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8장
=====18:1
그때에 - 막 9:33에 의하면 그때는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17:24-27에
의하면 그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
월) 15일 경에 한 번씩 내는 것이므로(출 30:11-16) 구체적으로 이 때는 예수께서 돌
아가시기(니산월, 태양력 3-4월 14일경) 한 달 전일 것이며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
시고 유대로 들어가려#고(19:1) 하실 무렵이었을 것이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이 질문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
(막 9:33;눅 9:46), 마가는 제자들이 노중(路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해서 열띤 토
론을 하였다고 전한다(막 9:33).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
으셨으나 제자들은 잠잠하고 아무말도 뭇하였다고 한다(막 9:33-37). 한편 누가는 예
수께서는 그때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기술하고 있다(눅 9:40-48). 이를 정리하면 예
수께서 제자들이 논쟁하는 것을 아시고(누가), 그들에게 물으시니 그들이 잠잠해졌고
(마가), 바로 그때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다고
(마태)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자리 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16:16), 또한 세 제자만 변화 산상에서의 영광스런 주의 광휘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17:1), 베드로만 성전세 사건과 연루된 사실(17:24-27) 등으로 볼 수 있다.
특별히 예수께서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관세와 정세(政勢)등의 세금을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만 비겨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결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세금을 내실 뿐이라고 말씀하
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 않아 메
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기대에 부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기대에 따라 제자들의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발생되었는데 본문의 말씀
'누가 크니이까'는 이러한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예수
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몰이해는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실 때까지 계속되
었다.
=====18:2
한 어린아이를 불러 -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 아이들은 위한(for) 교훈이 아
니라 그들을 통해(through)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이전 시대와 그 당시
만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몰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
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
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진무구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되는 것임을 말
씀하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전설에 의하면(Nicephorus) 이 어린아이는 훗날 안디옥
의 감독이자 순교자가 된 익나티우스(Ignatius), 내지는 버려진 고아(Paulus) 또는 주
의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한 아이(Boten) 등으로 추측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한
편 1세기 후반부의 디오그네투스의 편지(Diognetus Epistle)는 크리스챤은 어린아이들
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마가의 기록(막 9:3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작은 아이 하
나를 표본으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친히 안으시기까지 하셨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생명체 하나하나에게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신 드넓은 사랑을 보여주신 행동이
다.
=====18:3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우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
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
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
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
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
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
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
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
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
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
)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
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8 } 4 끼기쁠 낫추는 그이가. 사모 ) 3-4의 고난받는 종의 1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자기뤄 낫추다'의 혈라어 동사 '타페이1오' (멱488퉈01)쳤 단순할 의미의 겸손이 아니
라 멸시, 촨대, 굴욕 둥올 당하면서까지 겸손할 것올 의미한다. 따라서 신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넘의 말씀올 전하고 실천함으로 진찌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몌시를 당하는 것올 기뻐하는 상태를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 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 } 5
=====18:8
돌이켜 -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우한 조건으로써 선행되어야 할 행동이다. 따라서
돌이키지 않으면 어른은 결코 어린아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여기
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트라페테'(* )는 '스스로 돌이키
다'는 뜻이며 동사의 제 2과거형으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따
라서 이 말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가능
한 마음의 변화, 즉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인 변화를 가리킨다(요 3:3;행
2:38).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란 천진함이나 순결함이나
믿음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의 이상형으로서 또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
의 대표격으로서 내세워지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
는 것이지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D. A. Carson).
아이의 겸손이란 그가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고 부모의 품 안에서만
평안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順服), 그분의 보호아래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골 4:11, 12;요일 5:14). 그리고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자기
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부끄럼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
며,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이나 계산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을 지니고 가
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그 믿음의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천국 시민의 모델이 되고 있다.
결단코 천국에 둘어가지 못하리라 - '결단코...못하리라', 곧 이중 부정 '우 메'(*
)가 사용된 가정법으로, 천국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제자들은 '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資格)의 문제를 말씀하셨다. 따라서 천국으로의 입국 거부의 이 말
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8 } 4 끼기쁠 낫추는 그이가. 사모 ) 3-4의 고난받는 종의 1래를 연상케 하는 말씀
이다. "자기뤄 낫추다'의 혈라어 동사 '타페이1오' (멱488퉈01)쳤 단순할 의미의 겸손이
아니 라 멸시, 촨대, 굴욕 둥올 당하면서까지 겸손할 것올 의미한다. 따라서 신국시민의
자격으로서 의 자기를 낮춤이란 하나넘의 말씀올 전하고 설친함으로 진찌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몌시를 당하는 것올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예루살렘에서 모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주넘의
길올 그대로 따르는 깃임올 의미한다(빌 2: 5)
=====18:10
소자...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비록 세상에서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저희 천사들이 - 성경은 국가(단 10:13;12:1), 교회(계 1:20), 개인을 위한(행
12:15) 수호(守護) 천사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수호 천사'는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페르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람들을 위한 비사자로서 생
각한다. 이처럼 천사들이 구원을 상속받은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히 1:14). 워필드(Warfield)의 의견에 의하면 본문의 말씀, 즉 '소자들
의 천사들'은 사후의 그들의 영을 의미하며 타스커(Tasker)에 의하면 '저희의 영적인
짝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본절의 천사들은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영적
실존으로서 현재 하늘에서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워필
드(Warfield)의 학설은 결코 지지받을 수 없다. 여하튼 천사들의 수종은 비록 성도가
세상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이므로
결코 업신여김을 받을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내용을 근
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영혼들을 위해 수호하는 천사를 제공하셨다는 교리가
발전되었다(시 34:7;91:11;눅 15:7-10).
하늘에서...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것으
로 여겨져 왔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각 성도들을 수종하는 천사들이 동시에 어떻게 하
늘에서 천부(天父)의 얼굴을 볼 수 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
(Gregory)는 천사가 각 성도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여 수종드는 동시에 내적 관조를 통
한 희락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의 시선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말로 본
문의 난해점을 해결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수호 천사는 '하나님 면전의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이 수호하는 영혼들의 안녕을 구원함으로써 그 이중적 사역을
감당한다고 한다. 어떻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마치 왕정 체제
하에서의 신하의 배알(拜謁)처럼 매우 각별한 예우와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
여질 수 있다(왕하 25:19;에 1:14;렘 52:25). 즉 수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큰 영광을 부여받은 존
재들에게 당신의 백성의 수직(守直)을 명하셨다. 이는 결국 천사들의 위상(位相)의 탁
월성을 강조하기보다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11
본문은 2류 사본에 해당하는 A. D. 4-9세기의 언셜체 사본이나 수리아역 및 라틴
벌게잇(Vulgate) 역에는 눅 19:10에서 그 내용을 전입(轉入)한 본문('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권위있는 시내 사
본이나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이 빠져 있다. 여하튼 2류 사본의 기록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문맥상 생략된 본문의 내용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소자들'의 존귀성을 논하기 위한 서언(序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13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
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18:14
잃어지는 것은...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부정적 의미의 '잃어지는 것'(멸
망)은 이말의 긍정어 '찾음을 당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하나님
의 뜻은 무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딤전 2:4). 하나님 나라에서의 최고의 가치
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있다(Bachmann).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
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미래의 결론은 이 소자
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교훈으로 되돌아 간다(3-6절). 극서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이 소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하
나님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개개에 대한 이 사라은 전체 양떼를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전체 양떼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앞에서는 '어린아이' 또는 '소자' 등의 말이 사용되었
는데 여기서부터는 '형제'라는 말이 앞의 그것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반복 사용되고 있
다(15, 21, 35절). 한편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믿음의 동
료', '신앙의 동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예수는 이제 메시야 공동체, 즉 주를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 행해진 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편 본
문에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 궁극적 범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의 도덕적 범
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비록 한글 개역 성경과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벌게잇(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있는 제문서들에서는 '네게 대해'(* ,
에이스 데)라는 말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바로 뒤 이어지는 문장을
살펴보면 본문의 죄라는 것이 다른 형제를 멸시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
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르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동시
에 가능한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권고
하다'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의 의미인 '에피티몬'(* )이 아니라 '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란 뜻의 '엘
렝코'(* )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권고의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무엇이 죄악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또는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꾸짖
고 개도(開導)하는 것(요 8:46;딤전 5:20)을 말한다. 즉 그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
단,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고전
9:19-22;벧전 3:1).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에 해당한다(레
19:17).
만일 들으면...얻은 것이요 -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
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
음으로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
혜와 조심성과 사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서 형제
적 친교를 회복하고 그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정녕 필요하다(눅 17:3, 4;살후 3:14, 15;약 5:19, 20).
=====18:17
듣지 않거든(* , 파라쿠세) - '무심코 듣다', '무시하다'는 뜻
으로 남의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
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사 65:12).
교회에 말하고 - 범죄한 형제가 회개치 않아 개인적인 해결이 실패한 경우 제 3단
계이자 마지막 조치(措置)로서 교회가 공식 개입하며 범죄한 그 형제를 권면하기 위해
연합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한편 여기서 '교회'란 18, 19절의 특권을
살필 때 그 당시 존재하던 유대인의 회당으로 보기 보다는 아직 구체적으로 세워지지
는 않았지만 지금 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16:18). 실로 교회
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진리 전수의 터전이자, 모든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場)이요, 신앙 훈련과 성숙의 도장이어야 한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이방인과 세리'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
유대의 회당이나 기타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단체 밖의 사람'을 가리
키는 말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은 이 말을 '너에게 있어서 그가 이방인과세리처럼 되
게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각 교인이 범죄한 형제에게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므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의 징계를 넘어 사
회적 책벌(責罰)까지 부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
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각각의 교인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일절 금하고 범죄한 형제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와의 접촉을 피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로부터의 소외'라는 압력을 '죄지은 그 형제'에게 가함으로써 또 다시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18:19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 여기서 먼저 '두 사람'이란 예수의 제자된 자로서,
연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數)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견해와는 전적으로 다른 견해
가 있다. 최근에 던컨 엠 데레트(J. Duncan M. Derrett)는 주장하기를 합심한 두 사람
이란 '죄 지은 자와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자'로서, 그 두 사람은 교회의 결의를 기
초하여(18절) 상대방의 요구하던 권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게 되는 바로 땅에서 합
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합심하다'의 뜻인 동사 '쉼포네오'(*
)가 '어떤일을 의논하여 합의 보는 것'이라고 하는 사설은 데레트의 주장
을 밑받침해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두 사람'을 믿는 자들
가운데서 친교나, 합의, 합심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로서 이해한다. 또한 '합심'
이란 헬라어 '심포네오'가 '교향악'(Symphony)이란 말의 어원이란 점에서도 추측해 볼
수 있듯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연출해 내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단순히 '마
음의 일치,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사람의 일치는 물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자들에게 각 개인에
게 임제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적으로 임재하신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
의 일치된 기도는 하늘 아버시께서 그것들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18절:16;19)에 해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F. R. Fay).
무엇이든지 구하면 - 프리지크(Preisigke)에 의하면 '구하다'의 뜻인 동사 '아이테
오'(* )는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것'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본문의 구절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이는 18절에서 거론된 형제의 범죄 내용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합심 속에는 보
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령께서 함께 계셔서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18:20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 '내 이름으로'라는 의미의 헬라어 '에이스 토 에몬오노
마'(* )의 문자적인 뜻은 '내 이름과 관련해서',
'내 이름 안에서'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 2,3인이
모인 것 또는 2,3인이 모여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것 그리고 예수를 사랑
하며 연합하기를 열망하여 예수를 자기 소원과 신앙의 궁긍적 대산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인 것 등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토라(율법)의 말씀이 이야기
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유대 랍비의 속담집(Aboth 3:3)에서
처럼 그리스도인 2, 3인이 예수의 말씀을 서로 나누거나 그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는
곳은 그 장소가 어디든지 말론하고 예수께서 영으로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이 암시되어 있는 말이
기도 하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이름으로 연합한 무리들을 향하
여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영원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다(28:20). 이는 예수의
영원한 현존성과 편재성 및 무변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18:21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문은 현제의 죄문제(15--20절)와 결부된 죄용서
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 성도들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더불어 죄인을 용서
하는 이 양자를 조화 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와 평행 본문인 눅 17:3, 4이 "회개하거
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너는 용서하라"로, 회개가 용서의 전체 되어
있으며 일곱 번이 최종 숫자로서 거론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마태의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는 아니며 베드로가 언급한 일곱이라는 숫자도 예수의 의해 단번에
부정되었다. 따라서 마태는 용서의 법은 누가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고 너그러
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마태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용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동
사 '아페소'(* )는 '용서하는 사람과 관련된 죄악을 범죄한 형제로부터
먼 곳으로 보내다'는 의미로 악행자가 회개하여 죄 자백을 우리에게 하든 아니하든 즉
시 모든 악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의 이 적극적인 제안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하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벤시라 같은 이는 범죄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
을 말하고 있고(외경 집회서 19:13-17), 또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3회까지만 용서하
고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암 1:3;2:1;Jome 86b).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완전수 내지는 거룩
한 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적인
용서는 무한수로서의 일흔 번씩 일곱번에 의해 거부되었다.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습이나 랍비
들의 가르침, 심지어 베드로의 제안까지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새 지평을 여셨다. 여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에 대해 70*7(490)로 보는 학자도 있고(Erasmus, Jerome, Alford, Grotius등) 70인
역(LXX)에 의한 창 4:24에 나오는 라멕에 관련된 77배의 형벌과 연관지워 70+7(77)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Augistine, Ewald, Origen, Bengel 등). 여하튼 490번이든, 77번
이든 본문의 숫자는 강한 상징성을 내포한 말로서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인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Wycliffe)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친 말이다. 즉
형제들 간의 용서는 결코 횟수나 일정한 정도에 의해 제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인
데, 이는 23-35절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용서의 갈등을 겪고 있는 형제들은 그들이
용서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용서를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더구
나 예수가 가르친 용서의 횟수는 철저한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창 4:24의 복수의
횟수(일흔 일곱번)보다 또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넓
고 큰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보복과 형벌이 끝없는 용서의 모범을 따
르는(엡 4:32;골 3:13)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용서도 더 한층 끝이 없는 것이
어야 한다(A. W. Argyle). 진정 예수의 이 새로운 용서의 법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지닌 무제한적인 복수심을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로 대치(代置)시켜 놓으셨다
(McNeile).
=====18:23
천국은...과 같으니 -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앞벌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는데, 비유늬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늬 내용은 25: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
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 여기서 '종들'(* , 둘로이)이란 문자적으
로 노예들은 가리키지만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
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니라 왕의 영토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
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 혹은 영주라고 보아
야 한다(Herodotus).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
마나 많이 죄용서함을 받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
셨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를 다스리
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회계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 )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 쉬나이로)'의
의미로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지만,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실로 말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에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고후 5:10).
임금과 같으니 - 여기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하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
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18:24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
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 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
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
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
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대금(大
金) 또는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빚진 자(* , 오페이레테스) - 먼저 여기의 '빚'은 공금에서 횡
령 한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미처 다 상납하지 못
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
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
'(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 죄를 상징 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
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된 바, 그곳에서는 '죄'(* ,
오페이레마)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
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1)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
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으
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3)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
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
게.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3) 죄나 부채
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 하리라"(사 43:25). 그런
데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 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
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
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
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
는 일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충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
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하나를 데려오매 -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쩌면 하나님께
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지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 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18:25
다 팔아 갚게 하라 - 이러한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노예의
값은 많아야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성경에도 명기되어 있
는 일반적인 법이었다(레 25:39;왕하 4:1;느 5:5;사 50:1암 2:6;8:6). 물론 그런 노예
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어졌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
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이 상황
과 그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
자비할 종도리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정녕 그 임금
에게는 그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Chrysostom). 한편 이
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
(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8:26
엎드리어 절하며(* , 프로세퀴네이) - 이는 상대방에 대한 절
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
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도었음을 암시한다. 실로 이
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
)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 )와 '강한 감정 ,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 )의 합성어로,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
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앳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
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 응
변에 지나지 않는다.
=====18:27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 종에 대한 임금의 첫번째 시혜(施惠)로서 그 근본 동
인(動因)은 임금의 측은 지심(惻隱地心)이었다. 물론 종이 취한 겸손한 자세나 애절한
간구, 및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진솔한 실토도 이번 시혜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겠으나
그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원인은 바로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눅 15:20).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하에 달려 있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
나님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름
11:30-32).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임금이 베푼 두번째 시혜이다. 즉 임금은 종이 간구
한 것 (시간적인 여유, 조절) 이상의 것(완전한 탕감)을 약속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
서 '빚'(* , 다네이온)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겨
진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해 상당히 자비로
운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탕감하다', '용납하다'의 뜻인 '아피에미'
(* )는 주인의 자비나 지불 기한의 연장에 대한 채무자의 간청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즉 '아피에미'는 보통 '용서하다'(forgive)로
번역되는 말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을 퇴거시켜 멀리 보낸다'고 하는 것으로 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그것을
멀리 쫓아 보내 버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해 주고 있다. 실
로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탕감해 주는' 임금의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법적 행
위를 동시에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엄청난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
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칭의는
(1)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판단즉 '불쌍히 여김'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지 죄인의
간청에 의해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2) 이 한 번의 선언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단번에 탕감받은 것이다. 이 의인(議認) 자격은 우리의 지불 능력의 가부에 의해, 죄
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죄에의 단 한번의 선언으로 가
능하다(롬 8:33).(3) 그러나 우리의 의인(義認)됨에 있어서는 대속 제물로서의 그리스
도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일정한
죄악을 용서받음으로써 의롭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대속 또한 하나님의 진적인 은혜
와 사랑에 의한 것이다(요일 4:10).
=====18:28
그 종이 나가서 - 시간적으로 그리오래지 않은 때를 암시하고 있다. 이때는 임금으
로부터의 탕감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의 시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종은 바로 그러한 시간에 자신의 용서받은 감격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기
회를 맞이하게 된다. 실로 그 받은 바 은혜를 적절히 나누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
리요, 그분이 설정한 기회가 아닐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 예수 당시의 1데나리온은 보병이나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로서, 6000분의 1 달란트에 해당한다. 따라서 1백 데나리온
은 1만달란트에 60만분의 1에 불과한,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
다. 여기서 24절의 1만 달란트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
이라면 일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이며 동료인 인간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
하는 금액이다. 한편 본문의 '동관'이란 문자적으로는 동료 종이라는 뜻으로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붙들어 목을 잡고 - 여기서 '목을 잡고'에 해당하는 원어 '에프니겐'(*
,)은 미완료 과거 능동형으로서 '그의 목을 조르기 사작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제로 얼마 안 되는 대수롭지 않은 금액을 빚진 동관을 대하는 탕감받은 종의 난폭하
고도 매정한 성격과 거만한 태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태도는 26절의 엎드려 절
하면서 자비를 구하던 자세와는 완전히 다름 모습이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
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열반적인 속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당시의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법정에서 채무자의 목을 잡고 끌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F. R, Fay).
따라서 목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상대에게 극한 모
욕을 주는 무자비한 폭행(暴行)중에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빚을 갚으라(* , 아포도스 에이 티 오페
일레어스) - 문자적으로는 '만약 빚진 것이 있다면 갚으라'고 하는 의미로서, 프릿취
(Fritzsch)와 올스하우젠(Olshgausen)은 헬라어외 정중한 표현에 속하는 '에이 티(*
)가 사용되었다고 하여 이말이 그 요구를 부드럽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의 이 말은 '네가 가진 것이 있으니 갚으라' 혹은 '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는 칼날같은 강요로 보는 것이 좋다.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
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뜻하
는 말이다. 그는 채무자와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그를 만나자 마자 무조건적으로 빚
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29
엎드리어 간구하여(* , 파레카레이)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서 그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는 26절의 존엄한 부복(府伏)하
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단순히 허리가 굽어지도록 간청하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이 말은 조금 전 그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26
절) 좀더 현실적인 간청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느 부채였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의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동과의 이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저느이 자신의 처지를 기
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 브장문에서 미완료시제가 쓰이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뜻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가 거절했다(허락치 않았다)'는 동사의 미완료형인 '우크
에델렌'(* )은 22:3에서와 마찬가지로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
함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가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음을 나타내
고 있다. 이는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하여 준 임금에 비해 그 종의 마음
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허락하다'는
뜻의 헬라어 '델로'(* )는 '사랑하다'는 뜻을 내포한 단어로 사랑하는 마음
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상대방의 하찮은 소청이라도 들어 줄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사랑이 없는 마음을 가진 자는 또한 이웃의 눈물젖은 호소를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게
된다.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27절과 대조가 되는 구절이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
내었으나(석방)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투옥). 25절의
경우와 같이 가족과 소유를 다 파는 것이 여기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채무액
이 소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신 이 경우에는 돈을 지급할때까지 사람을 구속하
는 일이 언급되었는데(5:25, 26 참조) 고대 사회에서는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
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Deissmann).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옥
에 갇힌다고 하는 일은 억울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헐값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오백 데나리온에 팔렸으므로 그의 빚보다 더 많은 액수로 사람을 파는 일
이 불법이듯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구속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 더구
나 임금에게 빚의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던 그가 자신의 채무자의 지불 기한 연장
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
가하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받은 사랑을 주는 사랑으로 환원하지 못하는
자는 참사랑을 모독하는 자이다.
=====18:32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 첫번째 부름의 회계에의 호출이었다면 이번 두번째의 부름
은 정죄와 심판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에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하
는 자는 언제가는 이 두번째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사 63:4). 이 부름 이후에는 영원
한 투옥과 영원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다.
악한 종아 - 25장에서 한 달란트를 맡았던 중에 대해 주인이 책망한 말을 연상시키
는 말이다(25:26). 형용사 '악한'이 붙은 이 말은 왕의 유죄 선고를 의미한다
(7:23;25:41;눅 19:22). 즉 이 한마디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特
赦)의 은전은 상실하게 도었다. 어욱이 이 '악한 종'이란 말이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
씀 중에서 종종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이 채권자가 그
의 큰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네가 빌기에(* , 파레카레사스) - 이 헬라어는 '간청하다'의
뜻인 '파레카레오'(* )의 부벚자 과거형으로 여기에서는 26:53에
서와 같이 '단순히 한 번 간청한 것으로 충분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문의 경우 과거의 계속된 동작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동
작이 일어난 것만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을 사용한 것은 용서해 준 것이 빚진자의 계
속적인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18:33
불짱히 여김과 같이...불쌍히 여김이 - 이는 '받아들인 자비'와 그가 '행했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본문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첫번
째 자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자비로서 두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
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첫번의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
도가 엄청난 것임에 비해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비로서의 두번째 자비는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며 도리이고, 또 은혜와 감사의 정도로 지극히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자비가 있다. 이 세번째 자비는 벴겔
(Bengel)에 의하면 하늘나라의 관대하신 보상(benigna talio)을 의미하는 것으로, "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과
같이 성도가 장래에 받게 될 하나님의 자비를 으미한다.
마땅치 아니하냐(* ... , 우쿠 에데이세) - 의문사 '우크'(*
, 아니하냐)에서 강조하고 있는 긍적적 대답은 이 악한 자의 최후의 양심의 가책에
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는 이 물음에 대해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에게 부여된 처지는 오로지 자신의 채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기'(* , 데이)때문이다. 더구나 미완료형 '에데이'(* )는 다
른 사람과 비교하여 탕감받은 이 사람에게만 계속적으로 부여된 도덕적 의무가 바로
형제,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땅한 일을
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처벌의 대
상이 되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18:34
주인이 노하여 - 여기서 '노하여'(* , 오르기스데이스)란 '자극
받아 격분하다'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하 동관의 처신이 주인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
킬 정도로 크나큰 잘못이었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받은 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형제들에게 그대로 반영,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진노하실 것
인가에 대한 매우 적절한 예시이다. 정녕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
해서 하나님은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를 책망하실 것이다.
그 빚을 다 같도록 - 접속사 '헤오스 후'(* )는 '...까지'의 뜻으로, 제
한된 어느 시점까지의 도달 가능성을 암시한다. 바로 이 문장에 의해서 '연옥설'(煉獄
說)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본문의 사악한 동관은 감옥에 갇힌 이후라 할지
라도 그가 혹시 빚을 다 갚은 이후에 또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본
문의 제한적 용법에 근거해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가 연옥의 상태로, 그 이후에는 회
개한자는 천국으로, 회개치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의 자리로 ,옮기게 될 것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크리소스롬(Chrysostom)이 이야기 하였듯이 이 문장은 일정한
시점의 한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즉 본문의 '빚을 모두 갚는 일이 발생하기까
지'라고 하는 말은 영구적인 불가능성을 말하는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따라서 주인
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곳에 있으리라'고 한 말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나오지 못
하리라고 하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을 선언한 것이다. '악한 종'(32절) 이라고 하는 유
죄선고에 이어 이제 그에게 마땅한 형량(形量)이 선고된 것이다. 이러한 종신형은 영
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Meyer). 한편 주인의 선고는 그 자신의 1
만 달란트의 빚에 따라 형벌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주인이 노한 것은 바로 그가
같은 동료의 죄를 탕감치 않는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형벌받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부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는 은혜를 체험했음
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정녕 베푸는 사랑이 없는 자
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끝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언
도 받을 수밖에 없다(25:41-46).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옥졸'의 뜻인 '바나니스테스'(* )
는 '고통을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옥을 지키는 간수인 '데스모
퓔라크스' )가 아니다. 여기서는 결국 사악한 동관의 고통스럽고
처절한 투옥 기간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옥졸'이라는 말
대신에 '형리'로 표현하고 있는데,이는 본문 해석에 충실치 못할 표현이다. 한편 '바
사니스타이'가 왕의 시위병을 의미한다고 하는 점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수종들고 있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벗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옥졸들은 죄인을
그들 손으로 고문하고 매를 때리는 역할 뿐 아니라 지옥 형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는
사역을 맡은 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말에 주님의 재림과 함께 천사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라지들을 골라 불에 처넣는다고 하는 비유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