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겨레의 어미강을 찾아
어미강으로 돌아가려는 연어가 어느날 둑에 막혀 몸부림친다면? 둑처럼 우리를 막아섰던
일본 제국주의와 황국 식민사관,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식민지적인 것을 존속시켜왔던 이 땅
의 수구 세력들, 그 옹벽이 있어 많은 연어들은 처절하게 죽어갔고, 어미강은 아예 연어들이
찾지 않는 강이 돼버렸다.
내 나라의 찬란했던, 그러나 잊혀진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려 놓고자 길고도 먼 탐사의 길
을 걸었다. 민족문화의 보고인 "삼국유사"를 별빛으로 삼아, 간혹 길을 잃으면 "삼국지"와
"수서", 고대 현장에서 만난 옛 기록과 유혼의 부축을 받아 이역만리 인도와 중국의 절, 그
리고 일본 규슈의 들판과 산 속을 헤맸다. 숨겨진 진리를 밝혀 우리 정신의 원류를 찾겠다
는 열정만으로 젊은날을 송두리째 던졌다.
말하자면 옛날 옛적 고대의 전설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린 우리 할머니를 찾으러 온 것이
다. 천명을 받들어 수로왕의 배필이 된 허 왕후. 그녀는 원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다.
서기 48년, 아유타국을 출발하여 공주를 모시고 온 배는 두 달 가까운 항해 끝에 마침내
도착지인 낙동강 어귀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그 딸 가운데 한 명인 비미호(히미코)는 바다
건너 규슈로 가 가락의 또 다른 나라를 세웠다. 야마이국. 그것은 일본 최초의 고대 왕국이
었고 그 왕도가 현 규슈의 야쓰시로시 일대였다.
이른바 "꽃가마 뱃길"로 불리는 이 "거사"를 놓고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생판 모
르는 미지의 해로를, 그것도 시집가는 공주가 두 달씩이나 바다에서 헤맨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라고. 이러한 행각도 어찌 보면 오래 전 조상이 쓰던 바늘을 강물에서 찾아내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나의 작업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치부하였
다.
하지만 이런 회의론으로는 고대사의 진실을 밝혀내기 어렵다. 역사란 알려고 하는 자에게
만 비밀의 문을 연다. 사라진 고대사의 진실은 많은 허위와 상식들로 분장되었기에 실증을
바탕으로 엄정하게 논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실마리는 상상과 열정으로 풀어야 한다. 설령 의문과 회의가
든다 해도... 길을 헤매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함이다. 직관력으로 끝없는 미로를 더듬고, 고대
의 유흔을 바탕으로 철저히 고증하여 단 하나의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2천 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긴 침묵을 깨고 나타난 조상은 단순히 지난 날의 조
영만은 아니다. 헤아릴 수는 없으나 그들은 분명 나의 오늘을 만들어낸 인연일 테고, 그것은
곧 우리의 모습 찾기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지 어언 30여 년, 그처럼 단단하던 옹벽은 무너지고 어미강의 물길이 열리기 시작했
다. 수로왕릉에 있는 쌍어문은 일본 규슈의 신사에도 있었고 중국 푸저우의 절에도 있었으
며, 저 멀리 인도 북동부 아요디아의 사원에도 있었다.
만물의 근원과 왕을 상징하던 파형동기나 문양 또한 수로왕릉에도, 규슈에도, 아요디아에
도 있었다. 수로왕비 허황후는 실재했었고, 꽃가마 뱃길 또한 아시아 사람들이 서로의 지혜
를 배우고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정기적으로 오가던 무역로이자 문화 교류로였다.
1976년 일본에서 "비미호 도래의 수수께끼"를 낸 지 20여년만에 새로운 사실과 연구를 묶
어 나의 조국에서 책으로 엮는다. 이제 이 작업을 계기로 잊혀진 우리 고대사의 진실이 환
히 드러나기를 바란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다시 일본으로 이어졌던 교류의 길
이 밝혀지기를, 그리하여 그 길로 꼭두서니 빛 깃발을 달고 사랑과 지혜와 평화를 실은 배
가 오고 가기를 고대한다.
지금 난 어두운 하늘 가운데 반짝이는 별을 바란다. 저 별이 저렇게 또렷이 반짝이는데
예서 그칠 수는 없다. 저 별이 이렇게 별살을 길에 뿌려주는 한, 나그네의 길은 행복의 길이
다. 그 길에서 찾은 바늘은 잃어버린 내 조상의 삶을 한땀 한땀 재생해낼 것이다. 하여 그
길은 사라진 고대 한국사를 복원하는 길이자 우리민족 정신을 살리는 길이요, 나아가 아시
아의 평화를 도모하는 길로 열릴 것이다.
우리가 그 뜻을 이어 빛을 밝히는 한 어미강은 멈추지 않고 흐를 것이도 연어들은 마음껏
유영을 즐길 것이다. 삼국유사의 말처럼 "세월은 비록 흐른다 해도 근본의 법도는 기울지
않는다".
1부 잃어버린 왕국
낱말 속에 숨겨진 역사
화엄에서는 하나의 티끌 속에 세계가 담겨 있다고 하였다. 엄청난 진리일수록 작은 사물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낱말 속에도 고대사의 진실이 수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담겨 있다.
"에비!"
누군가 위험한 짓을 할 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다. 국어사전은 "에비"라는 단어에
대해 "아이들에게 무서운 것이라는 뜻으로 놀라게 하는 말, 또는 가상적 물건"이라고 풀이
하고 있다. 아이들은 "에비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일단 몸을 움츠린다. 실체를 모르는 채
무서운 것, "어이쿠, 무서워!"쯤으로 알라는 뜻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서 말하는 "가상적 물건"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 "에비"의 실체를 밝힌 한 문헌이 있다. 제목은 "조선민담집". 나온 지 반 세기가
지난 70년대 초, 동경의 고서점 거리에서 우연히 그 책과 마주치게 되었다. 저자가 한국인이
있건만 그 책은 유감스럽게도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언제였던가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조선군이 대거 일본을 정벌하러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조선군은 일본의 "에비야"라는 들판에서 일본군과 싸워 마지막 한사람까지 전사하고 말았
다. 그후부터 조선인은 "에비야"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치게 되었기에 이 말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아이들을 으르는 말이 되었다.
이 글은 옛날 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유래풀이 정도로 들릴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한반도를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무심항"의 설화를 대비시켜 한낱 말장난일 수만은 없는 지
명의 유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전남 여수군 돌산면에는 '무심항'이라는 좁은 해로가 있다. 섬과 섬 사이에 해발 10여척의
육지로 이어진다. 이는 멀리서 보면 서해와 남해 사이로 바닷길이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지형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사건이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전이다.
지형적 특성을 모르는 일본군이 그 해로로 빠져 나가려고 전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바다는 막혀 있었고, 게다가 물은 소용돌이를 치며 지나갔다. 결국 진퇴양난이 된 일
본군은 마침내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전멸당하고,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일본인은 이곳을 "무심한 항구"라는 뜻으로 "무심항"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마무리되는 "무심항"의 무대를 이번에는 "에비야 벌"과 대비시켜 실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한반도
무심항(전남 여수)
이순신 장군이 이끈 수군
(상대군)도요토미 히데요시
한반도 남해 해로를 십분 이용
왜군 몰사
조선조 봉건체제에 일대 번혁이 옴
일본
에비야 벌판(가라쿠니다케)
왜지의 토착 세력 "구노국"
(상대군)야마이국, 가야 파견군
에비야 고원의 화산섬 지형을 십분 활용
비미호의 가락국 군사 전멸
현재의 "천황" 체제 출현
"조선민담집"의 저자는 책에서 옛 조선군이 대거 일본을 정벌하러 간 것이 언제였던가를
확실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에비야 벌판이 일본의 규슈 땅에 있고, 적어도 "조선군
이 대거 일본을 정벌하러 간 일이 있었다"고 활자로 박은 이상, 조선군(한반도에서 온 군사
라는 뜻)의 대거 참사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게 된다.
"조선민담집"은 손진태라는 한국인이 1922년에서 1930년에 걸쳐 함경남도 홍원에서 시작
해서 한반도의 주요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모은 옛 이야기들을 일본어로 수록해놓은 책이다.
이 이야기 가운데 무심항의 해전에 대해선 1930년 5월 여수에 살던 김동무라는 사람에게 들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은 "그까짓 옛날 이야기를 가지고서..."라고 귀 밖으
로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에비야 벌로 짐작되는 현장을 나도 모르게 밟게 되었
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일은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여행하고자 하는 일본의 규슈 서해안 "다마나"라는 작은 도
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저승 벌판
70년대에 이르러 일본 열도는 "고대사 열풍"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패전 전까지, 말
하자면 절대적 군국주의가 팽배했던 시절까지 고대사 탐구는 "접근해선 안될 일"로 금기시
되었기 때문에 그 호기심이 봇물 터진 듯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찾아간 "다마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이미 열풍은 찾아와 있었다.
숙소를 찾는 이방인에게 시교육위원회가 주선해준 곳은 온천이 있는 어느 재벌회사의 사
원 보양소였다. 교육위원회가 있는 곳까지 마중나온 보양소 관리인은 이와나가라는 40대 전
직 체육교사였다. 이력과는 무관하게, 그가 이 고장에서는 고대사에 가장 관심이 맣은 사람
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혹시 '가라쿠니다케'라는 산을 아십니까?"
규슈로 온 까닭이 가라쿠니다케가 있는 에비노 고원을 찾고 싶어서였다고 고백한 것은 며
칠이 지나서였다. 다마나에서 2백km나 떨어져 있는 가라쿠니다케에 가려면 험악한 산악 도
로를 타고 가야만 한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어서 이와나가에게 동행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와 나는 김밥과 술안주, 1되들이 소주('구마쇼추'라는 독한 보리술)병
을 싣고 길을 나섰다. 현청 소재지인 구마모토시를 벗어나 남하하는 길은 순탄했다. 그러나
야쓰시로 시에서 구마가와의 급류를 따라 오르는 길은 구비구비 산길이었고, 운전 솜씨가
꽤나 노련해 보이는 이와나가도 점차 말수를 줄일 정도로 힘든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목표 지점인 가라쿠니다케의 중턱까지 올라갔다.
가라쿠니다케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곳에선 가라쿠니다케를 '한국악'으
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를 원칙적으로 한 개의 음으로만 읽는 우리로서는 같은
글자를 마음내키는 대로 읽는 일본인의 한자읽기에 곧잘 곤혹스러워진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한국'을 '간코쿠'로 읽다가도, 지명인 '한국악'에 이르면 '간코쿠 가쿠'가 아니라 '가라쿠
니다케'로 둔갑해버리고 만다. 인명인 경우에는 더 종잡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한국악. 일본 정부가 제작한 공식지도에도 '한국 산'으로 표기돼 있는 산. 분명 일본 열도
에 있는 산이건만 '한국 산'이라는 뜻인 '한국악'으로 표기한 다음 '가라 나라'라는 뜻인 '
가라쿠니'로 읽어온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 번 꼭
발을 들여놓고 싶었던 곳이다.
'가라'가 '구니'의 이름이면 우선 연상되는 것이 한반도의 고대 왕국 가라다. 이름뿐 아니
라 한반도 고대의 유적과 부합되는 점이 많아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가라'로
시집온 아유타국 공주의 꽃가마 뱃길을 추적하던 내가 1975년 야쓰시로시에 와서 한달 간
머문 이유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은 가라쿠니다케와 구마가와가 큰 강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이었다.
'지형적으로 보아 공주의 꽃가마가 들어올 여지가 충분하지 않은가? 고대사의 비밀을 푸
는 열쇠를 이곳에서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묘한 울림이 가슴 속에서부터 밀려왔다. 비
단 꽃가마배 항로뿐 아니라, 훗날 아유타국 공주의 딸 하나가 일본 최초의 왕이었다는 흔적
과 그에 관한 증거까지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라쿠니다케 약 20km 못미처 이토요시를 지나자 어둠 속에 장대비가 들이쳤다. 이와나
가는 일단 차를 안전한 지대에 주차시킨 뒤 잠시 휴식할 것을 제안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이 쯤에서 한 잔 할까요?"
세차게 내리는 비가 오히려 고맙다는 듯 그는 술병을 내밀었다. 독한 술 두세 잔에 먼저
곯아떨어진 것은 나였다. 눈을 떠보니 비는 그쳐 있었고 짙은 안개 속에 희붐히 아침이 밝
아오고 있었다. 이와나가는 한되들이 소주병을 밤새 말끔히 비웠는지 빈 술병을 끌어안은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를 깨워 김밥으로 요기를 한 후 우리는 출발했다. 이와나가는
'고바야시'라는 곳 가까이에서 가라쿠니다케로 오르는 좁은 찻길을 굽이 돌다가 일단 차에
서 내리자고 했다.
"여기에 볼 만한 구경거리가 있답니다. 잠시 내려서 둘러보시지요."
이와나가는 가라쿠니다케 중턱에 위치한 '사이노가와라'라는 협곡으로 안내했다. 협곡 어
귀에 들어서자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렸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앞장선 그를 따라갔다. 발 끝
마다 유황을 흠뻑 뒤집어쓴 바위가 흔들리고 있었고 바위 틈새로 시뻘건 땅 속의 불길이 보
이기도 했다.
부글부글거리며 물 꿇는 소리만 계곡의 적막을 가르고 있었다. 그제야 이곳을 '사이노가
와라(무서운 물줄기)'라고 명명한 이유를 절감할 수 있었다.
가라쿠니다케를 오르다보면 중턱쯤에 연기가 분출하는 '사이노가와라'에 이르게 된다. 이
일대에는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가득한데, 분기공에서는 수증기와 가스가 엄청나게 뿜어
나오고 있고, 자디잔 유황 결정이 흩어지는 모양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워서 소스라치게
한다.
일본의 국토안내서 "일본의 산하"는 에비노 고원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두려움'이라는 말
로 글머리를 풀어나갔다.
'사이노가와라'는 가련한 어린아이와 죽음의 세계가 맞물린 고환과 구제의 장소롤 오랫동
안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잡아왔다. 부모를 앞질러 죽은 아이가 이 강변에서 돌을 쌓아
탑을 만들려고 하면 귀신이 나타나 이를 허물어뜨리고, 아이는 울면서 다시 쌓는다는 전설
은 부모를 한맺히게 한 죄에 대한 벌의 상징이다. 그때 지장보살이 나타나 아이를 부축해
지켜준다고 한다.
중세 이후 속설로 널리 퍼져 전해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지장보살 신앙에 근거를 둔 슬픈
저승길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이 민담이 사실이라면? 산허리의 황량한 광경이
죽은 아이가 울며 서 있는 저승 강변으로 보았다면 이 일대 어딘가에 철없는 아이가 헤매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을까?
이렇게 물은 뒤에 그들은 단 한 줄의 글로 문장을 끝냈다.
눈 닿는 곳 멀리까지 고요한데, 인기척은 없군!
그러나 이 해설과는 달리 나는 이곳에서 '인기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위 모퉁이에서
오래된 조각상 하나를 찾아냈던 것이다. 이마에는 곤지를 찍고, 왼손에 벼이삭을 쥐고, 오른
손에 질그릇 물병(옛 항해자들의 휴대품)을 든 여인상이었다. 여인상을 대하며 강한 친근감
을 느꼈는데, 이 여인이 상징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차차 밝힐 것이므로 여기서는 비켜가기
로 한다.
일본인들이 저승길 어귀 세 갈래 갈림길의 강변으로 일컫는 비정한 에비노 고원의 협곡
'사이노가와라'가 바로 "조선민담집"에서 말한 '에비야 벌'은 아니었을까?
먼저 '에비야'와 '에비노'라는 두 지명은 분명 서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공식지
도에 한자 대신 가나로 '에비노'로 표기한 것은 퍽이나 예외에 속한다. 아주 옛날에는 이 에
비노를 '이비야'라는 한자로 표기하기도 했다. 우리말로 읽으면 '이비야'가 된다.
그러나 이름의 유사성만 가지고 이 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야쓰시로에서 가라
쿠니다케까지 이어진 강줄기를 따라 한반도의 남쪽 '가라'에서 온 집단이 이곳에 상륙했고,
마침내는 왜국의 여러 집단을 한울타리에 아우른 최초의 고대 왕국 야마이를 세웠다는 사실
을 얼마 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마가와 강을 따라 우뚝 솟은 고원의 산은 멀리서 보기에도 적을 막으려는 경계선 같았
다. 게다가 직접 와보니 전투 요새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즉 뚫린 줄만 알고 빠져
나가려던 도요토미의 수군을 '무심항'이 가로막았던 것처럼, 화산섬의 특이한 지형을 모르던
가락 군사들에게 '에비야 벌'은 속수 무책의 격전지였을 것이다.
히미코 열풍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는 막다른 해로가 아니다. 그들이 올 수 있는 바다이고
보면 우리가 갈 수 있는 바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바다를 사이에 두고 2천 년이 넘는 세
월을 함께 보내온 사이가 아니던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늘 한반도를 쳐들어왔다거나, 또 이 편에서는 당하기만 해왔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한반도의 군사가
일본 열도를 정벌하러 갔다는 기록이 단 한줄이라도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다. 그래
서 오기로 '에비야 벌'의 혈투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히 '일본 정벌'이라고 표현한 "조선민담집"을 어찌 옛날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길 수
만 있겠는가? 기록의 근저에는 일본 정벌에서 겪은 소름끼치는 경험을 전승해온 이름없는
민중의 입이 있다. 이것이 기록만큼이나 중요한 근거다. 마지막 산 사람까지 전사한 격전의
비보를 접한 겨레의 후손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에비야 벌'이라는 벌의 이름가지 꾸며낼 수
있을까?
이런 연유로 일본이 한사코 밝히려 들지 않는 고대의 실체를 말하기에 앞서, 우리의 민담
이 대대로 전승하고 있는 '한국인의 일본 정벌'을 글 앞에 내세운 것이다. 밝히려 들지 않는
일본의 시조, 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동행하
고자 하는 '규슈 행'은, 다시 말해 대를 물려가면서 치밀하게 날조한 일본 고대사의 흑막을
파헤치는 일에서 시작되고 끝날 것이다.
1975년 10월 초하루. 나는 당시 수로왕에게 시집온 '아유타국 공주'의 꽃가마 뱃길을 추적
하기 위해, 어렵게 얻은 여권과 비자로 일본의 규슈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적지인 야쓰시로
에서 자전거를 얻어타고 한 달을 돌아다니면서 확인한 사실들을 정리하며 몇 가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감춰온 일본의 고대는 바로 우리 한반도의 조상들이 왜지
(현 규슈)에서 이룬 역사였다.
히미코 열풍!
전후 일본 열도는 그들의 학자들이 1천여 년에 걸쳐 정체를 숨겨온 최최의 여왕국을 찾아
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야마다이'와 그 건국주 히미코. 그들은 이름조차도 일을 대자
로 바꾼 쪽을 택해서 야마다이라 했고 여왕을 '히미코'라 하여 야마다이와 히미코를 찾아내
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내가 밝혀낸 것을 일본어로 써 책으로 내기로 결심했다. 야쓰시로에서
확인한 현장은 그들이 열광하는 히미코 탐구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이 '후다미'라는 출판사였다. 생면부지의 출판사를 방문하여 원고를
보여준 결과 상당히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8일 일본에 온 지 석 달
여드레 만에 출판 계약을 했다. "여기까지 와서 동화 쓰려고 하지마시오. 돌아가는 비행기표
를 마련해주겠소"라며 출판을 못마땅해 하던 주일 공보관의 태도와는 달리, 원고는 7개월
후인 76년 여름 세상 빛을 보았다. "히미코 도래의 수수께끼"라는 타이틀이 달린 아담한 책
이었다.
그때 내가 한 일을 나라는 개인이 혼자 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물론 미신스러운
생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몸은 윗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조들
과 연결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나는 그 모든 조상들을 총체적으로 결집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호적에 자신의 본관을 밝히고 있다. 한국인 각자의 시조가 정착한 지명이
곧 본관이며 대부분의 성시들은 항렬에 따라 아들과 손자의 이름을 짓는다. 그 항렬을 역산
하면 시조로부터의 대수가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 다지고 보면 좁은 반도에서 왁자지껄하게
살아도 우리는 저마다 천 년이 넘는(내 경우는 2천년이 넘는다) 역사를 짊어지고 사는 셈이
다. 그러므로 나의 작업은 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선조들과 함께 이뤄낸 일이라 할 수
있다.
대략 '히미코 여왕 도래에 얽힌 수수께끼'로 풀이할 수 있는 그 책은 당시 일본의 베스
트셀러 작가였던 마쓰모토를 세이초의 정중한 소개문을 곁들이고 아사히 신문에 전단광고까
지 내는 등 출판 작업이 순조로이 진행됐다. 그런데 책이 시중에 막 깔릴 즈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초판 1만부를 서점에 내놓았던 출판사가 자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선생님, 면목이 없습니다. 책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출판사에선 '회사 사정'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끝내 회수의 진의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회수라니?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내걸고 이웃나라 한국의 언론탄압을 규탄하던 그들 아닌
가. 이는 말하자면 형태를 바꾼 출판간섭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세며 체류비, 그
외 제작비, 교정비, 기타 경비 등을 합쳐 엄청난 결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책을 회수해야만
했다.
대체 절판된 이유는 무엇인가? 책이 겪은 수난에 대해 귀중한 지면을 쪼개가면서까지 얘
기할 것은 못된다. 그보다도 그후 20년만에 나의 땅에서 우리글로 내 이웃에게 그 책에 담
은 내용을 재생하는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이유로든 그들이 금서
조치를 한 그들의 고대사 '히미코 여왕 도래에 얽힌 수수께끼'는 바로 우리 조상들이 그
옛날 일본 땅에서 펼친 웅대한 경륜의 흔적이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우리 선조들의 웅대한 사적을 확인하러 나설 것이다. 거듭 밝히거니
와 이 길의 길잡이로 삼은 문헌은 민담집이나 그와 유사한 책이 아니다. 고대의 일은 고대
에 물어야 마땅하다. 우선 정사를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하는 것이 탐사의 기본이다. 그러
나 정사란 최후 승자의 자기 합리화 과정, 정통성 확보의 대안으로 유용되기도 했다. '고대
의 일은 고대에 묻겠다'고 한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유뮬은 결
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3세기 중원의 대문장가 진수가 써낸 동북아시아의 고대에 관한 역사 문헌 "삼국
지"중 중원 동족 여러 민족에 관한 기록을 담은 "위지동이전"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의 실마
리를 풀어갈 것이다. 또한 나의 정신적 터가 되어준 일연의 "삼국유사"도 우리의 역사기행
에 불을 밝혀줄 것으로 믿는다.
2부 전설의 바다에 떠오른 역사
역사를 날조하라
'가라나라의 뫼'의 가라는 한반도 남부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나타난 고대 왕국의 이름
이다. 한족의 사서는 이 나라 이름의 음을 따서 '가라'라고 적었다. 이를 후손들이 미칭하여
'가락국'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 기록으로 남은 것이 "가락국기"이다. 완본은 사라지고 "삼국유사"의 저자 일
연이 김해에 들러서 완본 내용을 확인하고 초록한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가락국기"의 첫
장을 펼쳐보자.
서기 42년, 음력으로 3월 들어 맞은 첫 뱀날. 한반도 남쪽을 흐르는 겨레의 젖줄, 낙동강
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에 자리잡은 한 고을은 짙은 안개 속에 서서히 새날을 맞고 있었다.
"너희는 이제 하늘의 분부를 받들어 너희를 다스릴 대왕을 맞을 것이니, 노래에 화답하며
기쁨의 발춤을 추도록 하라!"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짙은 안개 속에서 위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자리에 모인 2백, 3백명 무리는 숙연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거북아, 거북아!"
이윽고 허공에서 노래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리는 따라 불렀다.
"거북아, 거북아!"
노래 장단이 어우러지자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시 이어지는 허공의 매김소리가 "네 모가
지 내놔라"로 이어지고 무리는 곡을 따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란다." 이렇게 끝나는 노래말이고 보니 딱히 외울 것도 없이 무리는 되풀이하여 노래하며
발춤을 추었다. 무리는 방금 치른 계욕의식에서 한 순배 술잔을 돌리고 난 뒤였다.
거북아, 거북아~ 네 모가지 내놔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란다.
사실 이 노래의 가사는 '왕이시여 왕이시여, 나타나소서. 나타나지 않으면...'이라는 뜻의
소원을 은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얼마 동안을 안개 속 구름 마루에서 노래부르며, 발춤을 추었는지 모른다. 의식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안개 속에 내려오는 거젓이 뭔가? 허공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은
붉은 보자기였다.
무리는 알 수 없는 신비에 싸여 보자기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속에는 눈부신 상자가 하
나 들어 있었다. 이건 황금합 아닌가? 조심스레 합 뚜껑을 열던 그들은 또 다시 탄성을 올
렸다. 아니, 이럴 수가! 둥근 알 여섯 개가 안개를 뚫고 비치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황금알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부신인가! 그토록 기다리던 대왕을 이제야 하늘이 내려주시려는 것이
다."
무리는 모두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우두머리 한 사람이 다시여민 금합을 받들어 제 집
대청마루 긴 의자 위에 소중히 올려놓았다. 이튿날 아침 다시 모인 무리가 대청마루 문을
열어보았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긴 의자에는 여섯 개의 황금알 대신 모습도 늠름한
여섯 소년이 정중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하늘의 뜻이다! 이렇게 생각한 무리는 그 중 용모가 뛰어난 소년 한 명을 받들어 하늘이
내린 대왕으로 추대키로 결정했다. 그 소년이 바로 '수로왕'이며 그 달 보름 가락국의 건국
주로서 엄숙한 대왕맞이 절차를 밟은 후, 오늘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왕도를 건설하였다.
족히 2천년 전의 수로왕 건국기를 오늘 이처럼 생생히 적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나의 힘이
아니다. 육당 최남선이 이른 대로, 옛기록이 남긴 주옥 같은 경험을 원 모습 그대로 담은
"삼국유사"가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1206-1289)이 김해로 가서 옮겨 적은 "가락국기"의 기록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이 6하원칙을 갖춘 완벽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어디서: 김해시 구지봉 마루에서
누가: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춘 이가
무엇을: 무리를 불러들여 노래부르고 춤추게 하며 황금합을 내려주고
어떻게: 금합을 거둔 자리에 다섯 소년을 거느린 한 소년이 앉게 되고
결과: 그 소년을 받들어 왕으로 추대한 다음 가락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가락국기의 역사는 '구지봉'이라는 작은 구릉에서 비롯되었다. 수로왕의 등극연도는 서기
42년. 이는 한반도 최초로 고대 왕국을 형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신라의 유리왕 19년이며,
고구려의 대무신왕 25년, 백제 다루왕 15년에 해당하는 해이기도 하다. 한 민족의 생활집단
이 한반도에 고대 왕국을 차례로 세우던 무렵 이 고장에도 그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다. 그런데 다음 글은 무슨 해괴한 넋두리인가?
"삼국유사"가 수미를 갖추어 초록하는 "가락국기"의 전설이다... 이상의 전설 가운데 먼저
개국 전설에 대해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 문구는 이른바 조선총독부 초기 전속사관으로 한국사 왜곡을 총지휘했던 일본인 스에
마쓰가 쓴 "임나흥망사" 가운데 가락국 건국에 관한 평가 중 일부분이다. 그는 막무가내로
가락국의 역사는 전설임을 전제하면서 고대에 자신의 나라 왜곡이 가락 지역에 들어와서 통
치했다는 생떼같은 설명을 해대고 있다.
다짜고짜로 전설이라니? 가락국 건국 경위를 '개국 전설'이라고 일축해버린 그의 처사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처지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탈취하고 주민들을 식민통치해야 하는 일본 총독부의 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한반도를 합법적(?)으로 빼앗을 어떤 빌미가 필요했다. 그래서 억지쓰기로
생각해낸 것이 가락국 역사의 허위설이다.
즉 가락의 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탄생된 고려 때부터 기록에서 사라진 점을 빌려 '
이 지역을 옛날에도 지배했으니 다시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받아 마땅하다'는 숙명적 굴복감
을 한반도에 못박겠다는 간계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스에마쓰에게 더 절박했던 과제는 이 지역의 고대사를 전설화 또는 왜곡함으로써,
일본에 고대국가를 건설하고 이끌었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같은 역사 자체를 일본화하자는, 즉 일석이조의 실리를 거두는 일이 시급했다.
오늘날 조선총독부는 사라지고 그토록 견고하게 지었던 조선총독부(옛 중앙청)마저 철거
되었건만 일본인의 한반도 역사 날조는 그대로 살아 있으니, 한국인이라면 이같은 사실을
절대로 외면해선 안될 것이다.
스에마쓰가 주장한 임나 흥망설
4세기 후반에서 약 2백년간 일본이 식민지적으로 경영한 조선남부 지역. 일본은 370년부
터 출병해서 백제, 신라 이외의 한지를 직접 지배하고 그 영역을 금강유역에서부터 낙동강
상류까지 넓혔다. 5세기 초 고구려의 압박에 대항하면서 475년에 그 북서부를 백제에 할여
하고 마침내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위의 설명은 1955년 출간된 일본의 "세계사 소사전"내용 중 한 구절이다. 지금도 검은 활
자로 위와 같은 글을 박은 채 일본 국민의 기본정서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오직 침략을 향
해 날뛰던 자들의 이성적 파괴가 측은히 여겨질 뿐이다.
부적이 된 석탑
김해시 북쪽으로 가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논과 밭을 훌쩍뛰어 넘는 구지봉 동쪽 기슭에
허왕후릉이 있다. 전형적인 원분인 능 곁에는 암회색 돌덩이 몇 개가 쌓여 있다. 이 고장 사
람들이 '진풍탑'이라 일러온 탑의 잔해다.
'진풍'이란 바람을 잠재운다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건국주 수로왕의 왕후를
먼 바닷길로 모셔올 때 이 탑이 영검을 발휘하여 풍랑을 잠재웠다는 내력에서다.
하지만 이 탑을 모시던 절이 조선 초기에 폐사되자 탑은 야금야금 쪼개져 원형을 잃게 되
었다. 바닷가 가까이라 이 지녁 뱃사람들이 돌을 조금씩 쪼개 항해 때마다 부적처럼 지녔기
때문이다. 그나마 겨우 몇 조각 남은 것을 모아 왕후의 무덤 곁에 보관하고 있으니 이 탑
하나만 보아도 긴 세월 동안 가락국이 겪은 영광과 수난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탑의 원래 이름은 '바사석탑'이다. 온전한 모습으로 호계사에 안치돼 있던 고려 말, 이 탑
을 참배했던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말을 들어보자.
김해 호계사의 바사석탑은 이 고을이 옛날 '쇠나라'라 했을 때, 건국주 수로왕의 왕후가
된 허왕옥이 서기 48년,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 아유타국 공주이던 허왕옥이 부
모의 분부를 받들어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을 때 처음에는 파신의 노여움을 사서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이에 부왕은 무거운 탑을 실을 것을 분부했고 당장에 영
검이 있어 공주를 태운 배는 빠른 뱃걸음으로 바다를 건너 마침내 이 고장 남쪽 귀퉁이에
닿을 수가 있었다.
꽃가마배가 와 닿은 남쪽 마을을 '으뜸개'라 칭하였으니, 공주가 혼례식장으로 들기 전 고
갯마루에서 비단 속곳을 벗은 그 고개를 일컬어 '비단 고개'라 하고, 처음에 그 배가 나타난
해변을 '깃발 난 언저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검붉은 돛을 달고 곡두서니로 물들인 깃발을 휘날리면서 온 공주의 꽃가마배에는
주옥 같은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수로왕은 아유타 공주 허황옥을 맞아들여 짝을 짓고, 1
백50여 년 동안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여기까지가 일연이 기록한 바사석탑의 유래다. 그는 탑의 모양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아주 색다르게 관찰하고 있다.
탑은 4면 5층으로 그 조각이 무척 특이하다. 돌은 엷은 적색 무늬를 띠고 있으며 부스러
지기 쉬운 석질로 보아 우리나라 돌이 아니다. 그 돌은 한방에서 피를 엉기게 하려고 쓰는
계관석이다.
탑에 담긴 사연을 더 언급하기 전에 수도 시절 한반도의 고찰을 거의 순례한 고려의 국존
일연이 '바사석탑의 석질이 한국산이 아니다'라고 한 증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탑의 석재를 가리켜 한방에서 극약제로 쓰는 '계관'이라고 하였다. 대개 화산지대나
은과 납이 나는 광상에 광석과 함께 섞여 나오는 암석으로, 지질학적으로도 한반도에서 나
기 어려운 돌이다. 또한 계관석은 예부터 주황색을 얻는 물감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일연이 탑의 돌에 엷은 적색을 띈 무늬가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보아 돌의 출처가 화산지
대가 아닌 은이나 납의 광산이 있는 곳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2천 년이 흐른 후에도 그 탑
동강이가 전체적으로 짙은 회색빛을 띠는 것도 바로 그 은이나 납이 든 돌에 계관석이 섞여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바사석탑의 석질에 깊은 관심을 갖는 데는 까닭이 있다. 말하자면 '탑을 실었더니
신의 노여움을 풀고 파도를 이겨 마침내 빠른 뱃걸음을 얻었다'는 영험스러운 힘이 정신적,
상징적 의미보다는 물리적인 것이었다는 확신 때문이다.
'바야흐로 동쪽으로 지향할 새'라고 한 증언은 공주의 꽃가마배가 바깥바다로 멀리 나아
갔을 때를 말한다. 공주와 공주의 혼례에 수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부피만 클 뿐 무게는 가
벼운 혼수만 잔뜩 실은 대형 범선은 무게중심이 높아 대양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피는 크지 않고 무게가 나가는 짐을 배의 바닥에 깔아 중심을 잡아야 했을 것
이다. 그래서 재차 출항할 때는 5층 석탑을 기단까지 합쳐 11개로 분해, 바닥에 깔아 꽃가마
배의 바닥짐으로 삼았을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허왕후릉을 참배하면서 능 옆의 동강난 바사석탑을 안아 올려본 적이 있다. 두 팔
로 능히 들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건만 엄청난 무게를 느꼈다. 아마도 돌에 은이
나 납 같은 무거운 광석이 섞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늘이 맺어준 부부
한일 고대사에 얽힌 미스터리를 푸는 데 첫 열쇠가 되는 사건이 지금부터 얘기하게 될 수
로왕과 허 왕후의 부부 인연이다. 허 왕후, 즉 비미호의 어머니는 말하자면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었다. 수로왕은 이때 '천명'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가락국기'는 밝히고 있다.
서기 48년 7월27일. 이 지역 우두머리 아홉 사람은 아침 문안의 예를 올리던 자리에서 고
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대왕께서 천강하신 이래로 아직 마땅한 배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신들이 가진
처녀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자를 골라 입궐케 하시고 왕후로 삼아주소서."
이에 수로왕이 '천명'이라는 말로 일렀다.
"이 몸이 이곳에 내렸음이 천명이었듯이 왕후를 짝지움도 그러할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말
라."
이렇게 옮길 수 있는 '가락국기'는 이어서 꽃가마배의 당도와 혼례식을 올리게 된 경위를
약 4백자의 한자로 자세히 서술해놓고 있다. 내용을 차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로왕은 지체없이 우두머리 중 유천간을 망산도로 가게 한다. 거기서 망을 보다가 붉은
돛과 꼭두서니빛 깃발을 단 범선이 바다에 나타나면 지체없이 횃불을 올려 승점에 간 신귀
간에게 알리라 하고 거룻배와 날랜말을 함께 가지고 가라 이른다.
왕성 바로 남쪽에 위치한 망산도엔 강으로 드나드는 배들을 감시하는 초소가 있다. 신귀
간을 보낸 승점은 왕도의 외곽으로 김해에서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망산도에서 유천간이 올
린 횃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침내 붉은 돛을 단 배가 낙동강 하구 남쪽 모서리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이를
본 유천간은 급히 횃불을 올리고는 거룻배와 날랜 말을 바꿔 타면서 궁궐로 달려와 보고했
다. 왕은 무척 기뻐하며 우두머리들에게 손님맞이 꽃배를 몰고 가서, 그 배에 타고 있을 공
주를 모셔오라 일렀다.
우두머리들이 흥분과 긴장 속에서 영접선을 몰고 꽃가마배로 가서 수로왕의 분부를 전하
였으나 꽃가마배에서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나와 그대들은 생면부지인데, 어찌 경솔하게 그 배에 함께 탈 수 있겠는가?"
배로 돌아온 우두머리들이 이 말을 그대로 왕에게 전하니 수로왕은 "과연 그럴 만하도다"
라면서 곧 왕성 서남쪽에 행재소(거둥시 임금이 잠시 머무는 곳)를 차려 그곳으로 나아가
맞겠다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한편 영접선을 돌려보낸 꽃가마배는 가락국의 외항에 닻을 내리고, 곷가마로 갈아탄 규수
를 모신 일행은 북쪽으로 통하는 고갯길로 오른다. 고갯마루에서 물 건너 수로왕의 행재소
장막을 확인하고는 공주가 입고 있던 비단 속곳을 벗어 터주산령에게 폐백을 드리는 예식을
거행했다.
행재소에 이른 공주 일행은 수로왕의 배를 따라 혼례식을 올릴 승점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날을 위해 마련한 신방이 있었다.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서기 48년 음력 7월27일에 범선을 타고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가
락국에 온 아유타 공주의 당도를 '전설'이나 '꾸민 이야기'로만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이들
의 혼인엔 언제, 어디서, 왜, 무엇을, 어떻게의 시놉시스가 분명할 뿐 아니라 사건 전개의 장
소며 등장인물 등이 한 치의 어김이 연결돼 있다.
이런 기록을 사실로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은 초록이나마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고산
자의 "대도여지도", 여러 종의 "김해읍지", 그리고 수로왕릉에서 빌린 "숭선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우선 그 첫날밤, 공주는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이 몸은 아유타국 공주이옵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한 친정 '아유타국'은 어딘가? 혹 자신의 지체를 높이기 위해서 꾸민
나라 이름인가? 또 꽃가마배가 검붉은 깃발을 나부끼면서 왔다고 거듭 증언한 것은 그 깃발
과 아유타국의 관련 때문인가?
그리고 혼례식을 올리기 전 비단고개에서 지체높은 공주가 입고 있던 비단 속곳을 벗었다
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랫도리를 벗은 채 혼정으로 나아갔다는 말인가?
속곳을 벗은 사연
그날 가락땅에는 아유타국 공주의 꽃가마 행차가 있었다. 이윽고 별포 나루에 배를 대고
상륙한 왕후는 수로왕의 행재소를 바라볼 수 있는 고갯마루에서 잠시 쉰 다음 우리 풍속으
로는 이해하기 힘든 혼전 의식을 시작했다.
...입고 있던 비단 속곳을 벗어서 폐백의 뜻으로 산신령께 드렸다
"가락국기"는 왕후가 분명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폐백드렸다'고 기록하
고 있으니 혼례식을 치를 새색시는 속곳이 없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가 전승한 어떤 관습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예식이 다음과 같은 "베다"의 지
혜를 만나게 되면 슬기롭기 그지없는 혼전의식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이는 정녕 검푸르고 붉도다, 주법으로 오염은 찍히었도다. 그녀의 연고자는 번영하리라.
지아비는 주박에 묶이었도다.
"리그 배다", "혼인의 노래"에 나오는 28장의 노래말이다. '검푸르고 붉은 오염의 낙인'이
란 다름 아닌 초야에 속곡에 묻은 새색시의 처녀막 혈흔이다. 이어지는 29장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더럽혀진 옷을 버려라. 바라문에게 재물을 나눠라. 이 주법은 발을 얻어 아내로서 지아비
에게 둔다.
이상 두 개의 가락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수천 년을 이어오는 인도 대륙의 생활규범이
라는 의미가 더 크다.
그러므로 이 노래에 따라 신방에 들어가기 전 새색시는 신랑 쪽에서 마련한 속곳으로 갈
아 입어야 한다. 혼전에 처녀막이 손상된 색시가 핏자국을 미리 묻힌 속곳을 입고 초야를
치를 수 없게 방지하는 조치다. 두 번째 가락은 초야의 혈흔이 확인되면 그때부터 새색시는
남편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행세하게 됨을 읊은 것이다.
이러한 "베다"의 지혜를 빌린다면 우리는 쉽게 서기 48년 음력 7월27일 그 고갯마루에서
비단 속곳을 벗은 아유타국 공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지만 검붉은
돛단배를 타고 온 왕후는 이 고장에 정착해 사는 사람과는 다른, 먼 나라의 풍습을 따라 신
랑 수로왕측이 건네준 비단 속곳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태양의 도시
"이 장식판은 언제부터 있었지요?"
"오래됐지요. 아주 옛날부터..."
"무늬가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수로왕릉. 나는 출입문 앞에 서서 문에 새겨진 장식판을 바라보며 왕릉 관
리인인 능감 김진출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으레 문 하나가 있으려니 하고 스치면
몰라도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본다면 우리의 단청과는 전혀 다른, 비전통적인 목판 디자인임
을 알 수 있다.
대칭을 이룬 도안 아래에는 파란 물이 그려져 있고, 좌우로 흰색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었
다. 중앙에는 하얗게 칠한 남방식(인도 및 인접한 동남아 일대) 탑이 뚜렷한 윤곽으로 그려
져 있다. 또한 탑 위 복판에는 B자가 등을 서로 맞댄 모습으로 붉게 채색돼 있었고, 좌우에
는 분홍색 연꽃 봉오리와 녹색 꽃대가 도려낸 목판의 구획을 따라 호기있게 세워져 있었다.
어쨌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물론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서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물고기 하나, 하얀 탑 하나, 연꽃 한 송이에 쌓아올린 긴 침묵의 언
어는 적어도 내겐 큰 의미를 던지는 역사의 흔적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늬나 채색이 바뀔 수도 있겠네요."
이 말에 능감은 말도 안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단청은 작년 가을에 새로 입혔는데, 개칠하기 전에 백지에 윤곽
을 그리고, 본시 칠해진 색을 찍어둔 다음에 새로 입혔거든요."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옛날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이 장식판을 보는 순간 수수께끼의 존재로 전해지는 '아유타'의 실재를 예감했다. 이런 생
각을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 가지를 묻고 싶다. 역사의 흔
적이 오늘 우리의 상식 저 편에 밀려났다고 해서 역사 자체가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빛 바랜 기록이든 조각난 유물이든 인간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유흔의 근저에는 어떤 실
제 사건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물일 수 있지 않은가? 실재했던 땅으
로 확신하는 '아유타'로 가기 전에 먼저 아유타라는 지명에서 오늘의 위치를 찾기로 했다.
그러고보면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그 아유타를 '서역 아유타국'이라 하지 않았던가. 예부
터 서역은 인도와 인도 서북쪽 나라를 일컫던 말이다. 우선 인도에 이러한 이름을 가진 지
역이 실재하는지 궁금했다. "불교사전"(운허, 용하 지음, 1961년 법보사)은 미지로 남아 있는
아유타 현장을 의외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아유사
중인도의 나라 이름. 아유차 아유타라 음역, 또는 난승성 불가전국이라 번역하며 인도 고
대문명의 중심지. 부처님이 출현한 후에는 영지라 하여 려러 승도들이 모여들던 곳.
현장의 "대당서역기" 제 5권에 있는 나라 이름. 곡녀성 남방, 항하 서안에 있는 나라. 범
어로 '아요디아'라 한 것을 한자음으로는 '아유타'로 옮기기도 했다.
인도의 지도에서 발견한 아유타는 갠지스강 상류에 옛 이름 '아요디아(Ayodhya)'로 표시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기댈 자료가 있다는 것에 흥분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려가
앞섰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던 때라 설령 현장을 답사하고 싶어도 별다
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답답한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묘
수를 찾게 마련이다.
마침내 나에게도 그런 날이 왔다. 1974년 정초. 마침 그 무렵 서울에선 국제 PEN 대회가
열렸다. 나 역시 회원으로서 대회 간행물의 편집제작을 돕게 되었다. 이때 인도 대표로 초청
된 분이 와디아(S. Wadia)였다. 히말라야의 눈빛처럼 희고 고결함을 풍기는 노부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네루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인도 PEN을 창설한 명사이며 국
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 와디아 여사에게 나의 소망을 얘기해보자. 그리고 내가 인도로 초청될 수 있는
길을 물어보자.'
그 동안 추적한 '가락국 왕후의 꽃가마 길'에 관한 작업을 요약하여 한국 PEN 본부를 통
해 인도로 보냈다. 와디아 여사의 회신은 예상 외로 빨랐다. 그는 초청장과 함께 아요디아를
순례한 후에는 인도 PEN 본부와 자신의 저택이 있는 봄베이에서 강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유타국 공주가 남긴 것(The memories of Princess from Ayodhya)'이란 타이틀로 영문
원
고를 준비한 나는 1974년 5월20일 도쿄를 경유하는 항공편을 통해 더운 나라 인도의 한여름
열기 속으로 날아갔다.
왕이 준 티켓
뉴델리 공항을 출발한 국내선 여객기는 1시간쯤 날아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 중
심지인 럭나우(Lucknow) 공항에 닿았다. 5월30일 밤, 호텔에 묵었지만 낮과 같은 더위로 밤
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튿날 아침 벌어졌다.
아요디아로 가려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당해야 했던 곤경이란... 정류장 앞에 한없이 늘
어선 승객 중에는 며칠씩 차례를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아요디아로 가는 철도가 있긴 했지
만 오랫동안 파업중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이쯤의 기다림에는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 성지 아요디아는 거기서 약 1
백km를 더 가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장사진의 꽁무늬에 줄을 서는 일인데 그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나는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아유타국 공주의 친정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할머니의 조상인 라마 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망설일 새도 없이 터미널 사무실로 들어가 지배인을 찾았다. 그리고 여권을 제시한 후 정
중히 말했다.
"인도 PEN 본부의 초청을 받아 온 사람입니다. 불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에 깊은 감명
을 받고서 그 무대인 주인공 라마 왕의 왕도를 밟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끄덕끄덕 졸고 있던 지배인은 '라마'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
자마자 벌덕 일어나 앉더니 느닷없는 방문객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당신은 위대한 로드 라마를 잘 알고 있군요. 그래요, 아요디아는 그의 출생지이자 영원히
그의 나라지요. 버스를 바로 탈 수 있게 해드리지요. 잠깐! 그 전에 버스요금부터 주시오."
그 표정이 얼마나 신명나 있던지... 내게서 몇 루피의 인도화폐를 받아쥔 그는 사무원을
불러 티켓을 마련해놓으라고 지시했다. "버스가 오려면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해요. 그동안 우
리는 위대한 로드 라마에 대해 이야기 좀 합시다."
그때부터 열변이 시작됐다. 지배인은 우유를 듬뿍 탄 차를 대접하면서 라마 왕과 시타 왕
비의 수난과 극복, 영광에 대해 쉬지 않고 말해주었다.
"라마는 지체높은 태양왕조인 아요디아 다사라테 왕의 왕자로 태어났어요. 생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기원 전 4, 5세기 쯤으로 알고 있는 먼 옛날 이야기죠. 그를 노
래한 대서사시만도 4천 송을 넘는답니다."
영어가 짧은데다 토박이 인도영어는 더욱 알아듣기가 힘들어, 몇 개의 단어로 짐작만 할
뿐인 대화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그는 마치 오랜만에 자랑스러
운 자기 친할아버지 이야기를 전하는 손자마냥 감회에 가득 차 있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순간적이나마 라마 왕이 그와 나의 공간에서 살아 움직였다는 점이
다. 현실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아요디아 행 버스표가 라마 왕을 '호명'한 지 채 10분
이 안되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왕의 현시를 믿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요디아로 향하기 전부터 라마 왕과 허 왕후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뉴델리 도착 후 열흘간 현지 공관의 주선으로 두 명의 인도 학자를 만난 후
그같은 믿음은 더욱 확실해졌다. 그 중 한 사람인 디세판테 박사(당시 인도 고고연구청)는
수로왕릉 정문에 세워진 장식판 사진을 보더니 못내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흰 건물은 말씀하신 대로 인도식 스투파(탑)입니다. 그 위의 문양은 인도식 활을 맞붙
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활은 위대한 라마 왕을 상징하지요. 그는 활의 명수였
거든요. 그리고 연꽃 봉오리 안쪽에 맞물려 그려진 문양은 코끼리 두 마리 아닐까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릎을 쳤다. 그렇다. 역사는 절대 수수께끼가 아니다! 장식판 문양
가운데 미처 풀지 못했던 상징들이 해독되면서 라마 왕과 허 왕후를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
히고 그들은 서서히 환상에서 현실의 장으로 다가왔다.
수로왕릉 출입문에 새겨진 물고기는 이곳 아요디아로 가는 길목 파이자베드의 돌로 된 성
문에 거대한 조각으로 붙어 있었다. "불멸의 인도"는 물고기와 연관된 아요디아의 강대한
힘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요디아, 혹은 태양신의 도시는 한 마리의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상여로 둔갑한 꽃가마
"아요디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어딥니까?"
"하누만(Hanuman) 사원입니다. 방문하시겠다면 릭샤(인력거)꾼에게 부탁해놓지요."
호텔의 젊은 주인은 친절히 답해주었다. 이날은 또 라마 왕이 출생한 사원을 들르는 일도
주요 스케줄로 잡았다. 고지대 건물을 제1목표로 삼은 이유는 "불멸의 인도"에 기록된 '아요
디아는 한 마리의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는 증언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요디아
는 태양신의 현신인 라마의 도시였기에 힌두교도 성지 중 가장 으뜸가는 명소다.
마침내 입구에 닿았을 때는 해가 어느덧 중천에 있었고 밤낮으로 40도씨를 오르내리는 오
지의 한낮 기온은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원은 분명 높은 곳에 있었다. 검은 돌계
단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 돌계단을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인도인들이 떼를 지어 기
도 자세로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 소리는 차츰 합창을 이루면서 순례자의 발길을 재촉
했다.
나 역시 그 행렬에 끼여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오르려는데, 웬일인지 조금 전에 같
이 온 릭샤꾼이 소리를 치며 불러세우는 것이었다. 다급한 손짓 발짓으로 보아 구두를 벗어
두고 맨발로 올라가라는 뜻 같았다.
"여기 순례자들은 모두 맨발이지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 사원에 쇠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고 들어가
는 것은 금기였다. 어쩔 수 없이 맨발로 오르는데 마치 불철판 같은 돌계단을 밟고 오르는
일이 여간 고행이 아닐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토끼뜀을 하여 오른 성지. 하지만 계단 끝
에 이르러 맨발의 화끈거림보다 더 큰 냉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사원 꼭대기에서는 멀리 보이는 갠지스 강 줄기가 흰 띠처럼 확인될 뿐 애초에 기대한 아
요디아 일대의 지형은 보기 어려웠다. 갠지스강의 퇴적물로 이뤄진 평야는 끝없이 넓었지만,
날마다 불어닥치는 열기와 먼지가 뒤섞여 마치 유리창 너머 희뿌연 풍경처럼 아른거렸을 뿐
이었다.
다시 뜨거운 돌계단을 밟고 내려와 릭샤에 막 오르려는데 어디선가 요란한 주악소리가 들
려왔다. 인도의 전통악기로 구성된 악대를 선두로 화려한 행렬이 뒤따르고 핑크빛 휘장을
친 작은 가마를 어깨에 멘 사람들이 보였다. 가마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환약 같은 하얀 것
을 뿌리면 길가 사람들이 주워서 입에 털어놓곤 했다. 그것은 '난'이라는, 밀가루로 만든
작
은 빵이었다.
나는 엄청난 더위도 잊을 만큼 흥분했다. 영락없는 새색시의 꽃가마 행렬은 호기심을 자
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행운을 놓칠세라 가방을 열고 기다란 망원렌즈로 바꿔 끼운
카메라를 꺼냈다(표준렌즈는 열기를 못 이겨 조리개가 고장나기 때문에 모든 조작이 수동인
망원렌즈로 바꿔 끼운 것이다). 그리고는 행렬이 가까이 오길 기다리며 파인더를 들여다보
고 있었다.
'왔다!'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지만, 이럴 수가? 내 눈에 들어온 가마의 주인공은 새색시가 아닌
송장이었다. 흥겹다 못해 요란한 악대의 주악이며, 허공에 뿌리는 빵가루며, 게다가 핑크빛
휘장이 어째서 곷가마가 아니란 말인가. 이처럼 화려한 정경이 어찌 저승으로 가는 이의 행
차일 수 있단 말인가!
일시에 허탈해졌다. 더위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주
인을 기다리는 릭샤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릭샤 앞에 이르러 나는 또 다른 공포
를 느꼈다. 주위를 에워싸는 군중의 심상치 않은 눈빛, 잔뜩 화가 났음이 분명한 까만 얼굴
들.
굳어져가는 두 발을 간신히 떼어 겨우 뒷자리에 앉으려는데 몸을 가누기가 무섭게 그들
입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단 한 마디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와들와들 떠
는 릭샤꾼의 뒷모습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무섭게 항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명백한 일은 이 상황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내게는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슨 변
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처지 아닌가?
"...어떡하지요? 할머니!"
나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였다. 그 순간에 나는 여읜 지 오래된 조모를 찾고 있었다(나중
에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할머니 역시 김해 김씨였다).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늘 할머니에게 매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 버릇이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판국에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는 떨고 있는 릭샤꾼의 등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레츠 고(Let's go)"
고함에 놀란 릭샤꾼은 반사적으로 페달을 밟았다. 별안간 릭샤가 돌진하자 군중은 이를
피해 옆걸음질쳤고 릭샤는 날개를 단 듯 질주하면서 가까스로 무리를 따돌릴 수 있었다. 한
숨을 돌리며 릭샤꾼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요?"
그의 말인즉, 장례를 지낼 때 죽은 사람을 가마에 앉힌 다음 흰띠로 묶어 놓는 것이 이곳
의 풍습이고 군중이 그토록 화를 낸 것은 카메라가 인간의 영혼을 빼앗는다고 믿기 때문이
라고 했다. 게다가 인도의 혼례는 밤에 거행되므로 대낮에는 꽃가마 행렬을 보기가 어렵다
고도 했다. 마치 아유타국 공주의 혼례처럼.
요행히도 아요디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머리에 화로를 이고 달리는 사람을 봤다. 그
것은 꽃가마가 혼례장으로 가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례였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꽃가마 행렬을 바라보며 잠시 어릴 적 고향길로 달렸다.
"저 사람들은 웬 절을 저리 하능교?"
"저래야 장가갈 수 있데이. 혼례를 치르기 전에 화롯불에 절하는 것을 이자뿌리면 안되
제."
저승길 터미널에서
어째서 아요디아 일대에는 출입문마다 물고기 장식이 그려져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호
텔 주인은 그저 꿀먹은 벙어리일 뿐이었다. 마치 왜 인도 사람은 천을 친친 감아 두르는가
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주인은 대답 대신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이
렇게 말했다.
"며칠 후 사원에서 큰 법회가 열립니다. 많은 힌두교 사제들이 있으니 답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법회는 3인조 전통악기 연주자들의 가락으로 시작되었다. 마침 함께 앉은 나이 많은 사제
가 한가해 보였기에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물고기 장식의 내력을 물었다.
"성스러운 물고기(Holy Fish)를 뜻하지요. 이 지역은 갠지스 강의 범람이 잦은 곳입니다.
옛날에는 더 심했다고 해요. 그래서 집에 물이 들어오면 이 물고기가 집안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었답니 . 그래서 이 지방의 주장에도 당연히 마주보는 물고기가 그려져 있지
요."
'성스러운 물고기'는 곧 '신어'라는 말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김해시 동쪽 우뚝한 산봉우리를 예부터 신어산이라 일컬어온 것도 단순한 우연
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으리라. 장식판에 연꽃과 코끼리를 곁들인 것도 인도의 상징성을
잃지 않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문자로 기록된 역사란 때로 그 기록을 남기게 한 권력층의 의지에 굴절되기도 한다. 그것
은 왜곡이요 일종의 '재앙'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이같은 화에 직면해서도 본래의 뜻을 살려내는 힘을 오래도록 지녀왔
다. 수천년의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많은 신화와 전설, 이것이 그 실체다. 2천 년
세월의 마멸마저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민중의 삶 속에 뿌리깊이 스며들었기 때문
이다. 때로는 수로왕릉의 장식판일 수도 있고 옛날 이야기 '에비야 벌'일 수도 있다.
끈질기게 지켜오는 민중의 고집, 그 단적인 예를 아요디아를 떠나기 전 날 그 물에 처음
으로 손을 담가본 갠지스 강 기슭에서 만날 수 있었다. '주옥 같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아
유타국 공주의 꽃가마배, 그 위에 휘날리던 꼬두서니빛 깃발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장장 2km의 긴 콘크리트 다리가 갠지스 강을 가로지르는 어귀에 붉은벽돌 건물이 하나
있었다. 건물 옆에는 게양대가 세워져 있고, 꼭대기에는 검붉은 깃발이 혼을 불러내는 듯 제
멋대로 펄럭였다.
'아요디아는 반정부 감정이 짙은 지역입니다.'
우리 공관의 한 젊은 외교관의 말이 생각났다. 공산당 본부일까? 그때만 해도 붉은 깃발
은 우리에게 거부감부터 갖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앞에는 동물을 가두는 우리처럼 생긴 것이 있었다. 통나무로 엮은 그 속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기도 했는데 어떤 인기척을 듣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화물열차처럼 이
어지면서 강물 가까이까지 내려가 끝부분은 강물에 잠겨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아지트인가.'
결국 숙소에 돌아와서야 통나무 우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공공시설이지요. 불치의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나 노쇠한 이들을
수용하는 곳이랍니다."
호텔 주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자진해서 통나무 아래칸으
로 자리를 옮기고, 마침내 강물에 잠겨있는 맨 마지막 칸에서 조용히 저승길로 돌아갈 차례
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인도인들은 성스러운 강 갠지스를 이승에서 받은 온갖 업보와 작별하고 열반의 세계로 건
네주는 조상의 거대한 품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들에게 강물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는 터미널이며 그 대합실이 바로 적막한 통나무 우리였다. 그런 까닭에 유한한
생명을 무한대로 바꾸는 작업은 언제나 강 어귀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붉은 벽돌집은 죽음을 맞은 이들을 화장해서 그 뼛가루를 강물에 뿌리는 일을 관리하는
곳이지요."
호텔 주인은 친정하게도 건물 앞 게양대에 걸린 붉은 기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그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요디아의 깃발이지요.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우러
난 빨강 물감으로 염색한 것입니다. 경축일이면 국기 대신 이 깃발을 집집이 게양하고 있지
요."
"아, 그렇군요."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산당 깃발로 오인하고 공포스러워 했다. 이름하여 레드 콤플
렉스. 그만큼 이데올로기는 한 인간을 옭아맸던 것이다.
붉은 깃발이 축일을 의미하는 것이라니... 멋쩍기도 하여 그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내게 무엇인가 희망적인 것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서기 48년 음력 7월27일, 낙동강 하구에 머물며 펄럭이던 아유타국 공주의 꽃가마배 붉은
깃발은 설화에만 남은 채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아유타 공주의 친정인 아요
디아에서는 2천 년 세월이 흘렀어도 꼭두서니 붉은 깃발이 그 모습 그대로 펄럭이고 있었
다.
아요디아의 4박을 끝내기 전날 호텔 주인이 내게 말했다.
"나의 삼촌은 이 지역의 로타리 클럽 멤버인데,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내일
아침에 식사를 같이 하시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이뤄진 자리였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내게 책을 한 권 건네주었고, 그 책에서 나
는 '아요디아는 한 마리 물고기 모양으로 건설되었다'라는 인도의 옛 역사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1880년 지역보고서 성격으로 작성된 그 책에 갠지스강이 흐르는, 물고기 모양의
아요디아 윤곽을 그린 측량도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인도의 저명한 문학가인 나가르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그는 아요디아의 고
대에 매료돼 아요디아 입구라 할 수 있는 럭나우 시의 저택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가르를
찾아갔을 땐 땡볕 속에 대지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닛폰(Nippon)의 고향
그는 마치 아요디아에 닿기만 하면 5천 년 전에 먼 곳으로 시집간 아요디아 공주 얘기를
주고 받는 코흘리개 아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 2천년 전 떠난 한 공주의 흔적을 아요디아에서 확인 한다는 것은 풀밭에 떨어진 바늘
찾기와 같은 것이다.
이상은 나와 만난 이야기를 "불굴의 탐구심"이라는 제목으로 인도의 유력지 "타임스 오브
인디아"에 기고한 나가르의 글 가운데 일부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 위였고 인도의 대표적
인 문학상을 고루 받은 저명한 문인이었다. 1시간 남짓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아요
디아 공주'의 실체를 조금씩 더듬어갈 수 있었다.
"아요디아는 지금의 이라크, 티그리스 강변 문명권을 잇는 태양신전에 뿌리를 두고 있습
니다. 그 태양을 따라 동진을 계속해온 태양왕조의 후예들은 갠지스가 시작되는 아요디아에
불멸의 도시를 건설하였죠. 그때가 기원 전 8세기 경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후예'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인도인의 영원한 구주인 라마 왕도 그 후예의 한 삶이지요. 이 아요디아를 근거로 그들
의 동진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곳은 타이의 메남강 어귀에 있는
아유타야 입니다만 이들의 동진이 그곳에서 멈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잔잔한 목소리로 아요디아를 얘기하던 그의 목소리는 다음 대목에 이르자 한순간 달라져
버렸다. 한국인이 일본을 얘기할 때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게 되는 그런 격앙된 어조였다. 닛
폰! 그는 일본을 '재펜(Japan)'이라 하지 않고 '닛폰'이라고 불렀다.
"나라 이름에서도 이내 알 수 있는 일이지요. 닛폰(일본) 역시 태양왕조의 후예가 건설한
고대국가에서 비롯되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아요디아에 관해서 궁금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한 해의 절반은 이곳에 머물며 아요디아 순례를 계속하고 있
으니까요."
역사의 길고 긴 탯줄을 스스로 자르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지복인가! 분리된 시대
속에 오히려 원형을 간직하려는 일체의 힘을 우리는 아요디아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요디아의 역사를 거슬러오르면 우선 "베다"시대가 자리잡고 있다. "베다"는 기원 전 15세
기로 거슬러오르는 아리안의 성전이자, 인류가 가진 최고 최대의 문헌이다.
"베다"를 이은 것이 인도의 고대 서사시 "라마야나"였고 그 다음에는 불교가 아요디아를
뒤덮었다. 석가의 저 유명한 "승만경"이 설파된 곳도 바로 이 지역이며, 당나라의 고승 현장
이 찾아온 곳도 여기다.
그 뒤 서쪽에서 침입해온 이슬람이 불교사원을 무너뜨렸고 다시 힌두교도들이 "베다"와
"라마야나" 시대로 복귀하는 신앙시설을 일구어 오늘에 이르는 곳, 아요디아를 벗어나 "삼
국유사"에 출현한 구지봉 마루, 그 현장으로 잠시 되돌아가 보자.
바다 밑 황금 찾기
구지봉 마루. 밧줄에 묶인 금합이 내려와 뚜껑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 수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도, 뜻하지 않은 황금덩이를 보게 된다면 누구라
도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무리는 함께 절하며 축하와 공경을 보내길 멈추지 않았더라
하지만 우리는 '축하'와 '공경'이라는 두 단어에서 다음과 같은 등식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황금알은 곧 공경의 대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춤을 멈춘 무리들이 거듭거듭 절
하면서 공경함을 멈추지 않았더라"라는 증언을 남길 리가 없다. 하긴 한반도를 정신적으로
침략적으로 침략하고 유린했던 조선총독부 사관 스에마쓰의 망언에 젖어 "설화를 가지고..."
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황금알을 신분증명삼아 마침내 고대왕국을 건설한 수로왕을, 그리고 그의 배필 아
유타국 공주를 시조할아버지, 시조할머니로 받드는 2천 년의 핏줄이 이 땅에 있고, 김해 김
씨가 한국의 최다 성씨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마당에 이들의 존재가 환상적인 것이라면 우
리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기원 전 8세기 아요디아 지역에서 성립한 "브라마나"에 나오는 한 신화 속에서 우리는
'황금알'이라는 말을 만나게 된다.
태초에 우주는 실로 물이었다. 물결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물은 원했다. '어떻게 하면 번
식할 수 있을까?' 물은 노력했다. 물은 고행 끝에 열력을 발했다. 이때 물 위에 '황금알'이
떠올랐다. 아직 해는 없고, 이 황금알은 1년 동안 떠 있었다.
대서사시 "브라마나"의 '우주창조 신화'는 황금알에서 깨어난 남자아이(프라자 파티)가 이
지구의 생명을 차례로 창조했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지구의 생명 창조, 즉 옛 인류의 한 갈
래가 '황금알'에서 비롯되었음을 전승하는 흔적일 수 있다.
공상소설에나 나옴직한 이 대목은 21세기를 수 년 앞둔 현대의 첨단지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가 이 땅에서 만들어낸 많은 물질이 유산으로
남듯이 상상해낸 이야기도 우리의 유산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황금알을 받들어 극진히 공
경한 그 무리는 바로 우리의 조상이었다.
수로왕의 "가락국기"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옛 이름인 변진이 무대였다. 이 무렵(서기 1세
기) 한반도에 관한 유일한 정보원으로 남아 있는 진수의 "삼국지"에선 다음과 같은 짧은 코
멘트를 만날 수 있다.
'위략'에 이르기를, 이곳 주민들이 밖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
이 이를 견제하면서...
결국 그때 구지봉 마루에서 고대왕국을 건설하고자 한 수로왕이나 황금알을 창조주로 인
지한 무리는 까마득한 옛날에 한반도 남부로 옮겨온 이들이었음을 "삼국지"는 증언하고 있
다. 그리고 수로왕의 배필인 허 왕후의 조상 가운데 일부가 황금알을 받든 근거가 있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타파르의 "인도사"에는 동남아시아의 건국 신화와 관련하여 기원 전 2
세기부터 후 3세기에 걸친 기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남부 인도의 여러 왕국은 대규모 해상무역에 풍부한 경험이 있어 그들의 문학작품은 오래
전부터 항구, 선가, 등대, 세관 및 항구의 온갖 건조물에 대해 언급해왔다. 촐라 사람들은 인
도양의 조운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배를 건조했는데 그 중에는
가벼운 연해용 배, 통나무를 여러 개 묶어 만든 대형선, 말레이시아와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향하는 원양어선도 있었다.
...동남 아시아의 여러 항구로 가는 항해는 중국과 접촉이 빈번해짐에 따라 정기화하였고,
이로써 동남아시아 여러 왕족의 건국설화는 인도의 왕자와 상인들까지 끌어들였다.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남부 인도 최강의 왕조로 부상한 촐라의 원양 항해선은 기원 전
부터 중국 대륙의 항구를 왕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배의 경유지였던 동남
아시아 여러 왕국의 건국설화를 살펴보면 인도 출신 상인과 왕자의 흔적이 적잖이 발견된
다. 여기에 또 하나의 증언이 있다.
한반도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말과 남부 인도의 드라비다 말의 기묘한 유사성
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1906년에 간행된 "더 패싱 오브 코리아"라는 책에 나오는 저자 헐버트의 언급이
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는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원을 받아들여 노령의 힐
버트를 특별기로 모셔온 것은 1946년의 일이다. 교사였고 편집인이었으며 저술가였고 그리
고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친구였던 그는 2년 후 86세를 일기로 서울의 외인묘지에 잠들었다.
그가 쓴 책을 몇 장 더 넘겨보자.
태평양의 강력한 '검은 해류(흑조)'는 자연적으로 이들 난파선을 북쪽으로 흘려보냈다.
결국 남부 인도 지역의 배가 중국으로 오다가 뜻하지 않은 풍랑을 만나게 되면 그 난파선
이 한반도 남부에 닿았을 것이라고 헐버트는 상상했다. 그런 일이 잦고 보면 남부 인도 지
역의 언어나 풍속이 한반도 남부로 옮겨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고대사는 또 다시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있다. 난파선이라니? 하기야 한반도
의 후손인 우리조차도 우리의 고대를 얕잡아보고 있는데 눈이 파란 그들이 '난파선' 이상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인도의 한 공주가 거대한 범선을 타고 30명에 가
까운 혼례행차를 이끌고 올 만큼, 또 행차를 맞아들이도록 교섭할 정도로 한반도의 남부가
외국과 연결돼 있었으리라고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비록 한국인의 절친한 친구이긴 했지만 그의 신분이 선교사였던 것과 외국인의 한문 독해
력을 미루어 짐작할 때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직접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아유타국 공주의 한반도 도착 시일과 장소, 그녀의 생애를
소상히 적은 "가락국기"의 무대로 돌아가자.
그때(서기 48년 7월27일) 낙동강 하구, 주포에 정박했던 비범 천기의 대형 범선이 본국을
출항한 것은 그해 5월 중순께의 일이다. ...그 배는 '아유타국 공주'라고 신분을 밝힌 신부
(허 왕후)와 30명에 가까운 수행원을 태웠고 승무원은 15명이었다. 이들이 돌아갈 때는 수
로왕이 하사한 쌀 1백50섬과 비단 4백50필을 싣고 갔다.
1세기 초 한반도 남부 지역이 바다를 통로로 아유타국과 교류하였음을 "가락국기"가 증언
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의 깊은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인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르내리면
서 추적한 김해 지역에서, 다시 아유타국을 찾아 아요디아에서 나흘밤을 보내면서 나는 그
옛날 꽃가마배의 도도한 항해를 밟기로 했다.
서기 48년에 도래한 허 왕후의 꽃가마배는 분명 두 달 남짓한 항해를 계속한 대형이었다.
범선이 항진해온 바닷길을 추적하는 일, 하지만 이 작업은 수천 년 전 바다 밑에 가라앉은
보물을 찾기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릇 물이란 삼라만상을 다 끌어안아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어늘 하물며 그 옛날 바
다를 스친 돛단배의 흔적임에랴... 그나마 다행한 것은 나의 추적에는 길잡이가 있었다. 진수
의 "삼국지"가 그것이다. 옛 한족의 증언은 어느덧 나를 한반도 남부와 직결한 일본의 규슈
땅으로 내몰고 있었다.
3부 꽃가마 뱃길 따라
한반도에 닻을 내리다
붉은 돛 가득히 계절풍을 안고 바다 멀리 가락의 낭군을 찾아온 아유타국 공주, 드디어
첫날밤을 맞이한 공주와 수로왕의 대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옮겨 적고 있다.
"저는 바로 아유타국 공주이오며 성은 허씨, 이름은 황옥, 나이는 16세입니다."
"짐은 나면서부터 각별히 성스러워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도다. 신하
들이 왕후를 간택해달라고 청을 해왔는데도 감히 따르지 않았도다."
공주는 바닷길을 건너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와 마침내 수로왕 곁으로 오게 된 기쁨을
이렇게 전했다.
"올 5월의 일입니다. 부왕께서 왕후와 함께하신 자리에서 저에게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
우리 내외가 간밤 꿈에 황천상제를 뵙게 되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의 건국주 수로왕은 하
늘이 내린 신성한 왕이라 가문과 나라를 새로 일으키는데 아직 배필이 없으니 너희 공주를
보내서 짝짓게 하라 하시고 승천하셨으니 공주는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하직하고 그곳으로 가
도록 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인식 할 수 있다. 첫째, 수로왕
은 자신의 배필이 먼 곳에서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미리 앎'의
이유를 '성스러운 출생'으로 돌렸다. 그것은 공주의 부왕이 내세운 황천상제의 탁선과 맞물
려 복잡한 현실의 경위를 줄여 말하기 위함이다.
이는 아유타국 공주의 부왕과 수로왕은 비록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거리에 있었지만 서로
간에 빈번한 왕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주의 꽃가마배는 이미 다져놓은
항로를 따라 한반도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을 품게 된다.
꽃가마배가 모항인 인도의 아요디아를 출발해서 낙동강 어귀가지 오는 데 걸린 기간에 대해
서다.
공주는 초야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양친을 하직한 것을 '5월중'이라 하였다. 또 혼례가 치
러진 것은 그 해 7월28일의 일이다. 현지 출발일을 5월 중순으로 잡아볼 때 항해기간은 최
소한 60일로 어림잡을 수 있다. 종착지는 낙동강 하구다. 그렇다면 항로를 어느 방향으로 잡
을 것인가?
가락국 건국 이전은 이 지역에 정주한 집단을 매우 꺼려왔다. 그들을 일컬어 '구야'라는
비천한 글자를 골라 쓴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들 집단은 당시 한족이
실용화할 수 없었던 쇠를 다를 줄 알았고 벼농사에 익숙했다. 최소한 인도 대륙을 경유한
조상의 자손일 가능성이 높다.
1세기 전후해서 인도 남부에 있던 도시동맹국들이 유럽과 동남아시아 간의 원양 항해 담
당자로 활약했던 점으로도 보아 꽃가마배의 항로는 동남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가락국탐사"에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더욱이 공주가 떠난 시기와 도착일은 시기적
으로 볼 때 한반도 남부와 그 남쪽 바다의 해류와 기상조건이 북상하기에 좋은 때였다. 5월
이나 7월은 음력이고, 서기 48년의 음력은 양력 2월4일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꽃가마배는
양력 7월에서 9월 말 사이에 이 해역을 북상해서 항해한 것이 된다.
한반도 근해의 리만 해류는 7월에서 9월 사이에 북상기에 접어드는 강력한 해류, 즉 동중
국해의 흑조와 함께 빠른 속도로 북상한다. 이때는 범선을 밀어올리는 바람이 남풍으로 바
귀는 계절풍 기간이어서 태풍 발생 빈도도 매우 낮다.
이렇듯 꽃가마배가 가락국과 아유타국 사이에 이미 다져놓은 항로를 따라 항해하는 동안
바람과 해류는 서로 맞물려 한반도의 낙동강 하구 똑으로 대형 범선을 밀어내고 있었다.
섬과 섬을 징검다리로
우리의 옛 땅, 2천 년 전 고대의 휴흔을 찾으려니 우선 지도부터 만들어야 했다. 그 가운
데 빠뜨릴 수 없는 지도가 일본의 규슈와 인근 섬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아
유타국 왕과 수로왕 사이에는 이미 징검다리식 항로를 통해 양국간에 가로놓인 바다를 오가
는 왕래가 있었으리라는 추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락국과 일본 열도의 관련을 주시하게 됐고 수로왕후가 낙동강 하구에
진입하기 전 징검다리 같은 쓰시마, 이키섬, 그리고 규슈의 어느 기항지를 역순으로 진행해
왔을 것으로 보게 되었다.
특히 규슈는 후일 왜지 최초의 고대왕국인 '야마이'국이 형성된 곳으로 동남아시아로 진
출하려던 아유타국이 인도 대륙에서 일본의 규슈- 한반도의 가락국을 오가는 항로를 다져
왔을 것이라고 보고, 적어도 규슈의 어느 지점에서는 아유타국과 상통하는 문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규슈로 걸음을 옮기기 몇달 전 나를 아요디아로 안내한 남동아시아 지도를 다시 펼쳤다.
이 지도는 미국 공군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전역의 지리적 요충에 관한
세밀한 정보를 빠짐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지도에서 "PUSAN"이라고 표기한 곳을 기점으로 그날의 꽃가마배가 온 길을 거슬러
가볼 수 있다. 다시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트인 바다 어귀로 'Korea Strait'로 표시된 대
한해협,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규슈 사이에 놓인 두 개의 작은 섬 쓰시마(대마도)와 이키
시마(일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섬들은 해협을 건널 때 징검다리로 안성맞춤이다. 특히 쓰시마는 부산에서 불과 48km,
일본 후쿠오카에서 1백 24km 떨어져 있어 지도상으로는 한반도와 더 가까운 섬이다. 따라
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편 등을 펼치면 일본으로 가는 뱃길로 이들 징검다리 섬
을 경유했다는 기록이 자세한 경로와 함게 남겨져 있다.
군에서 왜로 가려면 바닷가 물길을 따라가다가 한국 땅을 거치게 되고, 잠시 남쪽으로 갔
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가락국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7천여리이다.
스물 여덟 자의 한자에 담긴 정보를 해석해보면 구이라 한 것은 위에 앞서 한대에 한반도
에 진출한 한족의 근거지 '대방군'을 일컫는다. 이른바 '한사군'의 하나이며 그 위치는 서울
북쪽이었다. 이 정보를 제공한 이가 당시 위나라 소관이던 대방군의 관리였으므로 그가 왜
로 가는 기점이 대방군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거룻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마한, 진한, 변한의 총칭인 한국 땅에 상
륙해서 하필이면 개 구자와 마을 이름 야자로 표기한 가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가라를
그 북쪽 해안이라고 밝힌 것을 유념해두고 그들이 가던 육로를 따라 가보기로 한다.
가령 그들이 한강 북쪽 하구에서 탄 거룻배를 오늘의 당진쯤에 내렸다면 거기서부터 김해
까지의 육로는 지형상 남으로 가다 동으로 가기를 되풀이하는 지그재그 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가 7천여 리였다고 "위지동이전"은 밝히고 있다. 기록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
다.
비로소 한 바다를 건너면 천여 리쯤의 뱃길로 대해국에 이르게 된다.
비로소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선편을 얻기 위해 7천여 리나 되는 지그재그 육로를 거쳐
온 것이다. 당시 바다의 운항권은 유일하게 가락국에 소속된 것이어서 '비로소 건너다'라는
말을 쓰면서도 '가라'라는 현진음을 한자로 적을 때는 '가라'라는 몹쓸 글자를 골라 썼는데,
이는 옛 변한지역 주민들과 중국 대륙 주민간의 미묘한 위상 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여겨
진다.
일단 이들의 갈등을 비켜 일본으로 향하는 위나라 사신의 행보를 뒤쫓기로 한다.
그곳 우두머리 벼슬은 비구라 이르고, 버금 벼슬은 이르기를 비노모리라 한다
관리가 기록한 정보서답게 가는 곳마다 현지 관리의 호칭을 먼저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어서 위사는 그들이 얻어 탄 가락국의 배가 닿은 대마도의 자연환경과 주민
의 생활을 간추려 적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남족으로 천 리쯤 바다를 건너 일대국에 닿게
된다고 증언하였다. 그곳은 오늘날 이키섬을 가리킨다.
이키 섬을 출항한 배는 다시 남쪽 바다인 한해(현해탄)를 건너 규슈 섬 북족 끝인 말로국
에 닿고 여기서 그들의 임지 이도국으로 이어지는 육로를 밟게 된다고 "삼국지"는 증언하고
있다.
야성호, 덫에 걸리다
규슈행 채비를 위해 몇 가지 기초자료를 준비하던 1975년 초, 나를 흥분하게 한 사건 하
나가 발생했다. 일본의 신흥 출판사인 K사가 고대사 재현을 위한 '바닷길 축제'를 선언한
것이다. 빅 이벤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옛 무덤에서 얻은 선박의 부장품을 보고 배를 복원하여 그 배에 스무 명의 노수를 태운
다음, 한국의 인천항에서 규슈의 후쿠오카까지 노를 저어가는 바닷길 축제를 연다.
주최측은 "삼국지"가 증언한 위국 관리의 일본행을 재연하는 것이라 광고, 세인의 관심을
더욱 끌었다. 이 무렵 일본 열도는 '야마다이'와 '히미코' 찾기에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일본의 현대적 개화를 담당한 메이지 군부는 일본 제국주의를 건설하면서 그 구심점으로
일왕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새로 제정한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에 이런 조항을 못박아놓았다.
천황은 신성하므로 범하지 못할 것이로다.
그들은 덴노는 '아마테라스노오미카미'의 후손으로 이른바 만세일계로 이어온 혈통이기
때문에 '아라히토카미'라는 살아 있는 신으로서 국민 앞에 군림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조직적인 교육은 끈질기게 계속됐고 결국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살아 있는
신' 일왕을 위해서 싸우다 죽는 것이 이른바 '일본 남자' 최대의 영광임을 믿는 억지 신화
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신화는 청, 러시아, 중국 등과 벌인 전쟁을 통해 한층 가속되었다.
물론 그때마다 영토는 확장되었고 이에 국민도 크게 고무되어 '아라히토가미'를 외쳤다.
하지만 이들의 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45년 연합군 앞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일왕의 음성이 라디오를 통해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이것은 일본인들에겐 히로시마 상공에
터진 원자폭탄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현인신인 '천황'이 '귀축'이라 부르던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다니! 일시에 무너져내린 환
각의 장막 앞에서 그들은 경악하고 허탈했다. 줄곧 눈가리개를 해온 사람이 그것을 벗었을
때와 같은 대혼란이었다.
얼마 후 가까스로 진정한 그들은 파괴된 현장에서 두 개의 낯선 팻말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가 그 동안 자신의 눈을 가려왔던 역사 왜곡에 대한 것이었고, 또 하나의 팻말은 한족
이 일본 열도 최초의 국가 이름과 시조왕의 실체에 대한 것이었다. 즉 일본이란 나라는 그
들이 믿는 메이지로부터 1세기에 걸쳐 배워온 '가미요' 시대가 아니고 '히미코'라는 여왕
이
건국한 고대 여왕국 '야마다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한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족의 시조를 밝히는 역사적 확인은 과거 그들이 무참히 짓밟은
중국 대륙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여왕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지"에 나오는, 왜지 최
초로 건설된 '야마이'국의 별칭이다. 그런데 이보다 2세기 후에 나온 "후한서"가 끝 자를 잘
못 표기하여 '야마대'국이라 기록한 것을 가지고 오늘날 일본의 고대사는 '야마다이'국으로
통일하여 쓰고 있다.
여기서 후대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당시 중국의 사서들은 오랑캐로 인
정하는 나라 이름에 좋은 뜻을 지닌 한자를 쓴 예가 결코 없다는 사실에서 구할 수 있다.
그것은 '구야한국'의 예를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왕대, 장대로
쓰는 대자를 사(사악할 사)나 마(말 마)자 옆에 곁들였을 리가 없다.
어쨌든 야마다이와 히미코의 발견으로 인해 일본 열도는 마치 잃어버린 고향을 만난 것
같은 흥분과 관심으로 들떠버렸다. 야마다이와 히미코 열풍은 급기야 주택가 골목가지 전해
지면서 심지어 구멍가게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등 대단한 추세로 번져나갔다.
이런 호재를 야심있는 신흥출판사가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고분 출토품 가운데서 놀잇
배 토용을 모델로 골라 대형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배 이름은 야성호, 귀향지는 규슈 북단에
위치한 후쿠오카. 따라서 이 배의 노를 쥔 사람은 당연히 후쿠오카 지역 고교 조정부 학생
들로 구성됐다. 이들을 승선시켜 대방군에 인접한 한반도의 인천항에서부터 규슈 후쿠오카
까지 노를 저어 그 고대의 항해를 재연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한국의 신문들도 이 엄청난 행사를 일제히 기사화했다. 씁쓸하고 기막힌 일이었다. 다시금
식민지 시대를 연상케 하는 노여움이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아유타국 공주 꽃가
마배의 뱃길을 추적하러 나선 나의 고대사 연구시기와 맞물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에
도 '일본 제일주의' 하나를 믿고 멋대로 항해코스를 잡은 그들의 속셈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최측의 거리낌없는 '일본 제일주의'는 나의 노여움과는 상관없이 한, 일 양측 보
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출항식을 마친 후 인천항에서 노를 저어 남하하기 시작했
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어거지로 연출한 일이 어찌 그리 호락호
락 이뤄지겠는가?
한반도 서남 근해의 복잡한 해류는 변동을 거듭하면서 놀잇배의 남하를 방해했고, 대형
야성호는 별수없이 동력선에 의지한 채 간신히 후쿠오카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야성호의 참담한 실패는 나로선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는
일본식 한문읽기의 덫에 발목이 잡힌 셈이었다. 일본식 한문 읽기의 함정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는데, 일례로 앞에서 인용한 "위서"의 '왜지행' 첫 부분을 다시 들춰보기로 한다.
대방군에서 왜로 가려면 바닷가 물길을 따라 가다가 한국 땅을 거치게 되는데, 잠시 남쪽
으로 갔다가 잠시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가라나라에 다다르게 되며 여기까지가 7천
여 리이다. 비로소 한 바다를 건너면 천여 리쯤의 뱃길로 대해국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풀이할 수 있는 글을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내리닫이로 읽어버린다.
이 글을 얼핏 보면 원문을 다치지 않고 그럴 듯하게 잘 기록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잘못 읽은 것이다. 이 정보를 한문에 담아 기록한 이는 3세기 한족의 일류 문장
가이던 진수 아닌가. 그의 붓이 이렇게 엉성하게 정보를 정리했을 리 없다.
대방군치가 있는 곳에서 한국 땅에 닿기까지는 해안을 따르는 길이므로 진수는 그 행보의
조건을 명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안을 따라 가는 길은 육로로도 갈 수 있기 때문에
육행이 아니라 배를 타고 수행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일단 한국땅에 올라서면 행로의 조건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게 된다. 한국은 땅덩
어리이기 때문에 꿈에서라도 배로는 갈 수 없는 일. '육행'이라는 조건을 덧붙여 밝히지 않
는 것도 여기에 있다. '한국땅을 거치게 되었는데 땅 위로 갔다.' -이런 표현은 진숙 같은
명문장가는 물론이거니와 글줄이나 쓰고 말깨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않을 표현 방
법 아닌가?
그런데 일본식 한문읽기로 이 부분을 읽으면 한국 땅에 닿기까지 해안선을 따르는 길, 말
하자면 수행이 뒤에 오는 '한국땅 거치기'의 조건으로 내리써도 무관해져버린다. 즉 '해안을
따라 붙어 수행하여 한국을 거치는데 남으로 갔다가 동으로 갔다가 하였다'는 식으로 읽게
된 것이다. 결국 잘못된 해독이 야성호의 기세를 꺾은 셈이다.
게다가 '사남사동'이라 '잠시 남쪽으로 갔다가 이내 동쪽으로 방향을 꺾는 행로'를 뜻하
는 말이다. 그런데 그곳이 만약 한반도의 서해안이라면?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있어도 동쪽
으로 꺾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를 타고 해안의 동쪽, 즉 육지로는 갈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런 잘못되 해석을 따르느라 야성호는 줄곧 한반도의 서안과 남안을 떠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빠진 일본인 학자들은 이런 궁지에서도 할 말이 있었다. "어설
프게 일을 처리하는 중국인이어서 서쪽을 동쪽이라 적은 것이다. 아니면 잘못 새겨서 그렇
게 인쇄된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정중한 저서에 활자로 박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리 그랬을까"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이고 그 책을 읽는 일본인들은 아직도 생
생하게 그 '허술한' 중국대륙을 마음대로 분탕질한 경험이 있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
들
이니까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무모함은 따지고 보면 일본의 무례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야
성호의 해상 이벤트는 한문에 대한, 혹은 한족에 대한 얕잡음고 이웃나라에 대한 멸시에서
온 것이라는 증거를 그들 스스로 밝힌 사건이다.
일문으로 적은 문장은 한문을 풀이한 번역이 아니라 한문의 위치를 그들이 창안한 법칙에
따라 바꾸면서 군데군데 가나를 박아서 읽는 일본식 한문읽기이다. 더 설명할 것 없이 어계
가 다르고 구문법이 다른 한족의 글을 여지없이 일본어로 둔갑시켜 읽는 절묘한 기교를 그
들 일본인은 긴 세월 끝에 만들어낸 것이다.
정작 한문을 한문으로 읽어온 한반도의 전통적 한문읽기에 비한다면 이것은 겉핥기일 뿐
더러, 심하게 말하면 그 한문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는 속임수다. 한자나 한자어를 빌려
쓰기는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문을 비틀고, 떼어붙이고, 자기 말과 섞어서 자
기말을 만드는 일을 우리는 하지 않았다. 해서도 안되고, 못해야 순리이다.
일본식 한문 읽기의 함정
말머리를 돌려 "삼국지"가 전달하는 위나라 사신의 행로를 뒤따르기로 하자. 오늘의 쓰시
마 섬인 대해도에 닿은 사신은 그 곳을 통치하는 사람들의 직함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고서
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학자들은 깔끔하게 일본어화한 한문으로 다음과 같이 고친다.
원하는 바 절도는 사방 4백여 리쯤이니라. 토지는 사닝 험하고, 깊은 숲이 많으며, 도로는
금록의 길과 같도다.
직역한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한다면 이것은 일본인 쪽의 생각이고,
정작 책을 쓴 진수가 알았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쓴 사람의 의도를 캐려는 읽기가 아니
라 제 생각대로 글의 뜻을 몰아가 버리는 독해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한문읽기에 따
라 다음과 같이 풀었다.
그들은 절도에 산다. 절도의 넓이는 사방 4백여 리이다. 사방 4백여리의 그 땅은 산이 험
하다. 산이 험한 땅에는 깊은 숲이 많다. 깊은 숲 속 길은 짐승들의 것처럼 좁아 보인다.
편편하게 엮어서 늘어놓는 요설의 여유로움이란! 우리나라의 구문과 정반대인 한문도, 단
락의 끝 글자를 위 아래로 이어나가는 가운데 그런 대로 수다를 늘어놓을 수도 있다. 일본
식 한문읽기와는 크게 다르다. 만약 이 구절의 마지막인 '도약여금록경'만 독립시켜 옮기면
도로는 짐승들의 길과 같다로 되지만, 위 아래를 이어서 읽으면 별개의 상황설명이 되어버
린다. 즉 '깊은 숲속에 있는 길은 짐승들만 오가는 길처럼 좁아 보인다'로 풀이될 수 있다.
규슈 지방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느낀 일이지만 짙은 수림에 둘러싸인 길, 그 길은 포장
된 2차선인데도 실제로는 금록경 같이 호젓하고 좁아 보였다. 말하자면 이 루트를 보고한
당시의 위나라 사신도 평지 길에 더 익숙한 대륙쪽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치더라도 우리는 아직껏 '구야한국'에서 일해를 건넌 것이 어느 방향이었던가를
진수에게 묻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서두를 것은 없다. 건너야 할 바다는 아직도 이어져 있
다. 제 2 행정,대해국 - 일대국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삼국지"의 원문을 다시 들췄다.
우남도일해천여리명왈경해
문득 첫 글자인 '또 우'자의 요술과 같은 신기한 재주를 만나게 된다. 한국땅을 출발한 가
락국의 배가 대해국으로 항행했을 때, "삼국지"는 그 방위를 적지 않았다. 잊고 빠뜨린 것일
까 의심해 보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대해국 다음 기항지인 일대국으로 가는 항행 코스인
'남쪽으로 건너다' 앞에 '또 우'자를 하나 붙이면 앞에도 붙였어야 할 남도 두 글자를 생략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옛 한문의 철저한 절문주의 탓만은 아니다. '또'라는
글자를 만나고 나면, 그 이전에 적은 글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다시 되새겨 읽게 된다. 이러
한 한문 읽기와 더불어 생각나는 한 어른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중등한문"을 배울 수밖에 없던 시절의 일이다. 동급생 가운데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이 있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뜨거웠던 모양으로, 아
들의 공부를 위해 시골에 대궐 같은 본가를 놔두고 가족 일부가 경주에 와 있었다.
당시 이름난 선비였던 그의 부친도 가끔 아들 사는 곳으로 올라와 며칠씩 묵곤 했는데,
어쩌다 친구 집에 들를 때면 어른께서 꼿꼿이 앉아 상체를 약간 흔들며 소리내어 책 읽는
모습에 늘 깊은 인상을 가졌다. 유심히 들으면 앞에 읽은 구절의 후미를 다시 읽고 다음 글
을 읽는, 말하자면 루프식으로 한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한 번은 어른께 "중등한문"의 한 구절을 읽어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빙긋 웃
으시며 책을 받아들더니, 느닷없이 경멸에 찬 목소리로 책을 내던지며 말했다.
"너희 식대로 해석해. 왜놈 식대로... 난 도저히 알 수 없는 글이야."
훗날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적 본 친구 아버지의 루프식 한문읽기는 바로 한문이 전달하
려는 정보나 생각 또는 느낌을 바르게 파악하려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옛날
한문 기록이 처음부터 끝가지 한 글자도 띄어쓰는 일이 없이 글자재기를 하듯 적은 것도 이
런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지"를 엮은 진수나 "사기"의 사마천, "한서"의 반고와 같은 역사기록 책임
자가 사학자나 관료보다는 문장가로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우연일 수가 없다. 고
도의 문장 구성력을 가진 사람만이 잡다한 과거의 사실들에서 후세에 남길 정보를 효율적으
로 엮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1870년에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슐리만은 후세 사람들이
칭하는 대로 고고학자가 아니지 않았던가. 관계 학자들이 단순한 전설로만 본 호메로스 서
사시의 역사성을 믿은 그가 젊음을 바쳐서 한 공부는 트로이 지역의 옛 기록을 적은 11개국
의 말에 관한 것이었다. 슐리만은 그 11개의 열쇠로 땅 속 깊이 묻힌 금은 보화를 캐내 세
계사의 비밀을 열고 만 것이다. 허구의 신화가 실재했던 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세월을 이겨낸 장사는 없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자두 들으면서 자랐다. 진실은 세월 다라 밝혀지는 법이다.
결국 일본식 한문독법을 고집하는 한 일본의 학자들은 2천 년 전 신화에 묻힌 역사적 사실
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경험'이라는 보물 상자는 2천 미터 깊은 바다 속에 있는데 저들
은 야성호나 타고 수면 위를 오가면서 고대사의 산 증거를 찾겠다고 하니., 이솝 우화의 '코
끼리 더듬기'가 바로 이러한 장면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왕도를 잇는 5개 코스
단어 맞히기를 할 때 만약 한 자리도 잘못 되면 그 게임은 끝낼 수가 없다. 글도 마찬가
지다. 만약 읽는 사람 편의대로 한자를 '개정'하게 되면 그 기록에서 온전한 정보를 얻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는 그 사실이 비록 엉뚱하게 느껴지더라도 일단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정확하게 읽어서 퍼즐의 뜻을 원래대로 복원하고, 고고학적 자료와 관련 문헌을
아울러 참고하여 자체의 진실성에 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마다이국의 길잡이인 옛 문헌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우선 기본 텍스트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3백56자 퍼즐 게임에서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삼국지"의
부록이라 할 이 책에는 왜인에 관한 조항이 모두 2천 자에 가까운 한자로 엮여 있다. 그 중
여왕 비미호의 왕도 야마이국과 그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에 관한 행정과 정보는 총 3백56
자에 담아 기록하였다.
"삼국지"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앞서의 퍼즐 법칙을 차례로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아
요디아 공주의 가락국 내도는 인더스, 갠지스 문화를 둘러산 지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고, 다음은 여왕 비미호와 그녀의 왕도를 추적하는 일로 대항해의 흐름 속에
예상되는 바닷길을 체계적으로 복원시켜 나가는 일이다.
일정은 "삼국지"가 증언하는 왜국 여왕도의 길을 분석하고, 원문대로 일본의 지도 위에
코스를 표시해가는 일로 이어졌다. 왕도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디에서 멈췄을까?
결국 히미코 여왕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원고의 5분의 1 가까운 지면을 애국 최초의 왕도
인 야마이국을 찾는 일에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왜국 최초의 왕도를 찾는 지도는
모두 5개 코스를 돌며 완성했다.
제 1 코스 : 대방군치 - 당진 - 김해
제 2 코스 : 김해 - 대해국(쓰시마섬)
제 3 코스 : 대해국 - 일대국(이키섬)
제 4 코스 : 일대국 - 말로국
제 5 코스 : 말로국 - 이도국
대방군치를 떠난 위나라 사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길 없지만, 적어도 그의 부임지
인 이도국까지 가는 행로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위사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가
진 사람이다. 따라서 직업상 임지(이도국)와 관련된 것들을 낱낱이 보고하는 일에 익숙해 있
었다.
그는 우선 이도국에 인접한 노국 및 불미국과 이도국의 지리적 관련을 밝히고, 다시 그
남쪽에 있는 투마국에서는 대방군치까지 직결 항로가 있어서 '수행이십일', 즉 뱃길로 20일
이 걸린다는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투마국의 현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 곳에서 한강 어귀까지 항해로 20일 걸렸다는 사
실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낙동강 하구에 닿은 꽃가마배의 60일 간 항해 거리를 가
늠할 수 있어 아유타국 공주가 출발한 항구를 알아내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 주었다.
남으로 야마이국 여왕의 왕도에 이르는데 물길로 열흘, 육로로 한 달 걸린다. 대방군에서
여왕국까지는 만 이천여 리다.
"삼국지"를 조금 더 읽어가보면 우리는 몇 가지 단서를 잡게 된다. 왜국 최초의 고대 왕
국 야마이의 맹주로 추대된 여왕 비미호는 투마국의 남쪽에 거주했다는 것이며, 대방군치에
서 그 왕도까지의 이수는 1만2천여 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수와 소요기간을 수행과 육행
으로 나눠 적은 진수의 구문을 통해 빈틈없는 당시의 교통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옛날 위나라 사신이 왜지로 건너갔듯이 여왕국이 있던 일본 열도로 떠나는 일만 남았
다. 낙동강 하구 - 대마도 - 이키섬을 지나, 일본국 규슈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가 우리의
목적지이다.
뱃길 10일, 육행 한 달
먼저 총 도, 리수와 행정일수에서부터 시작하자. 1만2천 리라는 이수와 수행 10일, 육행 1
개월이라는 것은 어떤 거리를 가지고 잰 공간과 시간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둘 필요가 있
다. 그리고 이 수치는 모두 왜인 쪽에서 제공한 것이며, 중국인이 '가'라는 글자를 붙인 정
보만 그들이 실제 검증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둘 일이다. 그래서 이것을 km와 시간의 관
계로 바꾸면 일단 다음과 같은 수식이 된다.
12000리 = 900km = 40일
따라서 1일의 행정거리는 '900km 나누기 40일 = 22.5km'이다. 오늘의 이수로 바꾸면 하
루 평균 5.6리가 된다. 다욱이 돛에 바람을 받아 물 위를 항행하는 범주수행도 포함되어 있
으므로 수긍이 가는 수치다.
당시 한반도의 크기에 대해 "삼국지"의 "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으니 동과 서는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에 접해 있다. 사
방은 4천 리쯤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서 한은 마한, 진한, 변한의 3종이라고 밝혔다. 이 증언에 다르면 그들은
한강 이남의 한반도 크기를 사방 4천 리로 셈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약간 마름모꼴이기는 하
나 한반도 지형은 사방이 같은 방형임을 우리는 안다.
이것을 5백만분의 1지도에서 실측해보자. 평균하여 셈할 때 사방이 각각 6cm로, 이 수치
를 5백만 배 확대하면 300km라는 거리로 환산된다. 그러므로 그 300km의 4분의 1이 고대
의 기록에 나타난 천 리 길이며 따라서 75km가 그 당시 1천 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리고 다시 위사가 거친 육로와 수로를 "대동여지도"와 일본국의 메이지 초기의 지도를 근거
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은 수식을 유도해낼 수 있다.
"수행" 4500리 나누기 10 = 33.75, 약 34km
"육행" 7500리 나누기 30 = 18.75, 약 19km
범선의 1일 항행거리는 약 34km, 도보나 말을 타고 간 거리는 약 19km였다니 오늘의 우
리가 수긍할 수 있는 속도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그 꽃가마배가 당도한 가락국 건국기의
모습과 갠지스 강 상류 아요디아의 연관성을 찾아 고대의 바닷길을 되밟을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