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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어회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Sino-meeting
두보, 춘망(春望)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고
옛 성에 봄이 닥치니 초목은 우거지네.
세월이 스산하니 꽃에도 눈물을 짓고
이별이 한스러우니 새소리에도 놀라는 것.
봉화는 석 달이나 끊이지 않아
만금 같이 어려워진 가족의 글월.
긁자니 또다시 짧아진 머리
이제는 비녀조차 꽂지 못하리.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慅更短
渾欲不勝簪
두보(712~770)의 생애는 불우했다. 두보는 하남성 낙양 근처인 공현에서 태어났다. 측천무후 때 시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두심언(杜審言)이 그의 조부다. 집안 어른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두보에게는 커다란 자긍심의 근거가 되었다. 일곱 살 무렵에 벌써 시를 짓기 시작하고, 열네다섯 살 무렵엔 시인들의 모임에 끼일 정도였으니, 문재는 일찍부터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스무 살에 집을 떠나 남방 일대를 유람한 뒤 돌아와서 과거에 응시하나 낙방한다. 이듬해에 다시 집을 떠나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의 명승고적지를 하릴없이 탐방하며 세월을 보낸다. 가정 형편은 궁핍하고, 그 궁핍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두보의 마음에 시름은 깊어갔다. 그 뒤로도 살림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산에서 도토리도 줍고, 들에 나가 마도 캐곤 했다. 문재는 뛰어났으나 살림을 꾸리는 데는 무능했다. 기껏 황제에게 글을 써서 바친다든가, 권문세가에게 장문의 시가를 써서 환심을 산다든가, 해서 벼슬자리를 꿰차려고 도모한다. 마흔 셋에 가족을 장안으로 옮기지만 생계가 막막하여 처자를 봉선현의 지인에게 맡겼다. 시를 써서 고관에게 바치며 벼슬하려 애를 쓰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첨으로 벼슬자리를 구하니, 그 마음이 비루할 터. 마음을 비루함에 두어도 여전히 살 길이 막막하여 처자를 끌고 가 처가에 맡겨 놓기도 했다. 그것도 가장의 위신이 서지 않는 일이다.
두보의 나이 마흔넷에 낙양이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의 수중에 떨어진다. 775년에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르고, 현종은 장안에서 쫓겨나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두보는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가려다가 반란군에 붙잡혀 장안에 강제로 유폐되어 있었다. 그때 쓴 시다.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침통하고 암울했다. 자연은 나라의 흥망 따위에는 전혀 무심하다. 나라가 망하고 그 나라에 봉직에 있던 이들은 다 흩어졌건만, 여전히 봄은 오고 인적이 끊어진 옛 성에도 수목이 우거진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고/옛 성에 봄이 닥치니 초목은 우거지네.”와 같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절구는 간난(艱難)이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웠을 테다. 나라가 망했어도 그걸 알 리 없는 꽃은 피고 새도 운다. 잔맹(殘氓)으로 꽃을 보고 새소리를 듣는 이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러니 “세월이 스산하니 꽃에도 눈물을 짓고/이별이 한스러우니 새소리에도 놀라는 것.”이리라. 두보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슬픔과 애처로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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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Tu Fu, 杜甫]
태어난 때
712
태어난 곳
허난 성[河南省] 궁 현[鞏縣]
죽은 때
770
죽은 곳
후난 성[湖南省].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당(唐)
직업
시인
중국 성당(盛唐) 시기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이백(李白 : 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색인 : 중국문학).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또는 '소릉(少陵)의 야로(野老)'라고 자칭한 것은 장안(長安)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두보의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만년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보는 당 현종(玄宗)이 즉위한 해인 선천(先天) 1년(712)에 허난 성 궁 현에서 태어났다. 현종 45년간의 치세중 그 전반부인 개원연간(開元年間 : 713~741)은 당의 전성기였다. 초당(初唐)의 이름높은 시인 두심언(杜審言)의 손자이기도 한 두보는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조숙한 소년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뤄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의 시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뤄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술을 좋아했고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으며 연장자들과 교류를 즐겼다. 20세를 전후하여 8,9년간 각 지방을 유람했는데, 처음에 장쑤 성[江蘇省]과 저장 성[浙江省]을 여행하고 24세에 일단 뤄양으로 돌아왔으나 진사(進士) 시험에 낙제하고는 다시 여행길에 나서 산둥 성[山東省]과 허베이 성[河北省]을 유랑했다. 이때 명산대천을 보고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이 시기의 시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개원 28년(740), 29세 때 당시 산둥 성 옌저우[兗州]에서 관리로 있던 아버지 두한(杜閑)을 방문했을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는 두보 시 중 가장 초기의 것이다. 다음해 산둥 성에서 돌아와 평생의 반려자였던 부인 양(楊)씨를 맞아들였다. 안사(安史)의 난(755~763) 후에 지극히 궁핍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도 두보는 늘 부인과 함께 다녔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항상 처자의 신상을 염려하는 애정이 넘치는 시를 짓곤 했다. 이즈음 그는 벌써 30세나 되었는데도 전도가 열리지 않은 탓인지, 억압당하고 있던 정신이 때로는 대상을 찾아 날카로운 어조의 시로 표현되었다. 그는 전대의 시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빈약하고 엉성한 내용을 수식어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참모습을 충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천보(天寶) 3년(744), 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둥 성으로 향해가고 있던 이백과 뤄양에서 만났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 지금의 허난 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江南)으로 향했고 그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두보는 오랫동안 이백을 사모해서 종종 그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는데 사흘 밤이나 계속해서 이백을 만나는 꿈을 꾼 후 지은 것이 〈몽이백이수 夢李白二首〉이다.
천보 5년(746) 두보는 장안으로 갔다. 그후 약 10년 동안 수도인 장안에서 과거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명사·고관의 집에도 드나들고 추천을 희망하는 시들을 짓기도 했고 몇 번인가 시문을 조정에 바쳐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천보 10년(751) 〈삼대례부 三大禮賦〉를 바쳐 현종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집현원대제(集賢院待制)의 명을 받고 관리로 뽑힐 순서를 기다렸으나 결국 임용되지 못했다. 당대의 시인은 대체로 관계(官界)에의 진출을 원하고 정치참여를 구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다. 이는 시대적인 분위기이기도 했고 또 임용되지 않으면 세상에 나아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세제민의 이상은 예로부터 중국 지식인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두보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천자(天子)가 옛날의 요·순(堯舜)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되어서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해가는 것이 첫째이고 그것이 백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실제로 두보에게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은 두보를 "즐겨 천하의 대사를 논했지만 이상이 높고 실제적이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정치가로서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기고 또 초조해했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불우하고 궁핍한 것이었다.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의 시는 사회의 불합리한 실정을 여실히 그려냈다. 당은 초기부터 끊임없이 국경에 군대를 보내 전공(戰功)을 거두어 변경에서 위세를 떨쳤으나, 천보연간(742~755)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정치적 파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보 10년 남조(南詔)·대식(大食)·거란에게 크게 패하자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을 끌어가고 조세는 더욱 무겁게 부과했다. 쓸데없는 전쟁에 내몰려가는 병사와 그 가족들의 고통을 하소연한 시 〈병거행 兵車行〉은 이 해에 쓴 작품이다. 개원연간에는 풍년이 계속되었으나 천보연간에 들어오면서는 기근이 잇달았다. 천보 13년에는 장마가 심하게 계속되어 기근으로 점점 더 생활이 어려워지자 두보는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의 친척집 농가에 맡겼다. 다음해 처음으로 우위솔부(右衛率府)의 주조참군(胄曹參軍), 즉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로 정8품(正八品) 하(下)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일단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서둘러 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안을 출발해서 도중에 리산 산[驪山] 기슭에 다다르니 그곳 온천에는 정치에 싫증난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조정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추위를 피해 와서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봉선현에 겨우 당도해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어 있었다. 이때 두보는 비분강개의 울분과 마음을 무겁게 덮쳐 누르는 서글픔을 강렬하게 호소한 장편의 시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다.
천보 14년(755) 11월 9일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들을 데리고 산시 성[陝西省] 바이수이 현[白水縣]·부주(鄜州) 등지로 난을 피해 옮겨다녔다.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하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두고, 자신은 닝샤 성[寧夏省] 링우[靈武]에서 즉위한 숙종(肅宗)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도로 끌려갔다. 수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나날을 보내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이무렵 〈춘망 春望〉·〈월야 月夜〉·〈애왕손 哀王孫〉·〈애강두 哀江頭〉 등 많은 유명한 시를 지었다.
지덕(至德) 2년(757) 반란군에 내분이 일어나서 안녹산이 살해되었다. 숙종은 링우로부터 장안에서 가까운 펑샹[鳳翔]으로 행재소(行在所)를 옮겼다. 두보는 4월에 장안을 탈출해서 펑샹으로 급히 달려갔다. 황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두보를 5월에 좌습유(左拾遺)에 임명했다. 이무렵 휴가를 얻어 부주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여행길에서 두보는 많은 걸작시를 남겼다. 〈구성궁 九成宮〉·〈옥화궁 玉華宮〉·〈행차소릉 行次昭陵〉·〈강촌삼수 江村三首〉 및 장편의 〈북정 北征〉이 그것이다. 특히 〈북정〉은 앞에서 예를 든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와 더불어 두보 시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데, 나라와 군주에 대한 충성, 가족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것으로 비장미가 넘친다. 그해도 저물어 장안은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上皇 :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아직도 중원의 각지를 황폐시키고 있었고 시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정치의 결함을 보완한다는 좌습유라는 간직(諫職)에 있던 두보의 의견은 하나도 중시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그의 기대에 어긋났다. 지덕 2년 11월부터 다음해인 건원(乾元) 1년(758) 5월까지 그는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6월에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이라는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건원 1년(758)의 가을에서 겨울 무렵에는 관군의 세력이 한때 커져서 뤄양으로 가는 길도 뚫렸으므로 오랫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이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를 도와 대적하는 바람에, 관군은 크게 패하고 뤄양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어 두보는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화주로 돌아오는 길은 가던 길과 달리 짙어진 전란의 기운으로 어디나 어수선했고 백성의 고난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신안(新安 : 허난 성 소재) 부근에서 본 현실을 두보는 소위 '삼리삼별'(三吏三別), 즉 〈신안리 新安吏〉·〈동관리 潼關吏〉·〈석호리 石壕吏〉·〈신혼별 新婚別〉·〈수로별 垂老別〉·〈무가별 無家別〉의 시로 읊었다.
건원 2년(759)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 간쑤 성[甘肅省] 톈수이 현[天水縣])로 옮겨갔다. 진주에서 겨우 4개월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동곡(同谷 : 간쑤 성 청 현[成縣]) 땅이 기후도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쉽다는 소리를 듣고 10월에 동곡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1개월을 지냈지만 생활은 더욱더 궁해져서 12월초에 쓰촨[四川] 지방의 청두[成都]로 갔는데 가는 길에 각각 12수의 기행시를 남겼다(→ 색인 : 기행문학). 그 여정은 산천이 험준하고 먹을 것은 떨어진데다 처자를 이끌고 가는 실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이 지독한 체험에서 생겨난 기행시 여러 편이 두보 시의 정점을 이루고 있으며 중국의 기행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 시기 동곡에서의 생활을 노래한 시로서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칠수 乾元中遇居同谷縣作歌七首〉가 있다.
청두에 겨우 도착해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숨을 돌리기까지는 실로 그의 생애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청두에서 두보는 친분이 있던 승려와 친척두제(杜濟)의 도움을 받았다. 옛 친구 엄무(嚴武)가 성도윤(成都尹) 겸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로 재임하고 있어서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두보는 청두의 교외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고 여기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이즈음 그의 시에는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고난을 우려하고, 멀리 떠돌아다니고 있는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시도 있긴 하지만, 자연을 읊은 귀중한 절구(絶句) 등도 보여서 작자의 유유자적한 심경을 느낄 수 있다.
쓰촨에서의 평화로운 기간은 2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보응(寶應) 1년(762)에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청두 부근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광덕(廣德) 1년(763) 1월 드디어 9년에 걸친 안사의 난이 끝났으나 이어지는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소원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쓰촨 지방을 전전했다. 그런 중에 엄무가 다시 청두에 돌아오게 되어 광덕 2년(764) 3월에 청두의 완화초당으로 돌아왔다. 엄무는 두보를 천거해서 절도참모(節度參謀)·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으로 삼았다. 그러나 엄무의 막중(幕中)에서의 생활은 결코 즐겁지 않았고, 동료들과도 마음이 맞지 않은 데다가 관청생활의 불편함도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두보는 이전부터 폐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즈음에는 중풍 기운까지 나타나서 팔다리가 저렸다. 엄무에게 호소하여 영태(永泰) 1년(765) 1월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초당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태 1년 4월에 엄무가 갑자기 죽자 두보는 유일한 후원자를 잃고 더이상 쓰촨 지방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5월에 처자를 이끌고 배로 양쯔 강[揚子江]을 내려와서 또다시 표류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추석이 지난 후 운안(雲安 : 지금의 윈양[雲陽])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여행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져서 대략 반년 동안 거기서 요양생활을 했다. 이때 쓰촨 지방에서는 내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침입이 있어 시국은 점점 더 험악해졌고, 두보의 귀향하려던 소망은 더욱더 멀어졌다. 다음해인 대력(大曆) 1년(766) 이미 55세가 된 두보는 늦은 봄에 병이 얼마간 나아지자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서 기주(夔州 : 쓰촨 성 펑제 현[奉節縣])로 갔다. 대력 1년 늦은 봄부터 대력 3년 봄까지 약 2년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두보는 기주에 온 이래로 2년 동안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는 전체 시의 2/7에 해당한다. 그 시는 점점 율격(律格)이 엄격해지고 자구(字句)도 단련되어 정연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에서는 더이상 이전의 시에서 나타났던 혹독한 사회비판이라든가 격렬한 분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비장함은 밑바닥에 가라앉고 다만 무거운 우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절실하게 배어 있었다. 장년시대에 이백·고적 등과 허난 성 지방에 놀러갔던 때의 추억, 장안에서의 생활, 안사의 난, 그리고 결국 쓰촨 지방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추억을 시로 읊었다. 〈추흥팔수 秋興八首〉는 칠언율시 8수의 연작으로 늙고 병든 두보의 절절한 우수를 읊은 명편이다. 이 시기의 시는 늙은 시인의 침통한 우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두보가 기주에서 지은 시는 이미 힘이 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이 위대한 시인이 발한 최후의 빛이라고 볼 수도 있다.
대력 2년(767)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산(赤甲山) 기슭으로 옮겼고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이무렵의 생활은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폐병·중풍·학질에다 당뇨병까지 겹치고 가을이 되면서 왼쪽 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사이에도 시작(詩作)은 점점 많아졌다. 그는 산골짜기에 있는 고장의 열악한 기후와 친구도 없는 적막함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력 3년(768) 정월 중순경 또다시 배를 타고 싼샤[三峽]를 내려가 장링[江陵]으로 갔다. 그러나 장링에 와보니 남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어렵고 생활이 궁해져서 늦가을에 다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이때는 이미 발도 부자유스럽고 귀도 반쯤 먹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모멸을 당하는 일도 많아졌으며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이 없었다. 궁안[公安]에서 당분간 머물다가 연말경에 악주(岳州)로 내려갔다. 칠언율시 〈등악양루 登岳陽樓〉는 이때 지어진 것인데 이 시의 웅대하고도 침통한 멋은 실로 최고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대력 4년(769) 1월 악주에서 배를 타고 둥팅 호[洞庭湖]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1년 수개월간 두보 일가는 둥팅 호를 떠돌아다녔다. 그후 두보는 탄저우[潭州]로 가서 거적으로 위를 가린 배를 집삼아 지내며 부자유스런 몸으로 약초를 캐서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 이즈음의 시는 신세진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들이 많아서 그의 궁핍한 정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해 4월 탄저우에서 난이 일어나자 두보 일가는 난을 피해 샹장 강[湘江]을 거슬러올라가 천저우[郴州] 있는 외가쪽 숙부를 찾아가는 도중에 레이양[耒陽]에서 홍수를 만나 방전역(方田驛)에 정박했는데 5일간 먹을 것이 없었다. 레이양의 현령이 이 소식을 듣고 술과 고기를 보내주자 두보는 감격해서 감사의 시를 지어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건강이 회복될 여지 없이 가을과 겨울에 걸쳐 샹장 강을 떠돌아다닌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사이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력 5년(770) 겨울 탄저우에서 웨양[岳陽]으로 가는 도중 두보는 그 고생스런 일생을 끝마쳤다. 이때 나이 59세였다. 가족은 그의 관을 향리로 운반할 돈이 없어 오랫동안 악주에 두었는데, 그후 40여 년이 지난 뒤 두보의 손자 두사업(杜嗣業)이 뤄양 옌스 현[偃師縣]으로 운반하여 서우양 산[首陽山] 기슭에 있는 선조 두예(杜預)의 묘 근처인 할아버지 두심언의 묘 옆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