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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 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예수는 가장 오래된 비밀 학파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 학파는 에세네 (Essenes)라고 불린다,
에세네 학파의 가르침은 순수한 베단타(Vedanta, 모든 것은 환상이고 선과 악은 하나이며
궁극적인 진리 역시 하나임을 가르 치는 힌두교의 학파 이름, 여기서는 이 학파의 가르침인 궁극적인 진리를 뜻한다)였다.
기독교인들이 서른 살 이전의 예수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을 조금 가지고 있을 뿐이고,
서른 살부터 그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인 서른세 살까지의 기록만 가지 고 있다.
그것도 약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와 같은 현상은 우연한 일이 아니 다,
그것은 오랜 준비가 필요하며 아무 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란 존재는 이 삼십년 동안 끊임없는 준비를 거친 후에야 나타나게 되 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 이집트에 갔었고 그 다음에는 인도에 왔었다,
이집트에서 그는 비법의 가장 오래된 전통들 중의 하나를 배웠고,
인도에서는 붓다와 베다, 그리고 우파니샤드의 가르침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준비를 거쳤다, 그러나 그 준비 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동안 이런 학파들 속에서 이름 없는 제자로 배우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의도적으로 그런 기록들을 삭제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다른 사람의 제자였었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가 준비하고,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으로 는 하느님의 아들은 완전히 준비된 채로 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준비된 채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가 완전히 준비되어 있다 면 그는 올 수 없다.
그대들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로 세상에 온다,
완전한 것은 간단히 이 세 상에서 사라진다, 완전한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 은 법칙 자체를 벗어난다,
일단 누군가가 완전해지면 그의 모든 삶은 수직적 인 차원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대들은 수평면으로 움직이고 있다,
A에서 B로, B에서 C로, 그리고 D로, 그렇게 Z까지 움직여나간다,
그것은 하나의 선상에 있는 수평면이며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불완전한 영혼의 길이다,
그것 은 마치 하나의 강물이 산에서 평원으로 그리고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나의 수평적인 선상에서, 언제나 그 자체의 차원을 유지하면서 흐르고 있다.
완전한 존재는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움직인다,
A에서 B로 가지 않는다, A에서 A보다 높은 곳으로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움직여간다,
수평선상에 서는, 수평선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존재는 단순히 사라져버린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완전한 사람을 찾지만 그는 거기에 없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만 그는 그곳에 없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지만 거기에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여기를 바라보지만 그는 여기에도 없다,
왜냐하면 수직적 진행의 새로운 선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높이높이 올라간다, 그는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영원은 수직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한 지금이다, 거기에는 미래가 없 다,
그대가 하나의 선 안에서 움직인다면 거기에는 미래가 있다,
그대가 A에 서 B로 간다면 B는 미래 속에 있다, B가 현재가 될 때 A는 과거가 되고 C 는 미래 속에 있다,
그대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대의 현재의 순간은 단지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B는 C로 되고, D는 E가 된다, 모든 것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대의 현재는 단순히 기준점이고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그대가 어떤 것을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다,
완전하게 된 영혼은 전체가 다른 차원 에서 움직인다.
A에서 A1으로, A2로 A3로...... 이것은 영원이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에 산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세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그대들은 불완전해야 한다,
옛날 경전에 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거의 완전하게 되면-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그 사람은 세상에 다시 돌아와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어떤 불완전한 것 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마 크리슈나는 음식에 집착해 있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먹는 생각만 할 정도로 음식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도중 에도 기회만 생기면 부엌으로 가서 그의 아내에게
“새로운 음식 좀 없소? 오늘은 어떤 음식을 준비하고 있소?“ 하고 묻곤 했다.
그의 아내조차도 수없이 당황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파라마한사 데바(깨달은 성자에 대한 경의어), 그런 행동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면 그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제자들도 당신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파라마한사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죠?’“
그는 음식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 사르다가 음식을 가져올 때면 그는 즉시 일어나서 그녀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밥상을 살펴보곤 했다,
그때 그는 베단타, 즉 브라마에 대해서는 모두 다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깨달은 사람이 그토록 음식을 탐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물었다. “왜 그러는 거죠? 거기에는 무슨 이 유가 있는 것 같아요.“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날, 나는 사흘밖에 살지 못할 거요,
내가 이런 짓을 그만두는 날, 그것은 내가 단지 사흘만 더 산다는 신호요.“
그의 아내가 웃었다, 그의 제자들도 웃었다, 그들은 말했다.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들은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났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들어왔을 때 그는 침대에 서 쉬고 있었다,
그는 돌아누웠다, 보통 때 같으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가 음식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사흘 후에 죽을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음식 쟁반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쟁반을 떨어뜨렸다, 그리 고 울기 시작했다,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들 모두가 내가 이러 기를 원하지 않았소?
이제 그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사흘 동안 여기에 있을 거요.“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죽었다,
죽기 전, 그는 단지 자신 속에 불완전한 부분을 남겨놓기 위해 음식에 집착했던 것이고 그
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남아 사람들을 도우려 했다고 말했다.
많은 스승들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
그들 안에서 무언가 완성되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들은 단지 이 세상에 남아 있기 위하여 어떤 불완전한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들에게 맞지 않는다,
모든 사 슬이 풀리면 그들의 배는 다른 세계를 향하여 떠나게 된다,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슬 하나를 남겨두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를 남겨둘 것 이고, 자기에게 있는 어떤 약점을 선택하여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원은 완성되지 않은 채 틈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틈을 통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 다시 머물러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힌두교도, 불교도, 그리고 자이나교도들이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많은 스승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아주 깊이 알고 있다,
원이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그대의 눈에서 사라 져버린다,
그것은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이제 시야의 선상에 있지 않다,
그것 은 그대를 넘어서 있다, 그대들은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 해서 모든 기록들을 없애버렸다,
하지만 예수는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구도 자였다,
그는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한 알의 겨자씨에 불과했다,
그는 나무가 되었다, 아주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수많은 새들이 그 에게 와서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한 알의 겨자씨였다.
이것을 기억하라, 마하비라, 붓다, 그리고 크리슈나 역시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 났다는 것을,
탄생은 불완전에 속하는 것이다, 완전한 탄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
그대가 완전하다면 더 이상의 이동은 없다.
예수는 이집트와 인도로 돌아다니면서 이집트의 밀교 집단, 붓다와 크리슈나의 가르침,
그리고 힌두교의 베단타 등에서 배웠기 때문에 유태인들에게 아주 이질 적으로 보였다,
왜 그는 유태인들에게 그토록 낯설게 보였을까?
왜 유태인들은 그에게 동화되지 못하였는가?
왜 그들은 그를 용납하지 못한 것일까?
그들은 아직도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어떤 이질적인 것, 이국적인 것을 가져온 것이다, 그는 유태 민족에게 속한 것이 아닌 어떤 비밀들을 소개했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힌두교도들은 붓다를 받아들였다, 그가 말하는 것들은 이질적인 것이 아 니었다,
그는 힌두교 교리에 반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것 일 뿐이다,
그는 체제나 조직, 그리고 추종자들의 잘못을 질타했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그는 힌두교 교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힌두교도들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낯선 것도 이질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하비라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힌두교도들은 그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는 혁명가일 수도 있으나 힌두인 으로 남은 것이다,
붓다는 혁명가일 수도 있으나 그 역시 한 사람의 힌두인 이었던 것이다.
반항아였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힌두인에게 속해 있었다, 크게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는 혁명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 또한 유태 민족에 속 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예수의 가르침이 유태 민족에게 속하지 않는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서 이런 낯선 가르침들을 배워왔는가?
이집트로부터, 그리고 인도로부터 배워온 것이다.
인도는 모든 종교의 원류이다, 심지어 힌두교에 반대되는 종교까지도 그 근원은 인도이다,
왜 인도가 모든 종교의 원천이 되었는가?
인도는 가장 오래된 문명이며, 인도의 모든 정신은 끊임없이 종교적인 차원 에서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는 모든 종교적인 비법들을 알게 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비법은 없다.
사실상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종교에 관한 비법들을 인도에 가르칠 수가 없었 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아내었 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종교라는 여정 전체를 완성시켰다.
그러므로 종교에 관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지 그 근원은 인도라고 생각해도 좋다,
마치 그리스 정신이 과학의 원천인 것처럼 말이다,
모든 과학의 발달은 논리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정신인 그리스 정신에서 비롯되었고,
모든 신비 주의는 인도로부터 왔다,
그리고 오직 두 가지 형태의 정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
하나는 그리스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 정신이다.
그대가 만일 기본적으로 그리스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인도를 이해하 기란 전혀 불가능하다,
불합리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 두 증명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무의미하게 보이기 때 문이다.
인도인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한 이방인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의와 명확한 구분과 분류를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모순의 법칙, 즉 모순되는 둘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을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겉으로 보기 에는 그가 옳다.
힌두교인들은 모순을 믿는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살아 있고 동시에 죽 어 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그것들은 명확히 경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신은 수학적이고 힌두 정신은 신비적이다.
모든 신비주의는 인도에서 온다,
마치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신비주의는 인도에서 떠오른다, 인도가 그 심장이다,
예수의 이 경전 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대는 우파니샤드를 알아야 한다.
뿌리가 거기에 있다, 예수의 이와 같은 말을, 이와 관련된 기록을,
그대들은 구약 성서나 다른 유태 전통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찾지 못한다,
유태인들이 예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는 거듭 말했다. “나는 옛 경전을 반대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 성시키러 왔다.“
그러나 어떤 경전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구약 성서를 완성시키러 온 것이라면 그의 말은 잘못된 것 이다,
왜냐하면 그는 거의 언제나 구약 성서에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는 복수에 의존한다, 아버지 하느님은 복수하는 신이다,
두려움은 구약 성서와 유태 종교의 기반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는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을 두려워할 수는 없다, 사랑이 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사랑을 할 수가 있겠는가?
두려움은 사랑에 대한 독이며 죽음이다,
그대가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겠 는가?
두려움은 미움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랑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구약 성서 속에서 종교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고,
신약 성서에서 종교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누가 너의 눈 하나를 다치게 하거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려라, 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만일 누가 너의 뺨을 때리거 든 다른 쪽 뺨마저 내주어라.“
이것은 전혀 유태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 면 예수가 “나는 경전을 완성시키러 왔다”라고 했을 때 그는 어떤 경전을 말하 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가 인도에 있으면서 “나는 경전을 완성시키러 왔다”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가 바로 그가 완성시키 려고 온 경전이기 때문이다,
담마파다(법구경), 붓다의 이야기가 곧 그가 완성 시키려고 온 경전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랑과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유태 경전들은 사랑과 자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들은 두려 움과 죄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수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들은 “그는 우리 의 경전을 완성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대들은 구약 성서의 어디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 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대들은 우파니샤드나 기타(Gita),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 이러한 구절들을 수천 개나 발견할 수 있지만,
구약 성서 속에서는 단 한 줄도 찾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경전을 그가 완성시키러 왔다는 말인가?
그는 어떤 다른 경전, 어떤 다른 전통을 완성시키러 온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완전히 베단타이다,
그러므로 먼저 베단타의 내용을 이해하라,
그러면 예 수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유태인으로 태어났고, 유태인으로 살았고, 유태인으로 죽었다,
그 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에 관한 사실일 뿐이다,
그것을 제외할 때 예수는 순수한 힌두인이었다.
그리고 그대들은 예수보다 더 순수한 힌두인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 종교의 바탕이 곧 그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구조를 그 바탕 위에다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 바탕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유태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이 우주는 창조되었다, 그리고 피조물은 절대로 창조주가 될 수 없다,
그림이 어떻게 화가가 될 수 있는가? 시가 어떻게 시인이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일 시가 시인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시는 미쳐버린 것이다,
그리 고 만일 그림이 자기가 화가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그림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창조주이다,
그리고 이 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공간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대는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은 될 수 없다.“
이것이 유태인들이 가진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은 이것 을 유태인으로부터 배웠다,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보다 더 유태적이다,
사고 방식에 관한 한 모하메트는 예수보다는 모세에 더 가깝다,
모하메트는 힌두 교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베단타에서는 말한다. “신은 창조물이다, 신과 창조물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다,
그는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것처럼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그 관계는 마치 춤추는 자와 춤의 관계와 같다,
그들은 하나가 된다, 춤추는 자가 정지하면 춤은 사라진다.
그리고 춤이 사라지면 그는 더 이상 춤추는 자가 아니다,
우주는 분리되지 않 았다, 그것은 하나이다,
우주는 시간 속에서 창조되는 것도 시간 속에서 끝나 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매순간 창조된다, 그것은 매순간 창조되고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바로 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움직이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신은 창조한다,
매순간 그는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창조는 그의 움직임이며 춤이다.“
이것이 바로 우파니샤드에서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비밀을 알게 된 구 도자는 “나는 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유태인들은 절대로 “나는 신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신성 모독이 며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신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 일 개의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겠다는 것,
노예가 주인이라고 우기는 것 등은 그 들에게는 에고이즘인 것이다.
베단타에서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이 유태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에고이즘이 되는 것이다,
베단타에서는 이것이 에고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신이다“라는 느낌은 ‘나’가 완전히 사라질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더 이상 거기에 없고, 집이 텅 비고, 빈 배가 될 때,
돌연 그대 자신이 전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대가 거기에 있다면 어떻게 그대 자신이 전체 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거기에 있다면 그대는 하나의 영역을 가지는 것이고 하나의 개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주장은 거짓이다,
‘나’가 사라지 고 에고가 떨어져나갈 때, 그때 그대는 자신이 전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수의 주장은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다.
먼저 이것을 기억하라, 피조물과 창조주는 둘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이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일반 수학에서는 부분은 절대로 전 체와 같지 않으며, 부분은 절대로 전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계론적 사 고방식에서 보면 그것은 그렇다,
그대의 차에서 부속품을 하나 떼어내 보라, 그 부속품은 차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대의 손을 잘랐다고 하자, 그 손은 그대가 될 수 없다,
하나의 부분은 전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일반적인 논리이다,
그리고 만일 세계가 기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베단타는 존재계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것이라고 말한 다,
유기체에서는 다른 형태의 수학이 적용된다, 부분이 곧 전체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신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분이고, 신은 전체이기 때문 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분이 전체가 될 수 있 는가? 그것은 아주 불합리하게 보인다,
만일 나와 존재계 사이에 기계적인 관계가 있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거기에 유기적인 관계가 존재한 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따라서 예수는 유태인들에게 이해될 수가 없었다
그대는 완전히 그대 자체로만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 다,
그대는 하나의 섬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바다의 파도처럼 하나의 유기적인 단위로 존재한다,
바다는 그대 안에서 계속 움직이며 물결 치고 있다,
그대는 바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이해한다면 바다 역시 그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대는 바다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그대는 파도 하나하나마다 바다가 존재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다란 모든 파도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파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바다에서 파도를 떼어낼 수는 없다,
파도를 집에 가지고 와서 아이들에게 “내가 바다에서 파도를 가지고 왔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대는 파도를 가져올 수는 없다, 물을 가져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파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라, 파도는 살아 있다,
왜냐하면 바다는 파도의 생 명이기 때문이다,
파도가 수백 피트를 뛰어올라 하늘에 다다를 때, 바다 또 한 파도를 통해 하늘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대는 바다를 볼 수 없고 단지 파 도만 볼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파도를 바다로부터 떼어낼 수는 없 다,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하나인 것이다.
베단타는 피조물은 유기적으로 창조주와 하나이고 세계는 신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태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 역시 이것은 이해할 수 있 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또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신은 세계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태인들에게 신성모독이 된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세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그렇다! 그는 존재할 수 없다, 그가 존재한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가 창조주라면, 창조가 그의 특성이라면, 우주 없이 어떻게 그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창조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가 창조주일 수가 있는가?
세계는 그에 게 의존하고 있고 그는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상호의존이다.
세상은 그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며, 그 또한 세상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그 둘은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서로를 채워주고 있다,
그들은 하나이다,
서로 채워준다고 하는 것은 아주 전체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들을 분리시키거나 나눌 수는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은 구도자는 선언할 수 있다,
“아함 브라흐마스미, 아날 하크(Anal Hak), 나는 신이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은 곧 “나와 이 존재계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대들은 어디를 가든 지, 어느 곳에 있든지 나를 발견할 것이다,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나는 거기 에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 어떻게 예수가 나무를 쪼갠 곳에 있을 수 있는가?
그대는 거기에서 그 형체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대는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을 발견할 수는 없 다,
그 목수의 아들을 나무가 쪼개진 곳에서는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는 존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존재이다, 나의 형태는 변하지만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순수 베단타-하나의 유기적인 합일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오직 힌두교인들만이 사원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이다,
그 들은 어느 곳에나 신전을 세울 수 있다,
그들은 그저 한 나무 밑에 돌 하나 -그것이 어떠한 돌이든 간에, 그 위에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더라도-를 놓 아두고,
거기에 붉은 칠을 하면 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경배하는 것이 다.
어떤 나무라도 상관없다, 어떤 강이나 산, 그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나무를 쪼개보아도 거기에 신이 있고, 돌멩이 하나를 들추어보더 라도 거기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신경을 쓰겠는가?
힌두교인들만이 신을 내버린다,
그들은 신을 하나 만들어놓고 이삼 주일 동안 경배를 한 다음 경배가 끝나면 바다로 가서 신을 버린다,
그대들은 이 슬람교도가 신을 버리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유태교인들이 하느님을 버리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신을 바다 속에 버린다?
그대는 이교도인가? 정신이 돌아버린 것인가?
오직 힌두교인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바다 또한 신이라고 그들은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렇게 신 하나를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가?
그 기능이 끝나면 처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곳에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를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 어떤 돌이든지 상관없다,
예수는 형태가 아니고 존재이다, 그대들은 어디에서든지 그를 발견할 수 있다,
신의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은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꽃을 피울 때 그것은 곧 신이 꽃피어나는 것이다,
씨앗 이 싹을 틔울 때 그것은 곧 신이 싹트는 것이다,
강이 흘러갈 때 그것은 곧 신이 흐르는 것이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만일 신이 인격체라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 유태인들은 신은 인격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그는 순수한 존재이다, 그는 존재 그 자체이며 모든 것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를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는 거처가 없으며 그대들이 찾아가서 만날 수도 없다,
그는 주소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쓸 수도 없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다,
그대들은 어느 특정한 곳을 골라내어 “여기에 신이 있다”라고 말할 수 없 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형태를 가진 어떤 것만을, 다른 것과 구별이 되는 어떤 것만을 집어낼 수 있을 뿐이다,
형태가 없는 것, 모든 것 속에 있는 것, 모든 곳에 퍼져 있는 것을 그대가 어떻게 집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태인들은 대단히 인격화된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 격이 있으면 에고가 있다,
유태인의 신은 너무나 이기주의적이다, 아주, 너 무나 대단히 이기주의적이다.
그대들이 그에게 불순종하면 그대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신은 독재자의 세력이 되고 다른 모든 존재는 노예가 된다,
그렇게 되면 자유는 없다, 자유는 오직 신의 본질일 뿐이며 그대 들에게는 없다,
노예 상태가 그대들의 규율이 될 것이다.
예수는 완전히 그 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신은 에너지이다, 생명력이 바로 신이다,
베르그송이 ‘생의 약동(elan vital)'이라 고 말하는 것, 그것과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사물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 에나 신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따라서 예수는 유태인들에게 이해될 수가 없었 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다,
만일 예수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 이다“라고만 말했어도 유태인들은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그 이상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갈수록 그는 더욱 멀리 가버렸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그는 그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아버지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이 다......“
여기에서 그는 ”나는 신이다, 그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이 경전 속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신이다, 신의 아들이 아니 다.“
그가 아들이라고만 말했어도 그는 용서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 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근원이고 아들은 단지 그의 산물이 된다,
그들은 아주 친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들은 아들로 남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남는다,
구분은 유지될 수 있고,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하나의 관계가 존재하는 것 이다,
이것은 주인에 대한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 이다, 더욱 가깝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관계이다, 그들은 둘로 남는 다.
이 경전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될 수가 없다,
그는 틀림없이 이 것을 오직 제자들에게만 이야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아주 친밀해진 사람들만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거기에서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느님이다, 아들이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오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이것은 순수한 베단타이다, 그밖에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을 발견할 수 없 다,
이러한 내용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타나 우파니샤드로 가야만 한다,
이 것은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한 말이다,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의 근원 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오고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녹아든다,
너의 에고를 던져버리고 내 발 아래로 오라.“
예수가 한 말은 크리슈나가 이야기하고 있 는 것과 똑같다.
왜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하나의 전통이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증명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다.
‘크라이스트(Christ)'라는 단어는 ’크리슈나(Krishna)'라는 단어의 한 형태 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크리슈나’는 아직도 ‘크리스토(Kristo)'라고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크리슈나는 사람 이름 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그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그것은 ‘붓다(Buddha)’와 같다, ‘붓다’는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도달하는 완전한 성취를 말한다,
‘붓다’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크리슈나’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크리슈나’는 자석의 중심, 끌어당기는 사람, 모든 존재의 중심이 된 사람을 뜻 한다,
‘그리스도’란 말도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리아는 그녀의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가 세계의 중심이 되었을 때 붙여졌다.
이 경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심이다,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오고, 모든 것은 나에게 돌아온다,
너희가 나에게서 멀리 간다면 너희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크리슈나’의 한 형태라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타에서의 크리슈나의 말이다, 그리스도의 말이 정확하 게 같기 때문이다.
베단타에 대해서 그대가 이해해야 하는 세 번째 것은 베단타는 그대를 있 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거부한다는 것은 곧 신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잘라내야만 하고, 무엇인가를 내버려야만 한다,
지금의 그대 모습으로는 그대는 받아들여질 수 없고 환영받지 못한다,
그대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환영받는 것이다.
베단타는 그대가 현재의 모습 그대로 환영받는다고 말한다,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그대의 비참함의 원인이 되어 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대를 이 세상 속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힌두교에서는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카르마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카르마란 나쁜 것을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행한다는 뜻이다,
그대 가 이것 혹은 저것을 하려고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에 그대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한다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존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라,
무엇을 할까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단지 그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생각 하라.
베단타는 무(無)도덕적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십계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의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환영받는다고 말한다.
지금의 있는 그대로 그대는 좋으며, 아름답고, 진실되다고 말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스스로가 그대 자신 을 거부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대가 그대 자신을 거부한다면 그대는 악순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하지만 향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미 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대를 향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대는 비참해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대는 신이다, 어떻게 신이 향상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 가 그대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한다면 그대는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옮겨 가야만 할 것이다,
그대는 향상시키고 또 향상시키지만 결코 향상되지는 않 는다,
그대는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같은 지점에서 조깅을 하는 것과 같다,
그대는 땀을 흘리고 숨이 가쁘기 때문에 빨리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대는 자신이 빨리 달리고 있으며 어디엔가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그대는 같은 지점에서 조깅을 하며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대의 삶 전체는 한 지점에서의 조깅이다,
그대는 어느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갈 곳이란 없다, 그대는 향상되지 않는다, 향상은 불가능하다,
그대 내부에 있는 궁극적인 것은 보다 나아지지 않는다,
거기에 ‘더 나은’ 또는 ‘더 좋은’ 것이란 없다.
베단타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베단타는 그대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대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단지 그대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 다,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앎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아는 올바른 시각이다.
그것은 마치 다이아몬드가 가치 있는 돌이 되려고 배우는 것과 같다,
만일 다이아몬드가 더 좋은 돌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 생각이 바로 방해 물이 될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하는 모든 노력은 전부 쓸모 없는 일이 될 것 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가장 귀중한 돌이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가 자기의 노력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그는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이 정신과 진찰실로 뛰어들어가서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저를 도와주십시요, 저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기 억력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한 일을 기억할 수가 없고, 오늘 아침에 한 말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요,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의사가 물었다. “언제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증세가 생겼나요?“
그 남자는 당황했다, 그리고 말했다. “무슨 증세 말입니까?” 그는 잊어버 린 것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잊어버렸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대는 카르마를 만들어 낼 것이다,
카르마는 순환 이요 바퀴이다, 하나의 카르마는 다른 카르마로 이어진다.
A는 B로, B는 C로...... 이렇게 그대는 바퀴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간다, 그것은 바퀴이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카르마는 결코 그대를 해방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미 자유롭기 때문이 다,
그대가 이미 자유롭다는 사실을 납득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하라고 말 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하고 시키는 것은
그들을 지치게 함으로써 어느 날엔가는 내게 와서
“나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 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때서야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처음 왔을 때 그대는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것을 해야만 한다,
만일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누군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대는 완전히 있는 그대로 이미 신인 것이다,
이 것이 베단타이다, 그것은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종교이다,
세상에 베단타주의자가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많을 수가 없다,
이 때문 에 베단타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느끼기 때문이다, 만
일 누군 가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브라마이다,
그대는 신이다”라고 한다면 그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난센스처럼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 자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떤 목표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의 마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어린 시절의 경 험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유사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아주 극소수의 것들 만이 다를 뿐이다,
달리 말해, 사람들의 어린 시절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 기 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모든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 요소란, 어떤 어린아이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 그대도 한 어린아이였다,
그러면 즉시 사회, 부모, 어머니, 아버지, 형제 등 그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대를 더 아름답고, 더 도덕적이고, 좀더 낫게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는 옳지 않다, 무엇인가 되어야만 하며, 그때서야 그대는 받아들여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점차로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 작한다,
그는 좋은 일을 하면 받아들여지고, 나쁜 일을 하면 거부당한다,
순 종하고 따르면 받아들여진다,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를 미워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화를 낸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배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이지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옳은 일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사랑할 것이다,
나쁜 일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거부하고, 미워하며, 화를 내고 반대할 것이다.
그대 자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 옳은 일을 하라, 그러면 세상은 그대를 환영할 것이다,
나쁜 일을 하라, 그러면 모든 문이 닫힐 것이다,
만일 어머니와 아버지의 문마저 닫혀 있다면,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아이 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면,
이렇게 이상한 세상에 대해서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는 한 가지를 배운다,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옳은 일만 해야 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나쁜 일은 언제나 일 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나쁜 일이 되므로 나쁜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러면 아이는 자신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거부하게 된다.
아이는 말한다,
“나는 나쁘다, 나는 나쁜 아이, 나쁜 소년, 나쁜 소녀이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가 보통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유지하게 된다.
모든 소년, 모든 소녀들은 자신의 성기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다,
그것은 즐겁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몸 전체가 축복받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런데 아이가 자신의 성기를 만지면 모든 사람들이 즉시 그 행동을 금지시킨 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의 행동을 중지시킨다,
심지어는 아이의 손을 묶어놓아 성기를 만지지 못하게 한다.
아이는 깊은 의문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성기를 만지는 데서 오는 느낌을 좋아하고, 그 느낌을 즐긴다,
그는 그 느낌이 아름답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그가 그 느낌에 따라 행동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거부한다,
그는 못된 아이가 되고 사람들은 그에게 벌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는 생각한다.
“그런 나쁜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나만 이런 나쁜 짓 을 하고 있나 보다, 아무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 해서 알지 못한다,
“세상은 선하다, 오직 나만이 죄를 짓는다,”
그래서 그는 죄책감을 갖는다, 이것이 깊은 문제이다.
아이는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이는 자신의 배고픔에 대 해서 그대들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이는 세 시간 마다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의학적인 과정을 따른다,
그것은 책에 쓰여 있 다, 그대들은 그 책을 읽고 지성적인 부모가 된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나면 깜짝 놀라 아이에게 음식을 먹인다,
강제적으로 음식을 먹는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음식을 거부한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는 다, 우유는 흘러 떨어진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삼키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배고픔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 이다.
그들은 정해진 일과나 시간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그대가 말하는 의학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배고프지 않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배가 고파서 울 때에는 제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음식을 주지 않는다,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이인가 그대인가?
그대가 결정한다면 그대는 아이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아 이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배고플 때는 먹지 못한다, 배고프지 않을 때는 먹는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는 말했다.
“하느님, 저를 용서하소서, 저는 옳은 일은 하지 않고, 언제나 잘 못된 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아이들의 기도이다, 그대가 결정하면 아이에게는 죄 의식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화장실에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 는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다,
화장실 훈련은 그러한 죄의식을 창조하는 것이 다,
그대는 그대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갈 수 있는가?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그를 강요 하고, 설득시키고, 달래고, 유혹하며,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 써본다,
그대는 아이에게 자신은 무엇인가 잘못되었고 나쁘다고 하는 죄의식을 만들어주는 것 이다.
아이는 죄의식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육체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다,
그는 정원과 집 둘레를 뛰어다니며 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대는 말한다, “가서 자거라.“
그대가 잠자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이 “가서 자거라”하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눈을 감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나간 후에는 아이 는 심연 속에 남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 명령을 따를 수 있 을까?
어떻게 하면 착한 소년, 착한 소녀가 되는 것인가?
죄는 만들어지고 아이는 점점 독에 물들어간다,
그는 “나는 나쁘다, 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쁘다“라고 느끼게 된다,
놀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잘 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가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어도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그대는 “어디 아 프니?“하고 아이에게 묻는다,
아이는 언제나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에게는 힘이 없고,
그대들에게는 힘이 있기 때문이지 다른 것 때문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혼란을 느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구분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차츰차츰 나쁜 것은 전부 거부하고 옳다 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그는 가면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그 상처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것 때문에 내가 “있는 그대로 그대는 신이다”라고 말을 해도 그대들은 이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는 선하지도 않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가 신이 될 수 있겠는가?
신이란 궁극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대에게는 기본적인 선조차도 없다,
어떻게 그대가 신일 수가 있겠는가?
그대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꾸짖는 어떤 다른 스승을 찾아갈 것이다,
“너에게는 죄가 많고 너는 큰 죄인이다“라고 말해 줄 스승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편안함 을 느낄 것이다.
그가 옳다, 왜냐하면 그대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를 비난하는 사람을 숭배하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대를 마치 벌레나, 더럽 고 보기 싫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그대는 따른다,
소위 성자로 불리는 사람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대는 이러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비난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죄인들이 다, 그리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그대의 생각과 같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대를 비난할 때마다 그대는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얼마나 난센스인가!
그리고 누군가가 “그대 는 위대하다, 나는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신은 이 방식을 선택한 다, 그대 안에서 신은 이 방식을 선택한다,
이것이 그대 안에서 신이 존재하 는 형식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그대의 어느 부분도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의 섹스, 그대의 분노, 그대의 미움, 그대의 질투를 받아들인다,
나는 그대의 전체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받아들일 때에만, 그대가 전체적일 때에만 ‘하나(one)'라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는 그대의 질투, 그대의 분노, 그대의 섹스, 그대의 탐욕 그 전부를 초월한다,
아무도 탐욕을 변형시키지 못한다, 그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변형이 일어난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불편함을 느낄 것이 다.
이것이 예수가 용서받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유태인들은 가장 큰 죄의 창 조자였던 것이다,
세상 모두가 그와 같은 일을 했다,
하지만 유태인들에 비 할 바는 못 된다,
유태인들에 의하면 세상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담과 이 브가 원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아담과 이브로부터, 그들의 죄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죄는 중심 개념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그대를 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회개하고, 그대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대가 착해진다면 그대는 신에게 로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대를 받아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 모습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대는 하느 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버려질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복종이다,
그런데 하느님 은 왜 그렇게도 복종에 집착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아버지가 그렇 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주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왜 그렇게도 복종을 원하시는가?
조금 농담이라도 하는 여유를 보이 면 안 되는가?
스스로를 즐기고 있는 아이들과 잠시 놀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 을 조금만 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아담과 이브는 무엇 을 한 것인가?
하느님이 금지한 나무에서 단지 사과 한 개를 따먹었을 뿐이다,
하느님은 매우 이기주의자인 것 같다,
왜냐하면 에고는 항상 복종에 집착하기 때문 이다.
“나를 따르라, 내가 규칙이다, 복종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나의 에고에 상처 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에고를 가질 수 없다, 그는 복종을 주장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이야기를 창조한 것은 틀림 없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제들이다.
그리고 그대는 죄의식을 느낀다, 그대는 죄 속에서 태어났다,
그대는 태어 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다, 그대는 태생적으로 죄인이다,
그대에게 남은 일은 그대 자신을 갈고 닦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잘라내어 그대 자신 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베단타는 그대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대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대 는 죄인이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태도이다,
신은 그대를 적대시하지 않 는다, 그대는 신을 적대시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그대에게 어떤 복수도 하 지 않는다,
그대가 이것을 모른다면 그대는 스스로 고통을 창조하고 있는 것 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태도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그대는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힌두인 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그대가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그대가 지식의 열매 를 먹어서가 아니라
무지의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은 무지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은 그렇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간다, 그러나 이것이 죄는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더 많은 빛과,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지
도덕이나 덕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덕은 하나의 부산물이 될 것이다, 그대가 깨달을 때 덕은 따라올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같이 따라 올 것이다, 그대가 깨닫지 못하면 죄가 따라올 것이다,
왜냐하면 무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실수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기적들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유태인들은 흥분해서 그를 추종했을 것이다
죄는 실수와 같다, 그것은 마치 둘에다 둘을 더하고는 답을 다섯이라고 하 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이 죄는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둘에다 둘을 더 해 놓고 그것을 다섯이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그가 영원히 지옥에 던져지리 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실수이지 죄는 아닌 것이다,
그는 배워야 한다, 사물에 대하여 바른 시각을 얻어야 한다,
그는 수학을 모를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베단타는 그대는 단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그대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대가 깨달으면 그대는 신이 된다, 그대 말고는 신이 없다,
그대보다 더 나은 신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주의적인 주장은 아 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라고 하는 에고가 사라지고 그대가 전체가 될 때 에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 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시적인 선언이다,
그리고 예수와 같은 사람은 철학자 나 신학자, 혹은 수학자라기보다는 시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는 아주 시인 에 가깝다,
그리고 그대가 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그의 메시지 를 완전히 놓치는 것이다.
만일 어느 시인이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대는 그를 용서해 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대는 ‘그것은 시일 뿐이니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성자가 무엇을 주장하면 그대는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시인이다, 궁극의 시인이다,
그리고 궁극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수학의 언어는 매우 좁아서 많은 것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주 정확하다, 그래서 그것은 좁은 것이다,
시는 부정확하고 모호하지만 그 때문 에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이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시인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는 신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힌두인들은 절대로 깨달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 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들은 깨달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석할 필요가 없다, 분석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예를 들면 그대가 예수에게 가서
“좋다, 당신이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왔다‘라고 한 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입증해 보라,
태양을 보고 없어지라고 말해 보라, 아니면 오늘 밤에 또 하나의 달을 만들어보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믿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어리석다.
그대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그 말은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라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끊임 없이 노력해 왔다,
그들은 예수가 돌멩이로 빵을 만들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어 고쳐주는 등, 이런저 런 기적을 행했다고 말해 왔다.
왜 그들은 그토록 예수가 행한 기적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절대 로 붓다를 기적을 행하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가 기적을 행 할 수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 는 왜 그렇게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만일 누군가가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기독교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기적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어느 날, 예 수가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 아니고, 장님을 눈뜨게 한 일이 없고,
문둥병자 를 고처준 일도 전혀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기독교 신앙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교회도 없어지고, 교황도 사라지며,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에게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존하기 때문 이다,
이런 기적들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적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사실 기적은 그것에 의해서 감동받는 사람들의 무지를 증명할 뿐,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한, 예수는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기적을 행할 정도로 그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기적에 대한 이야기는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장님이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육체의 눈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 그것은 시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그대들 같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가 죽은 사람들을 살린 것은 송장과 같은 존재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다 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기적이다,
다른 기적들은 오늘날 과학에 의해서 어느 때고 이루어질 수 있다,
그날이 먼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러한 일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소련에서는 2차 대전 중에, 죽은 여섯 사람을 살려냈다, 그들은 성공했다
-그들 중 두세 사람은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이러한 일은 현대 의학에 의 하여 어느 때고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의학 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대들은 기적을 행하는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아마도 훌륭한 의사나 과학자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눈은 치료될 수 있다, 눈먼 사람들은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다, 육체가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들은 영적인 것, 내면의 존재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대들 은 장님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보 지 못하는 그대들이 도대체 무슨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예수는 그대들을 눈뜨게 해주었다, 내면의 세계를 보게 해주었다,
그는 그 대에게 눈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 해야 한다,
그는 결코 돌로 빵을 만든 적이 없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기적을 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깨달음을 볼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볼 수 없다,
크리슈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다,
그들은 오직 돌이 빵으로 변하는 것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세상적 인 것만을 믿는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들 에게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들은 깨달은 사람보다는 마술사를 따른다,
속임수를 쓸 수 있는 사람 을 따른다,
그러나 모든 마술은 쓸데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마술은 오직 그대들의 무지만을 증명할 뿐이다,
마술사는 교활하며 그대를 이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예수는 교활하지 않았다, 예수보다 순수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교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술사 가 아니었고, 그대의 무지를 이용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한번 생각해 보 라, 그가 정말 돌로 빵을 만들었고, 물을 술로 변하게 했는지를......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여인이 위스키를 백에 넣어가지고 다른 나라로 들 어가는 중이었다,
국경에서 심문을 받은 그녀는 백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말했다. “성수입니다.”
그러나 세관원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짐을 한번 봐야겠 는데요, 성수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의심이 가거든요,
그냥 물이 라고 하면 될 텐데 무슨 이유로 성(聖)자를 붙이는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는 짐을 검사했다, 그것은 위스키였다,
그가 말했다. “세상에!”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오, 주님! 보십시오, 기적이 다시 일어났 습니다!“
예수가 물을 위스키로 변화시켰는가? 그가 죽은 사람을 살렸는가?
나사 로가 그의 무덤에서 나왔는가? 앉은뱅이가 걷고, 눈먼 사람이 보게 되었는 가?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기 시작했는가?
만일 이런 기적들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유태인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태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 못지 않게 물질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기적들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유태인들은 흥분해서 그를 추종했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더 물질적인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 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 면 모든 사람은 병들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고통 속에 있기 때 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기적을 행하는 인물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돌을 지폐로 만들어줄 정도로,
이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모든 유태 민족이 이 사람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기적을 일으켰지만 그 기적은 눈에 보이 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적은 일어났었다, 지금 그대들이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사 로는 죽었었다.
만일 내가 그대를 살려낸다면 그것은 나와 그대 사이의 개인적인 일일 것이 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으로 공표되지 않는 다,
내가 그대를 그대의 내면 세계에서 살려낸다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적은 일어났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들은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아무도 그것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노력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적을 보았다,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보게 되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발단이다, 유태인들은 묻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보여달 라, 그리고 만일 그가 정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그가 그런 기적 들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보자.
그리고 스스로 부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해도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가 불사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가 그러한 치료자라면,
우리가 그의 몸에 상처를 내어 그에게서 피가 나오는지 안 나오 는지를 볼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들은 내면에서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예수는 온 나라의 초점이 되었 다,
그는 가짜처럼 보였고, 진짜 메시아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 들은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는 두 명의 범죄자와 함께 죽었다,
유태인들에게 그는 그 두 사람과 똑같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로부터 어떤 빛도 내려오지 않았다,
땅도 흔들리지 않았고 지진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하느님이 화를 내는 소리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들이 십자가 에 못박혔는데도 하느님은 완전히 침묵을 지켰다.
이것 때문에 유태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 사 람은 가짜였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십자가는 실험대였고 거기서 그는 자기가 하느님이 보낸 사람인지 아닌 지를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도 역시 위대한 기적을 보았다,
기독교인 들은 그것을 놓쳤다, 그리고 유태인들도 그 첫 기적을 놓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언가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은 이 사람을 잊어버렸다, 그는 사기꾼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내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
오직 소수의 사 람만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만이 십자가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받아들였다, 이것이 기적이었다, 이 사람은 고통을 받아들였다.
이 사람은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기적이었 다,
그를 죽이고 처형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기도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크고 위대한 것이었다.
예수가 한 마지막 말은 이런 것이었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 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하지 마소서,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육신은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설사 그가 소리를 지르고 저주하면서
“하느님, 저들이 당신의 아들에게 하는 짓을 보십 시오, 그들을 모두 죽여 주십시오!“하고 화
를 냈다 해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 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이었다, 십자가에서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 을 증명하였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비의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도 그의 자비를 파괴할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받아들였다, 그는 그대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순간에도 그는 그대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적은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 기적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 다,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는 기적이었다,
그는 마술사가 아니었다, 만일 그 가 마술사였다면,
그리고 그가 정말로 돌을 빵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문 둥병자를 고쳐주려고 노력했다면, 그는 높게 평가될 수 없다,
나는 그에 대 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라, 내적인 장님이나 내적인 문동병자는 언제나 있 게 마련이다,
그대는 아주 추하고 그 추함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토록 죄 를 많이 가지고 있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질투가 많고, 근심이 있고......
이것이 바로 문둥병이다, 이것이 벌레처럼 그대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다,
그 대의 내면에는 상처가 있다,
예수는 그것을 치료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인 일이다.
그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제자들조차도 나중에야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린다,
스승은 처음부터 그 상처가 치료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대개는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스승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한다.
예수는 말한다,
“나는 전체이다,” 그대 또한 전체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 들이 알아야 하고 느껴야만 하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전체이 다, 그대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대를 향하여 움직인다.
예수는 단지 그대를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대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대는 한 알의 겨자씨이고 그는 울창한 나무가 되었다,
그는 그대에 대한 확신을 말하고 있 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전체이다,”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대 또 한 전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대는 이미 전체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 하지 못하고 있다.
그대의 비참함은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
그대는 더욱더 깨어 있어야만 한다,
그대가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정점까지 그대의 의식을 높여 야 한다.
그 순간 그대는 빛나게 된다, 그 어느 구석도 어두움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대의 모든 존재는 불타오른다,
그때 그대는 예수를 이해할 수 있고, 붓다를 이해할 수 있고, 크리슈나를 이해할 수 있다,
혹은 나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이다,
왜냐하면 모든 노력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 말을 깊이 기억하라, 그대의 가슴속에서 언제까지나 고동치게 하라,
이 말을 통해서 그대의 씨앗은 흔들림을 견디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것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전체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은 나에게로 돌아 왔다.
나무를 쪼개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거기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첫댓글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너무 길어 못읽어........!! 노안이 와서 눈이 시려.........
그래도 끝가지 읽어 봐..
노안이 오면 돋보기라도 쓰고서.
빙혼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훌륭한 책은
- 노자의 도덕경,
- 불경 중의 법구경,
- 그리고 이 도마복음
이었다고 자신이 있게 말할 수 있음.
내 나름 책을 많이 읽어 본 편인데 모두가 그냥 단순한 즐거움을 주었다면
이 책들은 나 자신을 성철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삼불(등불, 횃불, 촛불)이며
죽는 그 날 까지 또 읽고 또 읽다가 나 자신을 깨닫고 싶은 책임.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