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터 홈즈』
박태식 신부 / 영화평론가, 성공회신부
일본에는 죽은 생명을 기리는 토속 문화가 있다고 한다. 기억의 장소에 그 생명을 위한 돌을 하나 놓아두는 일인데 이로써 예를 갖춘다는 뜻이겠다. 영화 <굿 앤 바이 2008>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라며 돌을 건네주는 대목이 있고, 일제에 징용 갔다 죽은 조선인들의 무덤에 돌을 놓아두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사람뿐 아니라 정을 주었던 애완동물이 죽어도 같은 일을 한다. 영화 <미스터 홈즈>(Mr. Holmes, 빌 콘돈 감독, 극영화/탐정물, 미국/영국, 2015년, 104분)의 마지막에 주인공 셜록 홈즈(이안 멕켈런)가 잔디밭에 여섯 개의 돌을 놓은 후 그 가운데서 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인생에서 아쉬움으로 보낸 사람들을 기리는 예식인데 저 멀리 베링 해와 맞닿은 웅장한 벼랑이 보인다. 도대체 홈즈는 누구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셜록의 형 마이크로포트, 한 때 인연을 맺었던 우메자키 부자, 친구 존, 허드슨 부인 그리고 앤 길모트(하티 모라핸) 등등. 셜록 탐정이 마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앤은 특별하다. 여간해서 여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던 셜록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50년이나 지나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고 앤의 흔적을 찾아 재구성하는 게 영화의 기본구성이다. 그러니까 <미스터 홈즈>는 비록 탐정 셜록 홈즈가 등장하지만, 엄격히 말해 스릴러라기보다는 애정물에 가깝다.
1947년, 은퇴해 잉글랜드 서섹스 시골마을에서 노년을 보내던 94세의 셜록은 미결사건 하나를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있다. 홈스는 이 사건의 추이를 엮어 소설을 남기기로 결심하고 기억을 되살려 증거를 찾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사 보조가 있는데 이번에는 왓슨 박사가 아니라 가정부 먼로 부인(로나 리니)의 아들 로저(마일로 파커)다. 로저는 영민한 소년으로, 셜록의 말에 따르면 우둔한 부모 밑에서도 가끔은 똑똑한 아이가 나오는 법이다. 아무튼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로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과거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기억에 기대어 과거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50년이나 지난 과거사에, 나이도 90세가 넘었다면 어떤 기억도 장담하긴 힘들다. 내가 그 때 그런 말을 했든가? 남아 있는 이 증거가 그 사건의 증거인가 저 사건의 증거인가? 그녀의 남편이 사건을 의뢰하러 왔던 때가 정확이 언제였던가? 그건 그렇고 지금 내 앞에서 사건에 대해 따져 묻는 이 소년은 도대체 누구지? 셜록은 기억 회복에 좋다는 산초를 구하려 일본으로 향해 우메자키(사마다 히로유키)를 만나러 갔다가 오히려 그의 아버지에 대해 풀어야 할 숙제만 안고 돌아온다. 게다가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정성을 다해 벌을 키우지만 이제 그 이유마저 불분명하다. 논리적인 남자 셜록에겐 세상만사가 의문투성이다.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그렇게 인생이 뒤엉키게 된 것이다.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로 유명한 셜록 홈즈 탐정을 실존 인물로 그리고, 은퇴를 결심하게 만든 사건을 다시 떠올려 해결하는 과정도 재미있고, 말년에 들어 자신을 돌아보는 설정 또한 좋다. 그리고 기억에 필요한 것은 우수하고 논리적인 두되가 아니라 그저 몸에 익숙한 냄새 한번이면 충분하다는 암시도 훌륭했다.
셜록은 정신이 갑자기 맑아진 어느 날, 그간 미루어왔던 모든 숙제를 한 번에 끝낸다. 그리고 저기 도버 해협의 단애(斷崖)가 바라다 보이는 풍경 앞에서 인생의 여섯 사람을 기리며 정중하게 절을 한다. 그의 인생이 참으로 아름답게 끝을 맺는 셈이다. 오랜만에 차분한 영화를 보았다. 셜록 홈즈 개인 보다는 그저 우리 모두의 인생을 암시하는 영화로 보아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