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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 04. 02(화)
문정공 서계 박세당 묘갈명
(文貞公 西溪 朴世堂 墓碣銘)
학문은 심오한 말을 밝힐 만하고, 지조는 퇴폐한 풍속을 격려할 만하며, 문장은 옛사람을 능가할 만한 경우,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뛰어났다 하는데 하물며 이를 모두 겸하고 있는 사람임에랴! 근세 이래로 구이지학(口耳之學)만 성해서 문기(文氣)는 날로 천박하고 유약한 데로 빠졌다.
또한 선비들은 벼슬자리만을 급급하게 생각해서 속된 무리를 초월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선생은 이러한 때에 홀로 관작의 영광을 사양하고 산림에 은거하였는데, 남긴 저술은 모두 옛 성인이 남기신 뜻을 연구한 것이고, 지은 문장은 또한 자신의 뜻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이었으니, 아아! 호걸의 자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성(姓)은 박씨(朴氏)고, 휘(諱)는 세당(世堂)이며, 자(字)는 계긍(季肯)이니, 반남(潘南) 사람이다.
10세조 상충(尙衷)은 고려 말에 벼슬해서 정도(正道)를 돕고 간사한 도(道)를 꺾어서 포은(圃隱) 등 여러 유학들과 함께 유명하였다.
그의 아들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 명재상의 호칭이 있었으니,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5대 뒤에 야천공(冶川公) 소(紹)는 바른 학문과 곧은길로써 역사상에 빛이 있었으니,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2대 뒤에 사재감정(司宰監正) 응천(應川)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니, 선생의 증조부시다.
조부 동선(東善)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선고(先考) 정(炡)은 이조참판(吏曹參判) 금주군(錦洲君)으로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양주(楊州) 윤씨(尹氏)는 관찰사인 안국(安國)의 따님이다.
선생은 인조 7년 기사년(1627) 8월 19일 남원부(南原府)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또한 전쟁을 겪었다.
10세가 넘어 비로소 중형인 승지공(承旨公)에게 수학을 하였는데, 견해가 투철하였다. 기축년(1649)에 모친상을 당하여 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는데, 3년 동안을 채소와 장국도 먹지 않았다.
현종 경자년(166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어서 증광시(增廣試)에 장원하여 관례에 따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전임(轉任)되어서 대사성(大司成) 이은상(李殷相)이 경박하여 사유(師儒)의 우두머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척(論斥)하였고, 또한 김좌명(金佐明)을 중비(中批)로서 발탁함이 부당함을 논척하였다.
판서(判書) 서필원(徐必遠)은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생각지도 못하였는데,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 이러한 의론이 있으니, 후일의 역사가는 장차 국가에 인물이 있었다고 하리라.”라고 하였다. 계묘년(1663)에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어 또 도승지 임의백(任義伯)을 논척하니, 당로(當路)에 있던 자들이 더욱 기뻐하지 않았다.
갑진년(1664)에는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연속하여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겨울에는 왕명으로 해서 지방을 염문(廉問)하러 갔다가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와 지제교(知製敎)로 선임되었다.
왕이 이조에서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노하여 특히 판서(判書) 김수항(金壽恒)을 파면하자, 간관(諫官)과 유생들이 연이어 논집(論執)하였으나 이어서 거절되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언관이란 자는 오직 상소를 올리다가 남에게 견책(譴責)을 받는 것이 본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왕이 실수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렇게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이에 차자(箚子)를 기초해서 논하니, 왕의 노여움이 풀렸다. 이때 교리(校理) 김만균(金萬均)이 북사(北使)를 피하라고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논란이 크게 일어났다.
선생은 홍문관에 있으면서 이를 도운 바가 있었기 때문에 비방하는 말이 시끄럽게 생겼다. 병오년(1666)에 왕이 온천(溫泉)으로 거둥할 때 도중에서 빨리 내달리느라 호위하던 군졸들이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자도 있었다.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할 바를 진술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가을에는 북도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가 되었다.
그 이듬해는 수찬(修撰)으로 소환되었다. 왕이 가뭄을 걱정해서 충언을 구하니, 선생이 그 뜻을 받들어 소문(疏文)을 지었는데, 거의 5000여 언(言)이나 되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의 법을 개혁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며, 비변사(備邊司)를 폐해서 어영청(御營廳)과 합할 것을 청하였는데, 네 가지의 장단점을 갖추어 진술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물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필요에 맞게 조절하여 사용하는 것에 달려 있고, 필요에 맞게 조절하여 사용하는 것은 낭비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으니, 낭비하는 것을 없애려면 궁중에서 솔선수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명백하고 절실해서 식자들은 호평하였고, 그것이 실행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세자에게 《소학》을 강의할 때, 왕이 언해(諺解)의 구두가 난삽해서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홍문관에 명해서 개정하라고 하였다. 여러 관료들은 꺼려하며 담당하지 않으려 하였는데, 선생은 언해가 잘못된 것은 주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서 드디어 주석에 대한 설을 붙여서 변정(辨訂)하여 올렸다.
왕이 유신(儒臣)을 시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교정을 보게 하였는데, 우암이 공이 논한 바가 적확함을 알고 찬탄하였으니, 세상에 전하는 신본언해(新本諺解)는 바로 선생이 편집한 것이다. 무신년(1668)에는 석천(石泉)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 노년을 보낼 계획을 하였기 때문에 삼사(三司)와 춘방(春坊)의 관직을 제수하였는데도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가을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는데, 오랫동안 부임하지 않는 것은 왕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해서 특별히 호출하여 연경(燕京)에 가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중국 산천의 거리와 지명 중에서 우리나라에 잘못 알려진 것이 많았는데, 선생이 옛 기록에 근거하고 거주하는 백성의 말을 참고해서 정정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정월 보름밤에는 정사(正使)ㆍ부사(副使)와 같이 길거리에 나가 연등 행사를 구경하였다가 귀국하였다.
대관(臺官) 중에 정사(正使)에게 오래된 원한을 가졌던 자가 있었는데, 이를 빌미로 삼아 공을 해임시켰다.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서용(敍用)되어 교리(校理)ㆍ헌납(獻納)ㆍ전랑(銓郞)으로 임명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나갔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온 마음을 다해 구휼하였다.
조정에서 각 읍의 장부를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오직 토착민만 먹이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은 장부에 올리지도 않았다.
선생은 말하기를, “백성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인데 어찌 차별하겠는가?”라고 하여 공의 관할 내에서는 굶어 죽는 자가 없게 하였다.
관사가 협소해서 그의 봉급을 털어 확장하였는데, 털끝만큼의 민폐도 끼치지 않아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신해년(1671)에 헌납으로 들어갔다가 석천(石泉)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사간(司諫)ㆍ응교(應敎)ㆍ사복시정(司僕寺正)ㆍ보덕(輔德)ㆍ집의(執義)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계축년(1673) 가을에는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영릉(寧陵)을 이장하였는데, 도청(都廳)으로서 감독관을 맡으라는 명을 받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업무를 살폈다. 그래서 폐단은 없어지고 임무는 잘 처리되었으나, 이 때문에 병에 걸렸다.
그 후 7년간 여러 번 삼사(三司)에 임명되고, 간혹 종부시정(宗簿寺正)ㆍ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경신년(1680)에 응교(應敎)가 되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왕이 특별히 하유(下諭)하기를, “그대의 욕심이 없고 청렴한 절개는 근래에 드문 일이다.
나는 가상히 여겨 매양 조정에 불렀으나, 간절하게 사양하면서 명에 응하지 않았으니, 그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이 몹시 한스럽다.
이에 새로운 벼슬을 주고 진정에서 우러나온 고시(誥示)를 내려서 마음속의 바람을 깊이 보이노니, 그대는 결코 사양하지 말고 빨리 상경하라.”라고 하였다.
선생은 사퇴하는 상소를 올려 “병으로 사퇴하였는데도 욕심 없이 물러났다는 칭찬을 받았고, 가난하였기 때문인데도 청렴하다는 장려를 받았습니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승진해서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명되었는데, 마침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입궐하여 사은(謝恩)할 때, 교체하라는 명을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선생은 사퇴의 명을 내려준 왕께 감사의 말을 올리고는 사직하여 귀향하였다. 이 이후로는 선생께서 드디어 성(城) 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신유년(1681) 후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ㆍ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ㆍ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ㆍ이조참의(吏曹參議) 등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2~3차례 더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여 교체되었다.
기사년(1689)에 중궁(中宮) 민씨(閔氏)가 폐비되었는데, 선생의 차남 응교공(應敎公)이 상소로 항쟁하다가 참혹한 고문을 받고 먼 섬으로 유배하라는 명을 받았다. 선생이 옥에 가서 보고, 또 노량진(露梁津)까지 따라갔다.
선생은 아들의 태창(笞瘡)이 심한 것을 보고서 영결(永訣)하여 말하기를, “그저께는 혹시라도 네가 회생하기를 바랐더니, 이제는 끝났구나. 삶과 죽음이 결정되었으니 조용히 처신하라.”라고 하니, 응교공(應敎公)이 대답하기를, “제가 죽은 뒤에는 소거(素車)에 실어서 동강(東岡)으로 반장(反葬)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후로는 조정에서 부임하라는 명령이 오래도록 이르지 않았다.
갑술년(1694) 여름에 연신(筵臣)의 건의로 인해 음식을 하사받았고, 조금 뒤에 특지(特旨)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발탁이 되었다.
을해년(1695)에는 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발탁 되었으니, 재상 윤지원(尹趾完)의 추천 때문이었다.
여러 번 참찬(參贊)ㆍ대사헌(大司憲)ㆍ한성판윤 겸지경연사(漢城判尹兼知經筵事)ㆍ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임명되었다.
무인년(1698)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묘년(1699)에는 연신(筵臣)의 건의로 인해서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자급(資級)이 더해졌는데,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사퇴하였다.
또한 예조판서(禮曹判書)ㆍ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임명되었는데, 부친 충숙공(忠肅公) 역시 관례에 의거하여 당연히 증직되어야 하였다. 그래서 자제들이 청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 선인은 이미 공이 있었고, 증관(贈官)도 되셨다.
어찌 나의 노직(老職)으로 헛된 자급을 더하여 선군이 조정에 세우신 실제의 영광된 공적을 가릴 수 있겠느냐?”라고 하고서 허락하지 않았다. 경진년(1700)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나, 6번이나 상소를 올려 교체되었다.
임오년(1702)에 백헌(白軒) 이상국(李相國,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었는데, 조금도 비호함이 없이 대놓고 송우암(宋尤庵, 송시열)을 논척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같이 노하여 상소를 올려 논척하려고 하였으나, 왕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저술한 《사변록(思辨錄)》을 들어서, 이 저술이 일찍이 주자를 능멸하였기 때문에 주자를 존봉하는 사람도 배척하였다고 하면서 글을 지은 사람을 죄주고, 그 책은 태워버리라고 왕께 청하였다. 왕이 과연 그 말을 들어서 관문(官門)에서 삭제하고, 대각(臺閣)에서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는 청에 따라 호남의 옥과현(玉果縣)으로 멀리 유배보냈다.
선생은 병든 몸으로 유배 길에 올랐는데, 이인엽(李寅燁) 공이 상소하되 “아무개의 높은 풍모와 절개는 퇴폐한 풍속을 진작할 만합니다.
하물며 아들 태보(泰輔)가 수립한 것이 그처럼 탁월함이랴! 옛 경전에는 말하기를, ‘자문(子文)의 후손은 오히려 열 세대를 용서해준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태보의 절개로써 그의 아버지도 보전하지 못한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왕은 이에 명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미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임종하던 날에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곧 죽을 것인데, 어찌 자리를 펴고 기다리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큰방으로 옮긴 뒤 돌아가셨다. 그때는 숙종 29년 계미년(1703) 8월 21일이니, 향년 75세였다. 그해 10월에 본가 뒤 100여 보쯤 되는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하고, 두 부인도 부장(祔葬)하였다.
선생은 돈후하고 정확하여 조금도 허위가 없으셨다. 학문은 한결같이 충신(忠信)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충신(忠信)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얻으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지만, 진실로 충신하지 못하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성현의 글을 읽을 때에는 구(句)를 통해 장(章)을 유추하고, 장을 통해 전체를 유추하였다. 이미 그 의미를 터득하고 나서는 또한 반복함으로써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서적의 내용이 잘못되었거나 자구(字句)가 탈오(脫誤)된 것이 있으면, 흑백을 분별하듯 명쾌하게 가려내었다.
선생이 저술한 《사변록(思辨錄)》은 비록 전인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평이하고 박실(樸實)해서 기이한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주자는 용의(用意)한 것이 지나치게 깊었지만, 애초에 견해를 터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의 배우는 자들은 의구심이 생기는 것을 통해 주자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여기니, 이것은 주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저술한 것이 진실로 가끔씩 선유(先儒)들과 다른 것이 있으나, 그래도 이것은 정자와 주자의 후세에 태어난 행운 때문이다.
만약 나의 앞에 정자와 주자가 없었다면 누가 나 같은 사람이 어떠하였는지를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일흔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였는데, 자로(子路)는 공자를 우활(迂闊)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부합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이에 대해 변론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의리가 어떠한지를 따지지도 않고 말의 일부분을 가져다가 놀랍고 기이하다고 여기는 후세 사람들과는 다른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장자(莊子)가 도를 밝힌 것은 가장 정밀하여 여타의 제가백가가 미칠 바가 아니다. 그가 조목조목 풀어내고 해석한 것은 구절마다 오묘하여 오직 한 방울의 물이라도 샐까 걱정하였으니, 천하에 이치를 밝힌 책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런데 맹자의 경우는 한 마디 말로써 의리를 다 펼쳐내고도 남음이 있으니, 장자가 수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본성을 찾기 위해 논의를 펼친 것은 지리(支離)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도와 이단이 구별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논어》와 《맹자》에 들어 있는 말은 모두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이어서 읽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자기에게 적용할 줄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학문을 한다면, 이것은 남의 것이지 나의 것이 되지 못하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또 문인에게 말하기를, “문장을 잘 지으려는 자는 독서할 때에 반드시 먼저 그 의리를 탐구해야 하니, 의리를 얻게 되면 그 문장은 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진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서할 때에 암기하는 것에만 힘을 기울인다면 비록 문장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는 독서를 많이 하지 못하였지만, 오직 깊이 연구해서 옛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조금만 책을 읽어도 다독한 것에 필적할 수 있다. 이것은 남은 정밀하지 않고 나는 정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음에 모두 그의 직분이 있게 만드셨다. 예컨대 생업을 게을리 하는 백성들이 스스로 먹을 수 없듯이 직무를 다하지 않고 스스로 높다고 자처하는 사대부들은 하늘이 버린 인간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흉한 덕이 두 가지가 있으니, 오만함과 나태함이다. 오만함은 남을 거스르고, 나태함은 자신을 해친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가져다 논의를 세웠는데, 이 책들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 정밀하여 주석으로 달았다.
《노자》를 해석한 것은 《설고공집해(薛考功集解)》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선생은 이 책을 보지 않았는데도 우연히 이와 같이 부합되었던 것이다. 《장자》의 해석은 선생보다 뛰어난 옛사람도 없었고, 후세의 사람도 선생을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하늘이 해석을 해주었다고 할 만하다.
문장은 간결하고 고아하였으며, 더욱이 논변에 능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감별하는 것이 귀신같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남의 글을 보고도 그것이 당대(唐代)ㆍ송대(宋代)ㆍ명대(明代)ㆍ근세 등을 구별할 수 없다면, 눈이 없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살고 있던 석천(石泉) 마을은 토지가 척박하였다. 매년 봄과 여름에는 호미 메고 쟁기 진 자와 수고로움을 함께 하였고, 이것이 부족하면 나무를 해서 팔았으며, 또 부족하면 배ㆍ밤ㆍ살구ㆍ복숭아 등을 심어서 생계에 보탰다. 일찍이 서계초수(西溪樵叟)라고 자호하였으니, 묘문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남부인(南夫人)은 2남을 두었다. 맏아들 태유(泰維)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이 되었다. 집에서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서는 강직하였는데, 마침내 조정에서 배척을 받고 영남의 바닷가로 유배 가서 죽었다. 초취(初娶)는 참봉 김하진(金夏振)의 딸이다.
1녀를 두었는데, 승지인 이덕부(李德孚)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사인(士人) 정(鄭{直+力})의 딸이다. 2남을 두었는데, 필기(弼基)와 필모(弼模)다. 차남 태보(泰輔)는 문과에 장원해서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가 되었는데, 문학과 재식(才識)이 뛰어났고, 포부도 컸다.
기사년(1689)에 강경한 상소문을 올렸다가 고문으로 죽었다. 우의정(右議政) 원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는데, 진사인 이덕해(李德海)에게 시집갔다. 선생이 명하여 필모를 양자로 들였다.
정(鄭) 부인이 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태한(泰翰)은 현감인데, 초취는 이희중(李喜重)의 딸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필손(弼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후취는 황식(黃植)의 딸이다. 장녀는 현감 이렴(李濂)에게 시집가서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현필(顯弼)은 첨정(僉正)인데 딸은 어리다. 차녀는 교리(校理) 김홍석(金弘錫)에게 시집가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측실에서 소생한 딸은 여필건(呂必建)의 아내가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삼년상 기간 동안 음식을 궤연 앞에 올리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는 세속에서 행하는 것을 절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 때만 제사를 올려 고례(古禮)를 회복하라고 하셨다. 선생이 말하기를, “장사를 지내고 나서 졸곡(卒哭)을 하면 정기적으로 올리던 제사를 철거하는 것인데, 하실(下室)에 음식을 올리는 행위를 어찌 3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진행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상례(喪禮)의 경우, 장사 지내기 전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예를 따르지만, 장사를 지낸 후에는 죽은 사람의 예를 따른다.
이것이 성인이 법을 만들어 삶과 죽음의 큰 변화를 분변하게 한 이유이니, 이제 와서 그것을 문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돌아가신 뒤에는 여러 자손들이 선생의 뜻을 따라 상식(上食)을 올리지 않았다. 이때에 정호(鄭澔) 등이 예의에 위배된다고 여겨 명을 전한 자와 명을 받든 자를 문죄하려고 구구한 쟁변을 그만 두지 않았으니, 사람에게 가혹하게 한 것이 또한 심하도다.
나 덕수(德壽)는 약관의 나이에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선생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지도해 주셨다. 이제 어언 40여 년이 지나 백발이 성성한데도 성취한 바가 없으니, 선생이 이끌어주신 성의를 저버리게 되었다. 이제 필기(弼基)가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였다.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며 개연히 탄식하다가 관벌(官閥)과 세계(世系)를 기록한다.
아울러 평소에 하신 말씀과 세세한 행실만을 덧붙이고, 나머지는 생략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맹자가 말씀하길, “부귀(富貴)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貧賤)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 이를 대장부(大丈夫)라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년 뒤에 찾아보더라도 이 말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선생이시다.
대개 선생은 《맹자》를 매우 즐겨 읽으셔서 저절로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을 몰랐다고 하셨으니, 그것은 반드시 기미(氣味)가 서로 부합하여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성현의 뜻을 연구한 것은 진실하고도 쉽게 밝혔고, 문장을 지은 것은 문사와 이치가 순결(醇潔)하였으니, 상하 수천 년 동안 선생에 비견할만한 자를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잘 깨달은 것’이니, 누가 그 견줄 바를 잃었다고 하리오?
아아! 사람 됨됨이가 정호(程顥)와 같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경전을 해석한 것이 다르다고 하여 어찌 그 학설을 비난하는가?
저 시끄럽게 재잘대는 사람들은 혀를 놀리지 말지어다. 수락산 기슭에서 자줏빛 기운이 하늘을 밝히는 이곳에 어찌 공경을 표하지 않는가? 여기는 선생이 잠드신 곳이다.
전의(全義) 이덕수(李德壽)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