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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의 상원사, 월정사와
2019년10월12일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느림산행동호회에서
가로등 대장님 안내로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와 횡성호수를 다녀왔습니다.
새벽 04:30에 기상하여 서둘러 나그네 길 떠나는 차림처럼 여장(旅裝)을
준비하고 한국철도공사 직원들의 파업으로 1호선 전철 운행이 불규칙하게
운행되면 종로3가역에서 07:00시 정각에 출발하는 관광버스에 승차가
어려울 수도 있어서 평소보다 30분 앞당겨 양주역에서 첫차를 탔는데
다행히 전철이 정시에 운행되어 종로3가역에서 버스에 승차하였고 상원사
입구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입장권을 사느라 예정 시간보다 늦은 열시
반경에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관람을 마치고 버스로 월정사로 이동
전나무숲길 걷기를 마칠 때까지 비가 내려서 몹시 불편했지만 횡성
호수 수변길을 걷던 오후에는 날씨가 좋아저서
기분좋은 여행이었답니다
상원사(上院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보천과 효명이 창건한 사찰.
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
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
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
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
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
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
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
(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
하였으며,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
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
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
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
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
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
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
(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
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
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
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
(禪院)으로 삼았다. 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
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
(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세조도 상원사
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
(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상원사를 세조
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
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
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
었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
(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
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
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
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 3
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
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
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
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
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보물
제79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
(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
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
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
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
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
되어 있는데,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
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동문선(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전통사찰총서』 1-강원도 Ⅰ-(사찰문화연구원, 1992)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월정사(月精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동산리 63)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창건 유래에는,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오대산
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
(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지(閔漬)가 쓴 《봉안사리 개건사암 제일조사 전기(奉安舍利
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 인용한 《대산본기(臺山本記)》에는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자장은 훗날 다시 8척(尺)의 방
(房)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도 전하고 있어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자장은 이곳에서 초가집을 짓고 문수보살을 친견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신의(信義) 선사가 암자를 건립하여 머물며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한동안은 머무는 승려가 없어 황폐해 졌다가 유연(有緣)이 머물면서 암자
를 건립하여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30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가 이일(而一)이 중창하였고 1833년에 또다시 불이나 전소되었다. 1844
년 영담(瀛潭), 정암(淨庵)이 사찰을 중건하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때 사찰의 대부분이 전소되었으나 1964년 이후 탄허
(呑虛), 만화(萬和), 현해(玄海) 등이 중건하였다.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이 절은 《조선왕조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史庫)가 있었고, 1464년
(세조 10)에 말사인 상원사(上院寺)를 중수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돕고자
시주물(施主物)과 함께 보내 온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
重祠勸善文)》이 보관되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8각 9층석탑과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있다. 이 밖에 일명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이라고도
하는 보물 제139호인 석조 보살좌상(菩薩坐像)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겨울 오대산을 찾은 건 부안 내소사, 남양주 광릉수목원과 더불어 한국 3대
전나무 숲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곳이 월정사 입구에 있다고 해서다. 월정사
라면 불교의 성지가 아닌가. 심신의 세속을 씻어내는 특별한 숲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오대산 입구에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어귀부터
빼곡히 얼굴을 내민 전나무 가로수가 반긴다.
멋들어지게 솟아 있는 소나무를 보는 것이 강원도 여행의 백미라면, 월정사
전나무 숲은 오대산 여행의 별미라고 할 수 있겠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1km 남짓한 길 양쪽에 있었다. 평균 수령 80년이
넘는 전나무가 자그마치 1700여 그루란다. 사찰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
중 첫 번째 문인 일주문 안쪽으로 숲이 조성돼 있기 때문에 전나무 숲은
월정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월정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
나고 온 자장율사가 643년 지금의 오대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을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소나무가 울창하던 이곳이 전나무 숲이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부처에게 공양을
하고 있는데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그릇으로 떨어졌다.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산신령이 공양을 망친 소나무를 꾸짖고 대신 전나무 9그루에게
절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이곳은 전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실제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월정사를 지킨 셈이 되었다. 그래서
월정사 전나무 숲을 '천년의 숲'이라고 부른다니 그 이름이 한결
새롭고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전나무는 나무에서 젖(우유)이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걸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탄소와 수소가 결합된 바늘잎에서는 상큼한 향이 뿜어
져 나온다. 식물성 살균물질인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숲길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최고령 370년에 달하는 아름드리 전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 배경 속에 와 있는 것 같다. 숲길 중간에 2006년
10월 태풍에 쓰러졌다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40m가 넘는 몸체가
꺾이고 남은 나무 밑동은 성인 2명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다. 수령
500년이 넘는 최고령 나무였다고 하니 쓰러진 뒤에도 풍기는 위용이 남다
르다. 숲길 옆을 흐르는 오대천 상류 계곡은 눈이 쌓인 채로 얼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따뜻한 날에는 수달, 삵, 족제비 등 야생동물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1시에 열리는 전나무 숲 자연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마음의 세속을 씻어내는 길
길을 걷는 연인과 가족 사이로 행자복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띈다. 혼자 천천히
걸으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비워내는 듯한 표정.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의
입학생이다. 일반 사찰의 템플스테이와는 달리 삭발을 하고 행자복을 입은
채 고행을 이어가는 프로그램이 월정사 단기출가학교다. 그 시작이 전나무
숲을 삼보일배하며 비워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전나무 숲길에는 2004
년부터 시작된 단기출가학교 입학생들을 기리는 삭발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마을 신을 모시는 성황각이 보인다. 예전
에는 이 숲길 안쪽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절의 시작을 뜻하는
일주문 안에 성황각을 그대로 남겨놓았다는 것은 불교가 토속신앙을 포용한
흔적이다. 그래서일까. 굳이 불자가 아니어도 전나무 숲길을 걸으면 세속적인
마음을 씻어내는 기분이 든다. 전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강교가 나오
고, 그 위에 바로 월정사가 위치해 있다. 한국전쟁 때 영산전, 진영각 등 17
동의 건물과 월정사 소장 문화재가 불에 타 재로 변한 뒤 1964년 탄허 스님
이 월정사를 중건했다. 현재는 국보 제 48호인 팔각구층석탑만이 고려 초기
사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전나무 숲길을 걷고 난 뒤 월정사에서 절밥을
맛보고 하룻밤 몸을 누이는 것도 좋다. ‘숲은 마음을 치료하는 녹색 병원’이라
는 말이 전나무 숲을 걸어 월정사에 닿으면 더욱 실감나기 때문이다.
출처:길숲섬 (세속을 씻어내는 숲길)
횡성군 횡성호수(橫城湖水)
댐으로 계곡을 막아 생성된 횡성호는 분명 횡성군 발전의 규모와 정도를 가늠
할 수 있게 만든다. 더불어 발전하는 논리에 고향을 양보해야 했던 수몰민들의
잃어버린 삶을 반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횡성읍에서 출발해 유유히 흐르는
섬강 줄기를 따라 도착한 횡성댐. 지역 주민들이 휴식공간이기도 한 자그마한
수림공원을 지나 댐을 굽어볼 수 있는 널따란 광장에 이르면 정면으로 횡성댐
만의 자랑인 물홍보관이 자리하고 있다.
* 물홍보관
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주제관'과 물의 물리적인 성질을 재밌게 배울 수 있는
'체험관'을 둘러보며 색다른 물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좀 더 생생하고, 다양
한 체험을 하고 싶다면 15분가량 상영하는 물홍보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횡성읍에서 댐까지 가는 길도 좋지만 자연경관을 따라 각종 산장이나
전망 좋은 찻집 등이 어우러진 댐 주변도 드라이브하기에 좋다. 특히, 댐 상류 쪽
에 위치한 수몰민들의 마음의 고향인 망향의 동산은 횡성댐을 찾는 이들이면 한
번쯤 꼭 들르는 매력적인 관광 명소이다.
* 횡성다목적댐
정부가 남한강 지류인 섬강의 중하류 지역의 갈수기 용수 부족과 매년 되풀이
되는 홍수피해 문제를 해결코자 수자원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현재 원주시를 비롯한 댐 하류 중소도시에 연간 111.6백만㎥의 홍수조절 용량
을 갖추게 되어, 댐 하류에 매년 발생하는 홍수 피해를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간 104Gwh의 전력을 생산 공급하게 되었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19-10-13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