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산행보다 흥겨운 저수령 뒤풀이로 기억될 (대간 28)
1. 일자: 2014. 2. 28 (토)
2.
장소: 벌재~저수령
3.
행로 및 시간
[벌재(09:15,
625m, 문복대 3.7km) -> (들목재/1020봉) -> 문복대(10:47, 1077m, 저수령 2.3km) -> (옥녀봉/장구재) -> 저수령(11:43, 850m)]
<
대간 28구간
산행을 준비하여 >
D-1,
28구간은 당초 벌재~싸리재 구간이었으나 지난 해 4월 죽령에서 출발하여 저수령까지 내처
달린 터라 이번은 벌재에서 저수령까지만 걷는 6km짜리 짧은 구간으로 변했다. 당시 추가로 걷는, 싸리재 넘어 유두봉과 시루봉 길은 만만치 않았으나, 오늘은 그 덕에 갈무리해 두었던 맛난 음식을 꺼내 먹는 기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산 후 삼겹살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
< 28구간 고도 표 >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고도
표를 살핀다. 완만한 높이로 올라섰다가 더 완만하게 내려선다. 초반
문복대까지 450미터의 비고만 이겨내면 무리는 없다. 쉬어
간다고 해도 좋을 편한 코스다. “벌재에서 저수령까지는 시오리 길 널널한 육산이니 암릉의 긴장을 풀고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라는 말을 믿어 본다.
<
희망사항
>
대장님께서 카페에 ‘백두대간 8기 완주예정자 현황’을
올리셨다. 2명의 개근자 밑에 내 닉네임과 실명이 표시돼 있다. 나
이외에도 10여명의 이름이 함께 써 있다. 자랑스러운 이름들이다. 굳이 상을 받는다고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켰다는 의미에서 박수를 보낸다. 몸이 아파, 혹은 늦게 합류해서 이번에 완주하지 못하지만 곧 대간
완주자 대열에 합류한 나머지 288들에게도 그간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2년을 꾸준히 참여하여 결실을 거두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그 목표가 한 여름의 뙤약볕과 겨울 추위와 눈밭을 걸어 달성한 것이라면 더욱 가치 있다. 대간 종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 즉 두발로 걷기의 지존인
것이다.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말을 들어가며 이룬 쾌거이니 아니 대단할
수 없다. 22번의 무박, 컴컴한 새벽 만물이 잠자고 있을
신새벽을 헤치고 대간 능선에 설 때마다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으나 지나고 나니 이 역시 좋은 추억으로만 남는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했던가? 오늘
산행은 대간 종주를 앞두고 내 자신과 그간 함께 헸던 모든 이들이 대간 길에서 힐링 받는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
벌재 가는 길에
>
산행 후 저수령 정자에서의
뒤풀이 파티를 위한 음식으로 장어와 새우를 샀더니 보따리가 많아진다. 일회용품을 넣어 두툼해진 배낭을
메고 아이스박스를 든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기이하다. 버스와 전철에서 뭇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겨울에 아이스박스라, 게다가 배낭은? 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무엇일까?’하는 눈치다. 개의치 않는다. 배낭을 메면 예전에 예비군 군복을 입었을 때처럼
얼굴이 뻔뻔해진다.
교대역에 내렸다. 앞에 양 손에 뒤풀이 준비거리를 든 해운님이 걸어간다. 바람님이 마중 나오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오른다. 반가운 얼굴들과 말을 건내고 내 자리에 앉는다. 대간 놓아 두고
설악 간다던 까막바위님도 보인다. 아무리 간통죄가 없어진다고 해도 대간 날 남의 집 기웃거리면 배신, 배신이다. ㅋㅋ
너무도 익숙하고 편한 내 자리에 앉는다. 이제 이 9번 명당자리에 8기 대간이라는 이름으로 한 반 더 앉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오늘이 더 소중해진다. ㅎㅎ
<
벌재에서 문북대
>
9시 10분 벌재, 반대편은 초소가 있고 이중 삼중으로 출입금지 펜스가 처져 있다. 험하고
위험한 황장산 길 때문이다. 반대편에서 출발한다. 고개 하나를
넘자, 길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 다리가 나타난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유박사님이 단체사진을 찍는다. 대세 오르막이지만 완만하여 걷기에 부담이 없다. 날이 찌뿌등하다. 바람이 꽤 차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날씨가 심술을 부릴 듯 하다.
후미로 쳐진다. 행진님과 제주도 여행 준비를 이야기 한다. 적지 않은 이들이 움직이려니 그것도 비행기로 이동하려니 신경 쓰이는 일이 여럿이다. 이동 차편, 숙박, 식사
등 행진님이 척척이다. 워낙 경험이 많으니 난 ‘바람잡이’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되겠다.
들목재는 어디인지도 모르게 지났다. 작은 오르내리막이 이어진다. 덩달아 흙 길과 눈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내리막 비탈에서 아이젠을
찬다. 연이어 두 개의 아이젠의 끈을 끊어 먹을 것 보면 내 발걸음에 문제가 있나 보다. 덕분에 청한님에게 아이젠을 하나 더 얻었다. ㅎㅎ
<
벌재 초반 산행 풍경 >
고도계도 시계도 없이 걷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며 길을 나아간다. 긴
오르막을 올라선다. 멀리서 보면 이곳이 정상인 듯 하였으나 막상 와 보니 앞에 더 높은 봉우리가 있다. 이곳은 1020봉인가 보다. 바위
전망대에 선다. 멀리 황장산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았다면 산 너울이 근사했을 곳이다. 행진님을 앞세워 카메라를 누른다.
뒤편 멀리 도드라지게 온전한 삼각형 형상의 봉우리들이 멋지다.
< 1020봉에서 본 풍경 >
선두에게서 무전이 온다. 문복대를 지난단다. 빠르다, 아마도 한설지님과 까막바위님이 날아가고 있나 보다. 중미는 봉우리를 타고 가고, 후미인 난 우회 길을 둘러 간다. 선두는 비탈을 타고 내려온다. 순식간에 중미에 위치하게 된다. 문복대로 오르는 마지막 오름에는 꽤 미끄러운 빙판과 작은 암릉이 이어졌다. 유박사님은
‘누가 이 길을 편하다 했어!’하며 투덜대지만 사실 이 정도
어려움도 없다면 그게 무슨 대간 길이겠는가? ㅎㅎ
문복대에 도착했다. 출발 1시간 32분 만이다. 이른 행보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사이 후미까지 다 도착했다. 길지 않은 산행 중 벌써 2/3를 와 버렸다. 저수령을 향해 나아간다.
<
문복대에서 저수령 >
문복대에서 커피와 쿠키를
나누어 먹고 잠시 담소를 나눈다. 이제 종아리에 힘이 좀 붙었는데 하산 길이다. 1000미터 후반대의 내리막 길에는 눈이 제법 깊게 쌓여 있다. 조심스레
고도를 낮추어 가자 길이 이내 순해진다.
< 문복대에서 >
바람이 점점 게세진다. 뒤풀이가 걱정된다. 30분 정도 내려서자 좌측으로 도로가 보인다. 거리는 1km 이상을 가야 하는데, 설마 하며 걷는다. 고도상으로는 아무래도 보이는 그곳이 저수령 같다. 짧은 등로가 아쉽기도
하지만 주려 오는 배를 생각하면 어서 날머리로 가고 싶다. 한참을 내려선다. 수 많은 표지기가 나붓낀다. 좌측으로 임도가 보인다. 망설이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넘어야 저수령
이란다. 더 가야겠다.
고도 900미터 대로 올라섰다가 좌측으로 길을 꺾는다. 부근에 농장이 있나 보다. 심상치 않은 구조물이 보이더니 길은 또
가파른 비탈이다. 고도가 높다 보니 응달은 여전히 눈 밭이다. 아이젠을
벗지 않길 잘했다.
< 저수령 가는 숲 길 / 저수령에서 >
정자가 보이고 경상북도에서 만든 커다란 저수령 돌비석이 서 있다. 2시간 30분, 산책 같은 대간 길이 끝났다.
<
에필로그
>
저수령, 재의 높이가 만만치 않아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곳이다. 정자에
비닐 천막이 처져 있고 부근에서 ‘쿵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이 가 보니 한설지님이 지난 겨울 정자 안에 켜켜이 쌓인 얼음을 깨고 있었다. 벌써 정자 바닥의 반은 나무가 드러난다. 누군가의 수고가 더 많은
누군가의 행복을 가져온다.
뒤풀이 식당이 차려진다. 불 판이 얹혀지고 고기와 해산물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간다. 맛있게 익은 김치에 먹음직스러운 장아찌, 다듬느라
손이 많이 갔을 겨울 야채가 입맛을 자극한다. 아카님표 밤 밥과 한설지님과 옥혜님의 ‘음료’가 단연 인기다. 술이
한순배 돌아가자 시끌벅쩍하다.
음식 연기로 정자 안이 뿌옇다. 비닐 천막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온다. 그 안의 20여명의 사람들… 음식과
옷이 초라했다면 영락없는 거지패거리다. ㅎㅎ
대장님은 늘 그렇듯 서서
흐뭇한 표정으로 음식이 익어가는 걸 보고 계시다. 불과 불 판에 따라 음식이 익어가는 속도가 차이가
난다. 먼저 익은 고개가 나뉘어진다. 정이 느껴진다. 맛난 음식에 입이 즐겁고, 오고 가는 덕담에 귀가 즐겁고, 익어 가는 음식을 보는 눈도 즐겁다. 많은 이들의 작은 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흥겨운 뒤풀이로 이어졌다.
훗날 오늘을 기억하면 ‘짧은
산행보다 흥겨운 저수령 뒤풀이로 기억될’것이다. ^.^
< 28구간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