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우리의 권리를 행사할 줄 모르는가
이경렬 (전 외교관)
2026. 8. 18
8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나란히 서 있는 옛 사진을 트루스소셜에 올렸다. 트럼프는 이어 8월 17일 시작된 한미연합 군사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를 몇 시간 앞두고 다시 글을 올려, 김정은과의 “매우 좋은 관계”를 거론하고 한미연합훈련이 조선에 “전적으로 부적절하고 적대적인 신호”를 보낸다면서, 국방장관에게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했다.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비싸고 적대적인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문득 묻게 된다. 한미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라는 명령은 미국 대통령만 내릴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한미연합사는 미국 대통령의 사병이 아니다. 한미 양국 국가통수기구의 전략지침을 받아 움직이는 연합지휘체계다. 두 대통령은 동시에 각자 자기 군대의 최고통수권자다. 트럼프가 미군에 훈련을 줄이라고 명령할 수 있다면 한국 대통령도 한국군에 그렇게 명령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먼저 결단하면 그 뒤 한미 간 협의를 통해 연합훈련의 규모와 방식을 조정하면 된다. 트럼프의 이번 지시 역시 그러한 메커니즘으로 실행된다.
그렇다면 이재명 대통령은 그런 명령을 내릴 생각을 해 보기나 한 것인가. 불과 이틀 전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는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평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가 되겠다고도 했다. 말은 장대하다. 알맹이는 없다. 광복절은 대통령의 화려한 말잔치를 구경하는 날이 아니다. 조선이 한국과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고 문을 걸어 잠근 지금 필요한 것은 ‘평화’, ‘공존’, ‘마중물’ 같은 단어를 늘어놓는 일이 아니라, 닫힌 문에 바늘구멍 하나라도 뚫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연합훈련 축소나 중단은 그런 결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노태우 정부는 1992년 북한의 핵사찰 문제와 연계해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7년 말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에 연합훈련 연기를 먼저 제안했고, 이듬해 트럼프와 합의해 실행했다. 차이는 있다. 미국 대통령은 먼저 결단하고 자기 군대에 명령한 뒤 한국과 협의한다. ‘선명령 후협의’다. 우리는 미국이 동의할지를 먼저 살핀 다음에야 움직인다. ‘선협의 후결정’이다. 우리도 ‘선명령 후협의’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혹여 주인님의 그림자라도 밟을까 노심초사하는 숭미지국의 지극한 겸양일 터.
이런 행동에는 철학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8월 25일 워싱턴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이제는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놀랍도록 공손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동맹국의 정책을 존중하고 협의한다는 말과 미국의 기본정책에 반대되는 판단 자체를 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후자는 ‘자기검열’(self-censorship)이요 ‘자기구속’(self-restraint)이다. 알아서 기는 자세다. 주권국가의 실용외교 전략이나 노선이라기보다 자율성을 자진 반납하는 노예의 철학이다.
그런 철학으로 어떻게 한반도의 ‘당사자’가 되겠다는 얘기인가. 기껏해야 남북관계에서 미국의 꽁무니를 따라 뛰어다니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자족할 뿐 아닐까. 당사자는 자기 판단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미국의 기본정책에 어긋날 수 없다고 미리 자신을 묶어 놓고 어떻게 한반도의 운명을 우리가 주도하겠다는 것인지.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과 대화하기 위해 연합훈련을 줄이라고 명령하는데 정작 남북관계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을 바라보고 있기만 할뿐. 누가 당사자이고 누가 피스메이커인지 보면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전시작전통제권 회수 문제도 뿌리는 같다. 전작권은 애초 미국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군대에 대한 우리의 권한이었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에서 넘겨준 작전통제권을 70년이 넘도록 온전히 되찾지 못하면서도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앉아 있으니 참으로 가여운 신세다. 누구의 군대인가. 누구의 대통령인가. 미국이 우리의 고유권한 회수를 계속 가로막는다면 연합사 체제 자체를 해체하는 것까지 선택지에 올려놓는 것이 주권국가의 자세다. 자기 것을 가져오는 데 상대방의 허락부터 기다리는 행태를 언제까지 정상이라고 할 것인가.
안보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경제에서는 더 기막힌 일이 반복된다. 한미FTA를 할 때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면 무조건 한국에 이익이라는 결론을 먼저 세워놓고 협상을 했다. 무엇을 내주었고 누가 손해를 입었는지 보다 ‘FTA는 이익’이라는 대명제가 앞섰던 것이다. 그러니 결과는 우리가 미국에 일방적으로 뜯긴 수탈이었다. 지난해 관세협상에서도 미국이 FTA의 무관세 질서를 걷어차고 25% 관세를 위협하자, 우리는 일본이나 유럽에 훨씬 못 미치는 팩트시트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도 정부는 성과를 자랑했다. 대국민 사기극이 따로 없다.
강도가 100원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60원만 빼앗아 갔다고 해서 “오늘 40원을 벌었다”고 자랑한다면 자기기만이다. 기준점 하나를 슬쩍 옮겨 손실을 승리로 바꾸는 것이다. 루쉰의 『아Q정전』에 나오는 아Q가 꼭 그랬다. 현실에서 얻어맞고도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정신승리법’이다. 우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 보여온 모습이다.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면서 ‘동맹의 합의’를 자랑하고, 우리 전작권을 회수하지 못하면서 ‘연합방위’를 들먹이며, 미국의 약탈을 보면서도 ‘국익을 지켰다’고 자화자찬하는 우리는 아Q가 아니던가.
더 나쁜 것은 이런 정신승리가 다음번 2차, 3차의 약탈을 부른다는 점이다. 미국은 바보가 아니다. 한국은 세게 밀어붙이면 결국 물러나고, 물러난 뒤에는 스스로 그것을 성공이라고 포장한다는 사실을 학습한다. 그렇다면 다음 협상에서는 요구수준을 대폭 높여도 상관없다. 우크라이나는 미국한테 지도를 받았는지 한국은 대공방어무기를 지원해야 한다고 시건방진 혀를 놀리고 있다. 거부할 줄 모르고 결렬시킬 줄 모르며 자기 권리보다 동맹의 체면을 먼저 걱정하는 나라라면 만만하고 우스운 상대다. 우리가 스스로 미국의 ‘봉’이 되는 구조다.
이제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언제까지 미국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움직일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조차 한미 간 합의라는 말 뒤에 숨길 것인가. 언제까지 미국에 더 내주고도 그것이 우리의 이익이라고 국민을 기만할 것인가. 미국의 기본정책에 어긋나는 판단을 할 수 없는 나라는 주권국가의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미국 자치령의 주지사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한반도의 평화가 우리의 절박한 국익이라면 대통령은 말이 아니라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대통령은 이렇게 명령하라.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미연합훈련을 즉각 중단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