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고 울며 사랑하노라니…
-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뒷이야기(4)
최 화 수
황량한 도시의 오아시스 ‘대학촌’
가난하고 어려웠던 지난 60년대,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들리는 ‘광포동’ 술집은 광복로 입구의 ‘대학촌’과 ‘갓집’, 그리고 ‘마산집’ ‘양산집’ ‘골목집’ ‘왕대포’들이었다. 이 가운데 ‘대학촌’은 주인이 부산 문화인들의 총집결소로 만들어 봉사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만든 주점이었다. 막걸리에 노가리 안주를 내놓았지만, 문화예술인들은 제마다 웃고 울고 떠들며 호기를 부리는 오아시스와 같았다.
‘대학촌’을 즐겨 찾는 단골은 미술의 임호林湖 김종식金宗植 이규옥李圭鈺 이석우李錫雨 김강석金鋼石, 문학의 김규태金圭泰 윤정규尹正奎 강파월姜波月 장세호張世浩, 음악의 유신劉信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궁핍한 시대의 향수가 가장 많이 묻어나는 주점으로 ‘대학촌’을 빼놓을 수 없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이도 아무 때나 무턱대고 들릴 수 있는 곳이었다.”고 단골들은 회고한다.
술이 아쉽거나 그리운 얼굴을 찾으려면 ‘대학촌’으로 가야만 했다. 막사발에 받아먹는 막걸리의 풍미에다 노가리 안주 한 접시면 그 날의 주흥은 도도해지기 마련이었다. 이 무렵 술값 잘 치르는 친구가 소영웅 대접을 받았다. 대체로 그런 역할 담당자는 시인 묵객이 아니라 예술애호가이거나 문외한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그 사람들』
자유민보, 민주신보 문화부 기자직을 그만두고 동가식서가숙하며 음유시인처럼 살았던 방랑시인 강파월은 집이 따로 없고 먹는 곳도 일정치 않았다. 밥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신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학촌’에 들렀다. 그에게 ‘대학촌’은 황량한 도시 속의 오아시스 같은 정신의 보금자리였다. 그는 얼근해지면 우울한 샹송 ‘글루미 선데이’를 불렀는데, 자신이 만든 노랫말을 이 곡에 맞춰 읊기도 했다.
1960년대 초 강파월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그의 시가 중앙의 일간 D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발표됐는데, 당선 시는 자신의 작품인데 작자의 이름은 강파월이 아니었다. 연하의 친구가 그의 작품을 송두리째 베껴 응모한 것이다. (중략) 강파월은 이 일로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일생을 견뎌내야만 했다.
- 시인 김규태, 위의 책
1963년 폐결핵으로 34세에 요절한 ‘산호’ 동인 장세호 시인도 ‘대학촌’의 단골이었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인 그는 술과 그림과 친구를 좋아했다. 특히 화가 하인두河麟斗와 의기투합, 무척 가까이 지냈다. 장세호는 폐결핵을 앓아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했다. 친구들과 대화 도중에 기침을 하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는 했다. 그래도 그는 틈만 나면 집을 뛰쳐나와 ‘대학촌’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장세호 시인의 집은 초량동 산비탈의 초라한 초가였다. 집 왼쪽에 벼랑이 있고, 그 아래론 버려진 쓰레기와 시커먼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이 초가에서 눈먼 할머니와 과년한 누이동생과 셋이서 살았다. 그의 방에는 천장까지 장서로 가득 차 있었다. 초기 문단 무명시인의 시집부터 ‘폐허’ ‘창조’ ‘백조’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친구나 후배들이 집에 찾아오면 이웃집에서 걸러 온 밀주를 시켜 통음을 하고는 했다.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 필자의 졸저, 『부산문화이면사』, 1991년
하루는 화가 하인두가 추연근秋淵槿 등의 미술동인과 함께 장세호 집을 찾았다. 이날은 평소 보지 못했던 한 규수가 술상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분기 없이 복스러운 자연 얼굴,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앞섶이 찢어질 듯 부푼 가슴팍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이 미지의 처녀를 방안에 들게 청했다. “도대체 이 처녀가 누구냐?” “내 제자여.” 화가들은 매력적인 처녀 앞에 넋을 잃었다.
1962년 장세호는 결혼을 하고 아기도 얻었지만 날이 갈수록 병세가 깊어져 마침내는 누워서 지내는 처지가 됐다. 친구들이 그의 집으로 문병하러 찾아갔더니 장세호는 기어이 부인에게 술시중을 들게 했다. 아무리 술꾼이라지만 환자가 누워 있는 방에서 술을 마시기란 무엇했다. 그러나 천하의 애주가인 장세호는 “술 먹는 것을 바라만 보아도 즐겁다”며 친구들에게 자꾸만 술을 권하는 것이었다.
‘대학촌’의 단골 화가 임호 또한 소문난 애주가였다. 1966년 부산 최초의 전국 규모공모전인 ‘한국국민미술전람회’를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는 야외 스케치를 나갈 때 곧잘 “휘발유를 좀 넣고 가자”고 말했다. 이는 물론 소주를 마시고 가자는 뜻이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즐겨 마셨는지는 생전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서성찬徐成贊이 다음과 같은 농을 건넨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자네가 먼저 죽으면 무덤에 구멍을 내서라도 술을 대령하겠네.”
임호는 영도 대평동 작은 화실의 반을 온실로 만들어 선인장을 비롯한 갖가지 화초를 가꾸기도 했으며, 손수 새장을 만들어 십자매 등을 기르기도 했다. 그의 솜씨는 아주 다양해서 액자의 조각까지 스스로 제작했고, 비좁은 자신의 집 담벼락에 사슴이 노니는 장면을 직접 부조 식으로 그리기도 했다. 평소 지병인 신경통과 고혈압에 시달렸던 임호는 그러나 신경통약 구르마징의 광고모델로 나섰을 만큼 멋쟁이로 다른 화가들과는 유별난 면모를 갖고 있었다.
- 필자의 졸저, 위의 책.
‘대학촌’ 주인은 성(姓)이 백씨여서 단골들은 그를 ‘백촌장白村長’ 이라고 불렀다. 그는 남근男根 수석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이를 가끔 은근히 자랑했다. 단골 화가 임호는 그보다 더 귀한 여근수석女根壽石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남녀 수석을 따로 둘 것이 아니라 혼사를 시켜 함께 살도록 하자는데 뜻이 모아졌다. 하지만 누구 집에 남녀 수석의 혼례식을 올리느냐는 문제로 옥신각신 다툼이 일어났다.
“남자 집으로 시집 와서 내 며느리가 되는 것이 원칙이다.” “술집에 시집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데릴사위도 있으니 신랑이 신부집으로 와야 한다.” 결국 술집에서보다 조용한 가정집에서 혼례를 올려야 한다고 하여 임호 집에서 식을 올렸다. 병풍을 치고 남녀 수석을 양쪽에 마주보게 놓아두고 됫병 청주와 쥐고기포, 과일 몇 개를 놓고 촛불을 밝혔다. 임호는 “오늘 우리 집으로 장가를 들었으니 첫날밤은 여기서 새워야 마땅하다”며 한잔 가득 부어 잔을 백촌장에게 권했다. “자아, 사돈 한잔 해라!” 이렇게 하여 혼례를 올린 임호 집에 남녀 수석 신혼방이 차려졌고, 결국 여근수석도 임호 차지가 됐다.
-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내 가슴에 안기기에 너무 큰 가을’
작가 최해군崔海君은 ‘나의 교유록-남포동 그날 그 사람들’에서 국제신문이 남포동 문화를 형성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 그는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사옥이 부산 원도심에 위치한데다 문인이 많았던 사실을 든다. 1952년 동광동에서 남포동 입구로 사옥 이전에 이어 59년 대교동 신사옥에 자리했고,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폐간될 때까지 ‘광포동’이 생활권이나 다름없었다는 것.
폐간 이전의 국제신문에는 문인이 많았다. 생각나는 대로 들어보면 이병주(李炳注·소설) 이형기(李炯基·시) 조영서(曹永瑞·시) 최계락(崔啓洛·아동문학) 구자운(具滋雲·시) 허천(許天·수필) 정영태(鄭永泰·시) 김규태(金圭泰·시) 임수생(林秀生·시) 배승원(裵勝源·수필) 최화수(崔和秀·소설) 들이었다. 문학인만이 문화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도 알게 모르게 남포동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작가 최해군 나의 교유록], 부산일보 2003년 9월 29일.
여기서 이름이 빠진 문학인들이 더 있다. 50년대 피란시절의 방송작가 이진섭李眞燮, 시인 정진업鄭鎭業, 소설가 송지영宋志英이 그들이다. 부산일보로 옮긴 손중행孫重行, 김태홍金泰洪 시인도 한때 국제에 몸을 담았었다. 특히 송지영은 최호진崔虎鎭 조동필趙東弼들과 함께 국제신보 논설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지방지를 중앙지 수준으로 발전시켰고, 처음 원고료를 지불하는 기명기사를 받는 공헌도 했다.
송지영이 단골로 출입한 다방은 ‘금강’ ‘밀다원’의 문인사회가 아니라 보수반동의 작가나 젊은 작가들이 자주 모이는 ‘야자수’였다. 일본 외무성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명사 박석윤朴錫胤의 딸 셋이 차린 서울 무드가 물씬 풍기는 일종의 바라크 다방이었다. 송지영은 빈핍과 좌절의 피란민 인상 대신에 나비 타이까지 매고 멋을 부렸는데, 경제학자 동료 최호진과 음주로 밤을 새기도 했다.
대학 영문과를 나온 미녀 김숙金淑의 요정은 부산 임시수도의 거물들이 모이는 일급 사교장이었다. 마돈나 김숙의 미인계가 상당한 유인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군소 명사들은 그녀의 치맛바람에 말려서 돈을 마구 뿌리면서도 “이놈”, “저놈”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물론 송지영 들도 그런 대접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김숙은 큰오라버니 뻘인 그들에게도 반말을 했다.
“이 방은 내가 특별히 송군 자네에게 주네. 피라미 국회의원 녀석들도 보내고 준 거야. 술 실컷 마시고 곯아떨어져 봐.”
- 고은, 『1950년대 - 그 폐허의 문학과 인간』
국제신문에 몸담았던 문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원도심 문화사랑방에서 긴다, 난다 하며 ‘한 가락’들을 했다. 모두 한결같은 애주가들로 ‘광포동’을 끔찍이도 사랑했다. ‘청추회’ 전신인 ‘삼각회’에서부터 ‘양산박’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광포동’에서 숱한 사연을 남겼다. 1974년 제5대 부산문인협회 회장에 선임돼 1982년까지 4차례 연임한 이형기는 피란시절부터 문재文才로 이름을 날렸다.
이병주와 이형기는 진주농림학교 사제지간인데 등단은 제자인 이형기가 먼저 했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문예文藝』 창간호에 시를 투고한 것이 추천받아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된 이형기는 『문예』지 50년 6월호에 추천을 완료하고 시인으로 데뷔한다. 6.25로 부산에 피란을 온 동국대에 입학한 그는 대학생이라기보다 문단에 정식 데뷔한 시인으로서 기라성과 같은 피란문인들과 어울렸다.
이형기는 동국대학이 신창동 대각사에서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동 금강다방이나 남포동의 술집 ‘갈매기’를 곧잘 들락거렸다. 이곳에서 그는 김동리金東里 이봉구李鳳九 조연현趙演鉉 들과 어울렸는데, 최연소 나이로 총애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그에게는 행운이 계속 이어져 도청 옆의 하숙집에서 한 여성과 동거상태와 다름이 없는 열렬한 연애를 꽃피워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게 했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 너무나 벅찬 커다란 가을이 / 숭엄한 가을이 / 아무데서나 나를 향해 밀려든다 / 내 바퀴에 역력한 차바퀴 / 여인아 그곳에 눈물을 쏟으라….
감수성이 뛰어난 이형기의 이런 시는 많은 사람들을 감격시켰는데, 소설가 김말봉은 자신의 둘째딸을 이형기와 결혼시키려고 그를 몇 차례나 자기 집으로 데려가 잠을 재우고 대학 등록금을 대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형기는 따로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고, 어느 문학소녀가 선물한 하얀 명주 머플러를 오스카 와일드처럼 핑크빛으로 염색해서 두르고 예술지상주의 늪에 빠져 ‘광포동’을 누비고 다녔다.
이형기가 하숙집에서 뜨거운 사랑을 엮고 있을 때 계룡산 동학사에 머물던 시인 김구용金丘庸이 영양실조 상태로 부산을 찾아왔다. 김동리가 딱하게 여겨 이형기에게 하숙집에 그와 동거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형기는 마지못해 김구용을 하숙집으로 데려갔고, 해병대 출신 소설가 오유권吳有權 들도 때때로 그의 하숙방 신세를 지게 되었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빼앗긴 이형기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숙방 신세를 지는 이들은 이형기가 달콤한 연애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란생활 신세이다 보니 이발비는 물론 목욕비도 없는 딱한 처지였다. 하숙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그들의 외투에서 이가 방바닥으로 기어 나오고는 하였다. 이형기가 이를 보고 소리쳤다.
“이 잡으소! 이 잡으소!”
그러면 김구용은 불살생의 염불을 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필자의 졸저, 『부산문화이면사』, 1991년.
이형기의 스승 이병주는 6.25동란 중 친구 이광학李光學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아 머리를 깎고 합천 해인사에 입산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갈등이 심했던지 밤중이면 사찰을 빠져나와 산촌의 술로 목을 축였다. 그는 끝내 산중에 남아있지 못하고 하산했다. 그도 부산으로 찾아와 1955년부터 61년까지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특유의 왕성한 필력으로 문명을 떨쳤다.
이병주는 ‘중립통일론’의 필화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풀려난 뒤 1965년 7월 『세대』지에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 문단에 데뷔한다. 이 작품은 방대한 규모의 소설적 배경과 흥미로운 서사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를 졸업한 이병주는 1933년 태생의 제자 이형기보다 15년 늦게 등단했다. 그것을 벌충이라도 하듯이 그는 1992년 타계하기까지 대하소설 <지리산> 등 많은 작품을 폭발적으로 썼다.
이병주는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호주(豪酒)에 성격 또한 호쾌하고 거침이 없어 가식과 기교를 싫어했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한 그는 놀라운 속필과 달필로 집필에 들어가면 파지 한 장 내지 않고 원고지 50~60장을 단숨에 써 내려갔다. 정교한 미문(美文)은 아니지만, 그의 문장은 힘과 속도감에 넘쳤다. 풍운의 삶을 산 걸출의 문사였던 그는 고희 기념 잔치 이듬해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신태범의 부산문화야사>, 국제신문 2001년 6월.
‘지애至愛한 정운丁芸, 최애最愛한 당신’
1967년 2월 13일 오후, 김규태 시인은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의 전화를 받고 광복동 책방골목 모란다방으로 나갔다. 청마가 문인협회 부산지회장으로서 부산예총지부장에 당선된 지 며칠 안 된 날이었다. 소설가 윤정규, 무용평론가 강이문姜理文, 미술협회 오재정吳在正 등 청마를 추대했던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청마는 아동문학가 J모란 사람이 예총지부장 당선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을 꺼냈다.
그 J란 사람은 사사건건 시비를 일삼는 말썽꾼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존재였다. 항시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식의 투정으로 마치 정의감이 걸출한 위인인 것처럼 남 헐뜯기를 일삼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자신도 문인협회 회원이므로 청마가 예총지부장으로 추대되다시피 한 마당에 생트집으로 당선무효 운운하면서 딴소리를 한다는 것은 분명 반역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으로 J는 문인협회 사상 초유로 제명을 당하는 기록을 남겼다.
-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그 사람들』
김규태 등은 “그런 무뢰한의 작태에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했고, 청마는 소주나 한 잔 하러 가자며 일행을 동광시장(현재 부산데파트 자리) 속칭 ‘짬보집’으로 안내했다. 낮에는 밥을 팔고 밤에는 술을 파는 10평 남짓한 식당이었다. 그들은 1시간가량 술을 마셨는데 혈압 때문에 술을 절제한다는 청마도 이 날은 잔을 사양하지 않았다. 청마 등은 다시 2차로 모란다방 앞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 한 잔씩이 돌았다. 청마는 스탠드의 모퉁이에 앉아 눈에 뜨일까 말까, 그런 미세한 동작으로 어깨춤을 추었다. 사실 이런 흥겨운 모습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필자가 바로 옆자리에 앉았으니까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청마가 일어나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가 조금은 취한 듯해서 윤정규더러 찻길까지 모셔다드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청했더니 그러마 하고 배웅을 나갔다가 10분 쯤 뒤에 돌아왔다. (중략) 술자리에서 배웅한 게 그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시인 김규태, 앞의 책.
그날 밤 9시 30분, 청마는 윤정규의 배웅을 받으며 수정동 자택으로 가던 중 중앙로에서 급행버스에 치여 숨졌다. 향년 60세, 아직 정정한 연세였다. 청마는 그날 저녁 만취한 상태에서 정운 이영도丁芸 李永道에게 전화를 걸어 꼭 할 말이 있어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정운은 “너무 취했으니 오지 말라”며 끝까지 거절했다. 다음날 아침 정운에게 걸려온 전화는 청마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부음이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 애모는 / 사리로 맺혀 / 푸른 돌로 굳어라.’
- 이영도, ‘탑.3’ 전문
정운 이영도는 청마 유치환이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고 노래한 바로 그 ‘사랑한 당신’이었다. 만주로 떠돌다 1945년 귀향, 통영여고 국어교사가 된 38세 유부남 청마는 남편을 잃고 얼마 안 되어 교사 발령을 받은 딸 하나가 딸린 29살의 청상 정운에게 마음이 사로잡힌다. 그는 매일 그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그 편지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럴수록 그의 절박함은 더 부풀어 올랐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그리움’ 전문
정운은 남편의 병간호에 젊음을 고스란히 내다바친 상태로 한이 가슴 깊이 사무쳐 있었다. 반대로 청마는 부인과 세 딸이 있었다. 그렇지만 청마는 정운의 ‘가을하늘처럼 높고 외롭고 깨끗함’에 슬프도록 온통 사로잡힌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날 어쩌란 말이냐’라고 그는 절규했다. 3년에 걸친 청마의 뜨거운 편지를 받고 또 받은 끝에 정운의 마음이 움직였다.
‘지애(至愛)한 정운, 최애(最愛)한 당신’으로 내닫는 청마의 사랑 편지는 끝이 없었다. 둘의 연모는 그들의 육체가 머물렀던 시공간 속에 전무후무한 애틋한 물그림자를 남기는데, 이를테면 정운이 부산에 와 있을 때 청마는 경남 안의에서 열두 시간 버스를 타고 와서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 ‘최애한 당신’을 바라보며 대화만 나누고 돌아가고는 하였다. 이 노릇을 2년 동안 한 주도 빠뜨리지 않았는데, 그러고도 편지는 편지대로 따로 보냈다.
정운도 마찬가지였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중략) 정작 마주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민망하고 말이 도로 없어지는 저 심심한 사랑의 깊이는 무엇이었을까. 이영도는 ‘나의 하늘은 투명한 9만 리’라고 했다.
- ‘최학림의 예술과 사랑-이영도’, 부산일보 2014년 6월 28일.
청마는 스물한 살에 딸 하나를 얻고 청상이 된 정운을 오랜 세월 동안 그리움과 사무침만으로 일관한 플라토닉 러브를 한 것이다. 그의 순정한 사랑의 징표는 20년 이상 줄기차게 써 보낸 5천여 통의 러브레터가 뒷받침한다. 말술을 마다하지 않고 너털웃음으로 말을 대신한 청마, 정운에 대한 사랑을 가슴속에서만 재가 되도록 불태우며 그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다’고 노래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후략)
- 유치환, ‘행복’
정운은 청마의 마지막 전화를 받고 “찾아오지 말라”고 거절했던 것을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그렇게만 하지 않았던들 그이가 그렇게 황망하게 이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하고 정운은 사는 동안 그 회한을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청마가 작고한 한 달 뒤, 정운은 대구의 이윤수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랑을 잃게 된 자신의 아픔을, 읍소에 가까운 자기 고백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20년의 열애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열애를 행위하지 못하고, 오직 희구로써 목마른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애정을 신앙에까지 승화시켜 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의 저의 심경을 어찌 알아주겠습니까?
- 이영도의 편지글 일부.
청마가 불의의 윤화로 타계하자 정운은 다른 여인이 청마의 연서를 책으로 묶어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청마의 연서를 받은 다른 젊은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운은 청마를 진정으로 사랑한 장본인은 자신이라는 징표를 남겨두고 싶었다. 국제신보 문화부장 최계락에게 부탁, 서둘러 청마의 연서를 가려내 책으로 펴냈다. 청마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책이름이 되었다.
“등나무는 굽어야 바로 선 것이며…”
“‘땅 위의 바위는 구름은 스쳐 보내되 붙잡지 아니한다.’는 당신의 말씀처럼 그는 세상의 뜬 가치에 미련을 두지 않고 주향酒香과 묵취墨趣 속에서 한 세월을 살았던 예술가였다.” - 한국화가 윤제 이규옥潤齊 李圭鈺에 대한 그의 제자, 한국화가 정갑주의 회고이다. 윤제와 함께 부산 한국화단의 긍지로 자리했던 청초 이석우靑艸 李錫雨 또한 윤제와 호형호제 하며 주향과 묵취 속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늘 주향에 젖는 그들은 당연히 ‘대학촌’과 같은 ‘광포동’ 문화사랑방을 즐겨 드나들었다. “청초가 있는 자리에 윤제가 있고, 윤제가 있는 자리에 청초가 빠진 일이 거의 없었다. 청초는 윤제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는 게 인간문화재 천재동千吊의 증언이다. 윤제와 청초는 대단한 애주가였지만, 자신이 술값을 치러야 하는 것을 절대선絶對善으로 여겨, 정열과 낭만을 누리느라 가난을 달고 살았다.
동아대 재직 시절, 윤제 선생은 서울에서 김기창金基昶 등 후소회 멤버들이 내려오면 주머니에 한 푼도 없으면서 그들을 멋들어진 술집으로 데리고 가 거창하게 대접했다. 화기애애하고 취기가 막바지에 이르면 선생은 주인마담을 불러 그녀의 치마폭에 화조화 한 폭을 일필휘지로 그려 술값에 대신하기도 했다. 그는 또 한 단골 술집의 외상값이 세월에 묻혀 계산하기 어렵게 되자 한 폭에 참새 100마리를 그려주어 술값에 대신하였다.
- 정갑주, ‘윤제 이규옥 선생님’. 『예술부산』 2010년 3,4월호
광복동 입구 ‘대학촌’ 건너편에 갓과 곰방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갓집’이라 씌어진 간판이 걸려 있는 통술집이 있었다. 이 집 주인은 미인으로서 인기가 높았던 허 마담으로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았다. 문인, 화가, 기자 등은 주머니 사정이 좀 넉넉하면 ‘갓집’을 찾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맞은편 ‘대학촌’으로 몰려갔다. 어느 쪽이나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거나 개똥철학을 논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갓집’에 갔는데 청초 이석우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앉아있었다. “작은 형님 윤제가 만취 된 채로 나가 행방을 모르겠는데, 어디서 실수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걱정이 됩니다.”고 했다. 혹시나 싶어 ‘대학촌’에 달려가 보니 과연 청초 말대로 윤제가 일본도(日本刀)를 빼들고 있었다. 윤제는 취기가 돌면 곧잘 옆구리 칼을 빼는 시늉을 하면서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쳐들어갈 기세를 취하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그런 자세로 ‘대학촌’ 주인 백촌장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흔히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하지만, 청초에게 삼락(三樂)은 그림과 벗과 술이었다. 청초는 술에 관한한 밤낮의 구별이 필요 없었고 청탁(淸濁) 또한 가리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화가뿐만 아니라 시인묵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들과 밤낮없이 뒤섞여 담소하고 마시고 취하는 것을 즐겼다. 청초는 그림 이상으로 술을 즐겼고, 윤제와 함께 술과 관련한 일화를 가장 많이 남겼다.
1960년대는 모두들 힘들고 어려웠을 때이다. (중략) 청초는 박노석 이윤제 들과 ‘대학촌’예서 가볍게 1차를, 남포동 포장마차를 전전하며 2차, 3차, 4차에 나섰다. 이윽고 주흥이 가득해진 청초는 “어이, 오늘 나 월급 탔는데, 조금씩 나눠” 하면서 남포동 구두닦이와 신문가판 소년들에게 월급봉투를 모두 털어버린 것이다.
당시 청초는 근무하던 학교 옆에 방 한 칸, 부엌 하나 딸린 관사이던가 하는 집에서 기거했는데, 벌써 몇 달째 봉급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부인이 학교 서무과에 왔을 때는 이미 6개월 어치 봉급이 가불된 후였다. 선생은 평생 그렇게 술을 좋아했지만 남의 술은 원치 않고 그 가난 속에서도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 박충검, ‘부산의 예술혼-청초 이석우’, 부산일보 2001년 1월
청초는 화실을 광복동, 대신동, 송도 등지로 옮기면서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곳에는 제자들보다 술꾼들이 더 많이 찾아들었다. 그의 풍류생활이 부른 현상이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그의 입에선 ‘정선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왔다. “등나무는 굽어야 바로선 것이며, 꽃이 화려한 것은 지기 때문이지. 인생도 그림도 다 마찬가지인 거여.” 청초가 소주잔을 들며 제자들에게 일러준 말이다.
윤제와 청초는 나중에 동아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이곳 동료교수 서양화가 김종식金宗植도 술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로 막걸리를 마셨고, 과묵한 성품으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린 자리에서도 말없이 마시기만 했다. 그는 자기 혼자 주점에 가서 마시기보다는 제자들이 다투어가며 술대접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걸주乞酒한다’는 뒷말이 따르기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수학하고 부산을 고집하며 활동한 김종식은 부산의 서양화가 1세대로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새로운 예술활동을 모색하며 부산 최초의 미술동인 그룹 ‘토벽회土壁會’를 창립하였다. 자유로운 화풍을 구사한 그는 600여 권의 스케치북과 2만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유화작품을 남겼다. 식사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스케치북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결과이다.
김 화백의 아들이 장가가는 날 하객의 한 사람으로 결혼식장에 들러 상객(上客)과 인사를 주고받는 자리에서 부인이 나를 보더니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그 원인을 알만하였다. 얼마 후 그를 만난 자리에서 “야, 김 화백! 너 마누라에게 나를 몇 번 팔아먹었나?” 했더니 즉시 하는 대답이 “몰라, 한 대여섯 번이 될까?” 하였다. 매일 술 취해서 밤중에 들어오면 부인이 “오늘 또 누구하고 마셨소?” “천재동하고 마셨소.” 한두 번이 아니고 날마다 천재동, 천재동 했으니, 부인이 나를 옳게 볼 까닭이 없었다.
- 천재동 회고록, 『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범어사 일주도로의 ‘금정산 문화의 거리’ 큰 바위에 부산 최초의 ‘김종식 그림비’가 동료 화가들과 후진들에 의해 세워져 있다. 그의 그림과 함께 새겨진 비문은 평소 그이와 술집에서 곧잘 어울렸던 시인 김규태가 썼다.
‘손은 그의 영혼을 대신하여 움직였다. 영혼의 황홀한 전파를 손으로 전달받아 그리고 지우고 또 문질렀다. (중략) 잠자기 전까지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쉬지 않은 까닭이다. 찬란한 손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 김종식 그림비 비문.
- 월간 『문학도시』 2016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