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봄, 기쁨과 감사의 차
부회장, 충북지부장
한문교육학 박사 박숙희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좋은 집이나 뛰어난 재력, 권력, 빛나는 미모... 저마다 갈구하는 것은 다르지만 모두 무너지게 만드는 한마디가 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평상을 갈구하면서도 문밖 나서기를 막고, 새해맞이 고향으로의 발걸음도 멈칫하게 만들던 것은 결국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잔혹한 코로나19에도 ‘백신’이라는 한줄기 빛이 다가오고 있다.
가만히 귀대고 들어보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봄이 온다네 봄이 와요
얼음장 밑으로 봄이 와요.
겨우내 잠자던 물레방아
기지개 켜면서 다시 도네
봄이 온다네 봄이 와요
물레방아 돌리며 봄이 와요.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님의 동시‘봄이 와요’이다.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인 속에서도 어디선가 졸졸졸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두껍던 한겨울의 얼음은 녹고 바야흐로 봄이 온다.
잠자는 듯 숨죽이던 차나무도 움을 틔운다. 파릇한 새순은 또다른 희망과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힘든 겨울을 이겨낸 기쁨은 차 만드는 힘겨운 손길도 흥에 겹게 만든다. 가장 먼저 법제한 감사와 찬미를 담은 햇차.
시호가 진정국사(眞靜國師)인 고려 후기의 고승 천책(天頙)의 시문집인 ≪호산집(湖山集)≫에는 <선사가 주신 차에 감사하며(謝禪師惠茶)>라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속명은 신극정(申克貞)으로 19세에 시험을 거쳐 국자감에 입학하고 겨우 1년 만에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회의감이 들어 23세에 요세의 제자가 되어 천책(天頙)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책(頙)은 ‘바르다’는 뜻이다. 만덕산 백련사 제4세 사주(社主)로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창도한 천태종의 대중불교 운동을 계승 발전시켰다. 문장이 특히 뛰어나서 조선 말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신라와 고려의 명문장가로 최치원, 천책, 이규보의 3인을 꼽기도 하였다.
貴茗承蒙嶺 귀한 몽정산 차를 선물받아
名泉汲惠山 이름난 혜산천 샘물 길어왔네
掃魔能却𦖋 졸음이 깨끗이 씻겨지니
對客更圖閑 객과 마주앉아 한가로이 즐기네
甘露津毛孔 모공엔 감로같은 땀이 솟고
淸風鼓腋間 겨드랑이엔 맑은 바람이 일어나네
何須飮靈藥 묻노니 신비로운 영약을 마셔야만
然後駐童顔 신선같은 동자 얼굴 유지될까
봄빛 따스한 날 귀한 차를 선물받았다. 급히 맑은 샘물 길어다 차를 끓여 마신다. 차 한 잔으로 봄날의 한가한 여유를 한껏 누려본다. 국사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삶 속에서 속세의 번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볼 수 있다. 차를 마셔 졸음을 쫓으며 수도에 전념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놓아도 편안한 차 벗은 언제나 즐겁고 반갑다. 문득 찾아온 차 벗을 맞아 잠시 일상으로 돌아와 차를 달인다. ‘염화미소(拈華微笑)’로 일깨우며 해탈의 또 다른 모습을 무언(無言)의 차 한 잔으로 나누는 모습이 느껴진다.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중국의 몽정산에서 나는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고 육안차는 맛으로 뛰어나다(陸安之味蒙山藥)’고 했다. 국사가 받은 차는 몽산차를 받은 것이 아니라 몽산차처럼 좋은 차를 선물 받았다는 뜻이다. 혜산천은 중국에 있는 차 달이기에 이름난 샘물이다. 당나라 재상 이덕유가 늘 차를 끓일 때 이 혜산천 물을 멀리까지 길어다 쓴 데서 그 이름이 전한다. 여기에서도 국사가 혜산의 물을 길어왔다고 하지만 진짜 혜산의 물을 길어온 것이 아니라, 차와 걸맞게 혜산의 물과 같이 좋은 샘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인다는 의미이다. 한가로이 앉아 차를 마시니 졸음을 쫓고 맑은 기운이 감돌아 양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와 신선 세계에 오르는 듯하다.
산사(山寺)에서 승려들이 차를 음용하고 부처에게 올린 이유는 차의 약리적 효능도 있지만 음식과도 관계가 깊다. 차는 피로감과 권태감을 쫓는다. 사람의 오장은 모두 오행(五行)과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오장은 오미와 관련이 깊다. 오장 중에서 간, 비, 폐, 신은 외부 음식물의 섭취를 통해 신체의 조화를 이룰 수 있으나 마음(心)을 다스리는 쓴맛은 음식으로 섭취하여 건강을 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승려들은 섭취가 어려운 쓴맛을 차를 마심으로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했다. 이렇게 산사에서는 차가 수양과 의식의 중요 대상이었지만 삶의 방편이기도 했다.
산사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한 차시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예찬이 아닌 해탈과 득도의 표상으로 정신세계의 자유로운 즐거움을 담고 있다. 선승들은 차시를 통하여 자연을 바라보는 관조의 눈으로 자신들의 득도와 선열을 노래했다. 산사는 선승들의 귀의처로 그들은 산사를 단순한 공간적 개념이 아닌 해탈의 경계로 삼고 있다. 그러기에 그곳은 비록 속인이 방문해도 낯설지 않고 언제든 넘나들 수 있으며 해탈의 세계로 가고 싶은 욕구를 자아낸다.
그 매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바로 茶이다. 산사에 접어들어 선경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차 속에는 평온한 즐거움이 담겨 있어 그곳을 찾는 속인들에게는 편안함과 번뇌를 잊게 하는 특별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선승들에게는 해탈과 세속 사이의 문(門)으로 중생구제에 전념하다가도 언제든 득도의 경지로 돌아올 수 있는 곳이기에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즐거움이기에 차시의 제재로 돋보이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따라 햇차도 서서히 다가든다. 맑고 투명한 차 한 잔 우리며 우리네 삶도 건강하고 따뜻하기를, 또한 나쁜 병마가 깨끗이 사라지기를 기원해 본다. 평온한 봄날 가족과 즐기는 차(茶)자리의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