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은총선물세트
(김현수 / 기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책 한 장도 넘길 수가 없었다. 이 한 번을 위해 12년이나 준비했는데 이렇게 컨디션이 엉망이니 시험을 망칠 게 뻔했다.
친구들 사이에 패배자로 남을 터인데 죽느니만 못할 것 같았다. 온갖 시나리오가 맴돌았다.
나에게 수능은 난생 처음 혼자 마주한 커다란 벽과 같았다. 세상이 나에게 공식적인 ‘이름표’를 달아주는 관문이어서 이걸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세상을 향해 발돋움할지, 아님 열등감의 늪에서 허우적댈지 결정될 것만 같았다.
외고에 다녔던 나는 무엇보다 친구들에게 뒤쳐지는 게 두려웠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살고, 심지어 예쁘기까지 한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지망했는데 나는 지기 싫었다.
학교에선 착하고 온순한 ‘순둥이’로 알겠지만 집에선 거의 깡패처럼 짜증을 부렸다.
시험일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았던 어느 날, 어두운 상상을 하며 책만 멍하니 바라본 채 주님께 투정을 부리는데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시험이 나보다 더 중요하느냐?”
깜짝 놀라서 주변을 돌아봤다.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속 가득히 울리는 그 음성….
원래 내 꿈은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사람처럼 되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런 사람이 되려면, 일단 좋은 대학에 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기복신앙이 아닌 것처럼 포장했지만 사실 ‘좀 도와주시죠’ 하면서….
겉으로는 주님이 주는 평화를 찾겠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칭찬을 얻지 못할까 안절부절못했던 모순을 안고.
그 순간, 내 우선순위는 옆 사람보다 잘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향해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른 그 무엇이 아니었으니, 그때부터 평온이 찾아와 등하굣길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어느 대학에 가든 하느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할 거란 확신이 드니 시험이 두렵지 않았다.
다행히 나에게 배정된 시험장은 명동성당 옆 고등학교였다. 시험 보기 전 시험장 곳곳의 성모상과 눈을 맞추며 기도할 수 있었다.
결국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참 ‘작은’ 나를 위해, 주님이 마련해준 ‘은총선물세트’ 같았다.
해마다 수능 시즌이 되면 10년 전 그 ‘은총선물세트’가 떠오른다. 그리곤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번 하산했으면, 한번 깨달았으면 그 길로 죽 가면 좋으련만 아직도 내 그릇은 너무 작아 세상이 주는 평화와 칭찬에 전전긍긍한다. 뭔가 반짝반짝 남 보기에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조용히 물으시던 주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평온을 되찾곤 하지만, 욕심을 줄이긴 참으로 어렵다.
얼마 전 친한 친구 한 명과 20대를 돌아보며 수다를 떨었다.
“내년이면 서른인데 대체 뭘 이뤘는가. 큰 실패 없이 평탄하게 계단을 올라왔지만 이 길이 맞는지 불안하고 내가 뭘 원하는지도 헷갈려. ‘평화의 도구’는커녕 내 평화도 못 찾았으니 참 한심해. 아직도 남의 얘기에 솔깃하고 남의 평가에 신경 쓰고”
문득 10년 전 주님이 주신 ‘은총선물세트’에 정말 감사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님이 나에게 뭔가 이루라고 주셨는데, 주님의 음성과 은총은 모조리 잊어버리고, 다 내 실력으로 여기고 세상의 소리에만 귀 기울인 건 아닐까.
과연 그때 수능을 처참히 망쳤어도 나는 감사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감사해하면서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향해 노력했을까.
대답은, 그동안 진실로 감사하지 않았고, 주시는 걸 당연하게 여겼으며, 남들이 좋다는 계단만 올랐다는 거였다. 나를 늘 변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기준에 맞추다 보니 당연히 불안하고,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사는 거라고….
수능 전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까 불안했듯이 지금도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그때처럼 곧 맞이할 30대가 불안한 것은 똑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나는 지금 정녕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도 내 우선순위는 수능 때처럼 세상인가 아니면 그때와는 다른 세계를 향해가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2010.1.가톨릭 다이제스트 통권23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