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우리역사를 통틀어 불교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였다. 왕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교를 믿었으며 종교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사회, 경제면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승려는 사회의 지배층에 속했고 절은 경제 활동의 중심지 역할도 하게 되었다.
*왕실호국불교
송악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정권을 세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시대는 시작된다. 건국기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 정책으로써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러졌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 [훈요십조]에 나타나듯이 훈요 십조의 제 1조에 " 우리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 . 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할 지어다." 하며 불교 숭봉을 표방하고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고려 왕권의 기만적 불교 통제 정책아래 소외되었고, 왕권의 비호 아래 날이 갈 수록 불교는 점점 썩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패는 광종 때 가장 혹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호족 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선택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고 특히 승과를 개설, 시행하였다. 한편 광종은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할 정도로 균여를 숭봉하였다. 그리고 균여 또한 화엄종의 남악파,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하여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써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전제 왕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은 [보현 십원가]를 보면 잘 나타나듯이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렸다.
이는 원효가 그의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린 것과 같이 균여에 의해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귀족 불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벗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성종 때의 정치 사상가 최승로는 시무28조를 통해 왕권의 불교 비호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권력의 후광을 믿고 횡포를 부리던 귀족 불교 승려들을 규탄하였으며, 그 대신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성종은 그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으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현종에 이르러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가 다시 부활되었고 황룡사9층탑을 재수리 하고 고려대장경이 조판되었다. 이것은 당시 거란 침략에 맞서 호국불교 행사를 통해 국민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 팔관회 [八關會]
우리 민족의 고유 민속신앙과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戒)가 습합된 신라와 고려시대의 국가행사로 치뤄진 종교행사. 고려의 팔관회는 고려 건국의 해인 918년(태조 1) 11월부터 시작되었다. 궁예가 매년 겨울 팔관회를 설치하여 복을 빈 것을 전승한 것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팔관회는 551년(진흥왕 12)에 처음 행해진 이래 4 차례의 기록이 보인다. 특히 이 때 행해진 팔관회는 모두 호국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런 팔관회가 국가적 정기 행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고려조에 들어서였다.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천령(天靈) 및 오악(五惡)·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그 성격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팔관회는 불가에서 말하는 살생·도둑질·간음·헛된 말·음주를 금하는 오대계 (五大戒)에 사치하지 말고, 높은 곳에 앉지 않고, 오후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세가지를 덧붙인 8가지의 계율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한하여 엄격히 지키게 하는 불교의식의 하나였다.
이같은 팔관회가 고려에서는 이미 태조 때부터 토속신에 대한 제례를 행하는 날로 그 성격이 바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이런 재회(齋會)를 통해 호국의 뜻을 새기고 복을 비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팔관회는 연등회와 매우 비슷한 대회였음을 알 수 있다. 팔관회의 개최일은 서울인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서경에서는 10월에 팔관휴가로 전후 3일을 주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개경의 팔관회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어 대회 전날인 소회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는 것이 통례였고, 궁중 등에서 지방관리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고 가무백희등의 순서로 행하여졌다. 대회 때도 역시 축하와 헌수를 받고 송(宋)상인이나 여진 및 탐라의 사절이 축하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왕이 행차하는 법왕사는 919년(태조 2) 국가의 융성을 불법에 의지하고자 개경 내에 10찰을 세울 때 수위에 둔 사찰로서, 비로자나삼존불을 주존으로 봉안한 절이며, 신라의 황룡사에 해당하는 호국사찰이다. 왕이 가장 먼저 법왕사에 행차한 것은 불법에 의한 호국을 염원하는 한 표현이었다. 또 팔관회일에는 죄인의 대사면을 내리기도 하였다. 팔관회를 주관하는 관청은 팔관보(八關寶)로서, 팔관회의 의식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문종 때 설치하였다.팔관회 의식이 이뤄지는 곳은 사방에 향등을 달고 2개의 채붕(綵棚)을 세워 장엄하게 장식하고 불교와 민속적 요소가 합치되어 있었다. 이 의식은 최승로의 건의에 의해 987년(성종 6)에 폐지되었다가 1010년(현종 원년)에 부활될 때까지를 제외하고는 고려 전시기에 거의 매년 행해지던 중요행사였다. .
고려 500년을 통하여 여러 번 변화와 성쇠가 있었는데, 대체로 초기에 성하였고 현종 이후에는 점점 쇠퇴하였으나,국가최고의 의식으로 계속되었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하였던 시기에도 이 의식은 행하여졌다. 조선 초기에는 잠시 보이다가 폐지되었다.고려는 팔관회를 통하여 종교의식의 단일화를 이룸으로써 중앙집권체제와 민족적 통합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다.
☞ 연등회
연등(燃燈)은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온 불교의식이다. 불교에서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세상을 밝히는 지혜에 비유하고 석가 생존 시부터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연등 공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연등회는 팔관회와 더불어 신라 진흥왕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 국가적 행사로 자리잡힌 불교 법회이다. 이 두 행사는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의 제 6조에서 후대왕들에게 계속 잘 받들어 시행할 것을 당부한 사항이기도 하다. 태조는 여기서 연등회를 '불(佛)을 섬기는' 행사라고 말하였다.본래 연등은 등에 불을 켜 놓음으로써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주는 부처의 공덕을 기려 선업(善業)을 쌓고자 하는 공양의 한 방법이었다. 연등 공양은 브라만교의 신들에게 물, 향, 꽃, 등불, 음식을 바치던 인도 전래의 풍습을 불교가 수용한 것으로, 불교 발생 초기부터 불교행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것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래되어 연중 행사화하고, 또 신에 대한 제사를 함께 지내는 등의 성격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런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의 연등 행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통일신라시대 경문왕(景文王) 6년(866)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바로 이러한 연등행사의 전례를 수용하여 상원연등회를 국가적 차원의 불교행사로 법제화하였다. 그가 상원연등회를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와 같은 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상원연등회는 정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개설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성내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리고 궁성대로와 성문들을 오색비단으로 장식하여 등불을 밝히고 궁성의 담을 따라서 등불을 쭉 매달아 야간에도 궁성 안은 대낮 같았다. 연등을 하는 저녁이라는 의미로 등석(燈夕)이라 부르는 보름날 밤 상원연등회 행사가 절정에 이르렀다. 국왕은 왕족과 백관들을 데리고 절로 행차하여 분향한 후 궁성 정문의 누대에 올라 수만 개의 연등이 밝혀져 있는 장관을 구경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음악과 춤 및 연극을 베풀어 군신이 함께 즐기는 한편으로 부처와 천지신명을 또한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
또 상원연등회 특수를 겨냥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갖가지 특산품과 고금의 진기한 물건들을 벌여놓은 임시 개설 시장인 등시(燈市)를 돌아다니면서 밤새도록 즐겼다. 이처럼 상원연등회는 모든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행사를 제공하였다. 성종대에는 최승로(崔承老)의 건의에 의해서 폐지했다가 1011년(현종 2)에 재개하였는데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피난길에 올랐다가 돌아오던 중 청주(淸州)의 별궁에서 2월 15일에 열었으므로 이후부터는 이 날짜로 바뀌었다. 이 후에는 나라의 형편에 따라 1월 15일, 혹은 2월 15일에 열렸다.
1038년(정종(靖宗) 4)의 연등회 때 왕이 태조의 원당인 봉은사(奉恩寺)에 나아가 그 사당을 배알한 이후부터 이 대회는 건국자에 대해 배례를 행하는 국가적·정치적 의의를 지닌 날로 지켜졌다.
고려시대 연등행사는 이와 같이 2월 보름 상원연등회가 대표적이었지만,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도 연등회가 열렸다. 사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의종(毅宗) 때 백선연(白善淵)이 석가탄신일에 등불을 밝혔다고 하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이다. 사월 초파일은 불교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축일이기 때문에 상원연등회처럼 대규모 행사는 아니더라도 경축행사는 있어 왔다.
이러한 석가탄신일 행사가 국왕이 주체인 기존의 상원연등회와는 별개로 석가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에 무인집권기 최고 권력가였던 최우(崔瑀)에 의해 자신의 집에서 연등회를(우리나라 최초의 초파일연등회) 화려하게 개최하여 사월 초파일 연등회로 발전되었다. 정규적 행사 이외에도 4월 초파일의 석가탄신일이나 불사(佛寺)의 낙성과 사탑의 건립 등을 경축하는 행사가 있을 시에도 설치되어 고려의 일반화된 국속의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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