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홧김에 서방질 한다’는 말이 있다. 지난주에 김상욱의 책을 한권 읽었다. <떨림과 울림>이라는 책이다. 책 제목이 근사해서 집어 들었다가 혼쭐이 난 책이다. 다 읽고 나니 머릿속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물리학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래서 물리학에 대한 무지를 조금이나마 희석시켜 볼 요량으로 책을 고르다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실재가 아니면 그럼 나는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흥미로운 제목이다. 그런데 아뿔싸! 그냥 김상욱의 조금은 인문학적 냄새가 나는 책으로 만족할 일이었다. 그래도 책을 넘겼으니 활자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모든 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뭐 몇 가지는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사실, 저자가 “이 책은 동료 물리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확실한 사실들에 관한 책이 아니다.”라고 독하게 선을 그을 때 이미 책을 덮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말의 무게감을 깊이 느끼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에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 같은 것이 조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 모험에 관한 책이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제한되고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사물의 근본 구조에 대한 점점 더 광대한 이해로 향해가는 여행이다.”
책은 한편으로 우주로 나아가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사물의 근본 구조로 내몰기도 한다. 거대하거나 미세하거나 양쪽 모두 물리학에 대한 내 무지와 쉬이 떨쳐지지 않는 편협으로 인해 그가 안내하는 여행에 함께 하기 힘들었다. 정말로 아는 만큼만 보였다. 그 아는 만큼 무얼 보았을까. 단언컨대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우주여행-하정열, 인터넷>
우리는 세상을 매일 같이 눈으로 보고 만지고 호흡하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 모든 행위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인간이 우주의 중심인 듯하다. 물리학은 이런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인간들은 오래 전부터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우주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조금씩 생각을 다듬어왔다. 따라서 이 책은 26세기 전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지적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세계는 어떻게 질서 지어져 있는지 모두가 하나같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당시에는 대개 이런 종류의 질문에는 신화나 종교로 설명을 해왔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려면 사실이 왜곡되는 법이다. 그러다 마침내 기원전 450년 전 밀레토스 학파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신화나 종교가 아니라 관찰과 이성을 통해 답을 구하는 엄청난 사고의 혁명을 일으켰다.
특히 데모크리토스는 주목할 만하다. 데모크리토스는 철저히 관찰에 기초한 논증을 펼침으로써 어떤 물질이든 유한한 수의 낱낱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조각들은 유한한 크기를 가졌으면서도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원자인 것이다.
물리학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생각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를 거쳐 갈릴레오에 이르러 보다 정교해졌다. 그에 이르러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물체를 떨어뜨리는 간단한 실험을 통해 물체는 동일한 속도로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면서 낙하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을 밝혔다. 이른바 가속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실험적 결과는 후에 뉴턴이 ‘작은달’ 추론을 통해 가속도를 정확히 산출해냈다. 그런 점에서 뉴턴의 세계는 수학적으로 표현된 데모크리토스의 세계라 할 만하다. 근대 세계의 모든 기술은 뉴턴의 이 공식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리를 짓고, 기차를 만들고, 마천루를 세우고, 엔진과 유압장치를 만드는 것, 비행기를 띄우고, 일기예보를 하고, 보이지 않는 행성의 존재를 예측하고,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는 법을 아는 것들이 모두 그 덕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곧 뉴턴의 방정식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들을 기술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중력 말고도 물체에 작용하는 다른 힘들이 있다는 말이다. 물체는 낙하할 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결국 19세기에 이르러서 페러데이와 맥스웰에 의해 난제가 해결되었으며 ‘전자장’과 ‘장’ 개념이 정립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세기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에 의해 물리학은 뉴턴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하나가 일반상대성이론이고 다른 하나가 양자역학이다. 상대성이론에서는 공간과 시간에 대해, 양자이론에서는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드러냈다. 이 두 이론으로부터 20세기 물리학이 시작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은 오늘날의 양자 중력 이론의 기초를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은 25세에 3편의 논문을 <물리학연보>에 제출했다. 그 중 둘째 논문이 아인슈타인을 스타로 만든 논문으로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조에 대한 중요한 해명을 담고 있다. 그가 발견한 시공의 구조는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단일 개념이다. 전기장과 자기장도 같은 방식으로 합쳐져 ‘전자기장’이라는 단일한 존재자로 융합되었으며, 에너지와 질량의 개념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결합되어 하나로 합쳐져 있음을 밝혀냈다.
질량은 그 자체로 보존되지 않으며, 에너지도 독립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보존되는 것은 질량과 에너지의 총합이다. 아인슈타인은 간단한 계산을 통해 1g의 질량을 전환해서 얻어지는 에너지의 양을 알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E=mc2이다.
뉴턴은 물체가 서로를 향해 끌어당기는 어떤 힘을 중력이라고 상상하고도 어떻게 멀리 떨어진 두 물체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이 힘이 서로 끌어당기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끌어당기려면 둘 사이를 연결하는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페러데이는 그것을 ‘장’이라고 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전기력과 자기력을 ‘나르고’ 있는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중력에 관해 알려져 있는 것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뉴턴의 중력, 패러데이의 장을 발전시켜 세계는 <공간+입자+전자기장+중력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입자+장>으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밝혔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뉴턴의 공간이 바로 중력장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공간은 더 이상 물질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것은 전자기장과 유사한 세계의 ‘물질적’ 구성 성분 가운데 하나다. 공간은 물결치고 유동하고 휘고 뒤틀리는 실재하는 존재자이다. 태양이 주위의 공간을 구부린다. 지구는 신비로운 원거리 힘에 이끌려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경사진 공간 속에서 곧바로 나간다.
마찬가지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고 물체들이 낙하는 것도, 그 주위 공간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구부러진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공이다. 시공은 물질이 있는 곳에서 더 많이 휜다. 공간이 휜다는 것은 이로 인해 빛도 휘어진다는 말이다.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휜다.
아인슈타인은 더 나아가 자기가 발표한 방정식으로 우주 공간을 기술하려도 시도한다. 먼저 그가 봉착한 문제는 우주가 무한할까 유한할까의 문제였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지금의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내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며, 유한하다면 우주의 끝이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경계는 어디가 되어야 하는가?
아인슈타인은 여기서 또 기막힌 생각을 한다. 즉, 우주는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자리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와 같은 구도 유한하지만 가장자리가 없는 셈이다. 한쪽 방향으로 자꾸 걸어가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는 이런 종류의 3차원 공간을 ‘3-구’라고 부른다.
지구를 적도를 중심으로 반을 잘라 놓으면 북반구와 남반구로 구분된다. 북반구는 남반구를 둘러싸고 있지만 역시 남반구가 북반구를 둘러싸고 있기도 하다. ‘3-구’도 이런 방식으로 반구가 아니라 공 두 개가 모든 표면에서 서로 맞붙어 서로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는 공간이 유한한 부피를 갖지만(두 공의 부피의 합) 경계는 ‘3-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가시적인 우주 전체를 가장 큰 규모에서 연구하는 현대 우주론의 시초가 되었다. 이로부터 우주의 팽창, 빅뱅이론, 우주의 탄생 문제 등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저자는 우리를 오늘날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양자역학으로 안내하지만 그 지점부터 저자의 안내는 내게 완벽한 외계어로 들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다. 아는 것이 없으니 들리는 것이 없었다. 어떻든 어설프지만 정리나 해두자.
양자역학을 통해서 세계를 구성하는 단위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보여준 <시공+장+입자>에서 <시공+양자장>으로 단순화된다. 공간이라는 배경이 사라졌다. 시간도 사라졌다. 고전적 입자도 사라졌고, 고전적 장도 사라졌다. 그러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입자는 양자이다. 빛은 장의 양자에 의해 형성된다. 공간은 장에 지나지 않으며 이 또한 양자다. 그리고 시간은 바로 이러한 장의 과정들로부터 태어난다. 결국 세계는 오로지 양자장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들은 시공간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하나 위에 다른 하나가 얹혀 있는 것, <장> 위에 얹혀있는 장이다.
이어서 다시 양자중력으로 끌고 간다. 저자의 끈기가 대단하다. 우리가 거시적 규모에서 지각하는 공간과 시간은 이러한 양자장들의 하나인 중력장의 대략적인 흐릿한 이미지다. 시공이 바탕에서 지탱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존립하면서 시공 자체를 생성할 수 있는 장들을 ‘공변 양자장’이라고 한다.
결국 끝장을 보고 말았다.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는 입자, 빛, 에너지, 공간과 시간 같은 이 모든 것이 단 한 가지 공변 양자장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라니. 이것은 직관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사유의 영역이다. 그렇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는 저자의 말은 명료하다.
과학 연구의 목표는 예측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과학은 기술이기 이전에 시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책 말미에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면 과학이 말해주는 것에 어떻게 의지할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확실한 대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다.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까닭은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대답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찾아낸 최선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