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43
(평설 인물삼국지 )
6. 장합
인물평: 제갈량의 북벌을 좌절시킨 역전의 용사
제갈량의 북벌을 실패하게 만든 사람은 조진이나 사마의가 아니었다.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 장합이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가장 결정적인 승부는 가정싸움이었다. 이 한판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력이 약한 촉한으로서는 기습만이 유일한 승리의 비책이었다. 가정싸움으로 1차 북벌이 실패한 후, 제갈량이 서너 차례 더 북벌을 시도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국력이 압도적인 위나라가 전력을 기울여 대비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한나라 중흥의 꿈은 1차 북벌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장합에 의해서 좌절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정에서 마속을 격파했을 당시 장합의 나이는 거의 칠십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에 응모할 당시 그의 나이가 20줄은 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합은 관도대전, 유성전투, 동관싸움, 서량평정, 한중쟁탈전 등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장합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다.
게다가 그는 비록 무장이었지만 전장의 형세를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관도대전 시 장합은 조조의 후방을 기습해 보급을 차단할 것을 건의했다. 또 조조가 오소를 습격하자 급히 순우경을 지원할 것을 주장했다. 원소가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은 패전하게 되었다.
장합이 이처럼 무용과 지략을 겸비했으므로 유비를 위시한 촉군의 장수들은 그를 몹시 꺼렸다. 유비가 한중에서 하후연과 장합이 이끄는 위군과 대결을 벌이게 되었을 때 하후연은 용맹하나 지모가 없었으므로 우습게 알았고 오히려 장합을 경계했다. 유비가 먼저 장합을 기습 공격해 기를 꺾어놓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하후연이 죽은 후에 위군을 수습한 것도 장합이었다.
반면에 제갈량은 천하의 기재라는 평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전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마속 역시 일급 군사참모였지만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다. 실전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장수가 이론에만 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우수한 성과를 낳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마속은 가정에서 장합에게 크게 패했다. 가정은 관중에서 농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제갈량은 농서를 완전히 장악하는 동안 마속이 가정에서 위군의 진격을 막아주기를 바랬다. 가정이 뚫리자 농서의 여러 군에서 작전 중이던 촉군들은 허겁지겁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밑바닥부터 쌓아온 풍부한 경험의 승리였다. 제갈량과 마속은 천하의 수재들이었지만 실전경험이 풍부한 장합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장합은 이 일전으로 촉한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써 일생일대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장합이 일개 무장이었으나 판세를 읽을 줄 알고 계책에 밝았던 것은 단순히 그가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장합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장군이었다. 그는 비록 무장이었으나 유사(儒士)를 아끼고 좋아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장합은 주변에 경전에 밝고 수양이 훌륭한 선비가 있으면 조정에 천거하기도 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늘 공부하는 자세가 장합으로 하여금 실전에서 가장 유용한 인물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일화: 목문도의 죽음
역전의 용사 장합은 사마의의 미숙한 지휘 때문에 죽었다.
제갈량의 2차 북벌 시 위군의 주장은 사마의였고 장합은 부장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의견이 잘 맞지 않았다. 제갈량이 위군을 깊숙이 유인하기 위해 상규성에서 기산으로 철수하자 사마의가 추격하려 했다. 장합이 이를 말렸다. 굳게 지키기만 하면 제갈량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사마의가 장합의 말을 무시하고 진격했다가 노성에서 제갈량에게 패전했다. 때마침 군량이 떨어진 제갈량이 회군했기에 사마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장합과 사마의 두 사람은 성장배경이나 출신성분이 서로 매우 달랐다. 장합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에 자원입대한 하급장교 출신이었다. 수많은 전공을 세워가며 차츰차츰 승진해 좌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장합은 전세와 지형을 잘 살펴 계책을 수립할 줄 안다는 평판을 얻었으나, 이는 오로지 오랜 경험에서 얻은 것이었다. 반면에 사마의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처음부터 조비의 측근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조조의 군사참모로 일하면서 병법과 이론에 정통하다는 평판을 얻었으나 어디까지나 탁상물림에서 얻은 지식이었다.
촉군이 회군하자 패배를 만회할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사마의는 장합에게 추격할 것을 명령했다. 장합이 반대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성을 포위할 때에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주고, 돌아가는 군대를 추격하지 마라 했소.”
후퇴하면서 복병을 설치하는 것은 제갈량의 주특기였다. 진창싸움에서도 혈기왕성한 왕쌍이 제갈량을 추격하다가 매복에 걸려 죽음을 당했다. 장합은 주도면밀한 제갈량이 복병을 설치했을 것이므로 추격하면 함정에 빠질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주장인 사마의가 고집을 부렸으므로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장합은 마지못해 추격에 나섰다.
장합이 목문(木門)에 이르렀을 때 과연 제갈량이 배치해 둔 복병이 나타났다. 높은 곳에 숨어있던 궁노수들이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쏘아대자 장합은 온 몸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백전노장 장합은 사마의의 판단 착오로 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이나 경험에 있어서 훨씬 위였던 장합이 사마의의 명령을 받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비가 조조의 지위를 계승하면서 위나라에서 대대적인 권력의 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조비와 절친한 사이로 그의 권력 승계에 공을 세운 사마의는 새로운 권력실세였다.
거짓말
역전의 용사 장합도 한번 크게 패전한 적이 있다.
조조가 한중을 점령한 후 장합이 여세를 몰아 파서로 진격했다. 장비와 탕거, 몽두에서 50여일 대치하다가 후방을 기습당해 대패했다. 이때 장합은 말도 버리고 도보로 산을 넘어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합이 장비와 싸운 시점이 유비가 한중을 정벌했을 때로 나온다. 조홍이 하변에서 마초와 오란의 군대를 격파한 직후 장합은 조홍의 만류를 뿌리치고 군령장을 쓰고 출전했단다.
탕거, 몽두의 싸움은 215년에 있었고, 무도, 하변의 싸움은 218년에 있었다. 게다가 무도군과 파서군은 서로 수천 리나 떨어져 있다. 유비는 한중을 정벌할 때 제일 먼저 양평관을 점거했는데, 이곳은 무도와 파서의 중간에 있었다. 조홍과 장합은 만날 수조차 없었다.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이 역사적 사실관계나 지리적 지식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려주는 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