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롯데화랑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88-1 롯데백화점 7층 Tel. 031_463_2716
탈脫과 탐探의 이중주 ● 힘 ○ 힘의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역량을 최고도로 발휘하고 있다. 권력, 신체, 자본, 전통, 새로움 등의 이름으로. 어제의 추억과 5월의 바람과 같이 이름을 갖지 못하여 괴물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잘 빚어진 자태로 만상萬象은 서로를 유혹한다. ● 유혹은 무대가 필요하다. 스토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만상은 학예발표회가 열리고 있는 교실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우면서, 흔적을 남기면서, 화장을 하면서 공연한다. 교실의 뒤편에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라는 경구가 그들을 격려한다. 개체의 힘과 사회적 힘들이 혼재된 힘의 경연장이,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개인의 이름으로 내세운 것들이지만 그 이름은 사라지고 개체의 지위와 장소만이 서로를 각인 시키고 있다. ● 저녁 6시 학예회가 파할 때, 만상의 시각이 정지될 때 연약한 나비는 어두운 시공간을 벗어나 보금자리로 잘 돌아갈 수 있을까? 나비의 지위는 어느 정도 표출되어 진 것일까? 나비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힘의 바다에서 그 개체를 잘 보존할 수 있을까? 시각은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청각이 예민해 지는 그때 나비는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끝없는 탈脫속에서 지혜를 탐探하고자 한다. 항상 내일의 저녁을 기다리며. ● 이러한 끊임없는 탈脫과 탐探의 공속적인 장이 작가 한진만의 출발점이다. 20세기 인간의 격정을 침몰시킨 힘의 바다에서 연약한 인간을, 예술을, 개체를 사유하는 것, 보이는 시각의 충만함에서 보이지 않는 청각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나아가 그러한 길 위에서 힘 자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한진만_念願Hope_46.5×36.5cm_2006
한진만_頭武鎭Doo-Moo Jin_113×174cm_2006
한진만_錐山島Choo-San Do_84×139cm_2006
주체와 대상의 교환작용 :수축 (탈)과 팽창(탐) ● 보이는 것에서 탈하고자 하는 작가의 관점은 우선 대상의 포획으로 다가선다. 완전한 포획만이 탈의 변주로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포획은 우선 대상과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 한다.그러한 간격의 긴장은 태양의 자오선아래 가로좌표(물질적)와 세로좌표(정신적)로서 대상을 포섭한다. 그것은 사물의 생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작가의 점적 사유이다. 그러므로 대상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재현의 영역으로 떠오른다. 주체와 대상의 이야기는 풍부해지고 비장감이 흐르고 마당 깊은 집에 머무르게 된다. 주체의 자아는 강해지고, 반성의 강도는 높아지고 대상은 수축하게 된다. 따라서 한진만이 마주하는 대상은 일정한 시점 안에 들어온다. 의미와 지각의 대상으로, 방향성을 가진 존재로서 파악된다. 여기서 모든 비판은 몽상의 영역으로 추방된다. ● 그렇지만 작가가 마주하는 대상의 내적 본질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사물 속에는 사물로서 정립되게 하는 사물의 속도가 끊임없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주체 또한 변조됨과 동시에 정념으로 인해 정신의 고양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간격이 아닌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거리의 사유가 위로 솟구친다. 주체와 대상의 질적 차이와 그 연속은 고정된 좌표 속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시간을 도입한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융합은 대상에 이야기를 부여한다. 아버지의 너그러움과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한때 죽음과도 같았던 욕망의 서사가 펼쳐진다. 따라서 한진만의 대상에는 빈곳의 허와 충만함, 곧 삶의 탄생과 사라짐이 반복되고 시간의 사유가 무방향적으로 도입되는 황토색이 출현하게 된다. 색은 본래 공간을 확정하는 것이나 작가는 색으로서 대상의 이야기를, 흐름을 드러낸다. 대상은 시간을 머금은 채 스스로 수축되어 주체의 시각과 조응한다. ● 이러한 빈곳과 시간에 대한 주체의 자각은 자신안의 변동과 대상의 변동을 추동한다. 곧 대상의 본질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변화의 시원이 주체의 내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주체가 대상에게서 독해하는 징후의 미끄러짐 때문이다. 주체에게서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시시각각 내뿜는 무방향적인 내적 에너지 때문이다. 대상의 속도가 주체의 속도까지 유발한다. 그러므로 주체가 대상을 봄과 동시에 대상이 주체를 응시함으로서 우리의 시각적 설계도는 완성된다. 주체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가시적인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이와 같이 대상이 우리를 선점하기 때문이다. ● 대상은 팽창하고 주체는 극도로 축소된다. 대상의 확장은 자아까지 소멸시키고 주체화의 일정한 지역만 남겨둔다. 대상이 탈주하면서 남겨놓는 선의 흔적들만이 주체를 유도한다. 그러므로 한진만은 대상에게서 지나친 깊이를 제거한다. 또한 대상을 시각으로는 포획하지 못한다. 이때 작가의 신체가 작동된다. 대상의 팽창은 주체의 신체를 접고 자신의 윤곽은 희미해지고 작가와 대상은 최대한 근접한다. 주체의 욕망까지도 대상은 제거한다. 오로지 주체의 수동적 작용, 수동적 종합만이 존재하며 비로소 대상에 자신을 맡김으로서, 탈함으로서 자유를 만끽한다. 외적 윤곽은 희미해졌지만 주체는 대상의 본질적인 것에 비로소 도달한다. 대상의 신체와 주체의 신체가 부딪침으로서 세계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 점이지대의 상승과 하강 그 우발적 놀이 ○ 주체와 대상은 서로 응시하면서, 위치를 바꾸면서 수축과 팽창이 융합하는 점이지대에서 무방향으로 변화한다. 두 힘의 맞닥뜨림은 때로는 상승작용으로 때로는 하강국면을 조성하면서 세계의 본래모습을 현시한다. 그러한 점이지대의 본래적 영역은 이 세계에 현존하는 가장 본질적인 힘이다. 이 힘의 상승과 하강을 한진만은 순환적 형태, 곧 원모양의 구도로 제시한다. 끝없는 미끄러짐과 생성의 반복적 현상은 주체와 대상의 점이지대에서 순환적 세계를 떠오르게 한다. 어떠한 돌출도 없이 평평한 구도로 제시되는 것이 공속적인 점이지대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그 두운동이 작동할 때 모든 깊이는 사라지고 바깥은 내면화 된다. 절대적이고 전형식적인 바깥을 통해 다른 것은 내재화 된다. 순환적 세계이므로 바깥과 안은 구별되지 않고 상승과 하강으로 그 국면은 점진적인 증대와 점진적인 감소만이 요동친다. 이러한 구도를 한진만은 대상의 결로서 나타낸다. 무한히 증식하는 점이지대의 결에서 작가는 무의미형성과 무주체성을 경험한다. 그것은 무정형적인 공기의 흐름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은 리듬을 타고 점이지대의 표면을 가로지른다.
한진만_無遊Silent Dance_29×20cm_2006
한진만_願ⅠHopeⅠ_46×36cm_2006
점이지대의 무정형적인 평면에서 위로 솟구치는 신新인간 ● 결국 작가는 주체와 대상이 탈하고 탐하는(수축하고 팽창하는) 점이지대에서 초월론적인 평면을 경험한다. 모든 것을 담지 하여 홀연히 나타났다가 일순간 사라지는 절대적 평면 그곳은 탈형식적이고 우발적인 생명의 선線만이 증식하고 있는 곳이다. 그것은 만물의 정기를 내재한 세계의 궁극이다. 고유명사는 붕괴되고 동사만이 작동되고 있는 삶의 원형이다. 새로운 본질, 가장 본질적인 힘이 포착되는 곳이다. 곧 강도의 제국이다. 그 제국에서 한진만은 신인간을 발견한다. 그것은 강도의 우발성 때문에 이름을 갖지 않은 인간, 구체적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 구체적 형식을 완성하지 못한 과정의 인간이다. 그것은 대부분 사물의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융합된 무시간의 시간 속에서 작동됨으로서 색을 수반한다. 한진만은 탐의 팽창 움직임으로 시각적 깊이 곧 부조적 형식을 파괴하고 근접성으로 처리하며 화면 중앙의 인물은 탈의 하강운동으로 축소되고 변형된다. 한진만은 명명할 수 없는 순수한 아무개의 광채를 인물에 주입한 것이다. 그것은 일상성과 도구성을 극복하여 모든 주체와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해맑은 마음의 속도가 확장되는 인물이다. 관능성과 무거움이 사라지고 바깥을 향해 자신을 벗어나고자 내일의 저녁마다 체험하는 어머니의 염원을 간직한 인간이다.
한진만_朝流Cho-Ryu_41.5×81cm_2006
한진만_竹島Juck-Do_32×65cm_2006
한진만_仙樂Music of Tao_96×55cm_2006
배려로서의 관심 ● 힘의 바다는 근대가 만들어낸 인간에 의하여 지배된다. 철저하게 시각적이고 주체중심이다. 그것은 공연을 필요로 하였다. 무대가 필요하고 통일적이며 조화롭고 아름다워야 한다. 폭력의 원천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의미를 가져야하고 방향을 지녀야하며 감각이 전이되어야한다. 왜냐하면 타자를 설득하는 것이, 선점하는 것이 주체의 작동방식이요, 힘의 존재이유다. 곧 타자에 대한 욕망의 근원으로서의 관심이다. ● 그러나 한진만의 관심은 폭력으로 지칠 대로 지친 시각과 힘이 빠진 저녁 6시의 나비에게 생생한 세계의 신체를 접속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고대 동방에서 태동한 시각적 견자의 자세로는 인간의 욕망조차도 극복하지 못함을 힘의 바다는 여전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생한 세계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신체가 부딪쳤을 때 떠오른다. 한진만은 그것을 반성의 시각적 세계와 자유의 육체적 사유를 융합하여 그 중간지대에서 움직이는 막으로서 생산하였다. 그러므로 한진만의 점이지대는 재현이 사라지고 깊이가 없는 하나의 판이다. 관조와 반성 그리고 할머니의 염원과도 맺고 끊을 수 있는 곧 탈과 탐이 공속된 감각작용의 대지이다. 그 점이지대의 강도가 가장 상위의 힘이다. 연약한 타자에게 배려할 수 있는 장인匠人적인 관심, 힘이다. ■ 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