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종 목 : 국보 제90호
*지 정 일 : 1962.12.20
*발굴 장소 : 경주 보문동 *현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 신라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는 상당수의 귀걸이가 발견되었고 특히 신라시대의 고분에서는 많은 수의 금제귀걸이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경주 보문리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제귀걸이는 형태나 세공수범이 다른 귀걸이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걸작이다.
금의 순도는 22.0-23.5k이며(순금은 24k임) 중심고리보다는 샛장식과 드림의 순도가 높다.
경주 보문동 합장분 (구 경주 보문동의 부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한 쌍의 금귀걸이로, 길이 8.7cm이다. 이 귀걸이는 귓불에 꽂는 부분의 고리가 굵어서 태환식이라고 부른다. 태환식(태환식)귀걸이의 태환은 속이 비어있으나 외형이 탐스러워 위엄이 있어 보이는데 겉에 또 이러한 화려한 장식문양이 가해지고 보면 한층 높은 격이 있게 된다. 신라의 귀걸이중 그 중심 고리가 지금이 3.5cm로 신라의 귀걸이 중에서 가장 크면서도 정교하고 화려한 귀걸이로서 보통 굵은 고리 귀걸이의 고리 표면은 매끈한데 비해 이 귀걸이는 중심 고리에 수백개의 금 알갱이를 붙여서 거북등무늬와 나뭇잎 무늬를 표현했다.
금 알갱이는 금사를 짧게 자른 뒤 열을 가하여 만들었는데 표면 장력에 의해 둥근 알갱이 형태가 된다. (누금세공 鏤金細工 : 금알갱이와 가는 금실을 붙여 세공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
귀에 닿는 굵은 고리(중심고리)에는 다시 가는 고리(노는고리)를 연결시켜 중간부를 달고 있는데 굵고 가는 고리의 대조가 아름다우며 특히 표면에는 매우 작은 금알갱이로 6각의 귀갑형(귀갑형)과 그 안에 3개의 꽃잎을 나타내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어 완숙의 경지에 오른 신라의 금공기술이 잘 드러나 있다.
그 밑에 달린 중간부(샛장식)는 작은 고리(연결고리)를 연결하여 속이 빈 구슬모양을 만들고 여기에 다시 금실을 꼬아서 수십 개의 하트형 금판(달개)을 2단으로 달았다. 금실을 꼬아서 그 끝에 달았기 때문에 구슬에서는 약간의 거리가 있게 되고 하트형 금판 주변 역시 금알갱이 장식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중간 장식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게 되어 찬란하기 이를 데 없다. 샛장식에는 달개가 무려 37개가 달려 있다. 6세기 초 신라 귀걸이에 일반적으로 18-24개가 달리는 것에 비하면 많은 숫자입니다. 각각의 달개에는 가장 자리와 중앙에 태를 새겨 화려함을 더했다.
그 밑에 달린 드림은 거의 원에 가까운 넓적한 하트형이다. 귀걸이의 드림은 대개가 하트형이지만 그 형태에는 다소의 변화가 있다. 이 귀걸이의 하트형은 폭이 넓어서 귀에 닿는 태환인 모양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드림에도 주변에 1줄과 중앙에 세로2줄 의 금알갱이를 장식한 점은 태환과의 조화를 또한 이루어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귀걸이는 금제, 은제, 금동제, 동제등을 합하여 수백 쌍에 이르고 있으나 이와같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드문 일이며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신비스러울 정도이다.
이와 같은 수법의 귀걸이가 현재까지 3점정도 발견되어 알려져 있으나 이 부부총 귀걸이는 출토지가 확실하고 관계유물이 갖추어진 유일한 예이기에 또한 학술적 가치가 한층 높다고 할 수 있다.

2. 경주 보문동 합장분 (구. 경주 보문리 부부총)
지금부터 97년 전인 1915년, 경주 보문동의 나지막한 구릉에서 신라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부부의 무덤으로 추정하여 ‘부부총’이라고 이름 지었다.
국보로 지정된 화려한 금귀걸이도 출토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발굴보고가 발간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으나 지난해 96년 만에 발굴보고서를 쓰는 과정에서 이 무덤은 부부가 묻힌 ‘부부총’이 아니라 두 명의 여성이 묻힌 무덤임을 밝혔다. 따라서 이름도 ‘보문동합장분’이라고 고쳐지었다.
보문동합장분은 일제에 의한 한일 강제병함이후 일제의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구조를 파악하지도 못한 매우 부실한 조사였으며 경주지역에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과 석실분(돌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의 조사자들은 적석목곽과 석실이 근접해 있으며 적석목곽에서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대도(大刀)가 , 석실에서는 여성의 장신구로 여겨지는 태환이식(금귀걸이)이 부장된 점을 들어 부부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 그로인해 지금까지 ‘부부총’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이후 우리의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결과 부장품들이 어디서 어떻게 출토 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경주 보문동합장분의 적석목곽에서 대도는 피장자의 몸에 착장된 상태가 아니라 별도의 부장궤에서 출토된 반면 태환이식(금귀걸이)는 머리 근처에서 출토되었고 양쪽 팔목에는 은과 동으로 만든 팔찌를 차고 있었으며 10개의 손가락에는 은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었. 석실에서도 태환이식은 주인공의 몸에 착장되었고 한쪽 팔목에 은과 동으로 만든 팔찌를 차고 있었던 상태로 추정되어 이로써 주인공은 최상위 신분에 속했던 신라의 두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신라사회는 신분제에 따름 엄격한 복식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대체로 관과 관장식을 포함하여 귀걸이 대도. 목걸이, 과대 팔찌 반지를 모두 착용한 사람은 최고 의 신분에 해당된다. 하위 신분이나 지방으로 갈수록 착장품중의 일부가 빠지게 된다.
보문동합장분의 주인공은 복식을 보아서도 대릉원 일대의 신라 마립간 시기 최고위층 무덤의 수준에 버금가는 신분이었다.

신라의 무덤은 목곽묘-적석목곽분 - 석실분의 순으로 바뀌었는데 적 석목곽분은 대락 4세기 중엽경에
등장하여 5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6세기 중엽경에 석실분의 등장으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보문동합장묘는 6세기 중엽경 신라 지배층이 주로 사용한 적석목곽분의 마지막 단계이자 석실분이 처음으로 도입된 단계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