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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0년 03월 15일 월요일 9시20분부터 4시까지
참석자: 오덕만, 한명진, 윤영선, 이은희, 김송미
코스: 대동법시행비- 객사- 향교- 점심- 농성- 홍학사비각- 심복사
산성 탐방하는 날은 요즘 매번 이렇게 하늘이 꾸물거리거나 눈, 비가 내렸다. 오늘도 우산으로 평택의 하늘을 가려야 하나보다.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참석자가 너무 단출했다. 처음으로 산성탐방에 참가하게 된 이은희 쌤이 묻는다. 참석자가 항상 이렇나요? 아니요, 오늘 비가 오니까 다들 가는 건가? 하고 고심하는 중일 겁니다. 취소문자가 없는 것은 곧 간다는 의미로 꼭 이해하길 바라며 기다려도 소식 없는 쌤들을 한 30여분 기다리다 출발했다. 이번에는 서해안이 아닌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약 11시 15분정도 자료수집 차 평택시청의 문화 관광과를 찾아서 지도에 눈을 밝히며 오늘의 답사지를 훓어 보았다. 평택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접경지역으로 경기도의 남쪽이며, 동쪽으로는 안성시를, 남으로는 천안시, 아산시와 접하고, 서쪽은 아산만과 바다를 아우르며, 위로는 화성시, 오산시, 용인시에 둘러싸여 있는 평평한 들이 펑퍼짐하게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목지국에 속했다가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 때는 팽성이라 불러지다가 고려 태조에 이르러서 평택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동북아물류 중심의 평택항과 중국을 비롯한 환황해권 국제화 중심도시라는 지리적 슬로건으로 황해경제자유구역이 지정되어 국제화 중심도시를 향한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서해대교가 평택에서 아산만을 지나 당진까지 이어져 있어 최적의 항만 입지와 광활한 평택의 배후지가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사동 마을 어귀를 헤집고 다니다 대동법시행기념비를 발견했다. 이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됨을 알리는 비로써 백성을 닮은 해학적인 귀부와 머릿돌을 이고, 대리석에 기쁨을 담아 낸 거대한 비가 있었다. 외형상으로는 삼전도비가 연상되었다. 현재는 비문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어서 비각을 만들어 세웠다. 아래 귀부의 모습에서는 불거진 눈망울에 헤벌쭉 벌어진 거북의 앞모습과 앙팡한 뒷모습에 절로 눈웃음이 지어졌다. 그당시의 이 비를 만드신 조상님과의 교감이 이어지는 듯하다.
비각 아래 입구에는 소사(素沙)동의 유래에 대한 표지석이 남아 있었다. 평평하고 넓은 들이 마을 어귀에서 백 리 길로 펼쳐진다하여 불러진 지명이라 한다. 기념비 옆의 설명문으로 대동법에 대한 설명을 대신 갈음한다.
"효종 2년 영의정 김육이 호서지방에 대동법이 시행되도록 건의 후 이를 시행하게 된 것을 기념한 비로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건립하였다.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던 것을 쌀, 베 혹은 돈으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던 납세제도이다. 조선 시대의 부세 제도는 토지에는 조세(租稅)를, 개인에게는 역(役)을, 집집마다는 공물(貢物)을 징수하여 국가 경비를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중 공물은 국가수입의 약 60%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공물을 납부하는 공납제(貢納制)는 공물의 생산, 조달과 납부과정의 어려움 등으로 공물에 따라 혹은 고을 사정에 따라 공납청부업자가 있어 납부를 대신하고 후에 그 고을에 내려가 대가를 징수하는 방납(防納)이 유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방납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바람에 부담이 가중되어 농민은 고향을 버리고 떠돌이가 되고, 국가수입은 오히려 감소되는 등 각종 폐단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징수한 쌀을 정부가 지정한 공인에게 지급하고 이들에게 왕실, 관청의 수요물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이것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논의되어 결국 대동법으로 이어졌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은 되었지만 농민의 생활이 실질적으로는 개선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 지역 백성들이 대동법의 시행을 반기며 잠시나마 삶의 희망을 안으며 김육과 왕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대동단결하여 세웠을, 당시의 마을의 크나큰 축제이었을 것이다.
팽성읍 객사는 평택관아의 중심 건물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놓고 절하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시설이다. 객사의 중심건물인 정청에는 다른 객사와 다르게 홍살문으로 입구를 닫아 놓았고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고 한다.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 동안의 관아객사의 모습에서는 홍살문이 없고 퇴칸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지방의 관직자들이 자주 뵈올 수 없었던 임금을 향해 충성을 약속하는 망궐례를 통해 지방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평택향교는 국가에서 세운 지방의 중, 고등부 교육기관으로써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이 일자 선상으로 세워졌으며 대성전으로 갈수록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전학후묘의 배치 양식등은 일반 향교와 비슷하다. 평택시의 관리가 잘 되어있는 듯했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며 시간이 어언 12시 30분, 배꼽시계가 여기저기 울린다. 식당을 수소문하러 시내를 돌아다니다 미군부대를 보게 되었다. 평택향교와 객사 부근의 안정리라는 넓디넓은 평야가 농부가 아닌 미군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쓴 웃음이 지어진다. 용산기지에 포름알데히드라는 방부제를 한강으로 쏟아 버리거나, 성폭행 및 살인, 최근의 어린여중생이 장갑차에 치어 죽은 사건들을 남겨 놓고도 공식적인 문제제기조차도 힘들어 해야 했던 우리나라의 국방력의 한계에 애통함을 느낀다. 주한미군부대가 전국적으로 10여군데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주로 경기도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과 남한의 상호 방위 군축이 이루어져 우리의 힘으로 된 통일국가가 세워지길 바라는 바이다.
이름있는 조박사 설렁탕에서 뜨건 국물에 추위와 허기를 달랬다.
드디어 오늘 탐방의 목적과 부합하는 농성을 찾았다. 주변의 주차장 시설도 잘 되어 있었으나 입구의 안내판에는 영어로만 씌여 있다. 타원형의 둘레 300m의 잘 다듬어진 평지의 판축토성이었다. 축성연대는 확실치 않고 초기 국가의 형성 단계에서 토착 세력집단들이 자기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후 세월에 따라 이용되었을 것 같다고 설명해 주셨다. 평지에 세웠다는 것이 실감이 나게 스카이라인이 뻥 뚫려 보이고 그 대신 강한 비바람이 우산을 다 뒤집어 버렸다. 토성 한바퀴를 어렵사리 통과하고 내려가니 한국 林 씨의 시조인 임팔급林八及의 동상이 하늘을 찌르게 서 있었다. 신라시대의 당나라에서 이주하여 이곳 팽성에서 공을 세워 신덕왕께 충절공忠節公 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뒤편에는 전국임씨문중에서 동상 건립비에 도움을 준 임씨 문중인의 이름중에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임창열, 임권택, 임경호등을 읽어 가면서 다들 임씨 문중에 아는 이를 찾느라 부산했다. 자기 뿌리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자긍심이 보는 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 준다.
근처에 홍학사비각을 찾으러 빙빙 계속 제자리 돈다. 탐방의 묘미라며 오쌤이 불안한 마음을 일축시킨다. 병자호란때 최명길이 주장한 화의론에 극구 반대하던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삼학사중에서 화포 홍익한化浦 洪翼漢의 가묘와 포의각袌義閣이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을 찾아, 삼전도비를 보면서 수차례 되뇌이던 삼학사의 한분을 영접하는 자리이다. 호란 당시에 풍전등화의 현실을 직시하여 청과 화의론을 주장한 최명길과 절개와 충절에 더 큰 뜻을 품고 포로가 되어 처형당하기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삼학사의 주전론이 지금 시점에서는 재평가를 받게 됨에 역사의 해석에 아이러니를 안고 가묘에서 조용히 머리숙여 인사 드리고 내려왔다.
평택호를 끼고 강변에 위치한 심복사는 보물 제565호인 대적광전에 모신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다. 경기도에서는 유래가 드문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파주 문산포에 사는 어부가 아산만에 고기잡이를 왔다가 바다에서 이 불상을 건지며 절을 창간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바닷속에 오랜 시간 침수되어 있었던 불상이라서 그런지 검은 빛깔에 조개 부스러기의 흔적으로 반짝임이 살짝 비친다. 대체로 온화한 모습이시며, 광배는 없으나 두 마리의 사자가 상대석 연꽃을 떠받치고 있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법의는 통견의로써 양소매깃에 반원꼴의 화문이 조각된 것이 특징이다.
산성탐방이 어느덧 향토탐방으로 전향하는 듯하다. 초기에 위례회원들의 열의가 생각난다. 봉고차 가득에 담은 이야기 거리와 서로의 이심전심에 기대며 더 나아갈 산성탐방모임이 이젠 서서히 자리를 잃는 촛불 같다. 다음 달의 양평에는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도 내비게이션을 능가하는 눈썰미를 날리신 오덕만 쌤과 장시간 운전이 힘드셨을 한명진쌤에게 감사드리며 함께 하신 윤영선쌤, 이은희쌤께도 더불어 있어 좋은 시간 갖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가장 완벽하게 쓴 답사기네요.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