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일제의 압박
일제 관헌의 눈초리는 유독 사학인 대창(大昌)에만 쏠리었다. 1937년 가을 느닷없이 나타나 왜경(倭警)이 교무실에 와서 교적(敎籍, 學籍簿)을 검열하고 교실에 들어와 보고 칠판에 쓰여진 시사 문제가 배일 문구와 독립 사상이 풍긴다고 트집을 잡아 배우던 학급과 3학년 갑반(甲班) 학생(당시에는 甲乙丙 3개반씩 있었음)들을 학년을 앞당겨 그 해 10월 10일에 조기 졸업(早期卒業) 시킨 일이 있었다. 당시 대창학원은 무지(無知)한 청년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에서 농촌 벽지에 있는 청년들을 계몽 지도하는데 교직원이 앞장섰고, 많은 인재 양성에 전력을 경주한 노력이 단시일(短時日)에 주효(奏效)되어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모여든 지원자가 쇄도하여 갑을병반(甲乙丙班)으로 편성하여 수업하지 않으면 안될 즐거운 비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일제가 방관할 리 없었다. 암행 감찰로 학적부를 검열하는 등 교실까지 눈길이 뻗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사랑하던 교정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사회적 여론과 학원에 위운 (危運)도 감돌았지만 벽천 김석희(碧泉金碩熙) 선생의 기민한 사태 수습과 학원을 아끼는 충정에서 사제(師弟) 간에 석별의 눈물을 흘리면서 교문을 학생들은 떠났다.
1944년 4월 18일에는 예천 군수로부터 전시(戰時) 비상조치에 관한 교육 방향이
전달되었다.
23. 여자 야학부의 신설
1941년 7월 1일부터 여자들에게 일본어(日本語)를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야학부(夜學部)를 운영하였다. 1942년 5월 18일에도 2부 교수 실시의 사유서(事由書)를 개최자 김석희(金碩熙) 선생이 도지사 앞으로 보냈다. 같은 해 10월 29일에 고미심조(高尾甚造) 도지사로부터 인가서가 왔다.
Ⅱ. 대창중고등학교 태동 시대
(大昌中高等學校胎動時代, 1947-1953)
1. 머릿말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이 되자, 대창학원(大昌學院)은 새로운 사명을 띠고 해방 조국의 중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원장 벽천 김석희(碧泉金碩熙) 선생을 중심으로 졸업생들이 모교 재건(母校再建)을 목적으로 대창동우회(大昌同友會)를 조직하였고, 대창학원은 중학교 설립을 전제로 대창공민학교(大昌公民學校, 47.2.15), 대창공민중학교(大昌公民中學校, 47.11.1),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 48.7.26),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 49.1.17)로 개편 운영하다가, 1950 년 6월 1일에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로 교명(校名)을 바꾸었고, 1953년 4월 15일에는 대창고등학교(大昌高等學校)의 설립으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설 대창학원(私設大昌學院)은 1948년 7월 20일 제25회에 걸친 졸업생 2,409명(女子 148名 包含)을 배출하고 그 종언을 고하였다.
2. 대창공민학교 설치(大昌公民學校設置)
1) 설치 신청과 승인 : 1947년 2월 1일에 대창학원 원장(大昌學院院長) 김석희(金碩熙) 선생이 국민학교(國民學校)를 졸업한 자를 중학교(中學校)에 준하는 교육을 하고, 민주 국가의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케 하기 위해 대창공민학교를 설치하기 위해 권대일(權大一) 예천 군수에게 승인 신청을 한 결과 보름 뒤인 2월 15일에 그 승인서가 왔다.
그리고 1947년 2월 10일에 대창공민학교(大昌公民學校)의 교사 채용을 신청한 결과 같은 해 2월 15일에 그 승인서가 예천군수로부터 왔고, 같은 해 2월 20일에 '예천 대창공민학교(醴泉大昌公民學校)'라는 간판을 걸고 보수과(補修科)를 두고 새로이 개교(開校) 발족하였다. 한 때 명성공민학교(明星公民學校)라는 교명을 가지자는 주장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김석희 원장(金碩熙院長)의 주장대로 대창공민학교(大昌公民學校)라고 교명을 정하였다.
2) 입학 자격과 연령은 국민학교 졸업자로 13세 이상인 자였고, 수업 연한은 2년
간이었다. 1학급 6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전임 교원(專任敎員) 2명과 특수 과목 담당 강사 7명을 두어 교육하였다.
3) 교과서는 문교부 제정 중등학교 제1.2학년용 및 기타 문교부 또는 도지사가 지정한 교과서를 사용하였고, 교과목 및 매주 수업 시수(授業時數)는 공민(公民) 2시간, 국어 6, 역사 3, 지리 2, 직업 3, 영어 5, 수학 5, 과학 5, 미술 1, 음악 2, 체육 3 등 총 38시간이었다.
3. 대창공민중학교(大昌公民中學校)로 교명 변경
1948년 6월부터 대창공민학교의 교명을 대창공민중학교로 바꾸려고 준비를 하여 그 해 11월 1일에 그 승인을 받아 신입생을 모집하였다.
28년의 역사와 전통있는 교풍(校風)을 가진 사숙 대창학원(私塾大昌學院)이 해방과 더불어 새 나라의 국민 교육에 공헌하고자 중등 교육기관으로서 예천 대창공민학교란 간판을 걸고 새로이 발족한 것이 1947년 2월 20일이고, 개교 후 관민(官民) 유지의 절대적 성원 아래 획기적 발전을 보게 되었으니, 같은 해 7월에 제2회 학생을 모집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다시 대창공민중학교(大昌公民中學校)로 승격하고, 사회의 요청에 의하여 1학급 증설(增設)하는 등 본교 초창 이래 28년의 빛난 역사는 힘차게 뻗어나고 있었다. 당시 시설면에 있어서는 전 대창학원 시설로써 충분하였고, 6년제 중학(中學)이 될 때까지라도 무난한 시설이었다. 그래서 1949년을 기하여 6년제 중학으로 승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 지도 목표 : 초등 교육을 받은 청소년으로 하여금 민주 국가의 도의적, 실천적 중견 인물을 육성함으로써 목표를 삼고, 특히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도 대상으로 하였다. 첫째, 일반적으로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청소년으로 하여금 중등 이상의 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질 향상에 힘쓰고, 둘째 학령 초과 또는 기타 사정으로 진학치 못하는 자를 단기(短期) 육성하여 진학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2) 수업 연한은 3개년으로 하였다. 종래 2년제이던 것을 3년제로 변경하고, 수재와 고령자를 위하여 2년제를 특설하여 초급 중학의 교육과정(敎育課程) 내용을 교사 7명, 강사 1명이 교육하였다.
4.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으로 교명 변경
1948년 7월에는 대창공민중학교 교장 김석희(院長金碩熙) 선생이 대창중학원의 개최를 경상북도 도지사에게 신청한 결과 같은 해 7월 26일에 그 인가서가 왔다.
5. 교사(校舍), 대창중학원 재단(大昌中學院 財團)의 재산으로 기증받음
1948년 7월 15일 노상동 산 1번지에 있는 교사(現 校長室, 庶務室, 松臺室)가 대창학원 경영자들의 공동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의 재단 설립을 위하여 재단의 기본 재산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김석희(金碩熙), 김주형(金周亨), 최병주(崔秉柱), 강정희(姜正熙), 황영찬(黃永瓚), 안성호(安成鎬), 박운수(朴雲洙) 등 공동 명의자들의 그 승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생략)
6. 교지, 계속 무상 대부
1948년 7월, 예천읍장 이만녕(李萬寧)은 예천읍 노상동 1번지의 대지(垈地) 570평을 대창중학원 교지(大昌中學院校地)로 무상 사용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학원측의 청원에 따라 허락하였다. 이 대지는 원래 예천향교(醴泉鄕校) 재산으로 일제 때 예천읍 소유 토지로 되어 있었는데, 1926년에 예천사설 대창학원(醴泉私設大昌學院)의 교사 건축 부지(校舍建築敷地)로 무상 대부(無償貸付)하게 된 것을 계속 사용하도록 다시 허락하여 준 것이다.
또한 1948년 7월 20일 예천군수(醴泉郡守)도 예천군 학교비(醴泉郡學校費) 소유였던 노상동 2번지 임야(林野) 1정(町) 2반(半) 2무(畝)(4,560坪)을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의 운동장 용지로 무기한 무료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여 주었고, 같은 해 12월 21일에는 예천읍장 이만녕(李萬寧)이 그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증명을 하기도 하였다.
7. 교사(校舍)의 건축 부지, 읍사무소로부터 기증받음
1948년 12월 20일에 노상동 1-1번지 임야 798평을 예천읍사무소로부터 기증받았다. 이는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 승격을 위해 재단 설립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는 1926년에 예천사설 대창학원 교사(校舍) 건축 기지로 대부받아 사용하여 왔던 것인데, 이때 기증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