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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10대 중요사실[高麗王朝 10大 重要史實]
1. 묘청의 난(1135~36년)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과,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 세력 간의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대위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난을 일으켰으나. 1년 만에 진압 되었다.
묘청의 난은 단순한 난이 아니라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단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다.
신채호 선생은 이 싸움에서 묘청이 졌기 때문에 조선사가 진취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묘청의 난의 거시적으로 봤을 때 고려시대의 최고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2.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년)
궁예를 몰아낸 뒤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그 후 왕건은 대내외 안정을 이룬 뒤 그 힘을 바탕으로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 하였다.
그 후 왕건은 발해가 멸망 하였을 때,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포용하고 우대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이룩한 신라의 통일보다 더 발전적인 민족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3. 서희의 외교 담판(10세기 말)
정안국을 멸망시킨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에 침공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던 고려 조정은 땅의 일부를 떼어주자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이 때, 직접 거란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서희는 왕에게 거란과의 담판론을 건의하고,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였다.
담판의 결과, 거란측은 고려 측의 합리적인 주장을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하고, 양국은 공동으로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기로 합의하였다.
고려가 강동 280리의 옛땅을 찾은 것은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가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는 실리를 추구함에 있어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찾으려는 북진 정책의 커다란 전략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4. 무신 정변(12세기 후반)
묘청의 난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 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 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무신 정변이다.
무신 정변은 고려 초부터 누적 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직접적으로 폭발 됐다는 점, 이 후 몽고 침입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가 됐다는 점 등에서, 고려사에 큰 의의가 있다.
5. 이자겸의 난(1120년 경)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이자겸은 인종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다.
이자겸은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는 금과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이자겸은 인종이 측근 세력을 모으고 자신의 권력 독점을 막으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1126년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자겸은 척준경에 의해 축출됨으로써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6. 몽고 침입(13세기)
13세기 초 몽고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중국을 점령하였다.
이로 인해 거란이 쫓겨서 고려를 침입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몽고와 접촉하게 된다.
그 후 몽고 사신 피살 사건으로 몽고와 고려는 대립하게 되고, 최우 정권의 강경책으로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고, 끈질기게 저항 했지만, 결국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능한 지배층을 대신해 민중들의 단결력을 통해 몽고의 침입에 대항 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7. 윤관의 9성 확보(1100년 경)
고려는 여진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여진족이 통합되면서 고려와 충돌하였다.
1차 접촉에서 패한 고려는 윤관을 중심으로 하여 별무반을 편성한다.
이 후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확보한다.
비록 후에 다시 돌려줬지만, 윤관의 9성 정벌은 외척의 침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고려 북진정책의 맥을 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8. 귀주 대첩.(11세기 초)
고려에 침입한 10만의 거란군을 강감찬 등이 귀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이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거란군이 가장 고전한 곳은 바로 이 강동 6주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지역의 반환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 관계가 험악해져 결국 1018년에 고려는 거란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귀주 대첩은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하였을 뿐 만 아니라, 거란이 그 동안 끈질기게 요구하였던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못하게 한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9. 광종의 개혁정치(960년 경)
광종이 즉위 했을 때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취했던 혼인 정책 때문에 왕권이 불안하고, 호족의 세력이 강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광종은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과거제도를 시행해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 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는 이후의 성종 때 이르러 통치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광종의 개혁은 이 후 고려의 문화적 정치적 안정의 기반이 됬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10. 위화도 회군(1388년)
1388년(우왕 14) 5월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고려왕조 계보도
태조 왕건(918~943)
4대 개국공신: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고려 개국(철원 -> 송악)
견훤 투항(935) -> 신라 투항(935: 경순왕, 아들인 '마의태자'의 반대) -> 후백제 멸망(936)
주요 2대 과제: 중앙집권(혼인정책), 북진정책(평양에 서경설치)
혜종(943~945)
왕건은 태자 '무'(혜종)에게 왕위를 주지만, 3번째 부인의 외척 '충주 유씨'의 세력이 강해 왕규와 박술희(개경파)에게 혜종을 부탁한다. 이에 불만을 느낀 충주 유씨, 서경파인 왕식렴 등이 개경파와 대립한다. '왕규의 난'이 있었다지만, 이는 서경파의 조작 가능성이 높다. 왕식렴과 충주유씨가 요(정종)을 왕에 등극시킨후 이긴자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정종(945~949)
서경천도운동, 광군 30명(거란대비)
광종(949~975)
개혁정치
노비안검법, 과거제, 공복 제정, 제위보
모색기 -> 왕권강화기 -> 호족숙청기
모색기
유력호족: 충주 유씨, 평산 박씨
정관정요 숙독. 균여와 교분을 갖고 그의 '성상융회'사상을 받아들임.
왕권강화기
외국인 쌍기의 등용후, 노비안검법(956), 과거제(958) 실시. 공복 제정(960)-자단비녹
최승로의 평
정종: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격
광종: 세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
서필: 광종의 귀화인 우대에 비판. 서희의 아버지
경종(975~981)
화합정치, 좌우집정제, 전시과 실시.
호족출신 왕선을 집정으로 했으나, 복수법을 남용하여 귀양보내고 좌우집정제로 변경.
최지몽을 내의령으로 하고 왕승의 역모 혐의를 처리중 정치염증으로 정치를 도외시 함.
전시과
관품뿐 아니라 인품에 따라 토지를 분급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관품만을 분급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토지가 높은 관계에 있는 호족들의 독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인품을 분급 기준에 둠으로써 낮은 관계에 있으면서도 호족을 견제하며 주요 업무를 수행하던 신진관료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성종(981~997)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유교사회 건설
행정조직확립:
중앙: 2성6부(6부의 서열: 이병호형예공)
지방: 12목(경학박사,의학박사 파견) - 고려 최초의 지방관 파견
교육제도: 중앙(국자감), 지방(향교) -> 유학교육
숭유억불(연등회,팔관회 폐지)
최승로 시무 28조 채택(숭유억불, 노비환천, 지방관 파견 주장) cf>최승로의 손자: 최제안
노비안검법 폐지 -> 노비환천법 시행
거란의 침입(993): 소손녕 vs 서희 -> 강동 6주 획득(국경선이 압록강까지 확대)
소손녕은 자신들이 이미 발해를 멸망시켜 고구려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땅 일부를 차지했기에 자신들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고 함.
목종(997~1009)
나약한 동성애자. 경종의 맏아들.
어머니의 섭정으로 왕권을 상실하여 남색을 즐김(유행간,유충정) -> 따라서 자녀 없음.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섭정을 했는데,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을 왕에 앉히려다 강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강조는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왕에 세우게 된다. 이는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된다.
현종(1009~1031)
불륜의 씨앗.
최초의 실록 편찬(칠대실록), 대장경 편찬, 황룡사 중수
거란의 1차 침입(80만,소손녕)(993:성종): 서희. 말빨로 퇴각시킴.
거란의 2차 침입(40만,거란 성종)(1010): 양규. 대책없이 당함. 개경까지 빼앗김.
거란의 3차 침입(10만,소배압)(1018): 강감찬(귀주대첩:1019). 20만 군사로 대비하고 있었음. 압도적 승리.
덕종(1031~1034)
별다른 사건없이 평온한 정치를 함.
천리장성 축조 시작
정종(1034~1046)
실리정치와 고려의 안정.
천리장성 완성. 노비종모법, 장자상속법
거란과의 평화 지속
문종(1046~1083)
고려의 황금기
정치,사회,문화,외교,학문등 모든 분야에 획기적 발전.
법제 확립(공음전시법, 재면법, 답험손실법, 삼원신수법, 고교법, 양전보수법, 선상기인법)
공음전시과, 경정전시과
흥왕사 창건, 연등회/팔관회 부활, 송나라와 외교 재개
동방의 공자 최충: 9재학당, 12사학 발달
대각국사 의천: 천태종(문종의 아들)
문종의 오른팔 이자연: 문종~인종까지 최대의 권문세가인 인주(경원)이씨. 인종때 이자겸(이자연의 손자)의 난 이후 몰락.
순종(1083~1083)
병상 3개월 치세. 동생인 선종에게 양위
선종(1083~1094)
중도정치와 문화 융성. 별다른 사건 없음.
헌종(1094~1095)
선종의 아들. 당뇨병으로 파워 제로. 숙종이 왕위찬탈
숙종(1095~1105)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 문종의 셋째 아들.
송,거란 쇠약, 여진(이전 말갈족 족속임) 흥기
문종 ->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것 같구나'
1. 양주땅에 남경 건설(한성)
2. 6촌 이내 혼인 금지(1096) - 별로 지켜지지 않음
3. 주전도감 설치(1097) -> 해동통보 주조(1102):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4.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1101)
여진침입(1104): 임간(실패) -> 윤관(대충 수습)
별무반 설치
이로 인해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 설치.
정규군인 2군6위가 있었으나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
20세 이상의 모든 백성(양반~노비)은 의무 가담해야 함.
예종(1105~1122)
거란,여진에 대한 중립외교.
여진이 급속한 성장하여 1115년에는 금나라를 건국. 이후 군신관계로 금에 조공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1107년 10월)
상원수: 윤관, 부원수: 오연총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17만 대군 출정(척준경의 활약) ->동북 9성을 쌓은 후, 1년 만에 반환.
7재 설치(관학진흥)
양현고 설치(장학재단)
도이장가(1120, 신숭겸, 김락 추모) - 정곡(鄭瓜亭曲)》과 함께 향가 형식의 노래가 고려 중기까지 남아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혜민국 설치
쳥연관,보문각
도이장가(悼二將歌) - 고려 예종(睿宗)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識麻又欲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현대어 풀이
임을(돌아가실 고비에서) 완전하게 하신
(정성스러운)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넋은 가셨으되
임께서 삼으심(내려주신) 벼슬은 또한 대단하구나.
(지금 팔관회에서의 두 장군의 가면극을) 바라보며 알겠구나.
그 때(역전 고투할 때) 두 공신이여
오랜 옛날의 일이나 곧은 자취(충성심)는
(오늘까지도) 나타나는구나.
인종(1122~1146)
14세에 등극하여 정치 권력 암투가 심했음. 금의 중국대륙 장악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이자겸
인종의 장인이자 외할아버지.(3,4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 보냄)
척준경과 사돈관계
이자겸의 난(1126)
인종의 이자겸 세력 제거 시도(실패) -> 이자겸,척준경의 권력 독식 -> 이자겸의 인종 독살 시도(이자겸의 4째 딸인 왕비가 모면시켜 줌) -> 척준경이 이자겸 제거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인종은 서경천도 계획을 생각한다.
묘청의 난(1135)
서경천도계획이 천재지변과 관료들의 반대로 포기되자, 묘청등의 서경세력(조광,정지상,..)이 난을 일으킨다. 이에 개경세력인 김부식이 이를 제압한다. 이로 인해 김부식은 문하시중에 오르게 된다.
후에 김부식은 1145년에 삼국사기를 완성한다.
의종(1146~1170)
환관정치에다 향락주의자.
인종 때의 묘청의 난 이후 문신 우대, 무신 경시 풍조가 나타남.
정함(서대 사건, 합문지후),김존중(정서 제거),영의(점쟁이) 득세
정습명(의종 옹립 주장),정서 좌천
무신의 난 발생
의종이 보현원에 놀러가던중,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으로 계기로 발생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상장군,대장군은 중방의 구성원이 됨.
최고 정3품 상장군까지가 한계, 전쟁시에는 문신 출신 상원수의 명령을 받아야 했음.)
정중부,이의방,이고가 주도.
정중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으로 문인에 대한 감정 나쁨.
이의방, 이고의 행동으로 좀 날로 먹은 감이 있음.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중헌.. 명종~고종까지 약 100년 동안 무인정권이 지속됨.
정과정 -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원류
지은이: 정서 (아래 님은 고려 의종을 의미)
장르: 고려가요
정과정 [원문]
정과정 [현대어 풀이]
내, 님을 그리며 울고 지내더니
산 접동새와 난 (처지가) 비슷합니다
(역모에 가담했다는 나에 대한 참소가 ) 옳지 않으며 거짓이라는 것을
잔월효성(殘月曉星 :지는 달 새벽 별)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넋이라도 님을 함께 모시고 싶어라.
(내 죄를) 우기던 이, 그 누구입니까
(나는)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의 참소하던 말입니다.
슬프구나!
님께서 나를 벌써 잊으셨나이까
아! 님이여, 내 사연 들으시고 다시 사랑해 주소서
출전 : [악학궤범]
명종(1170~1197) -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허수아비 임금. 소심하고 우유부단.
최여해의 꿈(임금이 될 것이라는 꿈)
이고 거사 실패 -> 채원 거사 실패 -> 이의방의 권력 상승 -> 김보당의 난 실패(1973, 의종이 이의민에게 죽음) -> 조위총의 난(1174~1176, 서경세력) -> 정균이 이의방 살해(1174) -> 명학소 망이,망소이의 난(1176) -> 경대승이 정중부,정균 부자 살해하고 집권(1179, 중방의 힘을 약화시키고 도방 설치) -> 이의민 집권(1183) -> 김사미,효심의 난(1193, 이의민이 왕위 찬탈 욕심으로 은밀히 도와줌) -> 최충헌 집권(1196) -> 최충헌은 이듬해 1197년 명종을 쫓아내고 신종을 즉위시킨다. 이후 최씨 무인 정권이 60년간 지배
이의민의 성장을 보자.
중랑장(정중부의 난,1170) -> 대장군(김보당의 난, 1173) -> 상장군(조위총의 난, 1174)
신종(1197~1204) - 최충헌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인 정권의 수립.
동생 최충수의 태자비 옹립 시도로 죽임.
만적의 난(1198)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희종(1204~1211)
왕권 회복을 꿈꾸며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왕위에서 물러남.
최충헌이 이규보 등용(1205), 교정도감 설치(1209)
강종(1211~1215)
황혼녘의 짧은 치세. 명종의 아들.
별다른 특이 사항없이 최충헌에게 놀아남.
고종(1213~1259)
몽고의 힘에 눌려 송,거란,금(여진)이 망해감.
1219년 최충헌이 죽자 최우가 교정별감을 장악하고 집권하게 된다. (최충헌 -> 최우 -> 최항 -> 최의)
최우는 최충헌이 뺏은 전답,가택,물품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문신등용의 폭을 넓힌다.
1225 정방설치(인사권등 정치관련 업무 처리)
1227 서방설치(문신 우대...)
야별초 조직(야간 경비를 담당하는 일종의 방범대로 도둑이 들끓자 설치한 조직)
몽고 침입(28년간 7차례 침입)
1231 몽고 1차 침입 - 몽고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이 빌미. 결과: 다루가치, 강화도로 도읍이전(1232~1270)
1232 몽고 2차 침입 - 도읍이전이 빌미. 김윤후의 살리타이 살해(충주성)
1235 몽고 3차 침입 - 경주까지 진격. 황룡사 9층탑, 대구 부인사 대장경판(초조대장경,속장경) 소실.
1236 몽고에 항복 제시. 대장도감 설치하고 팔만대장경 만들기 시작(1251년 완성)
1247 몽고 4차 침입
1249 최우 -> 최항
1253 몽고 5차 침입
1254 몽고 6차 침입
1257 최항 -> 최의
1257 몽고 7차 침입
1258 최의 -> 유영,김준,임연
* 대장경 조판
현종 - 초조대장경(거란 침입) : 1232 몽고 침입시 소실
선종 - 속장경(대각국사 의천) : 1232 몽고 침입시 소실
고종 - 팔만대장경(몽고 침입,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함)
원종(1259~1274)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원종은 원에 있었던 적이 있어 친몽파라 할 수 있다.
개경환도(1270) -> 배중손의 삼별초의 난(1270) -> 여몽연합군에 의해 토벌됨(1273) -> 이후 약 백년간 원나라 지배하에 놓임.
삼별초: 최씨 무인정권의 사병. 야별초가 효시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우별초로 나뉘었다가 몽고에 잡혀갔던 군사로 구성된 신의군이 합쳐져 삼별초를 이룸.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삼별초의 난: 강화도 -> 진도(배중손 죽음, 승화후 온 죽음) -> 제주도(김통정 지휘)
* 별무반: 숙종때 윤관의 건의로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군사
신보군
신기군
항마군
충렬왕(1274~1298, 1298~1308)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
자주성이 전혀 없는 왕이었음. 제국대장공주와의 결혼식에서 모든 대신들에게 변발 강요
제국대장공주가 왕권을 능멸하고 권력을 휘두르자 정치에 관심을 잃고 궁녀 무비와 놀아남.
1274 1차 일본정벌전쟁 - 대마도 정벌, 폭우로 실패
1281 2차 일본정벌전쟁 - 1280에 정동행성(이후 고려 내정간섭기구로 남다가 공민왕때 폐지됨) 설치하고 2차 정벌 시도
1281 일연 - 삼국유사
안향 - 주자학 도입
원나라 왕후(모두 왕과 불화)
충렬왕 - 제국대장공주 <-> 무비
충선왕 - 계국대장공주 <-> 조비
충숙왕 -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 덕비
1275 관제 개편(원의 압력)
중서문하성 + 상서성 -> 첨의부
추밀원 -> 밀직사
어사대 -> 검찰사
6부 통폐합 -> 전리사, 군부사, 판도사, 접법사,
명칭변경:
묘호: 종,조 ->왕, 시호앞에 충(忠) 붙임.
선지 -> 왕지, 짐-> 고, 폐하 -> 전하, 태자 -> 세자
충선왕(1298, 1308~1313)
전지 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원으로부터 심양왕 직위 받음. 대체로 자주적, 학구적 인물임(이제현과 교류:익재난고,역옹패설)
부왕 충렬왕과 불화 -> 왕위쟁탈
충렬왕이 죽자 그의 3째 부인과 불륜.
1298 개혁정치(공신전 환급,정방폐지 : 반원적 개혁)를 시도하나 계국공주의 질투(vs 조비)로 실권
1308 2개월간의 개혁 정치 시도. 이후 원나라 연경에 머물며 전지 정치 실시.
환국요청거부로 충숙왕에게 왕위 양도. 하지만 실권을 계속 잡음.
충숙왕(1313~1330, 1332~1339)
위태로운 삶과 불안정한 왕위.
폭력적인 왕.
충선왕이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우면서 왕위쟁탈전 발생.(심양왕의 직위로 물려줌)
충혜왕(1330~1332, 1339~1344)
희대의 패륜아. 고려왕실의 위기.
포악, 방탕한 강간범. 부왕의 후비들, 신하의 처, 민간의 여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강간.
이로 인해 원으로부터 폐위 당함.
충목왕(1344~1348)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녕공주의 섭정.
덕녕공주는 나라 기강 확립을 시도하나 병약한 충목왕이 병사.
충정왕(1349~1351)
충정왕의 짧은 통치와 비참한 최우
덕녕공주 <-> 의비 윤씨(충정왕의 친모)
왜구의 침입의 극심하지만 이를 진압하지 못한다. 원은 고려 조정의 안정을 위해 충정왕 폐위
공민왕(1351~1374)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정책과 고려 국권회복
홍건적의 흥기로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개혁에 박차를 가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퇴색하게 된다.
노국공주의 죽음 이후 공민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타락적인 생활에 젖어든다.
집권 초기 홍건적의 발호로 원의 세력이 급격히 약해되어 홍건적의 위협을 받게 되고, 왜구의 침입 또한 빈번하여 국경이 위태로운 시기였다. 공민왕은 원이 약해진 틈을 타 국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
몽고풍습(변발,호복) 제거, 친원세력 제거, 대대적인 관제 개혁(문종대의 관제로 복구), 정방폐지(최우가 설치), 전민변정도감(신돈,1366), 서연 재개, 정동행성(후에 재설치됨), 쌍성총관부 폐지하고 영토회복(동,서북면) -> 원에 쫓긴 홍건적의 침입 -> 홍건적의 위협으로 원과의 교류 재개(개혁관제 이전 원관계로 복구)
초기 개혁 박차 -> 잦은 변란 -> 이전 관제 복구 -> 최영, 이성계 대두 -> 노국공주 죽음(1365) -> 공민왕의 실의와 신돈의 대두 -> 신돈 제거 -> 공민왕의 개혁성향 퇴색(개혁쇠퇴, 술에 빠져 노국공주 그리워함, 변태적 행위 시작(왕비 강간 지시, 동성연애) -> 최만생,홍륜 무리에게 피살)
1352 조일신의 임시정변 - 정방 폐지에 대한 반발 : 정변은 성공하지만, 이후 공민왕이 조일신 제거
1356 기철의 역모사건 - 반원정책에 대한 반발 : 쌍성총관부 천호 이자춘(이성계의 父)의 개입으로 실패
1363 김용의 난 - 절대권력의 욕심
? 최유의 난 - 행실이 바르지 못함. 원나라에 있으면서 고려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가짐. 기철의 여동생 기황후와 연모
공민왕 집권 초기 이제현을 통해 개혁을 시도했다면, 후반기에는 신돈을 통해 시도.
현실적 개혁주의자 이제현
호: 익재, 역옹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로 전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
충선왕과의 교류로 중국에 여러번 왕래
신돈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의 힘 약화.
땅,노비를 정리(광종때의 노비안검법과 유사).
성균관 설치
후에 타락하여 역모를 꾀함.(이는 이성계 조선 개창과정에서 조작한 가능성 있음)
우왕(1374~1388)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고려조정의 혼란.
우왕의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심을 받음. 그의 아들 창왕도 마찬가지. 이로 인해 폐위됨.
1374 이인임은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 등에 의해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
최영은 이인임의 신임을 받아 중요인물로 부상하는데, 이후 이인임을 죽임.
명의 힘이 강성해지고, 북원이 거의 멸망 직전. 왜구들의 노략질 증가(한때 공주까지 점령하기도 함)
왜구격퇴: 최영, 최무선, 이성계
요동정벌
명의 철원 이북 요구와 철령위 설치 -> 최영의 주장으로 우왕은 요동정벌 명령 (최영, 이성계, 조민수) -> 이성계의 4불가론(거부됨) -> 위화도 회군 -> 우왕 폐위. 창왕 등극
창왕(1388~1389)
조민수, 이색의 추천으로 어린 나이로 등극하여 1년만에 물러남.
김저,정득후의 이성계 제거 시도 -> 실패
이성계파(정도전,조준) VS 조민수파(이색)
공양왕(1389~1392)
조민수,이색 제거.
이성계의 우왕, 창왕 사사.
경연제도 도입. 과거에 무과 신설. 관제 6조로 개편, 과전법 실시
급진파: 이성계, 조준, 정도전, 박위
온건파: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중도파: 심덕부, 성석린
끝.
고려사회
유학의 발전
광종: 과거제도 실시 -> 유학(공자의 가르침) 경전을 공부하는 학생증가.
성종: 비서성(개경. 유학 관련 서적 수집,보관 관청), 수서원(서경.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 국자감(국립대학: 유학[국자학,태학,사문학], 기술학[율학,산학,서학]) 설치
문종: 최춛의 9재학당, 12도 Vs 관학
충렬왕: 안향이 원에서 성리학(송나라 주희) 도입. 이제현 -> 이색, 권근, 정몽주, 정도전 계승 (불교배척 경향)
예술
고려청자: 순청자 -> 상감청자
그림: 예성강도(이녕), 천산수렵도(공민왕)
건물: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불교: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은진 미륵), 경천사 10층 석탑(원나라 영향)
한문학: 정지상, 이규보, 이제현, 정몽주
경기체가 - 신진사대부. 한림별곡, 관동별곡
역사서: 삼국사기(인종때 김부식), 삼국유사(충렬왕때 일연), 제왕운기(충렬왕때 이승휴)
기술
인종: 최윤의 상정고금예문(최초의 금속활자-부존)
우왕: 직지심경(세계 최고의 금속활자-현존)
문익점: 목화씨(무명)
충정왕: 이암의 농상집요
고종: 향약구급방(국내 최고 의학서)
공민왕: 최무선 화약
[출처] 고려왕조 정리|작성자 임진강
고려관련지도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고려의 호족도
왕건의 정략결혼도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의 고려영토
고려의 오계 양계도
공민왕의 고려영토 회복도
공민왕의 요동 회복도
공민왕의 영토회복도
고려의 행정지도
강감찬이 개척한 고려의 천리장성
무신 집권기의 민란지역도
홍건적의 1차 고려침입도
홍건적의 2차 침입
거란의 고려 침입도
강동6주와 천리장성
9성의 위치
몽고의 고려 침입도
고려의 대외교역도
위화도회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