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윅과 초기의 한국 선교> 1889년 26세의 젊을 나이로 선교 정신이 충만한 캐나다 독립 선교사 말콤 C. 펜윅이 한국땅에 발을 디딘 이래로 시작된 한국의 침례교회는 백년이 조금 넘는 역사 속에서 여덞번이나 교단 명칭을 바꾸어야 하는 수난을 겪었고, 비록 교단 분열의 쓰라림을 경험하기는 했으나 분열을 스스로 치유하는 지혜를 터득하며 2,400여 교회를 지닌 단일 교단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23세 되던 1886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중생을 체험한 청년 펜윅은 아무런 교단이나 선교회의 도움도 없이, 더구나 가족조차도 반대하는 어려움을 무릎쓰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한 선교 소명을 실천에 옮겼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 황해도 송천에 자리잡고 한국어를 익히며 전도하던 펜윅은 1893년 도미하여 3년동안 미국 보스톤의 클라랜돈가 침례 교회를 담임하던 고든(A.J.Gorden)목사 밑에서 신학과 선교 훈련을 받았다. 고든 목사는 철저한 근본 주의자로서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론에 반대하여 성전의 무오성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가까운 재림을 믿었으므로 선교에도 열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펜윅은 고든 목사 영향 아래 침례교로 전향하였다. 펜윅 선교사가 가르친 내용들은 대부분 고든 목사의 신학 사상과 유사했다. 성경 읽기를 무엇보다도 강조하였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세속 교육을 반대하였으며, 지상 천년 왕국에 대한 소망을 한국 침례교인들에게 심어주었다. 펜윅은 1896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함경도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에는 1895년에 침례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충남 공주, 강경을 중심으로 선교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펜윅의 영향으로 클라랜돈가 침례교회에 구성된 「엘라 씽 기념 선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엘라 씽 선교회는 1900년에 한국 선교 사역을 철수하며 1901년에 펜윅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였다. 이로써 펜윅은 북쪽의 원산, 남쪽의 공주,강경을 중심으로한 침례교 선교 사역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대한 기독교회> 전도자들과 개척된 교회수가 늘어나자 펜윅은 1906년 강경에서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 하였다. 총회에 해당되는 「대화회」와 지방에 해당하는 「당회」를 구성하고 펜윅 자신이 감독이 되어 중앙집권적인 감독정체 체제를 구축했다. 직분의 명칭도 아홉가지 이상이나 되는 복잡한 직급제를 형성했다.
「대한기독교회」는 약간의 노잣돈을 가지고 「만민 좋은 기별」이라는 쪽 복음을 전파하던 전도인들의 공헌으로 급속한 국내 전도의 열매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 간도 및 시베리아 선교의 대과업을 성취했다.
펜윅은 신약 성서를 침례교 입장에서 번역하여 1919년에는 「원산 번역」이라고 불리는 신약 성서를 출간했고, 1905년에는 공주에, 1907년에는 원산에 각각 성서 학원을 설치하여 전도인들을 훈련했다. 또한 「복음찬미」라는 찬송가 책을 출간하여 찬송가 수를 계속 늘려가며 찬송으로 복음을 가르쳤다.
<동아 기독교회> 「3 ·1운동」이후 교회 탄압을 시작한 일제는 「대한」이라는 명칭이 합당치 않다고 하여 교단의 명칭 개정을 강요했다. 1921년 「대한 기독교회」는 「동아기독교회」로 개칭했다. 동북아를 선교 대상으로 삼고 복음화 한다는 교단의 의지가 포함된 명칭이었다. 「동아기독교회」시대는 일제의 탄압 정책과 아울러 만주에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으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나온 기간이었다.
1921년에는 일본 헌병에게 독립군 첩자로 오인된 손상렬 목사가 순교했고, 1925년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전도하던 6인의 침례교 전도자들(김상준 교사, 안성찬, 이창희, 박문기, 김이주, 윤학영)이 공산당원에게 순교당했다. 특히 몽고에 30여개 교회를 개척하며 몽고족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던 이현태 교사는 1928년경 몽고 토족의 습격을 받아 순교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 종성동 교회에서 시무하시던 김영국 감로와 김영진 목사 형제분이 공산당원에 의해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고 장렬히 순교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1925년부터 「편공부」라고 불렸는데 이런 일제 탄압속에서도 「달편지」를 매달 발간하여 각 교회에 발송하며 신앙을 지도했다. 1926년에는 성도의 자녀들이 일제의 세속 교육을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 하여 학교 교육 폐쇄 지시를 내렸다.
1933년에 「교회」라는 명칭이 세속화 되었다고 느낀 편공부는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교회」에서 「동아기독대」로 바꾸었다. 「대」라는 명칭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무리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일제는 한국 민족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했으나 「동아기독대」는 「달편지」를 통해 신사 참배에 절대 참여치 말 것을 시달했다. 이로 인해 1935년에 5명의 지도자들이 원산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에는 편공부 내외를 사별해야 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는데, 1933년에는 편공부의 부인 하인즈 여사가 타계했고, 1935년에는 편공부 자신도 46년의 찬란한 선교 업적을 남기고 72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펜윅의 신한 사상, 교회관 및 전인적인 지도력 등은 오늘날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손치더라도, 그의 열정, 헌신, 강직한 신앙 및 도전적인 개척 정신은 침례교 후손들이 길이 본받을 점이라 하겠다.
<동아기독교> 1940년에는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이 천황군대에 저항감을 준다고 느낀 일본은 다시 교단 명칭의 개정을 요구했고, 이로인해 교단은 「동아기독교」라고 다시 개칭했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특이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1941년에 6개교파 교회들을 「만주기독교총회」라는 연합 교단으로 형성했다. 이로 인해 만주 지방의 1백여 침례교회는 형식상 한국의 교단과 분리하게 되었다.
또한 일정은 소위 「원산 사건」이라 불리는 「동아기독교」탄압을 감행했는데 1941년에는 침례교 신약 전서 6,500부의 복음 찬미 500부를 소각했고, 1942년에는 「동아기독교」의 지도자 32인을 함흥 형무소에 투옥시키고 온갖 고문과 구타를 하였다.
급기야 1944년에는 지방 법원인 함흥 재판소가 동아기독교의 해체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15개월 동안 한국 침례교는 교단 없는 교단이 되었다. 일제하의 한국 침례교는 성서 중심의 교육, 절대 타협치 않는 불굴의 신앙, 순교를 각오한 선교 정신을 그 특징으로 하였다.
1941년 당시의 동아기독교는 한국 전역에 1백여 교회, 만주에 1백여 교회, 시베리아에 47개 교회, 몽고에 수십개에 이르는 교회에 이르는 교세를 지니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의 기쁨조차도 침례교단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미약했다. 교단해체의 상처가 15개월 이나 계속되었고, 더구나 38선의 분열로 인애 북쪽의 기지를 송두리째 상실한 한국의 침례 교회는 꺼져가는 심지와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타 교단에 귀속되자는 견해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1946년 남한의 22인의 침례교 지도자들은 「교단재건회의」를 개최했고,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났다.
1946년 강경에서 개회된 36차 「대화회」에서 '감목정체'를 '회목정체'로 바꾸고 교회 직분도 대폭 변경 시켰다. '안사'를 '목사' 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집사'로 개칭했고, '교사'직은 그대로 두었다. 「대화회」도 「총회」로 개칭했다.
1947년에는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경북 예천의 일부 교회들이 불만을 품고 별도의 대화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립해 나갔다. 비록 10개에 불과했으나 동아기독교의 교세를 더욱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대한기독교침례회> 1948년 총회에서는 미국 남침례교와의 제휴를 추진키로 논의했다. 1949년 39회 총회가 강경에서 열렸을 때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고 신앙 노선을 분명히 밝혔다. 1949년 미국 남침례교 해외 선교무 동양 총무인 카슨(Cauthen) 박사가 내한하여 동아기독교가 남침례교와 다른 바 없는 신앙과 행습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1950년 존 애버내티(John A.Abernathy)선교사 부처가 내한함으로 본격적인 남침례교 선교시대가 열렸다. 1951년 충남 부여에서 개최된 41차 총회에서 교회 직분을 '목사'와 '집사'로 축소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활발해져서 1951년 의료 선교, 구호 선교, 고아원 선교를 시작했고, 1953년에는 대전에 「침례회 성경학원」을 개원했다. 1954년 성경 학원은 문교부로부터 「침례회 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또 같은 해에 현재 교회 진흥원으로 발전된 「침례교출판사」가 세워졌다.
남침례교의 선교로 인해 침례 교세는 급상승했고, 이로 인해 타 교단에서 많은 교역자들이 침례교로 전입했다. 그러자 동아기독 교 후계를 자처하는 「주류파」와 타교단에서 들어온 「전입파,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교파」 및 「선교사」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선교사들이 총회의 전도부장이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을 계기로 총회와 선교부는 대립했고, 급기야 1959년에는 「주류파」를 중심으로한 대전 총회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총회 분열로 인해 감정 싸움과 불미스러 운 일이 계속되던 중, 1963년에 문교부가 개입하여 재산 분할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에 포항측은 「한국기독교침례회 」라고 교단 명칭을 정했고, 대전측은 「기독교한국침례회」로 정했다. 이 분열은 1968년까지 계속 되었으나, 신학교를 졸업한 「신진파」들의 등장으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68년 4월 역사적인 합동총회를 개최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합동을 이룬 역사는 침례교의 상처이면서도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합동 총회는 「한국침례교연맹」으로 개칭했다. 분열 기간에 침례교회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자립 정신을 고취했으며, 침례교 부흥의 영적 기틀을 다졌다. 이 기간에 선교부도 여러 가지 기관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한국 침례교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76년 교단 명칭은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되어 웅대한 도약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한국 침례교회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기에 이르는 "침례교의 계절"이라고 불리는 10여년 동안 그 이전의 역사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활기찬 교회 성장과 교단 발전의 부흥을 가져왔다.
1976년 제 65차 총회에서 교단의 명칭이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된 이후 변혁의 모습은 그동안 영력을 잃고 믿음이 냉각되었던 교회들이 성령 부흥 운동을 통하여 영력을 되찾고, 경제적으로도 자급 자립하려는 의식의 변화에서 나타났다. 대표적인 부흥사(김충기, 오관석, 고승현, 지덕, 김장환 목사 등)들의 부흥회를 통해 교단 내외적으로 부흥하는 교단이 되었다.
특히 당시 총회와 선교부가 화합적 협동 관계로 개선되면서 한미 합동사업으로 함께 추진되던 한미 전도집회는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교단의 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교권 쟁취를 위한 교단 정치는 완전히 불식되고 오직 복음 전도와 신앙 훈련을 통한 교회 성장에만 총회와 선교부가 매진함으로써 침례교회 본연의 교회 생활과 교단 생활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1980년 수도침례신학교의 설립, 1982년 전국 남전도 연합회 설립, 1987년 해외 선교회 설립과 침례병원, 국내 선교회, 여선교 연합회, 침례회 신문사 등의 각종 기관을 통한 활발한 선교 활동은 침례교가 더 큰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열린 1989년 침례교회 선교 100주년 대회와 1990년 16차 침례교 세계대회 한국 개최는 국내는 물론 해외 모든 사람들에게 한국 침례교의 성장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99년 5월 5일에는 침례교회 110주년 행사를 같은 장소에서 10만 성도가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렀고 2000년 1월 8일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된 제 18차 침례교 세계 대회에서 전세계 115개국 201개 총회 및 연맹이 가입되어 있는 침례교 세계연맹(BWA) 총재로 한국의 김장환(수원 중앙 침례교회 담임)목사가 선출되 세계 속의 한국 침례교회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침례회 총회 본부도 반세기 동자동 시대의 막을 내리고 구로구 오류동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와같이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펜윅 선교사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지 11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의 선교에 크게 공헌하는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끊임없이 교단이 자기 성찰과 개혁을 이루고 철저히 성경의 원리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 침례교회가 이 사회를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제 2의 부흥기에 있으며, 또 다른 형제 국가인 북한 선교에 힘을 실어야 할 때가 되었다. 2000년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산하에서는 11개 기관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96개 지방회, 2,340여 교회, 4,350여명의 목회자, 68만의 침례교인이 소속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