누크 정권 전복을 기도한 사건인, 소위 "방콕 모의"(Bangkok Plot)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태국의 우파 정치인 살릿 타나랏(Sarit Thanarat) 장군이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 사리는 1962년 행방불명됐는데, 당시 캄보디아 정부가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역주)
(역주) "방콕모의"와 "삼 사리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설은 "방콕모의"를 미국 CIA가 사주했고,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한 CIA가 방콕에 망명중이던 삼 사리를 살해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시하누크 공 자신은 이 사건이 전적으로 CIA가 사주한 것이라 주장했고,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
얼마 안있어 모친 인 엠(In Em)은 남아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이민을 갔다. 삼 랑시 의원 역시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30년간을 프랑스에서 거주했다. 최근 <프놈펜포스트>(Phnom Penh Post)와 회견을 가지면서, 삼 랑시 의원은 부친의 죽음을 "엄청난 정신적 충격"의 경험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자신의 독자적 정치적 발전과정을 따라 이뤄졌다고 말했다. 가령 유럽에 체재할 때, 1958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사건 같은 주제들이 저녁식사 자리 같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회자되는 것과 같은 문화가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크메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함께 표방하는 SRP의 정강 속에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삼 랑시 의원은 "아버지는 엄격한 중립주의자였다. 따라서 캄보디아가 공산세계와 가까와지지 않길 바랬다. 이러한 점은 내게도 영향을 주었다. 공산주의가 억압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인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위해 싸울만한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 랑시 의원은 자신이 주도가 되어 1995년 "크메르민족당"(KNP)을 창당했지만, "KNP"란 당명이 법적인 소송에 말려들어가 1998년 "삼랑시당"(SRP)으로 당명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리고 SRP는 캄보디아와 해외 크메르인 공동체 사이를 연결하는 "독특한 조직체"로 성장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자신의 당내 역할에 대해서도 "시대착오적인 것"(anachronistic)이라며 위상을 낮춰서 평가했다. 삼 랑시 의원은 "만일 이게 원맨쇼라면, 우리가 현재 직면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 사라졌을 것"이라 말했다.
삼 랑시 의원은 SRP야말로 캄보디아에서는 유일하게 풀뿌리 단계에서 선출을 통해 조직을 구성하는 유일한 정당이며, 이 방식은 집권 CPP의 중앙집중식 정당운영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자신들의 당원, 즉 기관원들을 풀뿌리 단위에 임명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거를 통해 조직을 구성하는 유일한 정당"이라 말했다. 삼 랑시 의원은 이전의 "푼신펙당" 표들을 "상실"한 것은 대부분 "투명하지 못한 선거관리로 인해 협박과 유권자 매수행위가 발생했기 때문"이라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2008년 7월 총선부터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참호를 구축한 수준인 CPP의 기간조직망을 잠식할 수 있는 방안과 농촌지역에 대한 접근전략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삼 랑시 의원은 현재 및 향후의 인구학적 변화가 유권자들을 SRP 쪽으로 움직여줄 것이라 말했다. 또한 이를 위해 SRP가 최근 새로운 청년조직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기술과 정보, 통신과 교육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변화가 현재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다. 역사는 이미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국내의 선거감시 단체인 "캄보디아 자유공정선거 위원회"(Committee for Free and Fair Elections in Cambodia)의 꼬울 빤하(Koul Panha) 사무총장은, 삼 랑시 의원이 1990년대에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지조있는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매우 본질적인 정치적 자산을 갖고 있고, 그것이 바로 SRP가 현재까지 버틸 수 있는 기반이라고 말했다.
꼬울 빤하 사무총장은 SRP에게 던져진 가장 주된 도전은 대중과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삼 랑시 의원이 여전히 그러한 신뢰성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부의 핵심 요직을 사임한 바 있고, 자신이 그런 종류의 정치인임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러한 신뢰도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소통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라 말했다.
아마도 삼 랑시 의원의 활동이 국내 유권자들보다 외국의 청중들에게 더 많이 호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 이러한 문제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Sebastian Strangio는 캄보디아의 <프놈펜포스트> 기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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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좋은 기사입니다,, 이런글을 이곳우리카페가 아니면,,어디서 찾아보나요?
삼 랑시 의원이 국민과 함께 호흡하지 못한 부분을 비평하는 분도 있군요. 그런데 현 캄보디아 상황에서 국민과 소통할 소통의 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중집회를 할려고 해도 백색테러가 무섭고, 점잖게 정책을 말해도 그것을 보도해 줄 언론이 존재하는지 그래서 외국 언론과 힘을 빌리고자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선명한 야당이 존재해야만 훈 센 총리에게도 이득이 될 텐데....
그렇습니다.. 이 글이 은근히 비판도 하면서도.. 상당히 안타까와 하는 심정도 엿보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부분에서 삼랑시 의원의 발언들이 희망을 줍니다.. 나중에 우리가 군자금 모금해서 보낼 일은 없을듯 합니다~ ^^
그런데 하나 정확히 해둘 것은.. 훈센 정권이 분명 야당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선명 야당은 안된다는 조건이 걸릴겁니다... 야당이긴 한데.. 좀 얌전한.. 마치 전두환 정권 초기의 민한당처럼 여당 2중대 역할을 해줄.. 형식만 야당인 그런 정당이 필요한거죠.. 그렇게만 해주면 돈이고 권력이고 좀 나눠주겠죠. 그런데 삼람시당이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서구적 민주주의의 기치를 걸고.. 선명성이 강하면서, 타협도 안하고, 인권문제에도 관심이 많으니.. 이거는 좀 부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겠죠.. 훈센 씨로서도.. 지난 10년 정도 길들이기를 해봤는데, 길이 안드니.. 부수겠다로 가는거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