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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남부 사태 : 무슬림 반군 (하)
South Thailand insurgency
5. 쿠테타 이후의 상황 인정
'2006년 9월 19일의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남부지방 정책에 있어서 이전의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 정부가 취했던 접근방법을 반군들의 "마음과 영혼"을 승복시킨다는 방법으로 대체하면서 주요한 정책을 실시했다.
군사정권 의장인 손티 분냐랏끌린(Sonthi Boonyaratglin) 장군은 '남부 국경지방 행정센터'(Southern Border Provinces Administrative Centre: SBPAC) 및 '민경군 태스크포스 43'(Civilian-Police-Military Task Force 43: CPM 43)을 부활시킨다고 발표했다. 손티 장군은 '왕립 태국 육군'(RTA) 이 주도하는 관계기관 합동기구인 '남부 국경지방 평화구축 사령부'(Southern Border Provinces Peace Building Command)를 해체할 것이라면서, 그 예하 병력들은 CPM 43 예하로 배속될 것이고, CPM 43은 SBPAC와 공조하여 작전을 전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탁신 전 총리는 2001년 중반에 SBPAC와 CPM 43을 해체시킨 바 있다. 당시에는 CPM 43이 SBPAC의 하부 기관이었다.
또한 손티 장군은 스스로 '국내안보작전사령부'(Internal Security Operations Command: ISOC) 수장을 겸직했다. 그 전에 ISOC의 수장은 총리가 맡도록 되어 있었다.(주82) 2007 회계년도에 ISOC에 배정된 예산은 59억 바트(약 2120억원)였다. 하지만 2007년 5월, 손티 장군은 배정된 예산이 모두 소모됐다면서 정부에 20억 바트의 추가 예산을 요청했다. ISOC의 예산은 '기밀 예산'으로 분류되어 관계자들이 정부에 대해 그 사용내역을 보고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돈이다.(주83)
2006년 11월,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과도정부 총리는 반군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레스토랑과 똠양꿍(Tom Yam Kung: 태국식 해물찌게) 식당들을 운영하여 자금을 조달한다고 폭로했다. 그는 똠양꿍 네트워크가 보호비 명목으로 지역의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갈취한 후, 분리주의자들에게로 보낸다고 말했다.(주84)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의 후 아 키오우(Fu Ah Kiow) 안보담당 부장관은 수라윳 총리의 폭로가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면서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말했다.(주85) 군사정권 수장인 손티 장군은, 자신은 아직도 선거로 탄생했다 실각한 정부를 지지하는 "기층의 흐름"을 다루는 데 우선적인 관심이 있으며, 남부 반군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했다.(주86)
한편, 군사정권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다루기 위해 정보 역량과 정찰 장비, 그리고 전화 도청 장비들을 남부지방에서 방콕으로 올려보냈다.(주87) 분럿 솜탓(Boonrawd Somtas, บุญรอด สมทัศน) 국방부장관은 방콕에 대한 공격 우려 때문에 남부 반군들에 대한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망명 중인 한 남성" 때문이라고 언급했는데, 언론들은 그 말이 실각한 탁신 전 총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주88) 손티 장군은 이후에도 남부로 병력을 증강하는 일을 거부하면서, 그 병력들을 방콕에 머물게 하면서 자신이 "지역 공동체 관련 활동"이라 부른 임무를 수행케 했다.(주89)
(주82) The Nation, "Southern groups to be revived", 2006-10-18.
(주83) The Nation, "Sonthi seeks Bt2 bn for ISOC", 2007-5-15.
(주84) The Nation, "Tam Yam Kung networks in Malaysia finance insurgents : PM", 2006-11-21.
(주85) The Nation, "Not all Tom Yam Kung restaurants fund insurgency : Interior", 2006-11-22.
(주86) Bangkok Post, "Sonthi: South not given top priority Army chief blames political distractions", 2007-2-24.
(주87) Reuters, "Thai Army paranoia gives Muslim militants room", 2007-2-20.
(주88) The Nation, "Man in exile is threat: Boonrawd", 2007-2-28.
(주89) Bangkok Post, "Army changes plans to transfer troops to South", 2007-3-8. |
6. 계속되는 폭력상황
6.1. 학교들의 휴교
2006년 11월 27일, 빳따니(Pattani) 도내의 모든 학교들이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다고 발표한 이후, 얄라(Yala) 도와 나라티왓(Narathiwat) 도의 교사들 역시 안전을 우려하여 동일한 절차를 잔행시켜 모두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빳따니 도에서의 휴교 결정은 일련의 소요 사태가 발생하여 2명의 교사들에 대한 잔혹하고도 치명적인 총격 사건이 발생한지 1주일만에 일어난 것이다.
6.2. 고조되는 폭력사태
군사 정권이 "마음과 영혼"의 작전을 실행한 후 몇달 동안 폭력사태는 고조됐다. 쿠테타 직후 5개월 동안 발생한 사망자 수는 쿠테타 이전 5개월 동안과 비교하여 30%나 증가했다.(주44)
반군들은 시린톤(Sirindhorn) 공주가 탄 헬리콥터가 착륙할 예정이었던 착륙장에도 폭탄을 설치하여 그녀를 목표로 했다.(주90) 2007년 2월 21일, 얄라 도에서 시리낏(Sirikit) 왕후의 측근인 탄푸잉(Thanpuying) 위리야 차와꾼(Viriya Chavakul) 여사([역주] 왕실 후원 군경 및 안보자원봉사자 사기진작 위원회 의장)가 탑승한 차량 행렬이 총잡이들의 공격을 받아, 그녀가 부상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목숨만은 피해 달아났다.(주91) 이후 그녀는 정부가 군 병력을 너무 자주 순환 근무시켜서, 보안군이 지역에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또한 그녀는 군 병력이 통신장비 및 방탄조끼도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했다.(주92)
2007년 1월 14일, 삔 콧차틴(Pin Khotchathin)이란 이름의 고무채취 노동자가 얄라 도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의 시신은 얄라 시, 따새 면(Tambon Tasae)에 위치한 한 고무농장에서 발견됐는데, 잘려진 머리가 몸통보다 5 m 위에 걸려져 있었다.(주93) 반군들이 희생자들의 머리를 자르는 일이 항상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은 2004년 5월 이후 발생한 참수 사건 중 22번째 사건이었다.(주94) 사망한 삔 씨의 시신 곁에는 자칭 '빳따니 전사들'(Pattani Warriors)이라 부른 자들이 남긴 짧은 메모지가 발견됐다. 그들은 당국이 분리주의자 단원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라윳 총리는 폭력사태가 고조되자, 군사정권 수장이며 무슬림 출신이기도 한 손티 장군을 비판했다. 그가 반군들을 충분히 완화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주95)
말레이시아의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 총리는 태국을 공식 방문한 후, 태국 정부가 반군들과 협상을 하는 데 중개자가 될 수 있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하지만 닛 피분송크람(Nitya Pibulsonggram, นิตย์ พิบูลสงคราม: [역주] 독재자 쁠랙 피분송크람 원수의 6번째 아들) 외무부장관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주96)
중국 설날(=구정)이 겹친 주말인 2007년 2월 18일 저녁부터 19일 오후 사이에, 반군들은 폭탄 공격 38건, 폭동 26건, 매복공격 7건을 감행했다. 폭탄 공격들은 호텔, 가라오케 바, 송전소, 상업지구들을 목표로 했다. 또한 공립학교 2곳도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3명이 체포됐다.(주97)(주98) 군사정권 수장인 손티 장군과 아리 웡아라야(Aree Wongsearaya) 내무부장관은 이 공격들이 발생하리란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막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했다.(주99) 아리 장관은 나중에 남부 사태에 대한 정부의 전략에 결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주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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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aula Bronstein/Getty Images AsiaPac) 2011년 7월 15일 촬영 : 빳따니 도의 한 심문 및 구금센터에 수감되어 있는 무슬림 반군 용의자들의 모습. 이 장면은 태국 군이 외신기자들에게 공개한 모습이다. 이러한 공개 움직임은 잉락 친나왓 총리가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의 일이다. [크세] |
현재까지 반군들이 감행한 공격들 중 가장 심각한 경제적 테러 행위는 얄라 도에 위치한 '사우스랜드 고무 창고'(Southland Rubber warehouse)를 불태운 일이다. 이 사건으로 4억 바트(약 143억원) 상당의 고무 5천톤이 불탔고, 얄라 시내가 12시간 동안 검은 연기에 뒤덥였다. 태국 최남단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무 저장창고였던 이곳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소방차 30대가 사투를 벌였다. 더구나 이 창고로 진입하는 도로에는 차량 타이어 파괴용 스파이크들이 놓여 있어서 응급 요원들의 활동마저 더디게 만들었다. 이 사건에서 부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주101)
3월 14일, 얄라 도의 베똥(Betong) 군에서 핫야이(Hat Yai) 시로 가던 밴을 반군들이 멈춰 세운 후, 통근자 8명이 처형당했다. 수색대원들이 현장으로 출동하려 했지만, 도로변에 설치된 폭탄들이 접근을 더디게 만들었다.(주102) 최대 반군단체인 '빳따니 통일전선 기구'(PULO)의 대변인 1명은 이 폭력사태의 책임을 공수부대인 '타한 판'(Thahan Phran, ทหารพราน [타한 프란]) 병력이 폭력을 부추긴 데 있다고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이후 일부 반군들에 대해서도 그 행동에 대해 비판했다.(주103)
2007년 3월에는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왕세자의 차량행렬을 목표로 한 폭탄공격 시도도 발생했다. 하지만 지역 경찰이 폭탄이 폭발하기 전에 발견하여 제거했다.(주104)
2007년 4월 9일, 학생들 및 여타 승객들을 태운 픽업 트럭이 장례식에 참석한 후 귀가하던 길에 총격을 받았다. 12세의 소년 2명과 25세의 대학생 2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그날 일찍 총격을 받고 사망한 큰반랑(Khuen Bang Lang) 면의 면장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군대는 최초에 이 총격의 배후가 반군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럭에서 반군 동조자들이 "도발"을 했다는 증언들이 나온 후, 마을의 자경단원이 공격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수백 명의 성난 주민들이 이 총격 사건에 대한 항의시위에 나섰고, 정부에 대해 책임을 요구했다.(주105)
2007년 4월 13일, 빳따니 도에서 보안군이 오인 사격을 가해 무슬림 10대 소년 3명이 사망한 후 시위가 발생했다. 줄지어 들어선 휴대폰 가게 4곳에 대한 방화사건 조사를 위해 파견된 군인들이 일군의 10대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군인들은 소년들이 자신들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민들은 그 10대들이 군인들이 조사 중이던 장소 인근의 주말시장에서 딱지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으로 13~15세 사이의 10대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지역의 군 지휘관인 완차이 파웅쿰(Wanchai Paungkhumsa) 대령은 최초에 10대들이 있던 곳으로부터 총격이 날아와 군인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빠누 우타이랏(Panu Uthairath) 빳따니 도지사와 이 총격사건에 관한 일련의 합의사항들을 도출한 후 시위를 멈췄다. 군대는 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약속하고, 만일 위법한 행동이 있었다면 해당 군인들을 처벌하고 군대를 물린 후 주민들에게 사과하겠다고 말했다.(주106)
2007년 5월 14일, 얄라 도의 무슬림 주류 지역인 반낭 사따(Bannang Sata) 군에서 분리주의 반군들이 길을 가던 불교도 과일채집 노동자 가족에게 총격을 가해, 부부가 살해되고 세 살 된 딸이 부상을 입었다. 반군들은 남편인 쁘라판 뽄라락(Praphan Ponlarak, 36세) 씨와 아내인 찻다깐(Chaddakan) 씨에게 총격을 가한 후 남편의 목을 참수하여, 29번째 참수 희생자로 만들었다.(주107)
2008년 8월 3일, 송클라(Songkhla, 송카) 시내에서 5발의 폭탄이 터져 2명이 부상했다. 같은 날 밤에는 핫야이에서도 폭탄 2발이 터졌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주108)
(주90) Zachary Abuza, "Trends in Thailand's Insurgency in Early 2007", 2007-2-7.
(주91) The Nation, " 2007-2-22 기사".
(주92) Bangkok Post, "Queen's aide: Troops rotated too often", 2007-2-23.
(주93) Bangkok Post, "Rubber tapper beheaded as 3 die in Yala attacks", 2007-01-15.
(주94) Bangkok Post, "Militants behead 25th southern victim", 2007-03-06.
(주95) The Nation, "PM blames junta leader for worsening unrest", 2007-2-13.
(주96) Bangkok Post, "Government turns away Malaysia mediation offer", 2007-2-15.
(주97) New York Times, "South of Thailand Is Rocked by 28 Bombs", 2007-2-19.
(주98) The Nation, "Three arrested over weekend attacks", 2007-2-21.
(주99) The Nation, "Army's admissions not so clever", 2007-2-20.
(주100) Bangkok Post, "Aree says South strategy flawed", 2007-2-20.
(주101) Bangkok Post, "Extremist arson burns 400 million baht of rubber", 2007-2-21.
(주102) The Nation, "Massacre in Yala", 2007-3-15.
(주103) The Nation, "Soldiers help fan unrest in Thai south: separatists", 2007-3-16.
(주104) Bangkok Post, "Queen vows to protect southerners", 2007-3-18.
(주105) Bangkok Post, "Army admits southern killings", 2007-4-11.
(주106) The Nation, "Protest ends after assurances", 2007-4-15.
(주107) "Insurgents behead Buddhist", 2007-4-15.
(주108) 링크 단절. |
6.3. 군사정권의 대응
군사정권은 폭력 상황이 고조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방어적인 자세에서 "강경" 전술로 전환하고, 반군들에 의한 마약 남용을 단속하기 위한 노력도 증대했다.(주109) 2007년 3월, 군사정권의 최고위급 자문 한 사람은 발언을 통해, 반군들이 '알 카에다'(Al-Qaeda)와 '탈레반'(Taliban)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고, 이전 세대의 반군들과 달리 단순한 민족주의적 동기 뿐만 아니라 종교적 극단주의에도 자극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주110)(주111) 하지만 여전히 반군들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도 지적했다.(주112)
'국내안보작전사령부'(ISOC)는 폭력으로부터 불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뚜캄 람마텝'(Jatukham Rammathep)이란 '호신용 부적'을 발행해서 배포하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유명한 부적이 그것의 소지자를 폭력에서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고, 그 덕분에 이 부적은 대량으로 팔려나갔다. 이 부적 판매 계획을 입안한 사람은 ISOC의 얄라 도 지역 부지휘관이었던 마낫 콩판(Manas Khongpan) 대령이었다.(주113)
2007년 3월, 시리낏 왕후는 남부 지방의 모든 주민들을 보호하겠다고 다짐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무기사용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특히 학교의 교사들에게는 더 더욱 그러했다. 시리낏 왕후 전속부관실의 나폰 분탑(Napol Boonthap) 차석 부관은 정부가 남부 지방 소요에 대한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반군들에 대해 화합 정책만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진검 승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위반자들에 대해 사법적인 행동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주104)
2007년 4월, 군사정권의 수장인 손티 장군은 반군과 싸울 수 있도록 훈련을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손티 장군은 태국 남부에 국제 테러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입장을 지속했다.(주114) 2007년 5월, 손티 장군은 남부에서 군 병력을 철수시키고, 그 역할을 지역의 방위 민병대에게 담당토록 했지만, 남부에서 정규군 병력을 교체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주115)
이상과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폭력상황은 지속됐다. 특히, 국제기구인 '이슬람 협력기구'(Organisation of Islamic Cooperation: OCI)의 엑멜레딘 이흐사놀루(Ekmeleddin Ihsanoglu) 사무총장이 태국 군의 행동을 비판한 후 더욱 더 그러했다.(주116)
2007년 5월 9일, 태국 육군은 단일 사건으로는 그 해의 최대 인명피해를 당했다. 도로상의 폭탄 공격으로 7명의 군인들이 사망했다.(주117) 5월 11일에는 또 다른 공격이 발생하여, 경찰관 2명이 피격당한 후 그 시신이 불탔다.(주118)(주119) 당국은 이 사건도 앞서 군인들을 공격했던 집단과 동일한 집단의 소행으로 추정했다.(주120) 5월 31일에도 유사한 방식의 도로 폭탄공격으로 또 다른 군인 11명이 사망했다.(주121)
2004년 1월부터 2007년 6월 21일까지, 태국 남부에서는 반군과 관련된 폭력사건들이 6,850건이나 발생했다. '송클라 왕자 대학'(Prince of Songkhla University, 빳따니 캠퍼스)의 시솜폽 찟피롬시(Srisompob Jitpiromsri, ศรีสมภพ จิตร์ภิรมย์ศรี) 교수는 최소 2,303명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주122)
2007 7월, [태국 남부지방을 관할하는] 육군 제4군구 사령관 한 릴라논(Harn Leelanont) 준장은 군사정권이 남부에 대한 화합 정책을 취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정책이 군 요원들로 하여금 폭력상황을 통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정책이 공무원들이나 무고한 사람들을 반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앉아있는 오리들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주123)
군사정권은 대규모 야단법석을 떨면서 새로운 무기를 사들였고, '스웨덴제 전투기 10여대도 구매'했다 군부는 이러한 장비들이 반군들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주124)
(주109) Bangkok Post, "Government to adopt harder line on insurgency", 2007-3-4.
(주110) The Nation, "Thai militants adopting Al-Qaeda tactics: general", 2007-3-22.
(주111) Bangkok Post, "Southern extremists learning from bin Laden", 2007-3-22.
(주112) The Nation, "Muslim rebels infiltrate villages: Thai junta leader", 2007-3-28.
(주113) The Nation, "Amulets to 'help protect' Buddhists in South", 2007-3-14.
(주114) CNN, "Thailand rejects U.S. help to quell insurgency", 2007-4-19.
(주115) Bangkok Post, "Some troops to pull out of South", 2007-5-12.
(주116) The Straits Times, "Thai militants targeting security forces now", 2007-5-12.
(주117) The Nation, "Seven killed in brutal attack", 2007-5-10.
(주118) Bangkok Post, "Two police killed in broad daylight raid", 2007-5-12.
(주119) Channel News Asia, "Militants kill, burn policemen in Thai south", 2007-5-12.
(주120) The Nation, "Same gang blamed for two attacks", 2007-5-13.
(주121) The Nation, "Death toll of Thursday attacks is 21 : army spokesman", 2007-6-1.
(주122) The Nation, "Sweep-up operation in Yala", 2007-6-21.
(주123) Bangkok Post, "Reconciliation not working, general says", 2007-7-7.
(주124) AFP, "Muslim crucified, two Buddhists beheaded in Thailand: police", 2007-11-28. |
6.4. 2010년의 상황
2010년 1월 2일, 오전 10시경 얄라 도의 반낭 사따(Bannang Sata) 군에서 도로 폭탄공격이 발생하여 군인 3명과 민간인 3명이 부상했다.(주125) 1월13일, 빳따니 도의 한 부둣가에서 폭탄이 터져 마요(Mayo) 군의 위랏 쁘라세또(Wirat Prasetto) 군수 및 여타 민간인 10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폭탄공격으로 무슬림 반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부상자들 중 1명은 사망했다.(주126)
4월1일, 나라티왓 도에서 반군으로 추정되는 용의자들이 총격을 가해 마을 주민 6명이 사망했다. 또한 군경이 이 사건의 현장으로 출동하는 과정에서,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지면서 군인과 경찰 10명이 부상했다.(주127) 5월22일, 분리주의 반군들로 추정되는 용의자들이 차량을 타고 달리면서 가한 총격으로 여성 주민 2명이 살해됐다.(주128) 5월28일, 얄라 도에서 폭탄공격 2건이 발생하여 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했다.(주129)
9월8일, 경찰은 얄라 도에서 자신의 자택에 머물고 있던 '론다 꿈뿔란 께실'(RKK) 지도자 1명을 체포했다.(주130)
(주125) The Nation, "6 injured in Yala Bomb Attack", 2010-1-4.
(주126) The Nation, "1 killed, 11 injured in Pattani explosion".
(주127) Reuters, "Six killed in Thailand's insurgency-plagued south".
(주128) Bangkok Post, "Two villagers shot dead in Yala", 2010-05-22.
(주129) Bernama, "Two Killed, 52 Injured In Two Bomb Attacks In Yala", 2010-05-26.
(주130) Bangkokbiznews.com, "การเมือง : คุณภาพชีวิต". |
6.5. 2011년의 상황
2011년 2월 11일, 주민 3명이 총격을 당한 후 시신이 불탔다.(주131) 2월13일, 차량폭탄 사건 1건이 발생하여, 국인 및 일반인 18명이 부상하여 7명이 입원했다.(주132) 군인들은 반군 1명을 사살했다.
3월22일 밤, 나라티왓 도의 오지 마을에서 10여명의 무장괴한들이 총격을 가해 남성 1명과 여성 2명이 사살됐다. 경찰은 용의자들을 무슬림 반군으로 추정했고, 그들은 이 주민들을 당국의 정보원이라고 생각하여 사살한 것으로 추정했다.(주133) 3월23일, 나라티왓의 한 오지 마을에서 경찰을 태운 트럭에 도로 폭탄공격이 가해졌지만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날 밤에 있었던 주민들의 살해사건도 군경을 유인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됐다.(주133)
4월18일, 얄라 시내의 상업지구에서 차량 폭탄이 폭발했다. 공수 수색대원 1명이 사망하고, 여타 수색대원 4명을 포함하여 23명이 부상했다.(주134) 5월3일, '빳따니 신속대응군 제21연대'(Pattani Task Force 21) 본부에 수류탄 2발이 투하됐지만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5월11일, 빳따니 도의 까포(Kapho) 군에서 축구경기가 진행되던 중 치명적인 폭탄공격이 있었다. 군인 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으로 용의자 8명이 체포됐다. 얄라 도의 얄라 시내에서도 도로 폭탄공격이 가해져 군인 2명과 민간인 2명이 부상했다.(주135)
5월14일, 반군 4명이 한 주유소에 나타나 돈을 요구했다. 주인의 부인이 요구를 거절하자, 반군들은 그녀와 그녀의 자매를 사살했다. 그 후 남편인 사장이 주유소로 와서 반군들 중 1명을 3차례나 총격을 가해 사살했고, 나머지 반군들은 도망쳤다. 사살된 반군은 이 지역 반군의 소규모 분파 지도자로서, 지난 2009년 나라티왓에서 발생한 폭탄 사건으로 수배 중인 인물이었다.
5월17일, 얄라 도의 야하(Yaha) 군에서 도로 폭탄공격이 있었다. 스님 2명이 사망했고, 그들을 호위하던 보안요원 2명이 부상했다. 이 지방 모스크에는 무슬림 100명 이상이 모여서, 이 공격 사건을 비난했다.(주136) 5월18일, 얄라 시내에서 공격자들이 자동 무기들을 난사하여 타한프란(=타한판: 민병 공수수색대) 제47연대 소속 군인 1명이 중상을 입었다.(주137) 5월20일, 얄라 도의 탄또(Tharn To) 군, 반차루빼(Ban Charupae) 지역에서, 제47연대 소속 타한 프란 병력 30명 정도가 반군 4명과 대치하여, 4명 모두 사살했다. 현장에서는 AK-47 공격형 소총 2정, 38구경 권총 1정, 휴대폰 9대가 압수됐다. 사망한 반군 1명은 마애 아피발배(Ma-ae Aphibalbae)로 파악됐는데, 그는 28건 이상의 범죄 혐의가 있는 이 지역 반군의 핵심 지도자 중 1명으로 200만 바트의 현상금이 걸려 있던 인물이다.(주138)(주139) 한편, 나라티왓 도에서도 차량폭탄 2건이 폭발하여 경찰 1명과 민간인 8명이 부상했다.(주140)
[역자 주] 이후로도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고, 2004년 1월 이후 총 사망자 수가 5천명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2011년 7월 3일 총선에서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총리가 이끄는 '프어타이 당'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근년에는 무슬림 반군의 공격사건 소식이 거의 매일 보고되고 있으며, 하루 평균 1.5~2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는 2012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동시다발 폭탄공격도 보고되었다. 태국 남부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최근 방콕에 주재하는 유럽의 주요국가 외교관들이 이 지역이 만성적인 국제 테러 지역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태국 정부가 최근에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도 하나의 변수가 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게시물들을 참조하라.
* 관련 게시물 바로가기
- "[기사목록] 태국 남부 무슬림 반군 소요사태 진행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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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1년 7월 13일에 발생한 도로 폭탄공격 현장. 잉락 친나왓 후보가 총리에 당선된 후 발생한 이 사건 동영상에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한다. 태국의 저명한 여류 법의학자인 폰팁 로짜나수난(Pornthip Rojanasunand 혹은 Porntip Rojanasunan, พรทิพย์ โรจนสุนันท์) 박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녀는 2004년에 발생한 '인도양 쓰나미 대재난' 당시의 활약으로 유명하며, 탁신 친나왓 총리 집권 시절에는 경찰의 활동을 맹공격했던 친-왕당파 반-탁신 성향의 인물이기도 하다. 2010년 레드셔츠 운동의 대규모 시위 때는, 군부 및 아피싯 총리 정부가 그녀를 시위 진압의 최고 당국인 '비상사태 대책본부'(CRES)의 사건현장 조사역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크세] |
7. 반군 용의자들에 대한 정부군의 학대행위
'아시아 인권위원회'(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AHRC)는 정부군이 반군 용의자들에 대해 구타와 고문을 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한 내용에는 담배불로 성기를 지지기, 맥주병으로 무릎 때리기, 포박하여 개와 묶어놓기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인권유린 행위는 군부가 2006년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직후인 2006년 10월경에 보고됐다.(주141)
2006년 12월, 남성 9명과 여성 11명으로 구성된 2~55세 사이의 무슬림들이 말레이시아로 피난했다. 그들은 쿠테타 이후의 군사정권이 민간인들에 대해 보다 공격적이라면서, 자신들이 군대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태국 군부는 그 주민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반군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주142)
2007년 3월, 일군의 무슬림들이 말레이시아로 피신했다. 이들은 군대의 위협과 무자비함을 피해 도망왔다고 주장했다. 이들 주민들은 자신들이 군대에 의해 구타를 당했고, 자신의 아들들이 2005년부터 행방불명되거나 구속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한 일부 젊은이들은 구금되어 있는 동안 독살을 당했다고도 주장했다.(주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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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복잡하네요..
이 게시물까지 번역을 해봤지만..
아직도 확실하게 감이 안 잡히네요..
더 공부가 필요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