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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아! 솔바람 소리가 안뒤산에서 들려온다. 마을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봉룡의 집은 괴기하다. 봉룡은 하인 지석원을 데리고 뚝지활터에 가고 없었다. 초정월 장지문 밖에는 두터운 햇볕이 얼어붙어 땅을 녹이고 있었다. 건너편 뚝지에는 아이들이 연을 올리고 있었다. |
▣ 이름에 숨은 뜻은?
뚝지, 혹은 뚝지먼당으로 불린다. 먼당은 그 유래가 아직 불명확하지만 고개를 뜻하는 말이다. 이곳은 현재 통영시 명정동과 문화당을 경계로 하는 고지대인 배수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예전에 이곳은 현지인들에게 둑사가 있던 언덕위라 뚝지 먼당, 뚝지 먼댕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둑이란 독(纛)을 말하는 것으로 군중의 대장 앞에 세우는 세지창에 붉은 깃털이 많이 달린 기를의미하는 것이다. |
▣ 실제 이곳은?
서피랑의 정상이기도 하다. 이곳은 바다를 끼고 도는 낮은 땅으로 된 통영의 원래 시가지에서 유일하게 언덕 정상에 평평하고 넓은 지형이 형성되어 통영민들의 종합 운동장 구실을 했던 곳이다. 일제 시대 이후로 현재까지 배수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관계로 내부 출입이 통제되므로 먼당의 정상 철망을 돌면서 뚝지 먼당의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박경리 성장기 집
▣ 작품 속 이곳은?
충렬4가 15번지로 박경리가 진주 일신여고로 유학하기 전까지 동네 삯 바느질을 하던 생모와 기거한 집으로 추정되는 곳. 당시 생모는 입담이 좋아 생모의 바느질 방은 동네 사람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고 전해지며 박경리는 입담이 좋은 생모의 기질과 문학적 감수성을 물려 받았다고 한다. |
명정생(정당샘)
▣ 작품 속 이곳은?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득실거린다. |
▣ 이름에 숨은 뜻은?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 아래의 두 개의 우물을 통칭한다. 두 개의 우물을 각각 일정(日井), 월정(月井)이라 하고, 이를 합쳐서 명정이라 불렀다. 충렬사 아래에 있다 하여 이곳 마을에서는 명정동당 아래 새미라 하여 정당새미라 부르고 있다. |
▣ 실제 이곳은?
이곳은 1990년대 진주 남강댐의 물이 공급되기 전가지 명정동 일대 주민의 중요한 식수원으로 역할을 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이 곳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
충렬사
▣ 작품 속 이곳은?
그 뒷당산 우거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
▣ 이름에 숨은 뜻은?
통영 충렬사는 사적 제236호로, 이순신 장군의 사우이다. 경상남동 통영시 명정동에 있다. 조선 시대의 건물로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를 모셔 두었다. 1606년(선조39)왕명을 받아 이운룡이 건립하였고, 1663년(현종 4) 사액되었다. 정조어제기판과 명나라에서 이충무공에게 내린 8가지의 하사품이 보관되어 있고, 정문 밖에는 타루비 등이 세워져 있다. |
▣ 실제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특히 충렬사로 오르는 계단과 동백나무는 시인 백석의 젊은 날 로맨스의 현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
서문고개
▣ 작품 속 이곳은?
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서 얼마를 가파롭게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 그곳을 일컬어 서문고래라 한다. |
▣ 이름에 숨은 뜻은?
명정동과 문화동을 경계짓는 고개마루에는 서문이 있었으며, 일명 금숙문이라고도 불렀다. 이곳 성문 안쪽의 문화동 일대를 서문안, 성문 밖의 명정동 일대를 서문밖 그리고 이곳의 고개를 섬누고개 또는 서문까꾸막이라 한다. 또는 깔딱고래라 불렀다. |
▣ 실제 이곳은?
소설 속에 가장 중심무대가 되는 간창골에서 명정골로 넘어 가는 고개로 통영성의 서문이 있던 곳이라 서문고개라 이른다. 현재 서문고개 옆으로 안뒤산 허리를 잘라 산복도록가 개설되어 옛 모습을 추정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다. |
박경리 생가
▣ 실제 이곳은?
박경리가 태어난 곳으로 박경리가 성장한 곳과는 불과 1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아버지가 작은댁을 취함에 따라 박경리의 어머니와 박경리는 본가 근처에 살면서 아버지를 경원시하는 성장기를 보낸다. |
간창골 입구
▣ 작품 속 이곳은?
동헌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서 얼마를 가파롭게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 |
▣ 이름에 숨은 뜻은?
현재 통영시 문화동 통영초등학교 아래의 마을 일대를 말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통제영의 많은 관아가 밀집되어 있던 곳이라 관청골이라고 불리었는데, 골은 고구려 지명 곡임을 생각해볼 때, 관청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과자를 [까자]로 발음하듯 관청골이 이중모음을 잘 발음하지 못하는 경상도 사람들의 음운체계로 인해 관청골->간청골이 되었다가 모음동화를 일으켜 간청골->간창골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옛 문헌에는 이곳을 서부리 또는 서구상리라 부르고 있다. 통제영 당시 뿐 만 아니라 1970년 까지도 통영의 중요한 행정관청이 밀집한 곳이다. |
세병관
▣ 작품 속 이곳은?
홍섭이 먼저 발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엉성하게 엮어둔 철망을 건너 교정으로 들어간다. 용빈도 뒤따랐다. 그들은 세병관-세병관은 소학교 교사의 일부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돌축대 위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잿빛 박명이 깔린 세병관 돌축대 한구석에 시커먼 지붕의 그늘이 덮이고 사용이 금지된 세병관 정문 옆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밤은 고요하다. 아름드리 기둥에 옛날 비자를 잡아넣었다는 전설이 있는, 그래서 밤이면 귀신이 난다 하여 이 근방을 사람들은 피한다. 안뒤산 기슭에는 동헌과 세병관 두 건물이 문무를 상징하듯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
▣ 이름에 숨은 뜻은?
국보 제305호. 정식명칭은 통영세병관이다. 이 건물은 1603년(선조 36)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웠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두룡포에 설치했던 삼도수군통제사영의 중심건물로, 궐패를 모시고 출전하는 군사들이 출사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통영초등학교 교사로 이용되었으며 실제로 작고하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이 교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
▣ 실제 이곳은?
일제 때 세병관 건물을 나무로 막아 통영국민학교의 임시 교사로 쓰던 당시의 상황이 소설속에서 용빈과 홍섭의 이별 장면의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박경리가 노후에 통영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먼저 추억하여 확인한 곳이 세병관이다. |
충무교회
▣ 작품 속 이곳은?
예배당, 용빈과 홍섭이 만나던 교회. 용옥이 다니던 교회 |
▣ 실제 이곳은?
소설속에서 용빈과 용옥이 다녔던 교회로 당시 소설의 배경이며 실재했던 곳이다. 이 교회의 100년사에 보면 초기 교회에 외국인 선교사와 목사에 대한 활동이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