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신단은 조선시대의 제단이다. 숙종 19년(1693) 순흥부사 정중창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순절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숙종 45년(1719)에는 순흥부사 이명희가 삼단으로 쌓았고, 영조 18년(1742)에는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하고 순의비를 세워 숨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이 자리는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당했던 곳이다.
“가시울타리에 가두는 위리안치”
조선시대의 형벌로, 유배된 중죄인이 거주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바깥출입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위리안치라고 한다. 왕족이나 고위관리에게만 적용되었고, 서민이나 하급관리는 해당되지 않았다. 대개 위리안치형을 받으면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지역으로 귀양보내졌다.
1776년 정조에 의해 흑산도로 유배된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가 남긴 <가암유고>에는 울타리의 높이는 3길(5m 가량)이며 4겹으로 둘러쳐져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울타리 한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고, 바깥 사방에는 죄인을 감시하는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금성대군신단은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에 탕평정치의 움직임이 활성화됨에 따라 국왕에 대한 의리가 다시금 강조되는 정치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당대 왕조의 인신(人神)을 위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금성대군신단 → 영주 금성대군 신단)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금성대군신단에 도착했을때는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터라...금방이라도 어둠이 내릴것 같은 분위기였다.
금성대군신단 이정표




금성대군신단 설명 안내판

신단 안으로 들어가는길에 사과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난 내평생 사과나무에 사과달린것 처음봤다. 너무 신기했다. ㅎㅎㅎ






110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금성대군신단을 마지막으로 이번 안동, 영주의 답사가 모두 끝이 났고 사과로 유명하다는 영주까지 갔으니 사과 한꾸러미 안사올 수 없지...해서 사과 조금 사고...ㅎㅎㅎ
영주에서 거의 저녁 6시가 다돼서 출발했는데 하늘이 도우셨는지 차량의 원활한 소통관계로 집에 9시 30분에 도착!!!
차를 오래타서 몸이 석고처럼 굳어 있는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