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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혁 전주신흥학교 교가 역사
삼레교회 김성식목사 사위 이경혁 애국가
신흥학교 음악활동은 신흥학교 학생들의 음악적인 자질을 길러 주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느 학교보다도 음악활동이 보장되는 신흥학교에 유능한 교사가 부임하게 됨에 따라 신흥학교의 음악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초창기의 이름 있는 음악교사로는 이경혁 선생과 현제명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이경혁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1982년 5월에 이경혁 선생의 아들인 이홍기씨가 아버지인 이경혁 선생이 우리 나라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히는 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경혁 선생은 1892년 8월 8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1911년 윤치호 선생이 영국에 다녀오면서 외국 가곡집을 처음 가져 왔는데 이때 Y. M. C. A에 음악부를 두어 초대 음악부장에 이경혁 선생을 임명하고, 그에게 가곡집을 주었다. 이 선생은 이 외국가요를 다 번역해서 각 학교에 나누어주었다.
이때 이 선생은 우리 나라 애국가 가사를 작사하여 영국민요 이별곡에 맞추어 불렀고, 이것을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휘 씨에게 내놓고 이분 을의 찬성을 얻어 애국가로 채택하였다. 그후 1912년에는 홍난파 씨와 안익태 씨가 바이올린을 배우러 Y. M. C. A에 들어 왔는데 이들을 이경혁 선생과 김인식 선생 두 분이 가르치다가 그해 가을 이경혁 선생은 문주 동포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1916년 3년여의 만주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가서 잠시 쉬다가 1917년 전북 완주군 봉동면 봉상리(필자주:12회 졸업생 오기중씨에 의하면 당시 봉동 제네리교회의 김성식 목사가 이경혁 선생의 장인이라고 함.)에서 아이들 10여 명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1918년 신흥학교의 에버솔 교장의 초청을 받아 신흥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신흥학교 재직 중 우리 나라 13개 도를 의미하는 13도(열세 집) 가극을 만들어 1922년 1월 서문밖교회에서 시연하였고, 동년 3월 1일 전주극장에서 가극 열세집 초로인생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발표된 가극이라고 한다.
1922년 12월 첫 목요일 밤 서문밖교회에 새로 들여온 피아노를 밤늦게까지 쳤던 이경혁 선생은 그날 밤 돌아와 새벽 두 시에 숨을 거두었다.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1923년 3월에 미국유학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아깝게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고, 미국 유학의 혜택은 그 후에 신흥학교에 부임했던 현제명 선생에게 돌아갔다.
또한 이경혁 선생은 숭실학교 교가와 신흥학교 교가를 비롯하여 많은 노래를 작사하였다. 1930년 3월 6일은 아들 이홍기 씨가 보통과 6년 졸업을 몇 일 앞둔 날이었다. 이날 김인석 선생이 김제에서 전주까지 걸어와 이경혁 선생의 미망인에게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애국가의 곡을 만들어 보내왔으니 그 곡에 이경혁 선생이 작고한 가사를 붙이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이 때 부인은 아들 이홍기씨를 가리키며"저 애가 장남이니 저 애의 허락을 받으시오"하였다. 김인식 선생은 다시 이홍기 씨에게 허락을 요청하였고, 김 선생의 바이올린소리에 맞춰 애국가를 두 번 부른 이홍기 씨는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이 애국가는 3월 7일 전주에 사는 김원전(金元全) 씨에게, 3월 8일은 임양희 선생에게, 3월 9일은 이홍기 씨의 친구 김창락(필자주 : 지정1회, 현재 미국에 거주)씨에 전파했으며, 그 후에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새 애국가를 전파했다.
위의 글은 이경혁 선생의 아들 이홍기 씨가 부친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에게 올리는 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구체적 검증자료가 말살된 채 살아 있는 사람의 증언이 중심이 되었기에 객관적으로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우리가 이 자료를 믿는다면 이경혁 선생이야말로 우리 나라 애국가의 작사지요, 또 신흥학교, 교가의 작사자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증언해 준 신흥학교 졸업생 중에 이경혁 선생이 신흥학교 교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흥학교 교가의 작사자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경혁 선생이 13도의 가극을 지어 공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폐교 전 신흥학교에 재학했던 김대전씨도 이를 증언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 최초의 가극이 신흥학교 교사인 이경혁 선생에 의해서 전주에서 만들어져 공연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 외에도 이경혁 선생은 신흥학교 학생과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찬양대를 조직해서 서문밖교회에서 찬양발표를 하고, 또 전주극장에서 찬양발표회를 해서 그 수입금으로 서문밖교회 유치원을 설립했다고 당시 찬양대원 이었던 12회 졸업생 오기중씨는 증인하고 있다. 이경혁 선생이 사망하였을 때 이경혁 선생의 출상은 학교장으로 하였으며, 학생들이 운구하고 공동묘지까지 학생들이 상여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경혁 선생 다음에 신흥학교 음악선생으로 오신 분은 현제명 선생이다. 현제명 선생은 김가전 목사의 소개로 신흥학교 교사로 오게 되었다고 하며, 11회 졸업생인 이영준씨가 현선생에게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현제명 선생은 본래는 영어교사였는데 음악을 잘 했기 때문에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국의 민요를 "숨은 노래"라고 노래를 불러 우승을 했고, 세 번째는 광주가 고향인 이원주씨가 역시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지정2회 김현택, 김귀복 지정3회 정학송씨 등이 4중창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적은 당시 지방학교로서는 보기 드문 일로서 신흥학교의 음악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1930년 초반의 신흥학교의 음악활동에 대해서 당시 재학생인 16회 박철규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신흥학교 기독총년회가 주관하여 서문밖 교회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때 일본여학교 음악선생이 바이올린 독주를 했고, 보통과에 근무하는 교사가 피아노독주를 했으며, 우리 학생들은 합창을 하였다. 또 일반인 기독청년회가 주최하여 시내 극장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을 때는 서울에서 일류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공연했는데 이 때 신흥학교 합창단이 그 음악회에 출연하여 "저 못 가에 삽살개…"등의 합창을 해 준 일이 있다.
당시 신흥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는데 1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밴드부의 지도는 보통과 근무하면서 고등과 에서도 음악을 지도했던 나기룡 선생님이 맡았다. 이 밴드부는 학교 행사뿐만 아니라 각 교회의 행사에 참가하여 봉사하기도 하였다.
농악가락으로 부르게 작곡한 애국가곡 전주신흥학교 교가역사
삼레교회 김성식목사 사위 이경혁 애국가
신흥학교 음악활동은 신흥학교 학생들의 음악적인 자질을 길러 주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느 학교보다도 음악활동이 보장되는 신흥학교에 유능한 교사가 부임하게 됨에 따라 신흥학교의 음악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초창기의 이름 있는 음악교사로는 이경혁 선생과 현제명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이 중 이경혁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1982년 5월에 이경혁 선생의 아들인 이홍기씨가 아버지인 이경혁 선생이 우리 나라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히는 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경혁 선생은 1892년 8월 8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1911년 윤치호 선생이 영국에 다녀오면서 외국 가곡집을 처음 가져 왔는데 이때 Y. M. C. A에 음악부를 두어 초대 음악부장에 이경혁 선생을 임명하고, 그에게 가곡집을 주었다. 이 선생은 이 외국가요를 다 번역해서 각 학교에 나누어주었다.
이때 이 선생은 우리 나라 애국가 가사를 작사하여 영국민요 이별곡에 맞추어 불렀고, 이것을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이동휘 씨에게 내놓고 이분 을의 찬성을 얻어 애국가로 채택하였다. 그후 1912년에는 홍난파 씨와 안익태 씨가 바이올린을 배우러 Y. M. C. A에 들어 왔는데 이들을 이경혁 선생과 김인식 선생 두 분이 가르치다가 그해 가을 이경혁 선생은 문주 동포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1916년 3년여의 만주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고 고향에 가서 잠시 쉬다가 1917년 전북 완주군 봉동면 봉상리(필자주:12회 졸업생 오기중씨에 의하면 당시 봉동 제네리교회의 김성식 목사가 이경혁 선생의 장인이라고 함.)에서 아이들 10여 명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1918년 신흥학교의 에버솔 교장의 초청을 받아 신흥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신흥학교 재직 중 우리 나라 13개 도를 의미하는 13도(열세 집) 가극을 만들어 1922년 1월 서문밖교회에서 시연하였고, 동년 3월 1일 전주극장에서 가극 열세집 초로인생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발표된 가극이라고 한다.
1922년 12월 첫 목요일 밤 서문밖교회에 새로 들여온 피아노를 밤늦게까지 쳤던 이경혁 선생은 그날 밤 돌아와 새벽 두 시에 숨을 거두었다.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1923년 3월에 미국유학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아깝게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고, 미국 유학의 혜택은 그 후에 신흥학교에 부임했던 현제명 선생에게 돌아갔다.
또한 이경혁 선생은 숭실학교 교가와 신흥학교 교가를 비롯하여 많은 노래를 작사하였다. 1930년 3월 6일은 아들 이홍기 씨가 보통과 6년 졸업을 몇 일 앞둔 날이었다. 이날 김인석 선생이 김제에서 전주까지 걸어와 이경혁 선생의 미망인에게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애국가의 곡을 만들어 보내왔으니 그 곡에 이경혁 선생이 작고한 가사를 붙이도록 허락해달라고 하였다. 이 때 부인은 아들 이홍기씨를 가리키며"저 애가 장남이니 저 애의 허락을 받으시오"하였다. 김인식 선생은 다시 이홍기 씨에게 허락을 요청하였고, 김 선생의 바이올린소리에 맞춰 애국가를 두 번 부른 이홍기 씨는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이 애국가는 3월 7일 전주에 사는 김원전(金元全) 씨에게, 3월 8일은 임양희 선생에게, 3월 9일은 이홍기 씨의 친구 김창락(필자주 : 지정1회, 현재 미국에 거주)씨에 전파했으며, 그 후에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새 애국가를 전파했다.
위의 글은 이경혁 선생의 아들 이홍기 씨가 부친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대통령에게 올리는 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구체적 검증자료가 말살된 채 살아 있는 사람의 증언이 중심이 되었기에 객관적으로 인정받기가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우리가 이 자료를 믿는다면 이경혁 선생이야말로 우리 나라 애국가의 작사지요, 또 신흥학교, 교가의 작사자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현재까지 증언해 준 신흥학교 졸업생 중에 이경혁 선생이 신흥학교 교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흥학교 교가의 작사자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경혁 선생이 13도의 가극을 지어 공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폐교 전 신흥학교에 재학했던 김대전씨도 이를 증언하고 있으니 우리 나라 최초의 가극이 신흥학교 교사인 이경혁 선생에 의해서 전주에서 만들어져 공연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 외에도 이경혁 선생은 신흥학교 학생과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찬양대를 조직해서 서문밖교회에서 찬양발표를 하고, 또 전주극장에서 찬양발표회를 해서 그 수입금으로 서문밖교회 유치원을 설립했다고 당시 찬양대원 이었던 12회 졸업생 오기중씨는 증인하고 있다. 이경혁 선생이 사망하였을 때 이경혁 선생의 출상은 학교장으로 하였으며, 학생들이 운구하고 공동묘지까지 학생들이 상여로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경혁 선생 다음에 신흥학교 음악선생으로 오신 분은 현제명 선생이다. 현제명 선생은 김가전 목사의 소개로 신흥학교 교사로 오게 되었다고 하며, 11회 졸업생인 이영준씨가 현선생에게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현제명 선생은 본래는 영어교사였는데 음악을 잘 했기 때문에 음악을 가르쳤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국의 민요를 "숨은 노래"라고 노래를 불러 우승을 했고, 세 번째는 광주가 고향인 이원주씨가 역시 우승을 하였다. 그리고 지정2회 김현택, 김귀복 지정3회 정학송씨 등이 4중창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적은 당시 지방학교로서는 보기 드문 일로서 신흥학교의 음악적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1930년 초반의 신흥학교의 음악활동에 대해서 당시 재학생인 16회 박철규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신흥학교 기독총년회가 주관하여 서문밖 교회에서 음악회를 열었는데 이때 일본여학교 음악선생이 바이올린 독주를 했고, 보통과에 근무하는 교사가 피아노독주를 했으며, 우리 학생들은 합창을 하였다. 또 일반인 기독청년회가 주최하여 시내 극장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을 때는 서울에서 일류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공연했는데 이 때 신흥학교 합창단이 그 음악회에 출연하여 "저 못 가에 삽살개…"등의 합창을 해 준 일이 있다.
당시 신흥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는데 1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밴드부의 지도는 보통과 근무하면서 고등과 에서도 음악을 지도했던 나기룡 선생님이 맡았다. 이 밴드부는 학교 행사뿐만 아니라 각 교회의 행사에 참가하여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성계 대풍가
큰 바람이 부니 구름이 날
위세가 더욱 커져 고향에 돌아왔네
이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장사들을 구해서 사방을 지킬꼬?
가풍대(歌風臺) 입니다. 유방이 항우와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연회를 베풀며 대풍가를 불렀다는 루대 입니다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구름을 날렸도다.
해내(海內)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으로 왔도다!
이에 용맹한 장사를 얻어서 사방(四方)을 지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