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에, 요한복음은 공생애 초반에 ‘성전정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심지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내리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마가복음 11장 17절, 새번역>
예수님의 ‘의분’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하셨어야 했습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성전’에 대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우리 역시 ‘나’라는 성전의 ‘성전정화’를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의분에 대해서 함께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는 것에 대해서 ‘의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전을 지키기 위한 분노였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전 된 우리를 정화하기 위한 의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성전이 언제나 깨끗할 수 있도록 ‘나’에게 화를 내는 ‘의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하는 내가, 이제 주의 성전인 내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과 같은 상황이 되지 않도록,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을 지켜 나가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첫번째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https://cafe.daum.net/alivecommunity/B6M4/44
믿음의 선한 싸움 두번째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https://cafe.daum.net/alivecommunity/B6M4/45
셋째, ‘팔고 사고’, 돈의 논리에 대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0절, 새번역>
왜 이렇게 긴 구절로 우리를 설득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돈’은 정말로 무서운 ‘우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돈’이 가지고 있는 악, ‘돈의 논리’는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째로 쓴 편지에서도 이 부분을 정말 힘을 주어 강조합니다.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디모데후서 3장 1~2절A, 새번역>
예수님 당시 성전정화가 필요했던 가장 원초적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팔고 사고’의 문제였습니다. ‘돈의 논리’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뒤바뀌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마태복음 21장 12절A, 새번역>
이미 성전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서 사고자 해서 판 것이 아니라 이미 팔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시장이 되어 버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면 백 번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바뀌어 버리면 정말로 예배를 망쳐버리게 되는 돈의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은 결코 돈을 벌기 위하여 장사를 시작해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은 결코 ‘돈의 논리’에 얽매이거나 연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결코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토록 무서우리만큼 행동하셔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이들이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유형’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돈의 논리’의 결과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왜 제자들이 예수를 버렸습니까? 제자들은 예루살렘 입성 후 분명히 ‘유형’의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하나도 보장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억울했을 것입니다. ‘돈의 논리’가 만들어 낸 억울함이 예수를 팔게 했고, 예수를 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예수에서 반(反) 예수로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돈의 논리’에서 오는 유형의 보상이 없을 때의 일입니다. 일한만큼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것이 유형의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돈의 논리’와 치열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돈’은 잘못이 없습니다. ‘돈의 논리’가 우리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과 싸우지 마시고, ‘돈의 논리’와 싸우셔야 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농담으로라도 ‘돈의 논리’에 빠져있다고 쳐도 고작 은전 30개에 예수를 팔아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몇만 달란트를 준다고 해도 팔까 말까 한 대 정말로 고작 그 돈에 팔아 넘기는 돈의 논리라니! 정말로 어리석고 속상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요점은 이것입니다. 부디 ‘돈의 논리’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에게 이 ‘돈의 논리’와의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정말 ‘돈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세상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 속에서 ‘Another Level’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사랑의 힘, 나눔의 행복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반드시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어른 세대들부터 모범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돈의 논리’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래서 승리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