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왕(南解王)과 유리왕(儒理王)
1-3-1. 남해왕(南解王; 재위, 65~75)
신라 2대왕 남해왕(南解王)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아들이 아니다.
남해왕(南解王)은 범어(梵語)로 이름을 짓지 않았고, 또한 범어(梵語)가 아닌 한자어(漢字語)로 대보(大輔)라는 관직(官職)을 두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 없던 대보(大輔)라는 관직은, 고구려 유리왕(琉璃王) 때에 있었는데, ad 3년에 대보 협부(大輔陜父)가 남한(南韓)으로 떠났다고 했다. 신라로 왔던 것이다.
十二月, 王田于質山隂, 五日不返, 大輔陜父諌曰...,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 去之南韓. / 高句麗本紀 琉璃王記
남해왕(南解王)의 왕비인 운제부인(雲梯夫人)은 카시어형(Khasi語形) 고유어(固有語)로서, 움제(Um-jer = dews in Khasi)가 이슬을 의미하여 운제부인은 이슬부인이었다. 그래서 가물었을 때 기우제를 올리면 효험(效驗)이 있다고 하여서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로도 불렸다.
가로어형(Garo語形) 신라(新羅) 고유어(固有語)가 신라사(新羅史)에서 나타나는 첫번째가 남해왕(南解王)이었다.
남해왕(南解王)의 남(nam-a = good in Garo)은 가로어에서 좋다(good)는 뜻이다.
남해왕(南解王)의 해(解)는 ‘게’, ‘개’와 같은 지칭형(指稱形) 어미(語尾)로서 예를 들면 집게, 털개, 따개, 마개, 덮개 등에서 보인다.
탈해왕(脫解王) 나해왕(奈解王) 흘해왕(訖解王)에서 나타난다.
남해왕(南解王)의 왕호(王號)인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했고, 그 뜻은 무당(巫堂)이라고도 전하여 온다.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 三國史記
무(巫)라는 한자의 옛 훈(古訓)이 스승(susung)으로 알려져 있으니, 차차웅이 곧 스승의 어원이다.
당시, 왜국왕(倭國王)도 수승(帥升) 이라고 기록되었다.
安帝永初元年(ad 107)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後漢書東夷伝
차차웅(次次雄)이 수승(帥升)을 거쳐 중(僧)으로 축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가로어형(Garo語形) 고유어(固有語)는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와 한기부(漢岐部) 배씨(裵氏)가 사용했다.
이중, 한기부(漢岐部)가 가장 남쪽인데, 탈해(脫解)가 상륙한 아진포(阿珍浦)가 있다.
남해왕(南解王)은 바로 한기부(漢岐部)를 지배한 것이다.
아진포(阿珍浦)는 지금의 나아리(羅兒里)인데, 이는 낙랑인(樂浪人)과도 연결된다.
삼국지위지(三國志魏志)에서 진한(辰韓)의 낙랑인(樂浪人)들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아진포(阿珍浦)의 어원(語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낙랑인(樂浪人)들이란
① bc108년, 전한(前漢)에 함락당한 고조선(古朝鮮)의 낙랑인(樂浪人)과,
② 진(秦)에게 멸망한 연국인(燕國人),
③ 그 이전 연국인(燕國人)에게 빼앗긴 고조선(古朝鮮)의 낙랑인(樂浪人)과
④ ad 400년경에 티벳을 출발하여 연국과 낙랑을 거쳐 신라(新羅)에 정착한 가로계(Garo系) 고유어를 가진 이주민(移住民),
⑤ 또한 ad3년에 고구려를 떠나 남한으로 온 대보(大輔) 협보(陜父)의 무리를 포함하는데, 이들은 모두 한자어(漢字語)를 알았다.
남해왕(南解王)은 아진포(阿珍浦) 지역의 독립왕(獨立王)으로서, 자체적으로 대보(大輔)를 두었고, 탈해(脫解)를 맞이하여 사위로 삼고 탈해(脫解)를 중용(重用)하여 대보(大輔)를 주고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남해왕 원년 낙랑병사들이 금성(金城)에 쳐들어온 기록이 있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弃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妾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 南解王記
이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 말년에 2룡(二龍)이 나타난 것과 같은 기록으로서, 탈해가 금성으로 침입하여 박혁거세를 전사시키고 남해왕을 신라왕으로 즉위시킨 것이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 朴赫居世記
이때 금성(金城)의 2룡(二龍)으로 불리는 것은 반정(反正)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실패했다면 이룡(二龍)이 될 수 없어서, 또하나의 용(二龍)으로 기록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박혁거세는 유체가 흩어져서 떨어졌다. 비참하게 분시(分屍)된 것이다.
理國六十一年王升于天, 七日後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有大虵逐禁, 各葬五體爲五陵亦名虵陵, 曇嚴寺北陵是也./ 三國遺事
유체(遺體)가 산락(散落)되었는데 불구하고, 굳이 오체(五體)라고 한 것은, 이후 박씨왕(朴氏王)인 유리왕(儒理王), 파사왕(婆娑王), 지마왕(祇摩王), 일성왕(逸聖王), 아달라왕(阿達羅王) 등의 오체(五體)를 상징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남해왕은 박씨가 아니다.
사릉(蛇陵)에 묻힌 것은 박혁거세,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알영왕비 등 5인(五人)이었다.
박혁거세 39년이, 탈해가 나타난 ad 44년이니, 박혁거세 즉위년은 ad 6년이고, 박혁거세가 서거한 때는 즉위 60년으로서 ad 65년경이 된다. 이때가, 남해왕(南解王) 원년이 되고, 신라 금성(金城)을 차지했고 신라의 군권은 탈해왕에게 맡겨져 있었다.
가로어형(Garo語形) 고유어를 사용한 티벳계 낙랑 유민들의 대표가 남해왕(南解王)이었고,
왕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카시어계를 대표하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을 왕비로 세웠다.
즉, 범어를 사용하는 박혁거세 이전의 선주민에 의해서 왕권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왕호도 불교와 상관없이 무당(巫)을 의미하는 차차웅(次次雄)이었다.
남해왕(南解王)을 삼황의 첫째(三皇之弟一)라고 하였다.
南解居西干亦云次次雄......此王乃三皇之弟一云./ 三國遺事
이는, 박혁거세 사후에 이어진 남해왕, 유리왕, 탈해왕이 삼황(三皇)이었다.
그러나, 남해왕 11년인 서기 75년경에 왜병과 낙랑의 침입이 있었다.
이때 6부의 병사들이 왜병을 물리치려고 해변으로 나갔고, 그사이에 낙랑인들이 금성을 공격하고 알천(閼川)에 주둔했다.
파견나간 6부의 병사들이 낙랑인들을 치려고 되돌아왔지만, 토함산에서 알천까지 왔다가 낙랑인들의 숫자가 많은 것을 보고 그냥 되돌아갔다.
十一年, 倭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内虚, 來攻金城甚急.
. 夜有流星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知賊衆, 乃止.
위 기록은 6부병사가 낙랑인들을 퇴치하지 못하고, 금성을 넘겨준 기록이다.
따라서 남해왕이 축출되어 해변으로 물러난 것이고,
금성은 낙랑병사들의 지지를 받는 탈해왕이 차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탈해는 이때 즉위하지 않고 유리왕을 신라왕으로 세웠다.
남해왕(南解王)의 재위 연대(在位年代) 그래서 65년부터 75년이 되고, 이후 신라왕에서 물러났지만 남해왕 21년인 85년까지 신라의 북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해왕 16년 기록인 북명인(北溟人)의 기록은 신라 북쪽에 옮겨간 것을 의미한다.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 獻之. / 三國史記 南解王記
1-3-2. 유리왕(儒理王; 재위, 75~87)
신라 3대 유리왕(儒理王)은 범어(梵語) 율리기타(ullikhita = furrow, torn in Sanskrit)와 관련되는데, 자국(furrow)을 남겼다는 뜻이고, 떡에 이빨 자국을 남겼다는 전설과 일치한다.
以餠噬之 儒理齒理多 / 儒理記
14대 유례왕(儒禮王)도 역시 범어(梵語) 율리기타(ullikhita = furrow, torn in Sanskrit)와 관련되는데, 그에게는 성광입구(星光入口)의 탄생 전설이 있다.
이는 입술에 별모양의 흔적이 있었다는 뜻으로서 선천적으로 입술이 찢어진 것이다. 입술갈림증(harelip, cleft lip)이었다.
星光入口, 因有娠/ 儒禮記
그런데, 3대 유리왕(儒理王)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노례왕(弩禮王)이라고 하였다.
범어(梵語) 율리기타(ullikhita)에서 앞부분 율리(ulli)만으로 유리왕(儒理王)이라고 했고,
뒷부분인 기타(gita = song in Sanskrit)는 범어(梵語)에서 노래(song)라는 뜻이다.
그래서 3대 유리왕(儒理王)은 노래왕(弩禮王; king of song)이라는 별명도 가진 것이다.
남해왕이 타도(打倒)되고서, 군권(軍權)을 가진 탈해왕은 왕위를 사양하였고. 대신 계속 군권(軍權)을 가진 채로 유리왕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남해왕과 달리 범어(梵語)를 사용한 유리왕(儒理王)은 박혁거세의 아들로 고려되며, 재상으로도 범어(梵語)에서 유래한 이벌찬(伊伐湌 = 大角干)을 두었다.
운제부인(雲帝夫人)이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로 신격화된 것으로 보아서 알영부인(閼英夫人)과 운제부인(雲帝夫人)은 동일인었을 가능성도 높다.
유리왕(儒理王) 5년에 두솔가(兜率歌)를 지었다고 한다.
두솔(兜率)은 두(dvau =two in Sanskrit) 와 수르(surya = sun in Sanskrit)를 합쳐서 두 개의 태양의 의미다.
신라 경덕왕 19년(760)에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도솔가(兜率歌)는 내용이 알려졌는데, 두 개의 태양이 떠서 나라가 혼란할 때 이를 수습하던 노래다.
유리왕의 도솔가(兜率歌)도 두 개의 태양(兩日)이 떠올라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노래를 불러서 서로 화합을 바라는 노래다.
즉 유리왕이 있는데, 탈해왕이 역시 신라왕이라 하여서 맞서다가 다시 화합하는 노래다.
유리왕(儒理王) 9년에, 서기 83년에 범어체계(梵語體系)의 6부족을 확립하고, 문치(文治)를 시도했다.
그러나, 유리왕과 탈해왕이 신라를 양분(兩分)하여 다스린 것으로 고려된다.
유리왕(儒理王) 9년 한가위 대보름(八月十五日) 행사는 월지인(月支人)의 축제(祝祭)로 보인다.
유리왕 9년, 서기 84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이때, 두 부족으로 나누어 길쌈 대회를 치른 것으로 보면, 탈해왕(脫解王)과 신라를 둘로 다누어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王旣定六部, 中分為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内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𨓍, 績麻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戱 / 三國史記 儒理王記
이때 탈해가 주도하는 신라국은 달의 나라 사로국(斯盧國)으로 국명(國名)이 바뀌고, 달의 나라로서 추석(秋夕)인 한가위 대보름(八月十五日)이 대명절(大名節)이 되며, 유리왕은 달왕이라는 뜻을 가진 이사금이 되었다.
범어(梵語)에서 니사간(Nishakant= Lord Of Night, Moon)은 ‘달의 왕’이라는 뜻이다.
유리왕은 무려 34년 재위로 기록되었지만, 유리왕 11년 서기 85년경 경도지열(京都地裂)이 있었다.
十一年, 京都地裂, 泉湧./ 三國史記 儒理王記
유리왕 11년 경도지열(京都地裂)의 기록은 탈해왕(脫解王)에 의해서 신라의 분리(新羅分離)를 은유(隱喩)한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 13년 낙랑(樂浪)에 의해 북변(北邊)의 타산성(朶山城)이 함락된 것은 유리왕이 북변으로 피신하였다가 결국 항복한 것으로 고려된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䧟朶山城 / 三國史記 儒理王記
탈해왕은 ad 87년경부터 대략 95년까지 9년동안 신라를 지배했을 것으로 고려된다.
국호(國號)를 달의 나라 사로국(斯盧國)으로 바꾼 것도 월지인 탈해왕의 행적으로 고려된다.
탈해왕은 87년에 즉위한 것으로 고려되고, 95년까지 다스렸다.
참고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탈해왕(脫解王)이 bc 19년에 나타나 ad 57년에 즉위하였고, 즉위 나이가 62세라 하였는데 산술적으로는 76세여야 하므로 맞지 않다.
(bc 19 + ad 57 = 76? ≠ 62)
단, 신라초기 왕에게 매우 드문 기록인 즉위 나이 62세를 채택하면, 대략 ad 26년경에 태어나, ad 44년에 신라에 들어오고, ad 87년경에 즉위한 것이 된다.
[출처] 달의 나라, 달의 신 탈해왕|작성자 pati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