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잎 · 마흔 여섯
학문의 세계와 윤회
프란시스 스토리/디. 디. 피. 나나야까라 지음
민병현/안진영 옮김
고요한 소리
▲ 차 례
학문의 세계와 윤회
· 철학과 윤회 5
· 유전학과 윤회 29
철학과 윤회
SAṂSĀRA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Francis Story
민병현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4. Bodhi Leaves No. 49)
철학과 윤회
불교에서 윤회는 문자 그대로 ‘재생의 순환과정을 돌고 돎’을 의미한다. 이 재생의 순환은 전 우주를 무대로 전개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 우주라는 말의 뜻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우주, 즉 물리적 우주는 전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윤회세계의 한 부분, 내지 어떤 국면을 가리킬 뿐이다.
불교가 말하는 우주는 존재들이 머무는 서른 한 개의 주처(住處)와 그 각 주처의 조건에 어울리는, 다양한 형태와 등급의 식(識)들로 일목요연하게 구성되어 있다.
불교 전문용어인 색계라든가 무색계도 전 우주는 아니니 이들도 모두 우주를 구성하는 조건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질적 요인들이 윤회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윤회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조건’이다. 원래 상식적으로 쓰일 때 조건이라는 말은 기존조건에 지배되는 ‘상태’라는 뜻과 또 가끔씩 새로운 조건들로 능히 작용하기도 하는 ‘변수’라는 뜻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결국 변화를 전제한 말이 아니겠는가.
철학자 베르그송은 변화야말로 유일한 실재(實在 reality)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불교의 시공적 우주관과 너무도 근접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윤회의 일차적 정의로 채택한다 해서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럴 경우, 윤회의 유일한 실재는 ‘변화’인 셈이다. 불교용어로는 무상(無常)이다.
자, 이제 세속적 차원의 진리[俗諦 sammuti sacca]라는 관점에서 숙고한 결과 우주라는 상대적인 실재에 부합되는 ‘변화’라는 실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해두자.
이 세속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경우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련성 속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만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만일 어떤 특정 대상을 그 주변 정황으로부터 떼어내 고립시켜서 보려고 한다면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상이 그 자체의 존재 근거를 뿌리박고 있는, 다른 대상 또는 관념들과의 관계맥락을 제쳐놓고서는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서술할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그 대상이 네모꼴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 모양을 알고 있는 다른 어떤 것들과 연결시키면서 그 대상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을 딱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대상들이 주는, 보다 부드러운 촉감과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의 색깔을 초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시각의식에 다른 느낌을 주는 대상들의 색깔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 모두가 이런 의미에서 주관적임을 면치 못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여섯 감각적 지각의 문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식(識)에 비춰지는 그 대상의 그림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는 어떤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해도 괜찮은 것일까? 만약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과는 동떨어진 어떤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러한 어떤 다른 것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적록 색맹인 사람은 우리 눈에 녹색으로 비치는 것을 붉은 색의 물체로 볼 것이다. 다시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녹색의 대상이 한 나뭇잎이라 치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녹색 잎은 시들어 붉은 색을 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것의 모양, 조직, 색깔, 그 밖의 다른 성질들이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처럼 붉은 색의 시든 잎과 녹색의 싱싱한 잎 사이에는 동일성을 밝혀 줄 요소가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잎으로 본다.
달리 말하면, 잎이라 불리던 그 대상은 이미 변해버렸고 지금 우리는 그 대상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변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사정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적용되며 사람이란 존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변화 과정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담당하는 ‘당체’는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anattā)’의 개념이다.
플라톤 역시 이 점을 주목했다. 그는 ‘질(質 quality)’이라는 것은 변동하고 있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질에 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질을 지닌 것은 항상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해 가는 도상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것‘이다(be)’라고 할 것이 전혀 못되므로, ‘되어 있는(being)’ 세계라기보다는 오히려 ‘되어 가는(becoming)’ 세계라고 보아야 한다는 불교적인 견해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의식에 나타난 이 친숙한 세계에 관해서 우리는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는데, 이는 바로 이 세계가 완벽하게 실질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결론짓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불교 사상과 완전히 합치된다.
불교에서는 ‘존재’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한문에서 유(有, 존재)라고 옮기는) 빠알리어의 ‘바와(Bhava)’는 ‘되어감’을 뜻하지 ‘되어 있음(존재)’을 뜻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우주라는 개념을 초월과 내재라는 양 측면으로 나누는 극단적 방편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는 다시는 연결시킬 수 없을 정도로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플라톤도 ‘실재(the Real)’가 ‘비실재(the Unreal)’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 초월이라는 본성 그 때문에, 실재는 어떤 것과도 연관될 수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인도의 베다에서 말하는, 사물들의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정수(精髓)인 초월적 자아라는 개념도 인간 존재의 현상적 속성들인 육체, 정신, 성격, 기질, 감정, 기타 심리적 요소들과는 어떤 방식으로도 연결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정수 같은 것이 있다면 영원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고 있는 인간 존재와는 어떤 관련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으로 나타난 자아가 초월적 자아와 동일화 될 수 있는 영혼과 같은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일상세계의 나뭇잎이나 다른 대상에서 보듯이 현상으로 나타난 자아라는 것은 근본적인 존재나 실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무아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나뭇잎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변화’일 뿐, 더구나 변화하는 ‘것’은 부재하는 그러한 변화의 인과적 과정이다.
죠드 교수는 그의 저서 『철학』에서 “이 세상은 불완전하다. 참으로 악(惡)과 고(苦)로 가득 차 있다. 더구나 변화와 쇠퇴로 채워져 있어서 플라톤도 말했듯이 세상을 전적으로 참된 것으로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인도철학을 전혀 공부해 본 적이 없다는 사람에게서 무상·고·무아의 불교사상이 이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무상·고·무아[본질적 실재의 결여]라는 이 세 가지 성질에 의지해서 윤회를 알게 되고 또 알고 있다. 이 성질들은 서구철학에서 말하는 ‘질(質)’에 속한다. 그러나 여태껏 우리가 검토했던 변화과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이들의 주인이 되어 줄 어떤 ‘당체’라는 기체(基體)가 있을 수 없는 그런 ‘성질’들인 것이다. 즉 변화가 있으되 변화하는 당체가 없듯이 윤회에서도 성질들은 있으되 그 성질들을 지탱해 줄 그 어떤 당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론에서는 어떤 현상세계도 실존하지 않으며 그 현상세계란 단지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론은 물질적 세계가 유일한 실재이고 마음과 식(識), 분별과 의지는 단지 물질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둘 다 현실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 간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초월’과 ‘내재’의 이론이 범한 모순을 똑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물론의 경우, 앞에서 이미 따져 보았듯이 물리적 현상이나 그 현상을 이루는 질료적 요소에는 본질적으로 실재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 관념론도 진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우주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합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공통 기준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버클리가 주장하는 식의 관념론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각 개인은 정신병자처럼 자신이 관념적으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그 세계 특유의 행동법칙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관과 다른 사람의 세계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질 터전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관념론은, 타자의 존재란 그 자체가 단지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려 든다. 이는 마치 친구와 헤어져서 그가 우리의 시각·청각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인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가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는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헤어지자마자 그가 존재하기를 그친다면 우리 역시 그의 인지 영역 밖에 있게 되어 그 즉시 당연히 존재하기를 그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기를 계속해 왔고, 우리 경험의 흐름이 그동안 그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계속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불교철학은 관념론[유심론]과 유물론이라는 이들 양 극단을 피한다. 비록 관념론적 입장에 기우는 면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불교의 입장은 반(反)실체론적이다. 영구히 자존하는 질료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구히 자존하는 정적(靜的)인 물(物), 선행(先行)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가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대상과 접촉하게 되면 비로소 자극에 의해 움직일 뿐인, 마음이라 알려진 그런 것도 없기 때문에 유심론도 거부한다.
상좌부 교의에 따르면 마음은 오히려 제근(諸根)과 대경[정신적 기능들과 그들의 활동범위]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산물로 간주되는 편이다. 빠알리어의 ‘마노(mano 意)’라는 말의 어근은 ‘만(man 재다, 측정하다)’인데 계산하다, 평가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전문적 용어로 ‘마노’를 ‘이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냥 ‘찌따(citta 心)’와 같은 의미로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전 우주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고 마음을 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런 뜻을 밝히는 경우에는 ‘찌따(citta)’란 단어를 쓰지 ‘마노(mano)’는 쓰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찌따’ 대신에 ‘윈냐나(viññān 識)’가 쓰이는 수가 있다.
후대에 전개된 모든 불교 부파들의 근원을 이루는 주요 학파로 상좌부(특히 유부)와 중관학파, 유식학파 셋을 들 수 있다. 이 중 유부는 외부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인 제법(諸法)의 실존을 믿었다. 두 번째의 중관학파는 현상세계와 그를 구성하는 제법을 일언지하에 부정하고 따라서 제법을 분류하려는 수고도 아예 하지 않았다. 이 두 번째 학파는 거의 버클리 류의 관념론에 가깝다고 하겠다. 세 번째 유식학파는 이 우주가 의식의 사출(射出) 내지 반사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인 존재성은 지니는 것이며 특히 제법은 마음이 펼쳐지는 장(場)에 다름 아니라고 믿었다.
양 극단의 함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 이들 중에서는 마지막의 유식론인 것 같다. 또 오늘날의 우주에 대한 지식과도 가장 일치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세계를 구성하는 제일차적 요소로서의 제법은 우리가 그들을 알아채든 말든, 그에 관계없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네 가지 국면을 거치며 존속하도록 그 법들을 지탱해주는 에너지는 일종의 정신적 힘이며, 또 그 법들의 존재도 오직 일시적이고 상대적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감관에 의해 지각하는 현실세계라는 객체가 우리의 의식에 느낌을 남기는 외부적 사건들의 연속과 반드시 친연(親緣)관계라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사건들의 연속은 실현되고 있다. 시공 복합체인 이 윤회의 세계에서 실제로 그와 같은 사건들이 따로따로이되, 그러면서도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서로 결부된 채 연속적으로 항상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 진실인 진제(眞諦)와 대비되는 상대적 진실인 속제(俗諦)는 무명(avijjā)에 기초한 것이다. 우주는 상대적 진실이라는 의미에서 유부의 주장처럼 실재적이다. 한편 궁극적 진실이라는 의미에서는 우주는 일체 실존성을 띠지 않는다. 그래서 중관학파의 주장도 맞다.
진실을 좀 더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이 다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둘 다 각기의 차원에서는 맞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세 관점이 모두 일치되는 곳에서 보면 개개단위로 보거나 집합[蘊]으로 보거나 법을 생기(生起)하도록 만드는 원인은 생각, 그리고 의도적 행위[業]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될 여지는 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성질’ 즉 법은 분명히 존재하고, 또 한편 이 법을 논리적 형태로 구성시키는 기반이 되는 상대적 의식[識]이라는 공통된 차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을 윤회의 그물망 밖으로 건져내어 법을 전체로서 조망하고 그 근원을 파악하는 일은 철학도 과학도 못 한다.
법을 전체로서 조망하고 그 근원을 파악하는 일은 오직 선(禪)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불교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궁극의 진리가 사고체계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계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학자들끼리 우주의 본질을 놓고 논란이 분분했지만 어떤 결론도 도출해내지 못 했다. 그리스인들도 철학을 했지만 막상 철학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초월론적 사색은 언제나 그들의 진짜 종교, 삶 그 자체에 대한 따뜻하고 감각적인 사랑이라는 진짜 종교에 얹혀 지내는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는 식객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세시대의 그리스·로마 고전 주석가들은 오늘날에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신학상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논쟁을 일삼았다. 그리고 불교의 속제와 진제라는 개념도 결국은 플라톤의 초월과 내재라는 관념을 표현한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하며 그들의 난점과 결함을 그대로 안고 있는 것이라고 시비를 건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불교에서는 철학이란 단지 지적 훈련이고 상대적 진리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논리적 규칙에 따르는 경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실재를 현실화시키는 더 높은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관념적 사유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직관의 길이다.
불교철학은 현상계로서의 우주의 구성요소들을, 각 시대의 최고 지성들이 쓴 방법론을 취하여 매우 정밀하게 분석한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이 무상·고·무아라는 윤회의 특성을 드러내는 일 이상을 할 것처럼 표방하는 일은 결코 없다. 요컨대 불교철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명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계를 도는 것, 이것이 윤회다. 윤회는 상대적인 진실이다. 따라서 무위법(Asaṅkhata Dhamma)이라는 절대적인 진실을 발견하려면 당신은 생각과 사변이라는 상대성의 것들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순화시키고, 마음의 들뜸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갈애를 종식시키는 길이다.
유전학과 윤회
Heredity Beyond Materiality
디. 디. 피. 나나야까라 지음
D.D.P. NANAYAKKARA
(Newfoundland Canada)
안진영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79. Bodhi Leaves No. 83)
유전학과 윤회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것을 유전학은 왜 설명하지 못하는가.
생물학은, 유전학의 근본원리를 구축하고 있는 단계에 있거니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생명현상에 있어서의 비동질성을 설명해 줄 합당한 이론을 정립해야 할텐데 그에 필요한 과학적 정보를 제공함에 있어서 아직도 여러 면에서 미흡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머리가 좋은 부모한테서 왜 정신박약아나 지진아가 태어나는가? 어떤 사람은 건강을 타고 나는데 어떤 사람은 왜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왜 남보다 더 오래 사는가? 어떤 사람은 왜 카리스마적 자질을 타고 나는가? 어떤 사람은 왜 재주를, 심지어는 놀라울 정도의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나는가?
이 밖에 그와 유사한 많은 질문에 답하려면 그러한 답변의 토대가 될 유력한 근거를 마련해야 할텐데 생물학은 유전학을 토대로 하거나 그 외의 다른 발생학적 고찰을 근거로 해서 그런 증거를 공급하는 데 실패해 온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어떤 물리적 생화학적 조건하에서 만나는 것, 그것이 자궁 내에서 인간 생명의 배아가 생겨나게끔 만든다는 것이 인간의 생식에 대한 생물학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불교적 사유에 따르면 비록 생물학적 조건이 충족되었다 할지라도 이 정자 난자의 융합물을 ‘재생식(再生識)’이 활성화시켜 줄 때까지 인간 생명의 배아는 결코 배태될 수 없다. 불교는 재생 순환과정에 연기적 연속성을 부과하는 필수불가결의 요인이 바로 재생식(再生識)임을 단언하는 데 반해 생물학적 사고는 그런 첨가요소가 유전과정에 기본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처님이 직접 식이야말로 마음뿐 아니라 육체적 존재까지 포함해서 이 두 가지 모두의 근본적 원인이자 조건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그럼 식, 특히 재연결식을 어떤 문맥에서 이해해야 하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것 같다.
열, 빛, 소리, 자력, 전기 등이 현상적 활동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물리적 에너지의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 내지 알아차림[識], 지각 내지 인식[想], 감각 내지 느낌[受], 의도 내지 의지가 빚는 정신적 구성[行] 등도 인간의 활동으로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심적 에너지의 여러 형태이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은 심적 에너지와 물리적 에너지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조건으로 작용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렇다면 이 심적 에너지는 물리적 에너지와 연관이 될지언정 떼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원성은,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상대적이며 조건 지어진 존재, 다시 말해 연기적인 존재를 시종일관 관통하고 있다. 물리적 에너지는 인간의 체내에서 열 또는 복사 에너지[火大]와 운동[風大]으로 존재한다. 물리적 에너지가 원래 그 성질상 재생, 유(有) 또는 변화라는 인과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속성을 밀어 붙이는 강력한 힘인 것과 똑같이 심적 에너지인 식(識) 또한 순환적 변화과정을 통해 그 자체의 지속성 또는 전진적 추동력을 줄곧 발휘하는 강력한 힘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심적이건 물적이건 모든 형태의 에너지가 공통되게 가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찰나적 생-멸-생(生-滅-生)의 형태로 연속되는 점이라고 하셨다. 즉 어떤 일정량의 에너지가 물적 이든 심적이든 재생(再生) 또는 재유(再有)라는 목적을 위해 생기했다가 쇠하여 소멸한다는 것이다. 생기(生起)하는 찰나 그것은 이미 그 자체의 휴지(休止)의 조건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며, 휴지의 찰나는 다음 생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 가운데 인-과-인(因-果-因)의 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과거의 찰나는 현재 찰나의 생기에 대해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의 찰나는 미래찰나의 생기에 조건으로 작용한다. 현재는 지나간 그 과거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은 현재가 그 과거를 배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미래도 과거나 현재의 재판이 아니지만 그 둘과 무관한 것도 아닐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서로 차별을 짓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은 가운데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속체인 것이다.
이렇듯 현재의 찰나가 엄격한 인과적 일관성 속에서 과거 찰나에 의지해서 생기하고 있는 이상, 그리고 현 찰나가 과거 찰나와 같은 것은 아니라도 또한 이질적인 것도 아닌 이상, 어떤 생각도 다시 말해 어떤 심적 에너지의 단위도 인과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엉뚱하거나 모순되는 단위로 비약하는 일 역시 있을 수 없다.
모든 심적·물적 에너지 단위들은 전부 연이생(緣已生)을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심찰나는 강하든 약하든 간에 그 뿌리를 과거에 두고 있으며 또 그 나름으로는 뒤를 잇는 다음 찰나를 다소간에 조건 지운다. 거듭 말하지만 현재가 과거와 똑 같을 수 없지만 과거와 무관하게 생겨난 것도 아니다. 미래 역시 과거나 현재와 똑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관할 수도 없다.
여기서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과거를 구성하던 많은 요소들이 현재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며, 또한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도 투영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과적 연속성이 튼튼히 견지되는 가운데 다양한 변화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신의 노력과 올바른 견해를 통해 현 찰나에다 꽤 훌륭한 윤리적 선(善)을 실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의지작용 또는 자발적 의지행위라는 정신적 형성물이 인간의 탄생이라는 생명현상에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윤리적 면과 연관되는 의지작용을 부처님은 업(業)이라 부르시면서 이 개념을 다듬는 데 많은 정성을 쏟으셨다. 모든 의도적 행위가 하나같이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어떤 생각과 연결되어 있고 또 그 생각은 어디까지나 각자가 스스로 만들고 꾸며낸 것인 이상, 자기 스스로 미래의 인생행로를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자신의 의도적 입력 행위에 의해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들과 동일하지도 상이하지도 않은 가운데 ‘인-과-인’ 형태로 지속하는 것, 이것이 조건 짓고 조건 지어지는 상대성의 세계가 작동해나가는 기본원리이다.
이러한 상대성의 원리, 다시 말해 연기의 원리에 관해 부처님이 공식화하고 상세히 설명하신 것이 불교교리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의 상대성 세계를 지배하는 이 보편적 인과율에 당연히 생명과 존재론적 연속성도 묶일 수밖에 없다. 앞선 원인, 정신물리학적으로 조건 지어진 이 원인이 띠고 있는 어떤 성질은 그 원인에 뒤따르는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지금이라는 말의 ‘현재성’이 풍기듯, 과거는 얼씬거리지도 못할 것 같고 그래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듯한 분위기가 실제로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보일 것이다.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또 현재와 계속 상호 작용하고 있는 정신 물리적 에너지의 단위들이 미래성 속에 인과적 일치성을 어김없이 정확하게 현출시킴으로써 인간의 미래를 모양 짓는다. 이처럼 미래는 임의적으로나 우발적으로가 아니라, 우연이나 숙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계획이나 유일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인-과-인의 토대에 입각해서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적 이어나감에는 공간-시간-운동의 연속과 연관될 수 있는 절대적 기원으로서의 출발 지점도, 태초의 시작도 있을 수 없다. 현 존재에서 정신 물리적 에너지 단위들이 찰나적으로 생-멸-생 하며 생명 또는 인과적 지속성을 견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현재 육신의 구조 내에서의 그들의 상호 작용의 마지막 찰나, 불교에서 죽음으로 간주하는 그 찰나가 새 탄생에서 육신의 계승자 내에 정신 물리적 에너지의 첫 단위의 생기를 조건 지운다.
지금 이 생존체 내에 에너지의 단위들을 찰나에서 찰나로 엮어주는, 또는 원인에서 결과로 다시 결과에서 원인으로 엮는 결속체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이 생과 다음 생을 윤전(輪轉)하는 실체적 양(量)과 같은 것, 불변의 잔류체 또는 절대적 기층(基層)이라 불릴 수 있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아’ 또는 ‘영혼’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그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조건 지어진 에너지도 조건 지어진 존재체의 모든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물질과 에너지로 분해하고 또 분해하면 결국 자아의 공(空)함이랄까 영원한 자성의 공(空)함으로 귀결된다’고 말씀하셨다.
업에 의해 결집 강화된 저 연결력 때문에 현 생명체의 마지막 조건 지어진 에너지량[業識]은 인과적으로 자기에게 가장 맞는 성질의, 그래서 가장 잘 발육 존속할 수 있는 자궁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아무리 남녀가 물리적 및 생화학적 조건으로 만나더라도 재(再)연결식 내지는 심적 에너지가 자궁에 들어가서 그 세포들의 결합이 결실을 맺도록 이끌어줌으로써 인과적 연속성을 촉진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오로지 그런 연후에만 새 생명이 연기법에 따라 시작·성장·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복제나 시험관 아기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법하다. 아직까지 인간복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없으니 가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또 아기가 시험관 안에서 태어난 적도 없다. 지금까지 진행된 것은 아기가 태어나도록 인공적인 환경에서 정자와 난자를 수정·결합시켜 그 수정란을 인간의 자궁에 이식하는 정도이며 그렇게 해서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이런 실험이 재연결식이 생명 탄생에 있어 필수 요소라는 불교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퇴색시키는 것은 아니다. 탄생의 조건이 되는 유전학적 요인들이 적합한 환경 조건하에 있기만 하면 어디든지 재연결시키는 정신 물리적 힘이 들어가서 인과적 연속을 형성시키고 지속하게끔 한다. 남녀의 성적 결합을 거쳐서 아기가 태어난다할지라도 재연결 식이 남녀 중 어느 쪽을 통해서도 오는 것이 아닌 까닭에 아기는 부모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와 염색체만을 근거로 삼고 있는 한 생물학은 인간 생명현상의 비동질성을 설명해 줄 만족스런 해석을 제공해 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좋게든 나쁘게든 미래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의식의 흐르는 방향을 결정해주고 그 의식이 서로 같고 다름에 따라 비슷한 것끼리 모이게끔 만드는 개인의 의지적 활동, 즉 업(業)이다. 사람이 각양각색으로 태어나는 사실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탐구 하다 보면, 불교의 업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 ‘원인-결과’의 인과론이, 생물학은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는 요소들을 보충해 줌으로써 현재의 생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내실 있는 보완을 해주게 될 것이다.
프란시스 스토리(아나가리카 수가타난다 : 1919-1971)
영국출신. 런던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다가 광학 연구로 전환. 비교종교학 공부 도중 16세에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 2차 대전에 인도에서 군 복무 중 사르나트를 방문하여 마하보디 협회와 연관 맺음.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종교생활에 전념하기 시작. 상가라타나 장로로부터 ‘프리야달시 수가타난다’라는 법명을 받고 재가 수행자가 됨. 1954년 미얀마 양곤에서 불자협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활약하다 건강 때문에 스리랑카로 옮김. 골수암으로 투병하다 영국에서 임종. <고요한 소리>에서 이미 번역 출간한 그의 작품으로는 보리수잎 6 :『불교의 명상』, 보리수잎 13 :『불교와 과학, 불교의 매력』, 보리수잎 25 :『큰 합리주의』, 법륜 15 :『사성제』가 있음.
디.디.피. 나나야까라
캐나다, 뉴펀들랜드 출신. 이 글의 저본인 BL 83(BPS)에는 「윤회와 유전학 Heredity Beyond Materiality」과 「인과와 도덕적 책임 The cycle of cause-effect-cause(Karma -Vipāka-Karma) and moral responsibility」이 함께 실려 있는데 두 번째 글은 보리수잎 4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인과와 도덕적 책임』(〈고요한소리〉간행)으로 이미 번역, 출간되었음.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보리수잎 46
학문의 세계와 윤회
2006년 10월 25일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 프란시스 스토리·디.디.피.나나야까라
옮긴이 : 민병현·안진영
펴낸이 : 한기호
펴낸곳 : (사)고요한 소리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우 110-300)
전화 : 02)739-6328, 725-3408 ·전송 : 02)723-9804
홈페이지 : http://www.calmvoice.org
부산지부 051)513-6650·대구지부 053)755-6035
출판등록 : 제 1-879호 1989. 2.18
ISBN 89-85186-72-8
값 500원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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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과율의 세계에 살면서도 윤회가 선뜻 믿기지 않는 이 중생에게 좋은 법문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전향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