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 5. 20(일)
완산백 류공 습 신도비명 병서
(完山伯 柳公 濕 神道碑銘 竝書)
전주 류씨는 우리 동방에서 우러러보는 씨족으로 자손이 널리 번창하고 있다. 시조 완산백의 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율곡리 동남향의 산기슭에 있는데 옛날에는 지평(地坪) 노필(盧王筆 )공이 지은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글씨가 마모되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공의 6세손 곡(轂)이 고산 현감으로 와서 사초(莎草)를 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후에 8세손 영(寧)이 전주 판관으로 있을 때 다시 세웠고,] 세월이 흘러 또 이끼가 끼고 마모되자 17세손 참판공 정양(鼎養)이 다시 비문을 지어 세웠으나 규모가 작고 비문(碑文) 역시 아주 간략하였다.
모든 자손들이 상의하기를 지체 높은 집안의 시조이신데 4척(1.2m)의 작은 비석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고 보기가 민망하여 이대로 세월이 가면 어찌 오래 두고 보겠는가. 공의 밝은 공덕을 대강 밖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주 류씨의 문호를 열게 된 시조로써 천만년 끊이지 않고 시향(時享)을 모실 것인 데 시조의 신명이 나타나 흡족하지 아니할 것이 걱정된다. 반드시 위대한 업적이 있었으련만 알려지지 않고 있음은 다만 문헌의 고증이 없을 따름이다.
공은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추증(追贈)되고 또한 완산백(完山伯)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조비(始祖妣)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그래서 예법에 따라 갓머리 돌과 거북 좌대로 큰 비석을 마련하여 삼가 글을 새긴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습(濕)이요, 전주류씨 시조이다. 공의 선영(先塋)은 실전(失傳)하였고 생졸(生卒) 마저 분명치 않으나 다만 군지(郡誌)나 가승(家乘)을 살펴보건대 전주의 남쪽 5리되는 곤산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은 빼어난 고장으로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수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세의 풍류를 회상케 한다.
공은 고려 공민왕 시절에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평생 근신하셨으니 이 고장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셨다. 아! 슬프도다. 고려말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 목은 이색(李穡)의 충절과 두문동 72현(顯)의 절의(節義)는 오랜 세월을 옥같이 빛내고 있으나 공은 벼슬이 없는 한 선비로서 세상을 보고 스스로 조용히 지내셨다.
공이 선견지명이 없고 현명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배필 전주 최씨의 묘소는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건지산 동쪽 산기슭 서남향에 있으며, 5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갑을(甲乙)과에 급제하였다.
문정공(文靖公) 목은 이색(李穡)이 죽계 안(安)씨 세 아들이 등과(登科)한 축하시 서문(序文)에 전주 류씨 세 아들[극강, 극서, 극제]의 등과를 칭찬한 바 있다. 옛 법에 다섯 아들이 등과하면 그 부모에게 작위(爵位)를 주게 되어 있는데 이때 공은 별세하였으므로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고 완산백에 추봉되었으며,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다.
시조의 장남 극강은 판사, 둘째아들 극서는 직제학, 셋째하들 극수는 군사, 넷째아들 극제는 판관, 막내 극거는 사마이며, 사위는 부유인(富有人) 대제학 심효생이다. 옛 비문에 이른바 자손들이 많이 나와 오래도록 번영하니 대대로 시조와 시조비의 은덕이라 할 수 있다.
극강은 네 딸을 두니 사위는 김관, 유중노, 박걸, 소천이다. 극서는 두 아들을 두니 큰아들 정은 첨지, 막내 빈은 직제학이다. 극수는 두 아들을 두니 큰아들은 사심이고 막내 사문은 참지이다. 극제는 두 아들을 두니 큰아들은 지원이고 막내 번은 별제이다.
극거는 두 아들을 두니 큰아들 길안은 현감, 막내 경안은 참판이며, 정의 아들효지와 혜생은 현감, 효산은 목사, 효천은 문과와 중시로 직제학이며, 효담은 문과로 집의이다. 사위 김말은 문과로 판중추부사이며 시호는 문장이다.
빈의 큰아들 경손은 중부령, 둘째아들 의손은 문과와 중시로 참판이며, 셋째아들 신손은 동부녹사, 막내 말손은 집의이다. 사심의 큰아들 대생은 호군, 다음 아들은 충생이다. 사문의 큰아들 맹강은 현감, 막내 맹회는 진사이며, 지원의 아들은 서황, 번의 아들 성손은 우윤이다.
길안의 아들 맥은 생원, 경안의 큰아들 천은 문과로 군수이고, 다음 아는 생원이다. 효지의 큰아들은 승해이고 막내 승명은 사직이다. 혜생의 큰아들은 백문, 둘째는 백행, 막내 백충은 현감이다. 효산의 큰아들은 경수, 막내는 경림이고, 효천의 아들 승식은 사부이다.
효담의 아들 승함은 생원, 경손의 큰아들 맹기는 군수, 막내 지성은 서령이다. 의손의 아들 계동은 증도승지이고 신손의 아들 숙련은 찰방이다. 말손의 큰아들 계반은 문과로 참판이며, 둘째 계장은 무과로 현감[첨지]이다. 충생의 큰아들은 해, 둘째 문명은 수사이다.
맹강의 큰아들 분은 세마인데 취임하지 않았고, 둘째 벽은 생원이다. 맹회의 아들 철동은 생원이고, 서황의 아들은 찬이며, 성손의 아들 현명은 군수이고, 맥의 아들 형근은 교수, 천의 큰아들 이성은 진사, 작은아들은 이일이며, 아의 아들은 창근이다.
승해의 큰아들 응삼은 참봉이며, 둘째는 응벽이다. 승명의 아들 이와 호는 모두 현감이다. 백문의 큰아들 삼원은 진사이고 작은아들은 팔원이며, 백행의 아들은 장보와 효보이다. 백충의 아들 철근은 부사직이며, 승식의 아들 세미는 생원이다.
맹기의 큰아들 장은 감찰이고 둘째 탄은 도사이다. 지성의 큰아들 숭조는 문과로 대사성[동지성균관사]인데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이며, 둘째 흥조는 선무랑, 셋째는 창조이다. 계동의 큰아들 식은 문과로 부사이며 증참판이고, 둘째 원은 봉사, 셋째 주는 진사, 막내 곡은 현감이다.
계반의 아들 진은 현감이고, 계장의 아들 헌은 문과로 참판인데 청백리가 되었다. 해의 아들은 승호이고 문명의 아들 민은 군수이다. 분의 큰아들 자호는 사직, 둘째 자파는 별제, 막내 자경은 참봉이며, 벽의 아들 팽년은 생원이다. 철동의 아들 자연은 지사이고, 찬의 아들 연은 참봉이다.
명현의 아들 양춘은 교리, 형근의 아들 영은 참봉, 이성의 아들은 첨이고, 이일의 큰아들은 원, 둘째는 인, 막내는 별이며, 창근의 아들은 흠인데 이 이하의 자손은 번거로워 생략한다. 참판[정양]공이 비석에 기록하기를 과거합격자와 벼슬을 한 수는 문과 97명, 음사 197명, 무과 70명, 사마 203명이고, 조정에 나타난 명사는 영의정 1명, 대장 1명, 임금의 사위 1명, 봉군 9명, 판서 3명, 참판 16명, 세자사부 2명, 관찰사 9명, 수군통제사 1명, 병마절도사 3명이라 하였다.
이 비석을 새긴지 110여 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많은 관작(官爵)이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덕은 높지만 나타나지 않는 자손들이 많으니 오직 공의 음덕(蔭德)이라 하겠다. 자손들은 그 뿌리를 잘 알고 모선(慕先) 정신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새겨 이르노니,
고산 율곡 마을에 양지바른 곳에 있으니,
바람과 물을 감춘 곳은 공의 묘소를 모신 곳이다.
공의 자손이 무수히 진진하노니 그 수가 천억이나 되고,
영의정과 문무관 등 높은 관리가 줄지어 배출되었도다.
사시사철 자손들이 제수를 마련하여 앞 다투어 모여드니,
말과 수레가 동구 밖까지 메웠더라.
공께서는 일생동안 근신하심을 생활신조로 하여,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으셨도다.
하늘이 거울같이 비쳐주니 그 음덕 자손만대에 베풀었네.
고산과 건지 산이 서로 바라보니 삼한국대부인의 덕이며,
높이 마련된 묘소는 지나는 행인들도 예를 갖추게 하였네.
오직 공이 쌓으신 덕은 그 근원의 흐름이 길어서
앞으로도 머나먼 세월 길이 보존되고,
후손과 세상 사람들은 공경하게 될 것이로다.
이 고장에서 가장 좋은 돌에 이와 같이 새기나니,
잊지 말고 후세에 전함은 후손들의 할 일이로다.
고종5(1868)년 3월 상순
가선대부 규장각 전제관 윤희구가 삼가 짓다.
자헌대부 전 규장각 직학사 남규희가 삼가 쓰다.
성균관 진사 소학규가 전자(篆字)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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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完山伯柳公濕神道碑銘竝書。
全州柳氏爲我東望族子姓蕃衍而始祖完山伯衣舃之藏在高山治西栗谷亥坐之原舊有持平盧公王筆 所撰碣歲久剝落不可讀公之五世孫轂出守本郡伐石而表之亦年久苔蝕十六世孫參判公鼎養改撰竪之然質尙樸小而文亦太簡山下諸孫諗於宗曰以大家始祖之尊而四尺之封旌紀率約則恐不足稱於觀瞻日月寖改其何以垂示悠久哉公之明德樹不少槪見然肇基門戶爲人刱垂之祖享有蒸嘗千百年不匱則神明之兆陰騭之功其必有瓖偉非常者但文獻無徵耳且公所贈官雖爲奉正而又封完山伯配爲三韓國大夫人則爵秩之累進不卑也明矣法當得大碑乃具螭首龜蚨之制俾叙而銘之謹按公諱濕全州氏始於公其先佚其傳字號及生卒年月亦不可攷只據郡志及家乘所載全州之南五里坤山之東有公遺址洞壑之幽勝泉石之淸麗令人有瀟灑出塵之想公當恭愍朝廢擧來字于此以謹愼稱一鄕嗚呼高麗之訖也若三隱之忠杜門諸人之義豈不磊落千秋而公以一布衣見幾自靖色擧於玄陵之初則非賢而能之乎配全州崔氏墓在乾止山東麓丑坐育五男一女皆登甲乙科牧隱李文靖公 賀安氏登科詩序至擧以喩焉故事五子登科爵厥父母時公旣沒追贈奉正大夫司憲府掌令進完山伯崔氏封三韓國大夫人男長曰克剛判事次曰克恕直提學次克修郡事次克齊判官次克渠司馬女適大提學富有沈孝生舊碣所謂後嗣振振愈久愈盛世服種德深者是也克剛有四女適金寬兪仲老朴潔蘇遷克恕二男曰汀僉知曰濱直提學克修二男曰思潯曰思汶參知克齊二男曰智源曰藩別提克渠二男曰吉安縣監曰慶安參判汀男曰孝池縣監曰惠生縣監曰孝山牧使曰孝川文科重試直提學曰孝潭文執義女適文判中樞謚文長金末濱男曰敬孫部令曰義孫文科重試參判曰信孫信孫東部錄事曰末孫逸執義思潯男曰大生護軍曰忠生思汶男曰孟江縣監曰孟淮進士智源男曰絮黃藩男曰成孫文右尹吉安男曰陌生員慶安男曰阡文科郡守曰阿生員孝池男曰承海曰承溟司直惠生男曰伯文曰伯行曰伯忠縣監孝山男曰瓊樹曰瓊林孝川男曰承湜師傳孝潭男曰承函生員敬孫男曰孟沂郡守曰之盛暑令義孫男曰季潼贈承旨信孫男曰叔漣察訪末孫男曰季潘文參判曰季漳武縣監忠生男曰垓曰文溟水使孟江男曰坋洗馬不就曰堛生員孟淮男曰哲同生員絮黃男曰粲成孫男曰顯明文科郡守陌男曰亨根敎授阡男曰以星進士曰以日阿男曰昌根承海男曰應參參奉曰應璧承溟男曰頤縣監曰顥縣監伯文男曰三元進士曰八元伯行男曰長保曰孝保伯忠男曰哲根副司直承湜男曰世湄生員孟沂男曰場監察曰坦都事之盛男曰崇祖文科大司成贈左贊成諡文穆公曰碩祖曰興祖宣務郞曰昌祖季潼男曰軾文府使贈參判曰轅奉事曰輳進士曰轂縣監季潘男曰軫縣監季漳男曰軒文參判淸白吏垓男曰承琥文溟男曰旻郡守坋男曰自壕司直曰自坡別提曰自坰參奉堛男曰彭年生員哲同男曰自沿知事粲男曰淵參奉顯明男曰陽春文敎理亨根男曰英參奉以星男曰詹以日男曰黿曰麟曰鼈昌根男曰欽繼玆以降不能盡錄參判公所撰碣有曰只擧其科宦之數文科九十七蔭仕一百九十七武科七十司馬二百三若其顯于朝名于世則相國一大將一駙馬一封君九判書三參判十六師傳二方伯九統相一兵相三今距撰之日且百十餘年則計不當止此矣不其盛歟又况詩禮禪襲碩德韙望非直以科宦顯名者乎維其有之是以似之公之謂也禮不忘本樂樂其所自生公之諸孫之謂也銘曰。
栗谷之里有原面陽風水固密維公攸藏維公有後其麗千億將相牧伯濟濟抑抑歲時伏臘籩豆駿奔高牙大纛照輝里門觀者歎息維公之韙維公一生謹身持己鞱光鏟采遑有其他天鑑孔昭報施不差乾山相望實有媲德巍嵬堂斧有過必式維公之韙濬深流長藐玆來許俾也可忘乃新樂石繫以銘詞 永垂無止孝孫之思。 <끝>
檀君紀元七十二戊辰三月上浣 嘉善大夫 奎章閣典製官 尹喜舊 撰。
資憲大夫 原任奎章閣直學士 南奎熙 書。
成均館進士 蘇學奎 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