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함에 대하여
-4월에 스러져간 두 청년을 기억하며-
마이클 샐던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 서문에 보면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메리토 크라시)에 대해 아주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준다. 미국이나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의 핵심은 학력주의이며, 많은 사람들은 암암리에 "교육받지 못한 이들은 깔봄을 당해도 싸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데에 비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편견은 샤이한 태도를 넘어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 4월에 스러져간 두 청년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4월 24일 한강변에서 친구와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사라져 30일 주검으로 발견된 고 손정현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달 22일 평택항 부두에서 용역회사 지시에 따라 컨테이너 바닥에 있는 이물질 청소작업을 하다가 300KG의 개방형 컨테이너에 깔려 숨진 고 이선호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 젊은이는 모두 부모님의 사랑하는 자녀였으며 앞길이 창창한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청년 모두에게는 사건을 이슈화시킨 아버지가 있었고 너무도 젊은 청년들의 죽음이었기에 안타깝고 애달픈 마음은 모든 사람이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고인이 된 두 청년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만, 두 청년의 죽음의 과정이 언론에 다뤄지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방식에 깃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짚어 보고자 한다. 어느 누구의 죽음도 가볍다 할 수 없으니, 조금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쓰인 글임을 밝힌다.
우선 고 손정현군은 4월 24일 밤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러 한강변에 나갔고 밤늦게까지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시고는 갑작스럽게 실종되었다. 실종된 25일 새벽부터 손군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기 위해 언론에 알리고 현수막을 붙이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등 갖은 애를 쓰며 노력하였다. 손군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마음을 알게 된 많은 이들은 자신의 일처럼 여겨 마음을 모았고, 그 과정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혼자 살아서 돌아간 친구의 행적이 여러 의구심을 낳으면서 손군의 친구를 손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몰아간다. 손정민군의 시신이 한강변에서 발견되고 부검결과 "익사"로 발표될 때까지 친구 측에서는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음으로서 의구심은 진실로 포장되어 수 없는 유튜브 가짜 뉴스로 재생산되었다. 특히 성인 실종 사건을 다루는 경찰에 대한 과도한 불신으로 손씨 친구의 집안이 대단하여 모든 조사가 조작되고 있다는 '불공정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정조준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말 불공정한 시각이 존재한다. 사망한 손씨는 중산층 집안의 어엿한 외동아들로 부모의 모든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여 소위 "인서울 의대"에 진학한 사람이었다. 만약 이 사건의 당사자가 몇 년째 직업도 없이 세월을 흘려보내며 제대로 자기 앞가림도 못하다가 친구와 놀러나가 사망한 사건이라면 이 사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어땠을까? 이 사람의 사망에도 성인 실종 사건을 다루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경찰이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정의를 지켜내겠다는 신념으로 비내리는 한강공원에 집시법 위반을 감수하며 200여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추모행사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열심히 노력하여 사회적으로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한 대학생 죽음의 원인과 그 과정은 명명백백히 밝혀져 한 점 의구심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대생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 땅에 하루에 수도 없이 죽어가는 많은 젊은이, 아니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하여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또 다른 청년 고 이선호군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그는 군대에 다녀온 후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나갈 수 없게 되자, 하청업체 직원인 아버지를 따라 평택항 부두 내에서 1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하여 자신의 밥벌이를 하던 건실한 청년이었다. 원청 직원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작업으로 인해 발생한 사망사건임(증인 있음)에도 원청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당시 고 이선호군은 어떠한 안전장비도 갖추지 않고 안전교육 한 번 받아본 일 없이 자신의 본 업무도 아닌 작업에 투입되었으나 회사는 오히려 안정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개인의 잘못이 사건 발생의 핵심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이선호군이 300KG이 넘는 컨테이너 박스에 깔린 지 1시간 후에야 119에 신고된 이유가 하청이 원청으로 보고하는 체계를 밟느라 늦어져 아버지가 직접 가서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 손정민군의 실종과 시신 발견에 이르는 전 과정이 CCTV를 재현하듯 언론을 통해 수도 없이 보도되었지만, 고 이선호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언론은 그와 같지 않았고, 고 이선호군을 위한 추모집회는 민주노총 등 노조 회원 30여명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는 데에 그쳤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산재사망사고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많이 발생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에 대한 통계수치를 살펴볼 만한 언론보도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다만, 2020년 산재사고 사망자가 882명이고 올 3월 말까지 산재사망자가 199명이라 하니 한 해 800~900명 가까운 인원이 산재로 사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이고 자녀이며 삼촌이고 이모, 고모, 형, 누나, 오빠 동생이리라.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중대재해 기업 처벌법은 내년이나 되어야 효력을 발휘하고 그마저 50인 이하 영세사업장에는 3년 후에나 적용된다.
원청에서는 여전히 작업 지시가 없었으며,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은 본인 과실을 주장하고 있다. 안전모 하나로 300kg의 컨테이너박스를 버틸 수도 없을뿐더러 평소 본인의 일도 아닌 일에 게다가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자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여 안전장구 하나 없이 위험한 작업장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작업 지시 전 회사는 작업의 안전성을 통제할 인력 한 명만을 더 배치하면 되었다. 아니, 최소한 사고가 발생한 즉시 119에 신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어야 했다.(회사 내부적으로 사고 발생시 119신고를 자제하도록 한다고 함) 이러한 고 이선호군의 억울한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집회야 말로 전국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억울한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법률 제정과 같은 제도적 정비가 더욱 필요하고, 직원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기업에 대하여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일을 언제까지 "운 없는 개인의 죽음"으로만 치부할 일일까?
좋은 학력을 가진 사람이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학력주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가속화 시킨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좋은 학력을 갖지 않은 이들의 사회적 기여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 고 이선호군의 죽음과 같은 일은 반복되게 될 것이다. 과연 열심히 살지 않아(?) 좋은 학력을 갖추지 못한 개인은 언제나 그런 취급을 받아도 마땅한 일인가?
우리가 바라는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 단단히 쌓아올린 학력주의의 위선을 허물어트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간과할 때 우리의 품격은 손상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은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첫댓글 두 명의 죽음을 둘러싼 온도 차이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시선으로 예리하게 포착해 주셨군요. 언론의 보도에 자칫 사회적 공정성의 감각을 잃을까.. 늘 경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