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부터 매년 ‘물레야’, ‘물망초’, ‘얄미운 사람’, ‘몰래한 사랑’을 대히트시키면서 톱가수로 명성을 떨치던 김지애. 결혼과 동시에 가수 생활을 잠정적으로 은퇴했다가 지난 2000년 재기를 시도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한 후 종적을 감췄다. 그보다 앞선 1997년에는 하와이의 한 모텔에서 추락사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남편과의 불화 때문인지 자살을 시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아직도 노래방에서 많은 사람에게 불리고 있는 그녀의 주옥같은 명곡들. 커트머리와 시원한 목소리가 트레이드마크이던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대중 앞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다는 독자엽서가 간간이 날아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의 제보를 통해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추락사고 이후, 끝나지 않은 투병 생활
그녀를 만나기 전 그녀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친오빠와 전화통화가 됐다. 그는 동생과 연락을 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고 입을 열었다.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어렵게, 힘들게 살고 있어요. 건강이 좋지 않거든요. 사고 후유증으로 다리도, 턱도 많이 아플 거예요. 저만 보면 눈물을 흘려서….”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유달리 자존심 강한 동생인지라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간의 상처를 이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라고 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동생이 남편 없이 홀로 지내는 모습도 안타깝다. 둘 사이의 문제는 당사자가 풀어야 할 숙제라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김지애는 현재 경기도의 한 중소도시에서 중학생 딸과 살고 있었다. KBS PD이자 <지구촌 영상음악>의 MC였던 남편과는 결혼 3년째부터 기약 없는 별거 생활을 해오고 있는 중. 남편은 현재 외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적인 부부이긴 하지만 10년이 넘게 떨어져 산 두 사람은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딸과 잠시 외출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몰라보게 체중이 줄어 가수 시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외모가 변했다. 어딘지 모르게 걸음걸이도 불편해 보였다. 어렵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놀라기보다는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잘 지내요, 근데 저를 왜 찾아오셨나요? 저는 인터뷰할 생각이 없어요. 가수로 컴백할 생각도 없습니다.”
“건강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냥 잘 살고 있어요.”
“건강하시라”는 작별인사를 건네자 눈빛으로 답례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에 부치는 듯했고, 딸아이는 익숙한 듯 엄마를 정성스레 부축했다.
이웃 주민들에 따르면 그녀는 다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하와이 추락사건’의 후유증이라는 것. 당시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와 오른쪽 다리가 꺾인 채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투신자살로 보도됐지만 그녀는 단순한 실족사라고 말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턱과 이가 상해 지금도 턱관절이 좋지 않다. 사고 이후 여러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오랜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그녀는 주말마다 주민들이 함께 하는 계단 청소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매번 벌금으로 대신한다. 사정을 아는 주민들도 그녀를 배려해준다. 생활비는 친오빠 중 한 사람이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애는 딸아이와 함께 동네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라고 한다. 엄마와 아빠를 반반씩 섞어놓은 외모의 딸아이는 인사성도 바르고 공부도 잘한다. 동네에서 소문난 효녀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모습이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인다.
비록 건강은 좋지 않지만 평소 김지애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기도 한다. 웃는 모습엔 옛날 얼굴이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동네 사람들은 처음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설사 알아본들 달라진 모습 때문에 실례가 되지 않을까 누구 하나 물어보지 않았다고. 이후 몇몇 주민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별다른 얘기 없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싫은 눈치였단다. 화려하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을 터. 서울이 아닌, 그렇다고 연고지도 아닌 경기도의 중소도시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가수로 활동할 당시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투신자살설, 이혼설이 끊이지 않았을 때도 가까운 지인들에게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없었다. ‘악바리’, ‘깐돌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일 처리도 야무졌다. 대중에게는 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던 완벽주의자였다. 자신만의 원칙과 소신이 있어 정해진 출연료 이하로 개런티를 주면 무대에 서는 법이 없었다. 목숨까지 잃을 뻔한 큰 사고를 당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 흔한 해명이나 남편에 대한 원망 없이 혼자 야무지게 자신의 문제를 매듭지었고, 지난 2000년엔 건강한 얼굴로 가수로 컴백하기도 했다. 죽음보다 깊은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아이의 존재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