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 3. 6.(일)
▲피염정(避炎亭)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갈산 1리
[건 축 주] 이희음(李希音, 1579년~1641년)
[건립개요]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 있으며 1632년(인조10)에 진사(進士) 이희음(李希音)의 건립으로 1729년(영조 5)에 소실(燒失)된 것을 1865년(고종 2)에 중건하였다. 단곡(丹谷) 곽진(郭진)의 기와 순흥(順興) 안연석(安鍊石)의 중건기 및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시와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의 시가 있다.
●건축이야기
세상살이 열기 까지도 식히길 바램이었던 피염정
영주서 예천으로 통하는 큰 길을 따라 장수면 소재지인 반구(盤邱 : 일명 반두둘)를 거쳐 두어 굽이 산모퉁이를 지나면 장수교(長壽橋)가 나온다. 이 다리에서 큰 길을 벗어나 둑길로 길을 바꾸어 서북쪽으로 약 2km 쯤 들어가면 나지막한 야산자락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동네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경주이씨가 400여 년을 대대로 거주해오는 갈산리(葛山里), 즉 갈미마을이다.
갈산리는 용암산(龍巖山)에서 비롯된 줄기가 동남향으로 뻗어 내리다가 매봉산[鷹峰山]을 일으키고는 남으로 틀어 마을의 진산(鎭山)을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는 멀찍이 연화산(蓮花山) 줄기와 남쪽에서 뻗어 내려온 주마산(走馬山)이 마을 앞에서 공손히 엎드리고는 다시 서쪽으로 내달린다. 이런 주변의 빼어난 산들이 성곽처럼 에워 두른 가운데 남향으로 자리한 이 마을은 성오당 이개립이 터전을 연 곳이다.
피염정은 그곳 갈산 1리 표지판을 따라 북쪽으로 난 샛길을 조금 올라가면 장구복 길에서 바로 눈에 뜨인다. 피염정 앞은 무논 몇 마지기가 발아래 닿아 있는데, 바로 건너편의 나직한 구릉 솔밭에서 가끔 바람을 보내와 더위를 피해 쉴 만해 보인다.
정자를 옆에 끼고 길을 돌아 들어가면 빈 집들이 몇 채 보이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이 논밭으로 나간 것일까. 사람의 흔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물난리에 갈미마을이 잠기면서 다른 곳으로 이주를 했다고 하는데, 북쪽의 성곡리로 옮긴 사람들이 많다.
피염정에 얽힌 얘깃거리와 유래를 남겨 놓은 문집을 보면, 이 정자를 주제로 문인들 간에 주고받은 화창시가 제법 많아 정자를 주제로 하여 많은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피염정이 지어지던 당시에는 주변의 경관도 더 좋았고, 정자를 지은 뜻이 아마 주위 선비들의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리라.
지금은 정자의 주인도 가고 손도 끊겨 외손봉사를 한다고 하니 새삼스럽게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한길 옆에서 드러난 정자의 모습에서 마음으로나마 여름의 무더위 뿐 아니라 세상살이의 지나친 열기를 식혀볼 수 있을 듯하다.
●건축배경
피염정(避炎亭)은 무더운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쉴만한 정자라는 뜻으로 조선조 진사 이희음(李希音)이 지은 풍류공간이다.
원래 있던 장소가 물난리로 잠기면서 자리를 옮겨 지금은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長壽面) 갈산(葛山) 1리 장구목 길옆에 있다.
‘염(炎)’자가 2개의 ‘불[火]’로 이루어진 것만 봐도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겠는데, 정자의 원래 주인이 부여한 ‘피염(避炎)’이라는 의미는 비단 사계절의 순환에 따라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무더위를 식힐 뿐 아니라,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속세의 불구덩이를 피한다는 바람도 포함하고 있다.
●누정 이야기
빼어난 주변경관, 훌륭한 인품이 어우러진 피염정
피염정(避炎亭)에 얽힌 이야기는 단곡(丹谷) 곽진(郭 山+晉)의 기문(記文)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 벗 이희음(李希音)은 매우 기이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명성이 자자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는 숲이 우거진 산골에 숨어 책을 읽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가 책 읽으며 보내는 산골의 집은 문밖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집 앞에는 작은 언덕이 있으며, 그 언덕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에 정자가 있다. 그 솔숲이 마치 장막처럼 뜨거운 햇살을 가리고서 서늘하게 부채질을 해주니, 제 아무리 찌는 듯한 무더위라 할지라도 더운 줄 몰라 여름날인 것을 잊고 지낼 만 한 곳이다.
일찍이 내가 백운동(白雲洞 : 순흥 소수서원 부근)에서 나와 들렀더니, 나더러 부탁하기를, “내가 정자를 지어 놓고 ‘피염(避炎)’이라 이름 지었는데, 자네가 한 말씀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기에,
“자네는 어떤 연유로 ‘피염’이라고 이름을 지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건 말일세, 온 세상이 불구덩이 같은 명예와 이익을 다투느라 허덕이는데, 나는 초연히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해서 이 정자에 올라 거닐곤 하니 정신이 맑고 심기가 상쾌하더군. 그 느낌이 부는 곳 일정치 않은 바람처럼 어지러운 먼지세상을 벗어나 신선의 경지에 오른 듯한 가쁜 하고 시원하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 싶네만…….”라고 하기에,
“진사 이희음(進士 李希音)은 은자의 도를 지켜 영달을 도외시하니, 일체 속세에 대한 욕심을 깨끗이 씻어 버려 세상의 이익을 멀리하고는, 자연 속에 소요하면서 맑고 고결한 뜻을 온전히 지키며 생애를 마치려 하노니, 그 뜻이 곧 피염인 것이다. 그러니 속세의 불구덩이를 피하는 그 뜻 외에 무엇을 또 부러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피 염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묶어놓은 책 『피염정일고(避炎亭逸稿)』에 보면 정자가 황폐해지자 이희음(李希音)의 후손이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 풍산김씨 김세락(金世洛)이 발문을 쓰면서 이희음(李希音)의 고결한 뜻을 높이 칭송해 놓았다.
이희음(李希音) 선생이 이 곳 산림에 정자를 세우고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스스로를 ‘피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겉으로는 더위를 피하고자 나무 한 그루 심은 것이지만, 한여름의 폭염을 어찌 한 그루 나무 밑에서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선생이 만난 세상이 어지러운 군주와 간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난세인지라 잠시 불구덩이 같은 세상에 몸담았다가는 이내 물러나 자연 속에 소요자적하면서 세상에서 잊혀 질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의 덕망 있는 선비 청풍(淸風) 정윤목(鄭允穆)과 단곡 곽진 등과도 교류하고 지내, 이들과의 교류시가 전해 온다.
이 밖에도 피염정 주변 경관도 빼어났던 듯, 그 빼어난 경치를 찬탄하고 그 정자의 주인의 인품을 빗대어 칭송한 시들이 많다.
그 가운데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의 팔경시(八景詩)도 전해오는데 그 마지막 수를 감상해본다.
맹추위나 무더위나 아랑곳하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의연하게 홀로 푸르르네.
바람서리와 힘써 싸우며 산골짜기에 누워 있으니,
누가 알랴 곧은 줄기 동량감인 것을.
◇우물가의 푸른 솔
이희음(李希音, 1579년~1641년)이 정자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심었다고 하는데, 이 시는 우물가에 늠름하게 서 있는 푸른 솔의 독야청청하고 곧은 성품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독야청청 푸른 솔이야말로 우리네 선비들이 절개의 상징으로 삼았던 자연의 벗이 아니던가? 산골짜기에서 누워 한가로운 듯 지내는 고고한 절개의 은사가 기실은 동량재이며 이는 곧 이 전자의 주인 이희음을 두고 말한 것일 게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정자를 둘러싼 솔숲의 바람으로 식히고,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쫓는 불구덩이를 마음 공부로 피하고자 했던 올곧은 선비의 높은 뜻은 여전히 피염정에 남아 있다.
●관련인물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쓴 이개립·이희음 부자
피염정의 주인 이희음에 대해서는 경주이씨로 장수면 갈산리, 일명 갈미마을에 터를 잡은 선조 때 선비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개립은 호가 역봉(櫟峰)으로 학문과 덕행과 효행으로 이름을 날린 선비이다. 조선 명종 때 진사과에 합격해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고, 찰방(察訪)· 현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이 마을로 들어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장수면 갈산 리의 옛날 행 의사(行 依寺) 자리에 세운 의산서당(義山書堂)은 원래 이개립이 창건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개립이 의병장으로 참전하게 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아들 이희음(李希音)과 진상홍(秦尙弘)·김응조(金應祖)·조관(趙貫) 등이 뜻을 모아 세웠으며, 그 후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희음(1579~1641)은 성오당 이개립의 2남으로, 자를 여순(汝純)이라 했고, 피염정을 짓고는 이 정자 이름을 자호로 삼았다. 1603년(선조 36)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그의 형 학유(學諭) 이휘음(李徽音)이 과거에 급제한 후 일찍 죽어 버리자 출세에 뜻이 없어져 과거를 단념하고는 글을 읽으며 어버이 봉양에만 정성을 다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국정이 혼란스러워지자 영달에 급급한 무리들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권세에 가까이하려고 앞을 다투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희음은 집 앞에 피염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독서에 열중하였으니, 권세의 불꽃을 외면한다는 뜻을 부여한 것으로 그의 의지를 뚜렷이 드러낸 행동이었다.
1624년(인조 2)에 이르러 김천 찰방·의금부 도사 등의 자리에 추천을 받았으나 임명받지는 못했다. 이희음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시묘살이까지 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모부 되는 고한운이 자식이 없어 선산(善山)에 살다가 한 때 갈산리에 와 있었는데, 이희음이 이들을 극진히 받들었다.
나중에 이들이 돌아가시자 유언대로 그 선영에 장사를 지내준 다음 그 유산은 고씨의 친족에게 돌려주었으며, 자기 몫의 유산은 그 절반을 형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혼자서 3년상을 다 지켰다. 이런 행실만 보아도 이희음이 얼마나 지켜야 할 도리에 실천적이고 재물에 담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희음의 덕행과 학식이 널리 알려지자 멀리 가까이서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라의 수치인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이희음은 더욱 분개하여 세상에 나갈 뜻을 버리고 문을 닫고는 학문과 후진양성에 마음을 쏟고 자연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
[문헌자료]
피염정일고(避炎亭逸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