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아나운서
80년대 초 어느 가을, 나는 야간 당직을 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5시 55분, 보도당직 기자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뉴스 담당 아나운서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나는 잠을 떨쳐내지 못한 채 퉁명스레 곧 나올 거라고 대꾸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잠을 청했다. 곧이어 전화벨은 다시 울렸고 보도당직 기자는 소리쳤다.
“아직도 아나운서가 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같이 당직을 한 동료에게 얼른 주조정실主調整室로 올라가보라고 했지만 그도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나에게 가보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전화벨은 또다시 울렸다.
“본사에서 6시 뉴스가 시작되었으니 빨리 조치를 취하세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시간은 벌써 6시 4분. ‘지방뉴스’ 하기 1분 전이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팬티 차림으로 1층 당직실에서 2층 라디오 주조정실을 향해 신들린 사람처럼 달려갔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당직 기자는 분노와 절망으로 이글대는 표정으로 고함을 치며 뉴스 원고를 건네는 동시에 나를 스튜디오 안으로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스튜디오 문이 닫히는 순간, 이미 서울 본사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6시 뉴스가 끝나고 지방뉴스의 시작 신호를 알리는 차임chime 소리와 동시에 ‘방송 중’이란 빨간 불이 들어왔다. 나는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덜커덕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았다.
아나운서가 뉴스를 진행할 때에는 미리 원고를 받아 몇 번 읽으면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후 포즈pause, 띄어 읽기, 장단음 등을 연출하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뉴스 원고를 한 번도 읽어 보지도 않은데다 1층에서 2층까지 뛰어왔기 때문에 숨이 찼다. 이런 상황에서 뉴스를 진행할 수 있을까? 포기해? 아니야, 어쨌거나 방송사고만은 막아야지. 그 짧은 순간 내 안에선 갈등과 긴장이 극한으로 치달렸고, 당직 기자는 다그치듯 뉴스를 진행하라는 사인sign을 보내왔다. 난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면서 입을 떼었다.
“6시 헉, 대구․경북 헉,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원고를 읽는데 당황한 나머지 원고 두 장을 한꺼번에 넘겨버렸다. 문장이 잘 이어지지 않아 다시 앞장을 뒤적거려 찾아 읽는 둥, 5분 뉴스에서 거의 3분 정도는 우왕좌왕하다가 겨우 안정이 되어 남은 2분가량만 정상에 가까운 목소리로 방송을 했다. 그때 그 5분은 내 일생에서 가장 길고긴 시간이었다.
뉴스를 끝내고 스튜디오 밖으로 나오자 바로 MBC에서 전화가 왔다. ‘KBS에 오늘 새로운 아나운서가 왔느냐’고 묻는지 엔지니어는 “대리 아나운서”라고만 답하고 전화를 끊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녹음한 것 한 번 들어보시지요.”
그는 그날 뉴스에 대하여 혹시 문제가 제기될 경우를 대비해 증거자료로 제출하기 위해 녹음해두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쾅’하며 스튜디오 문 닫는 소리, 의자에 앉는 소리, 숨이 차서 헉, 헉, 거리는 소리, 불분명한 발음에다 더듬는 소리, 쉼표 없는 읽기, 장단음 등이 엉망인데다 부산스레 원고지 뒤적거리는 소리 등등. 그것을 듣는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선 청취자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어찌 용서를 빌 것인가. 차마 용서를 빌 수조차 없는 대형 사고다. 이를 어쩐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그때 내게 가장 간절했던 것은 제발 우리 방송국 직원들이 듣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녹음 청취가 다 끝나기도 전에 방송과장과 보도과장으로부터 연거푸 전화가 왔다. 두 사람 모두 “뉴스가 그게 뭐냐”고 혀를 차면서 “아침 간부회의에 보고할 수 있도록 경위서를 작성해 대기하라”는 지시였다. 보도당직 기자로부터 첫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빨리 조치를 취할 걸, 난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담당자인 N아나운서가 주조정실 문 앞에서 파리한 얼굴로 겁에 질려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어이가 없어 시선을 떨구었고 바로 그 순간, 달랑 팬티만 걸친 내 하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냅다 당직실로 달려갔다. 옷을 주섬주섬 꿰입으면서 치를 떨었다. 나를 이런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그를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서둘러 주조정실로 올라갔다. N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난 그를 추궁했다.
“왜 늦었습니까? 사실대로 얘기하세요.”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그만 늦잠을 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색이 된 그는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늦잠 때문에 방송 사고를 냈다면 중징계입니다. 해임解任까지 각오해야 될 거요.”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순간, 예전에 내가 겪었던 방송사고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73년부터 라디오 프로듀서로 근무하다가 78년 도청소재지 방송국인 갑지국甲地局(그 당시 道내 각 市에 있는 방송국은 乙地局이라고 했음) 텔레비전 방송 프로듀서 1기로 차출되어 서울 본사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연수를 받고 다시 대구방송국으로 왔다. 그때 처음 배정받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매주 일요일 새벽 5시에 방송되는 〈농수산 교실〉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새벽 4시경에 일어나야 했으므로 갖고 있던 탁상용 시계에 알람을 맞춰두고 미리부터 워밍업을 했다. 그러나 막상 방송이 시작되자 그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알람시계를 두 개 더 사다가 알람을 맞춰 베개 옆에 두고 자곤 했다. 그런데도 어느 날 그 알람소리를 듣지 못하고 곤히 자다 벌떡 일어나 보니 이미 5시였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허둥지둥 잠옷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갔다. 집에서 약 5분 거리인 방송국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엔지니어가 녹화테이프를 챙겨 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엔지니어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N에게 일렀다.
“연탄가스를 마셔 그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세요.”
그리고 ‘담당 아나운서가 연탄가스를 마시는 사고가 발생해 제가 대신 뉴스를 진행하게 되었으니 선처를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을 담은 경위서를 제출했다. 아침 간부회의에서 경위를 보고받은 국장은 그렇게라도 자체뉴스를 방송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프로듀서가 아나운서를 대신해서 뉴스를 한 것은 엄연한 ‘방송사고’인만큼 N아나운서와 나를 인사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지시했다.
며칠 뒤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나는 인사위원장의 질문에 그날 있었던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고, N은 “알람을 4시 30분으로 맞춰 놨지만 연탄가스에 취해서 겨우 5시 40분경에 일어났고 간신히 몸을 추슬러 황급히 택시를 타고 왔지만 뉴스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습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기꺼이 받겠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그러자 인사위원장을 비롯한 인사위원들은 N에게는 정상을 참작하여 ‘경고警告’ 처분했고, 나에겐 당직자로서 연락을 받고도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들어 ‘주의注意’ 처분을 주었다.
N은 서울출신으로 대구방송국에 첫 발령을 받아 온 신입 방송인이었다. 3년간 대구에서 근무한 후 서울 본사로 갔고, 25년이 흐른 지금도 아나운서로 재직하고 있다. 아침 출근길에 가끔 N의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그는 나와 함께 근무하는 동안 가끔 그때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말을 했고 그럴 때마다 난 농담을 했었다.
“프로듀서가 ‘대리 아나운서’로 뉴스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으니 되레 감사하지.”
하지만 늘 마음 한편으로는 개운치 않았다. 평소 정직한 사회를 만들자는 내용의 다양한 방송을 제작해온 내가 정작 내 일터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상사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진실을 은폐시켰다. 나는 나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할 때가 있다. 다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또 똑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만약 누군가 진실을 은폐했다면 나는 또 집요하게 그 진실을 파헤치려 들면서 그 위악에 대하여 분개할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에겐 관대하고 타인에겐 인색한 존재. 나의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속성에 대하여 나는 절망한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인간적인 속성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아직은 인간적이라는 사실에 희망을 품는다.
첫댓글 지난 사연이지만 영원히 잊지못할 추억이겠습니다. 제가 판단해 볼대는 그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로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사회로 변화하는 요즈음이지만 때론 이런 임기응변의 거짓말은 필요하리라 믿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청운 선생님 부족한 저의 글에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가며 해결하기 힘든 어려운 고비가 한,두번 찾아오곤 하는데 그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신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