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두메마을로 떠나는 시간여행
정선 단임골에서 안도전까지
|
|
|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구불구불한 산길로 접어든다. 가을이 한창인 산자락에는 돌투성이 비탈밭에 성기게 세워놓은 메밀가리며 옥수수가리들. 낮은 지붕마다 높은 산그늘을 이고 뻐끔뻐끔 저녁 연기를 피워 올리는 집들. 그 집들을 와락 끌어안은 산기슭의 작은 마을들. 별어곡, 자미원, 예미, 여량, 화절령, 몰운. 들을수록 정겹고 애틋한 이름들. 그 살가운 풍경 속을 달려 어머니 품에라도 안기듯 정선에 든다.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정선 땅. 와 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단지 첩첩산중이라서 왠지 가기 싫은 곳이요, 한 번이라도 와본 이들에게는 인심 좋고, 산과 물이 두루 아름다워 떠나기 싫은 정선 땅. 예나 지금이나 정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두메산골로 통한다. 오죽하면 “앞산 뒷산에 빨랫줄을 매고 산다” 는 말이 있을까.
|
청정 계곡에 자리한 숙암리 단임마을 북평면 숙암리 단임골은 단풍나무가 많아서 단임골이다. 단임마을은 이 단임골 계곡의 비경이 끝나는 곳에 앞산 뒷산 산자락을 지붕 삼아 둥지를 틀고 있다. 마을의 첫 집은 바로 귀틀로 된 너와집. 그러나 지붕 위에 푸른 천막을 씌워놓아 더이상 너와집이라 할 수 없는 너와집이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비는 가려야겠고, 군청에서는 너와를 걷어내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천막 안을 들여다보니 나무를 쪼개 올려놓은 너와가 거의 삭을대로 삭아 있었다. 집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방문은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었고, 부엌에는 아침에 군불을 땐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너와집을 벗어나 한참을 더 올라가자 동네 반장댁인 심상복 씨(70)네가 나온다. 마당에는 장작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뒤란에는 토종 벌통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필자가 찾아가자 그는 손님 접대를 한다며 귀한 벌꿀술을 내왔다. “올핸 벌이 잘 안됐어요. 꿀 못 딴 통이 절반 넘어요. 솔잎혹파리약을 쳐서 그런가봐요. 이 약이 워낙 독해서 수간주사 한번 치고 나면 주변에 뱀이고, 해충이 싸그리 없어져요.” 그에 따르면 단임마을에는 모두 아홉 가구에 열네 명의 주민이 산다고 한다. 마을이 해발 700미터쯤에 자리잡고 있어 겨울이면 날씨가 대관령과 비슷한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간단다. 그러니 겨울에는 오로지 나무하는 게 일이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집에는 보기 드문 성주(집안신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의 신체가 부엌에 남아 있다. 이 곳의 성주는 무명 실타래와 한지를 접어 신체를 만들었는데, 부엌 대들보 아래 모셔져 있다. 아마도 처음 이 집이 지어질 무렵에 모신 듯하다. 본래 성주는 집을 새로 지을 때 대들보 아래 모시며, 마루가 없는 집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모시기도 한다. 이 마을에 북에서 내려온 귀순자 이영광 씨(59)도 산다. 37년 전 북에서 내려온 그는 춘천 쪽에 살다가 16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여긴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부딪칠 염려가 없잖아요. 여기 자연이 너무 좋으니까, 마음이 편해요. 만약 여기까지 오염이 된다면 나는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에게는 어쩌면 이곳 단임마을이 삶의 마지노선인 셈이다.
디딜방아가 남아 있는 산촌(散村), 안도전 해발 1,200미터가 모두 넘는 수병산, 고적대, 중봉산을 병풍처럼 아우른 채 둥지를 틀고 있는 마을, 안도전. 특이할 것도 없지만 이 마을의 집들은 전부 양철 지붕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과거 이 곳의 집들은 삼대로 지붕을 인 겨릅(껍질을 벗긴 삼대)집이 대부분이었는데, 새마을 운동 시절에 싸그리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집의 벽체는 흙벽이 대부분이고, 돌담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이 많다. 또 마을의 집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독가촌과 비슷한 산촌(散村)을 이루고 있다. ‘산촌’이라 함은 산마을이란 뜻이 아니라 집이 뚝뚝 흩어져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정선의 다른 두메마을과 마찬가지로 안도전에서도 모든 집들이 나무를 때고 산다. 때가 때인지라 이 곳의 농부들도 땅과의 힘겨운 싸움을 갈무리하고 겨울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깊은 두메에서의 겨울 준비란 겨우내 군불 지필 땔나무와 소에게 먹일 여물을 준비해 놓는 것이다. 흔히 강원도 두메마을의 집들은 외양간을 부엌에 둔 겹집 형태를 띠고 있다. 두메의 집들이 소를 밖에 두지 않고 부엌 한 켠에 두는 까닭은 그만큼 소를 가족처럼 여기는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산속에서는 산짐승의 습격이 잦았으므로 소를 집안에 두어 보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 이르러 처음으로 들른 집은 탁왈수 씨(67)네 집이다.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부엌으로 들어가보니, 쇠죽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안도전에는 모두 스무 집이 있는데, 사람이 사는 집은 열두 집밖엔 안 된다고 한다. “농사래야 뭐 무하고, 당귀하고, 강내이 좀 하죠.” 토종벌도 치고 있지만, 대여섯 통이 고작이다. 운이 좋았을까. 탁왈수 씨네 집에서는 아직도 옛 디딜방아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디딜방아로 이웃 사람들까지 와서 메주도 찧고, 고추도 빻고, 서속(조)과 강냉이도 찧어간다는 것이다. 명절 때면 디딜방아로 쌀을 찧어서 떡을 하는데, 방앗간 기계로 빼는 떡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쫄깃하고 맛있단다.
탁왈수 씨네 말고도 안도전에는 디딜방아를 사용하는 집이 한 집 더 있다. 바로 안교원 씨(65)네 집이다. 안씨는 4대째 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토박이다. “여기 60년대만 해도 마을에 100호가 넘게 살았소. 저 위 골착으로 다 사람들이 살았으니까. 그러다 68년돈가 울진삼척사건 나고는 마이 나갔죠. 산 속의 집을 막 태우고 그랬으니까. 그 때만 해도 이 동네 집들이 다 겨릅집이었어요. 삼대 있죠, 삼대로 지붕을 한 집. 지끔은 뭐 삼 심기도 워낙에 가닭시러워서, 신고하고 심잖어요. 그러니 맨 양철집이지.”
상상을 해 보라. 100여 집이 넘는 겨릅집마다 모락모락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아마도 안씨는 그런 옛날 안도전의 풍경을 마음에 담고 있었던 모양이다. 겨릅집이 양철지붕이 되긴 했어도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안도전의 풍경은 여전히 옛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다. 언제부턴가 안도전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산속 깊이 박혀 있는 마을이지만, 계곡물이 맑고 주변 경치 또한 빼어나기 때문인데, 그런 까닭으로 중간중간 마을길은 말끔하게 포장이 되었다. 하긴 찾는 사람들이야 두메마을이 좋다지만, 사는 사람들이야 두메마을로 남고 싶지는 않을 터이다. 그래도 어쩐지 이런 식으로 조금씩 두메마을의 살가운 서정과 풍경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지 아쉽기만 하다.
가는길 승용차는 영동고속도로에서 새말 인터체인지로 나와 평창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고, 하진부에서 정선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 버스는 동서울 터미널에서 하루 10회 운행. 단임마을(심상복 씨, 033-563-3380)은 영동고속도로 하진부에서 405번 지방도를 타고 숙암리까지 와서 숙암에서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이어진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안도전(탁왈수 씨, 033-563-1223)에 가려면 정선에서 42번 국도를 타고 여량 아우라지와 임계면을 차례로 거쳐 직원리 쯤에서 도전리 쪽으로 우회전, 가다가 삼거리가 나오면 다시 우회전하여 올라가면 안도전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정선에서는 여러 향토 음식이 있지만, 산초두부와 감자 옹심이, 콧등치기, 곤드레비빔밥, 올챙이묵이 유명하다. 동면식당(033-562-2043)에서는 산초 기름으로 구워낸 향긋한 산초두부를 맛볼 수 있다. 산초는 주인 아저씨가 직접 산에서 따온 것이다. 이밖에도 정선에서는 독특한 음식이 많다. 감자를 갈아 수제비처럼 끓인 감자 옹심이(이모네 식당 033-562-9711), 메밀을 갈아서 꼬들꼬들하게 삶아낸 콧등치기(물레방아 033-562-3465), 산에서 나는 곤드레로 맛을 낸 곤드레비빔밥 (싸리골 033-562-4554), 장날에는 옥수수가루를 삶아 만든 올챙이묵도 맛볼 수 있다.
|
|
|
|
|
|
|
|
|
첫댓글 낭산님! 정선은 저의 제 2의 고향 이지요..
정선 !!! 정말 좋은 곳입니다 ..항상 제 맘속에 잊지 못합니다 ....
시간내어 담에는 정선을 따라올라가는 59번 도로타고 함백산 최정상 도 함께 가보도록 해'ㅆ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