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애굽기 3:13-15) 2012.11.11.
요즘‘성장동력’이라는 말을 뉴스 논평 같은데서 자주 듣곤 합나다. 최근에 듣기로도‘노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동력’이란 말을 쓸 때는 자동차를 연상하면 쉽습니다. 마치 성능이 노후화된 어떤 자동차가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가 힘에 부처 점점 속도가 떨어져 쩔쩔매는 경우라고나 할까요? 이같은‘성장동력’이 필요하기는 사람에게도 해당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너무 크고 쓰라린 인생실패를 맛보고 절망과 좌절에 처한 어떤 젊은이가 있다고 할 때, 이런 사람을 다시 분연히 일어나게 할 그 어떤 힘이 주어질 수만 있다면 그 힘이 바로 그 젊은이에게는 새로운 성장동력일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그 연세가 팔십의 노인이기도 하지만 그가 처한 현실 자체가 그야말로 인생의 모든 성장동력이 사라진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십 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지요. 애굽 바로 왕가의 공주의 아들로서 무엇이든 하려고만 한다면 못할 것이 없는 그야말로 성장동력이 왕성하였댔습니다. 그러나 동족 히브리인을 핍박하는 애굽인을 쳐죽이고 동족을 감싼 일이 탄로나 급히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무려 사십 년의 세월을 한낱 처가살이로 장인의 양들을 치는 늙은 목자로서 살았으니 그야말로 모세의 인생살이는 무엇 하나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탈진되고 소진되고 성장동력은 오래전에 사라진채 그저 보통 다른 노인들과 다름없는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광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시어 모세에게 분부하시는 것입니다.“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9-10). 이 말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또 묻기를,“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이같은 질문을 하는 모세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에 애굽을 도망나올 당시에 동족으로부터“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 모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그 시대는 다신론의 시대였기 때문에 나라마다 민족마다 제각기 섬기는 신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족속에게는 바알과 아스다롯, 블레셋 족속은 다곤, 모압 족속은 그모스 그리고 암몬 족속은 몰록이 저들의 섬기는 신이었습니다. 애굽에도 라, 오시리스, 하솔, 프타 등의 신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신이 센 편이 이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시대가 그렇기도 하였고 또 모세의 말을 듣고 바로와 맞서 민족의 운명을 걸어야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의 이름 등 무언가 분명한 표식을 구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만 알면 즉시 동족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 시키려 애굽으로 달려가겠다는 말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단지 언뜻 떠오르는 여러 당혹스러운 상황을 감안하여 하나님께 물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고 하지만, 모세는 계속 몸을 사리고 주저합니다.“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11절),“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11절),“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4:1절),“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절), 막판에는“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3절)라고 계속 뒷걸음질을 쳤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모세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모든 기력과 의욕과 모든 성장동력을 상실한 나약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노하심 앞에서 어쩔수 없이 마지못해 모세는 복종합니다만, 짐작하기로는 지팡이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는 사실과 또 시간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되새겨 보는 과정에서 모세에게 확고하고 담대한 믿음이 생겨났으리라 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답하시기를“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하여 설명하여 놓으신 곳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시작되는 첫 구절부터“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일방적인 선포로 시작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이시며 왜 천지를 창조하시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설명이 있는 부분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에 답하신 이 부분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최초의 자기 선언이신,“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하신 말씀 즉 영어로는‘I AM THAT I AM'이며 히브리 원어로는‘에흐예 아세르 에흐예’에서‘야훼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씀을 통해 당시의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상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스스로 있는 자”는 자존자(自存者)로서 다른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스스로 존재케 하시는 분이시며, 본래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신으로 추대된 세상의 그 많은 우상과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있다하여 있어지고, 없다하여 없어지는 분이 아니신 독자적인 분이시며, 또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든지 혹은 사람들 뜻대로 좌우될 수 있는 분이 결코 아니신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둘째로,“스스로 있는 자”는 영원한 자족자(自足者)로서 스스로 충만하시고 다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까지 그에게 의존되어 있으며 모든 피조물을 충만케하는 축복의 원천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세째로,“스스로 있는 자”는 영원자(永遠者)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하였고, 시편에서도“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1-2)라 하신대로 영원자 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심은 그의 모든 약속에도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이심을 뜻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없고 단지 믿음으로 다가오도록 하십니다. 그러기에 조상들이 지녔던 신앙의 소생을 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르기를“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15절)고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의 경우와 같이 인생의 모든 성장동력이 사라지고 좌절과 절망에 처한 자들이 모세 말고도 여럿 나옵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던 요셉이 어느날 갑자기 이복형들에 의해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겪는 모습에서 볼 수 있지요. 또 동방의 의인이며 부자였던 욥이 어느날 갑자기 불운에 쳐박혀 말로 다할 수없는 고통의 처지에 떨어진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아합 왕 때 엘리야는 얼마나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였습니까? 그러나 자기를 죽이려는 왕후 이세벨을 피해 유다 광야로 도피해 들어가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는 모습에서 봅니다.“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요즘 말로 한 때 잘나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어느 순간 가동할 만한 인생살이의 모든 동력이 소진되고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진 정황에 처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성경의 해법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의 말씀이지요.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거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7-31)
즉 영원자이시며 창조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만이 해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바로 그“스스로 있는 자”곧 자존자이시며 영원한 자족자이시며 영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당시 모세 나이 팔십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회에서의 노령화는 성장동력의 약화라는 문제를 야기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성숙해지는 때이며 신령해지는 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아본 자도 노년의 시므온과 안나였습니다. 저들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눅2:25-38). 오순절 성령강림때에도 사도 베드로가 모인 백성들에게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외친 말씀에도 나옵니다.“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7-18). 젊은이들이든 늙은이들이든 남자든 여자든 성령으로 충만하며 신령한 천국의 비전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고요. 바라기는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든 신목의 성도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도“스스로 있는 자”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시어, 신앙의 성장동력을 충분히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