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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에게 감동 깊은 강연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심령을 꿰뚫어 주는 은혜를 주는 강의도 못 합니다. 단순하게 교실에서 학생들을 보면서 분필을 잡고 강의하는 심정으로 하나 하나 필요한 것을 현장 위주로 함께 생각해 볼까 합니다.
저의 강의의 깊은 내용은 두 권의 책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권은 월리엄 맥스웰의 책 속에 초대교회부터 현대까지의 종교 개혁가들의 예배순서가 역사적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그 다음 제임스 화이트의 책은 각 예배가 그 특성에 따라 어떻게 드려졌는지를 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사건별로 추린 ‘예배의 역사’입니다. 그 외에는 제가 설교의 하나의 실천적 모델을 내놓고 하나 하나 분석한 것을 내놓았습니다만, 두 분의 ‘예배 역사서’를 보시면 강의에 보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묘한 모순 속에 빠져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라는 말을 제일 많이 쓰는 민족이고 교회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배’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외국에서 늘 오는 예배 신학자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을 많이 방문하게 됩니다. 주일 낮, 특별히 큰 교회를 비롯해서 시골 교회까지 방문을 합니다. 그리고서는 꼭 떠날 때쯤 되었을 때 제가 묻습니다. “한국 교회 예배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을 못 합니다. 그러다가 비행기 탈 때쯤 악수를 하려고 하면 “If you don't mind(괴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면)”라는 주를 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한국 교회는 예배는 없고 집회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한테서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한국 초대교회 때 선교사들이 한대로 순수하게 말씀만을 들려주었던 말씀 위주의 사역 속에서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왜 괜찮았느냐 하면 천주교는 성만찬 중심이고 우리는 설교 중심이므로 괜찮았습니다.
그런대로 우리가 더 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1965년 이후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이 시작했습니다. 1965년 제2바티칸 공의회에 문헌이 나오게 됩니다. 거기에서 철저하게 “모든 가톨릭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를 모셔라. 그리고 반드시 설교를 가르쳐라. 그리고 예배는 전부 다 그 나라 말로 설교하도록 하라”는 소위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부터 가톨릭 교회는 설교 분야에 열심을 냈습니다. 제가 주일 미사에 가보면 그 설교는 대단히 비중이 있습니다. 무겁습니다. 설교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들이 두 바퀴를 딱 가지고 나가기 시작하니까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 개신교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우리에게 부족했던 예전의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성만찬입니다. 옛날에는 그저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는데 이제는 매월 한 번씩 할 정도로 성만찬의 바퀴를 굴리면서 예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성만찬을 하시면서 지내실 것입니다. 만약 제네바에 가시면 칼빈의 무덤을 찾아보십시오.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찾으시면 무덤을 파시고 관을 열어보십시오. 틀림없이 눈을 뜨고 있을 것입니다. 왜 눈을 뜨고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매주일 해야 할 성만찬을 일년에 한두 번 또는 네 번 정도로 끝내고 있는 것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한다”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일 년에 성만찬을 한 두 번만 하도록 하는 것은 악마의 농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로 바깥에 있는 책을 보면 그 말이 나옵니다. 악마의 농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악마의 농간에 놀아난 줄도 모르고 1년에 한 두 번만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전의 바퀴를 너무 소홀히 여겨왔던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올 때마다 우리 예배 현장을 보면서 ‘예배’라는 말은 세계에서 제일 많이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예배의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 속해있습니다. 우리 통합측은 금년에 총회에서 정식으로 새예식서를 통과시키게 됩니다. 그것의 집필진으로서 앞 부분을 다 채워가면서 열심히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내용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강의하게 된 것은 주로 그 예배를 새롭게 건져보겠다는 예배 복구 운동의 결정판인 이 예식서의 내용을 추렸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이번 예배예식서 맨 첫 순서에 “예배를 위한 기도”라는 기도문을 먼저 넣었습니다. 평신도, 예배 인도자를 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예배를 위한 준칙을 냈습니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일에 대한 개념입니다. ‘주일’을 일컬어서 ‘작은 부활 주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제쳐놓고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부활 사건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의 주일은 부활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이 주일의 행사입니다. 그 날에 와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와 존엄과 경배의 생각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개신교에서 맨 먼저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 있는데 실질적으로 많은 개혁교회들이 여기에 줄기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이 실질적으로 많은 개혁교회, 특별히 장로교회의 원조가 되는데 거기에서 보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성상 앞에서라든가, 왕족이 나타나든가 할 때 일체 경의를 표하지 못한다. 그리고 와가지고 겸손하게 자리를 잡고 주님을 만날, 소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강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가 절대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인도자가 어떻게 준비를 해 나가느냐, 어떤 자세를 갖추고 나가느냐를 매우 강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예배의 첫 출발은 이렇게 됩니다. 모든 예배에서는 반드시 두 가지 행위가 있었습니다. 첫째, 예배는 말씀을 읽고 설교했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초신자 해산이 있습니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다 집으로 보냅니다. 다 보내고 세례 받은 사람만 앉아가지고 바로 성만찬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1부 말씀과 2부 성례전이 항상 같이 병존하는 것이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430년, 어거스틴이 세상을 떠난 뒤 설교의 전성기가 시들어져 버립니다. 그때 설교를 없애 버리고 성만찬으로 계속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버텨오기 시작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나 드디어 종교개혁을 하는데 마틴 루터는 분명하게 그 미사를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습니다. 단 거기에 자기들의 국어를 사용하도록 했고 지금까지 외면당해 온 설교를 거기에 넣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틴 루터부터 실질적으로 설교와 성만찬예식이 초대교회와 똑같이 회복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츠빙글리입니다. 츠빙글리는 개혁을 하면서 성만찬을 없애버리고 설교만 했습니다. 칼빈이 30년 후에 나와서 “잘못된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말씀과 성례전 회복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례전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예배에 상존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의 준칙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예배는 단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가 끝나면 그것으로 다 끝난 것으로 아는데 예배는 연속입니다. 내 가정 속에서 하는 가정예배가 바로 예배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게 됩니다. 어느 날 아주 높으신 분이 저에게 책을 한 권 출판했는데 설교를 해달랍니다. 출판 기념예배라고 해서 안 간다고 했습니다. 왜 못 오느냐고 해서 “못 가는 사연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출판기념 예배라는 것은 출판한 사람을 위한 예배인데 그 사람을 위해서 제가 무슨 설교를 한단 말입니까?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요.” 그러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하면 오겠느냐고 묻습니다. “간단합니다. 이름을 바꾸시오.” “무슨 이름을 바꿉니까?” “지금 당신이 하는 행위를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안 되오. 출판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예배로 드릴 수 없소.” “바로 그 뜻입니다.” “그 뜻을 말로 하시오.” 그래서 “누구 누구 출판 감사예배”라고 고쳐서 제가 가서 설교를 했더니 하는 말이 “이미 주보 다 나왔고 포스터가 다 있고, 플래카드를 다 붙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못 갑니다.” 그랬더니 다 바꾸고 와서 설교해 달라고 해서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예식서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기념예배에 “몇 주년 기념예배, 종강예배, 기념예배, 졸업예배, 개회예배, 입당예배” 그런 말을 없애버리라고 했습니다. 다 없애버렸습니다. “입당 감사예배, 졸업 감사예배, 입학 감사예배” 이렇게 바꾸어야 된다고 명문화시켰습니다. 이번 총회에서 아마 많은 분들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 기독공보에 30여회에 계속 쓰고 있는 말이 이것입니다. “이제는 인간 위주로 하지 말자”입니다. 특별히 임직예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임직하면서 드리는 예배”라든지 “임직 감사 예배”인데 임직자들이 강대상 위에 앉아가지고 꽃을 꽂고 앉아 있는 모습은 아주 괴롭습니다. 그것도 못 앉게 했습니다.
저희 학교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예배당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 위주의 방식을 철저히 타파했습니다. 강대상 위에 의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이 화려하게 앉아 있는 모습, 설교자는 누구도 화려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개혁교회의 정신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인간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일 예배도 없습니다. 생일 감사예배, 그것이 하나의 우리의 변모된 모습입니다. 모두가 다 이 예배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뜻, 정성을 모두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뚜렷한 형태, 내용, 그리고 거기에 모든 순서가 집중되지 않으면 우리 한국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아멘’이라는 말도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실 것을 약속하십니까?”하면 “아멘”하는데 아멘을 못 하게 했습니다. “예, 약속합니다. 예, 서약합니다. 예, 영접합니다.” 그렇게 일일이 묻는 대로 대답을 정확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의 잘못된 언어관습을 버리고 형식적인 것도 다 버리고 이제는 정말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는 고집도 부려 봤습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축사다, 경과보고다, 감사패 증정, 인사 예물교환 이런 것이 예배에 많습니다. 그것은 전부 2부로 돌리고 2부에서 행하도록 했습니다. 축도가 끝난 다음에 하도록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꽃 주고, 박수 치고 한참 하다가 축도하면서 예배가 끝납니다. 그것들은 예배 가운데 있을 순서가 아닙니다.
또 하나 더 재미있는 것은 광고를 전부 축도 다음으로 했습니다. 아까운 설교 듣고 은혜받은 사람들에게 장황한 광고를 실컷 하다보면 무슨 설교를 했는지도 모르고 광고만 듣고 예배당을 나서는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간단하게 광고하도록 했습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해보자는 새로운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각 교단에서도 우리의 예식서를 보고 함께 참여해 주시면 한국 교회의 예배 정신이 조금 달라지지 않겠는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과거보다 훨씬 더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인간 중심 예배에서 하나님 중심 예배로 바꾸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꼭 권면하고 싶은 대목입니다.
예배는 크게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조가 짜여 있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예배 순서를 보면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배의 시작
앞부분 멘트가 무엇인가를 찾아봤습니다. 우리는 종을 두 번 울리고 “다같이 묵도하심으로…”하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없습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를 해가지고 지상에 “그것은 이것입니다”란에 제가 발표를 했습니다.
예배시 종은 두 군데서 썼습니다. 옛날에 개혁교회들이 천주교회 틈에서 시작할 때 산골짜기에 개혁교회가 있으니까 종을 치면 “아, 저기가 교회구나!”하면서 찾아 갔습니다. 그것은 예외고 이 종은 어디에서 있었느냐 하면 선데이 스쿨에서 사용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이 마구 떠들 때 조용히 시켜도 안 들으니까 그 다음에 종을 쳐서 조용하게 합니다. 그래가지고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 때는 예배를 드리러 오면 매우 떠들었다고 합니다. 「백목강단」이라는 최초의 설교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화학당의 선생님이 쓴 일종의 설교처럼 쓴 글이 있습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오면 친구 따라서 앉아 가지고 반가워서 와글 와글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화도 없고, 자동차도 없는 시대에 오랜만에 만나니까 얘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을 쳐야 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안 되니까 두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종교 행위 중 불상 앞에 가면 조용히 묵념을 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다같이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들에게 묵념”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된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성인데 잘 되었다고 땡땡 종을 치고 “다같이 묵도하심으로…”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다 고개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내를 잠잠하게 해놓고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민도가 충분히 높습니다. 제일 먼저 읽은 것은 예배선언입니다. “이제 다같이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어서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한다든가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은 “오늘 날씨가 매우 좋습니다. 바로 이 좋은 날, 우리 함께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겠습니다.”하면 오르간 전주가 나온다든가 예배의 부름이 터져 나오는데 초대교회 때 보니까 맨 먼저 무엇을 했습니까?
예배부름이 있기 전에 맨 먼저 참회의 기도를 했습니다. 써가지고 함께 읽는다든가 조용하게 참회의 기도를 한다든가, 침묵을 한다든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우리처럼 종 치고 “다같이 묵도하심으로…”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외국 사람들이 와서 보고서는 깜짝 놀라가지고 이것이 어디어서 온 것이냐 성경 어디에 있는 것이냐 라고 물을 때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이제 대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맨 먼저 예배를 위해서 참회와 경배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예배 순서에 보면 무조건 찬송, 찬송 해왔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앞에는 찬양의 찬송, 경배의 찬송이고 설교 다음에는 감사의 찬송, 응답의 찬송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무슨 찬송인지 알고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찬송인지 모르고 부릅니다.
앞에 경배의 찬송, 찬양의 찬송은 현재 우리 찬송가 65장까지 있습니다. 주일 낮 예배 때는 그 찬송만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부터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이라든가 “성령이 오셨네”를 부르면서 박수를 쳐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상식인데 교파를 초월한 상식입니다. 절대로 장로교만의 것이 아닙니다. 교파를 초월해서 하나님 경배를 먼저 드린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경배를 드릴 때는 경배의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어쨌든 예배의 시작 부분에 예배의 부름이라든가, 경배, 우리의 고백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 봉독
절대로 제가 장로교를 대변하고 있지 않음을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이 서식을 그대로 가지고 가서 만약에 그 교단에서 문제가 발생된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성경봉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앉아 있는 예배 청취자들에게 성경이 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경회에서 그런 것을 하려고 합니다. 성우를 한 사람 모셔다가 성경을 봉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성경만 듣게 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고 싶습니다. 성경봉독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럴 때 맨 먼저 일반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마태복음 3장 1절에서 5절까지 있는 말씀입니다”하고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못 알아들었을지도 모르니까 1절부터 봉독합니다. 봉독한 다음에 꼭 이 말을 붙여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은혜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하면 외국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께 감사합니다”하고 같이 합창을 합니다. 가톨릭적인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시면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봉독자는 설교 전후 이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말씀의 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례전
그 다음에 성례전이 끝난 다음에는 ‘파송’ 나가라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복 내려주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강복하셨습니다.
우리나라 대교회 목사님이시고,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분이고, ‘축복’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셨던 분입니다. 이 분을 대할 때 과거 인상을 가지고 그 분을 대하지 마십시오. 제가 연 3주째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십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빌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것은 강복입니다. 복을 내려 주십니다”하셔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설교에서 그렇게 많이 쓰셨던 “생각합니다. 원합니다. 기원합니다.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하나도 쓰지 않습니다. 네 번 들었는데 딱 한 번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거 습관 때문에 나온 말 같습니다.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배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께서 복 내려주시는 것을 선언해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군데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말씀으로 복을 내려주시고 예배에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의 구조가 짜여집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맨 앞의 부분은 참회와 경배를 드리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 성만찬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또 우리에게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 봉헌, 우리가 드리는 부분이 있고, 그 다음에 축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 내려주심을 선언하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구조가 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성도의 절대 다수가 예배 순서의 하나 하나의 의미를 모르고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이 기원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성시 교독이 뭐냐고 물으면 그냥 말씀 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그릇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역자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본인이 인도하는 매 순서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가르쳐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목회를 했던 교수로서 목회적 차원에서 현장에 필요한 것을 들려줄까 생각합니다.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강의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알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우리가 예배 순서 하나하나를 잘 알고 예배를 드려야지 무조건 드리면 안 됩니다.
예배를 위한 준비
소위 전주라든가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예배의 준비는 단순히 주일날 바로 예배 시작 직전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상 계엄령이라는 말은 군사정권에서 쓰는 말이 아니고 우리 예배에서 써야 할 단어입니다. ‘비상 계엄’이라는 말은 금요일날 오후나 토요일부터는 집안에 완전 비상 계엄령을 내려가지고 전혀 상대에게 마음 상하는 말을 못하게 하고 그때부터 서로를 위해서 긴장 가운데서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그때 한 마디만 하면 사탄이 파고 들어옵니다. 금방 속상해집니다. 예배 인도자는 상한 심령으로는 안 됩니다. 온 가정이 보고 웃고 살 수 있는 분위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의 선언
예배를 선언하게 됩니다. 그때 성가대가 거기에 대한 응답송을 하고 예배의 부름, 예배의 말씀이라는 것을 하는데 예배의 부름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배하라, 오라,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에게 와서 잠잠할지어다.” 명령하시는 것을 그대로 성경 구절을 통해서 읽어주는 것입니다. 장엄하게 읽어주어야 합니다.
제가 「예배와 설교」라는 핸드북을 해마다 펴냅니다. 예배의 부름은 그 책에 나온 것이 정설입니다. 다른 책에 나온 것은 정설이 아닙니다. 금년에 저와 비슷한 책을 만든 것을 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의 시를 갖다놓고 예배의 부름에 이 시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하고 시를 여러 군데 써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의 부름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원
그 다음에 “기원합니다”해서 기원하는데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받아주십시오”하는 얘기입니다. “영광 받아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간단하게 나오고 두 번째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해 주시옵소서. 깨끗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기도를 드리게 해 주시옵소서.” 이 말만 나옵니다. “저희 장로님 수술했는데 꼭 낫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기원에서 엉뚱한 기도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단순하게 “영광 받으십시오. 오셔서 우리를 성결하게 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 핵심적인 말만 간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보통 일 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이 기도를 기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기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찬송에는 꼭 경배의 찬송 또는 찬양의 찬송이라고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시편 교독
시편 교독은 초대교회 역사를 모르면 의미를 모르실 것입니다. ‘성시교독’이라고 많이 바뀌어졌는데 원칙은 그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찬송가는 전부 시편이었습니다. 시편에 곡을 붙여가지고 시편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가 나와 가지고 난데없이 복음송과 같은 곡을 가사로 해서 마음대로 곡을 붙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나라 국가까지 집어넣어서 부르게 했습니다. 민요나 댄스곡 등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을 좋다고 신나게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부르고 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것은 독일의 국가입니다. 거기에 가사를 집어넣었습니다. “천부여 의지없어서”는 스코틀랜드 민요입니다. 그런 곡을 부르면서 거기는 보수고 우리나라 가락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이단 삼단 하는데 잘못된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솅키라든가 웨슬리 같은 사람이 나와서 찬송가를 많이 보급하다 보니까 시편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찬송가를 사용합니다.
칼빈은 억척스럽게 예배는 반드시 시편송을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전통이 지금도 살아있는 곳은 장로교의 원조인 스코틀랜드 교회입니다.
그런데 큰일났습니다. 성경에서부터 있었던 시편송이 우리 예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니까 큰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 신학자들이 드디어 만들어낸 것이 “시편송은 부르지 않되 그 시편을 예배 때마다 우리가 함께 읽는 순서를 갖자”해서 시편교독문을 넣은 것입니다. 우리의 교독문은 교회 절기가 들어있는데 교회 절기에 맞는 절수를 짜깁기 하다 보니까 교독문이 되었습니다. 원칙은 시편 교독입니다. ‘교독문’이라고 하는 것보다 ‘시편 교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편교독이 나왔습니다.
성가대의 찬양
성가대석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가대석은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지금 가장 예배를 존엄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교회는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부르게 합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가보면 오르간 반주자를 못 보게 하기 위해서 굴을 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이면 피아노 치는 솜씨를 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뒤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설교단은 오른편 그리고 인도대는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부분이고 설교대는 하나님께서 내려주는 부분입니다. 설교대에서는 딱 세 가지만 하게 됩니다. 성경봉독, 설교, 축도 이 세 가지밖에 못 합니다. 이것은 내려오는 부분입니다.
올라가는 부분인 저쪽에 성가대석을 만드는데 성가대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방향이 반드시 설교자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예배드리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얘기입니다. 찬양이 끝나고 앉으면 목사님을 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위치를 정해야 합니다. 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눈으로 직접 설교자를 보는 것이 55%의 효과가 더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뒤에 있던 성가대석은 많이 철수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특별히 성가대에 대해서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제가 예배학 개론에 집필했습니다만, 저는 오페라에 가면 오페라 단원들은 보지 않고 지휘자만 봅니다. 예술적으로 지휘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가 어떻게 화려하게 하는가 그것만 쳐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성가대 지휘자는 지휘의 폭을 줄이고 가급적이면 너무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만 쳐다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 전 기도
설교 전 기도는 실질적으로 옛날에는 아주 길게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음에 보면 많이 했는데 설교 전 기도는 지금에 와서는 많이 달라집니다. 기도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소위 성령 조명의 기도, 성령 임재의 기도 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간단한 내용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기다리는 심령들에게 말씀을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종에게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서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하는 간단한 얘기입니다. 여기에서 긴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설교 후 기도
설교 후 기도에 보면 아까 앞의 기도와 맥을 같이 합니다. “뿌려진 씨앗, 성령님께서 가꾸시고 싹이 나게 하시고 결실을 맺게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긴 기도가 필요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와 응답의 찬송
설교가 끝난 다음에 말씀과 연관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우리가 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응답의 찬송, 또는 감사의 찬송이라고 해서 응답 또는 감사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야 설교와 연관이 되어서 찬송을 부를 때 말씀을 상기하면서 더욱 더 감격적인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세례
세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례, 입교 문답 같은 것은 꼭 성만찬을 할 때만 하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율법처럼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세례, 유아세례, 입교문답, 학습은 어느 예배에서나 당회에서 결정한 대로 줄 수 있습니다. 꼭 성만찬과 같이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억척스럽게 일 년에 두 번 성례전 할 때 세례를 주곤 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고 싶어도 못 받고 죽고 맙니다. 얼마나 큰 우를 범하고 있습니까? 세례는 당연히 결의만 거치면 언제든지 어느 예배에서든지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는 가급적이면 설교 후가 아니라 설교 전에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가 울면 예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일찍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수세
초대교회의 목사 지침서였던 열두 사도 교훈을 ‘디다케’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교파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침례교도 없었고 장로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디다케에 보면 세례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흐르는 물에서 잠기면서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두 번째는 흐르는 물이 없을 때는 물을 받아 놓고 너무 물이 차가우면 따뜻하게 데워서라도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 번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 번 물을 뿌리는 방법입니다.
요즘은 한꺼번에 갖다 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합니다만 그때는 반드시 세 번 하도록 했습니다. 물을 갖다가 그대로 부었습니다.
제가 제일 불만스러운 것은 손에 물을 적신 후 털어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다케, 즉 초대교회의 목회 지침서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얼굴에 물이 좀 흐르면 어떻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세례의 예식 행위는 세 가지가 소위 디다케라고 하는 열두 사도의 교훈집에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한 가지만 진리가 아니고 세 가지 다 진리요 우리 교회의 전통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봉헌
원래 기독교의 봉헌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성물, 빵과 포도주를 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많다 보니 그것을 가지고 애찬식도 나누고 방언하는 사람은 신유의 은사도 나누고 했습니다. 이 세기에 와서 그것을 다 없애 버렸습니다. 신유의 은사도 없애 버리고 애찬식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성만찬에 쓸 수 있는 성물, 빵과 포도주만 적당량을 특별하게 준비하게 했고 남은 것은 전부 다 자기의 몸을 바치는 행위로서의 소위 헌금을 하게 했습니다. 돈을 드리게 했습니다. 그 돈은 전부 다 구제헌금으로 사용하였던 것이 초대교회의 봉헌의 정신입니다.
그때 봉헌에는 소위 헌금을 아무리 많이 바쳐도 지금처럼 그렇게 거기다 복을 빌어 주는 일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외국에서도 아주 드문 일입니다. 아마 어떤 교인이 십일조로 백만 원을 바쳤나 봅니다. 그런데 “아무개 어느 집사님이 십일조 백만 원을 바쳤습니다. 주여, 믿사오니 다음달부터는 한 달에 1억씩 십일조를 바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십일조 1억을 바치려면 한 달에 순이익이 10억이 나와야 할 것이고 1년이면 120억을 벌어야 하는데 재벌도 그렇게 못 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소위 시주를 바친 사람이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에서 온 생각입니다. 절대로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 헌금을 바치는 것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의무적인 행위입니다. 책임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있는 것을 없는 사람을 위해서 내놓는 것 주의 몸 된 모든 교회를 움직이기 위해서 내 시간을 못 내놓으면 내 물질을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너무 복받는 것과 직결시켜가지고 10만원 바치면 100만원이 생긴다는 일종의 투기성을 조성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이것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성만찬
성만찬을 할 때는 반드시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이라든가 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말씀을 읽지 마시고 제정의 말씀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에피클레시스)는 대단히 중요한 기도입니다. 성례전을 할 때 성물을 앞에 놓고 이 기도를 드리면 바로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이 바로 주의 살이 되고 주의 피가 된다는 소위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말합니다. 이 기도는 루터교에서는 공재설이라고 해서 기도하고 나면 주님께서 바로 거기에 함께한다고 하고 영적 임재설을 믿고 있습니다. 그때 임재한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신학적인 해석은 저만큼 갖다 놓고 그 에피클레시스라는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는 매우 중요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빠뜨리면 안 됩니다. 너무 형식적으로 성례전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없으면 성령께서 임재 안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꼭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정의 말씀 다음에 몇 마디의 교훈을 준 이후에 꼭 필요한 기도입니다.
분병분잔
저는 대단히 보기 싫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빵을 뗄 때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어 가라사대”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보기가 흉한지요.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이것을 왜 이렇게 할까 하고 봤더니 칼빈이라든가, 부쩌라든가, 녹스라든가 이런 분들을 보면 다릅니다. 성체분할이라고 번역해도 되겠습니다.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를 말한 다음에 정중합니다. 아주 정중합니다. 그때가 소위 말하는 성만찬 성례전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문헌을 다 더듬어보니까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같이 마지막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 떡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떼시면서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한 내 몸이다. 받으라. 먹으라.’ 우리 주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주의 살을 함께 받겠습니다.”
잔도 마찬가지입니다. “식후에 우리 주님, 잔을 들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잔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서 흘린 내 피다. 너와 내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피다. 받으라. 마시라.’ 우리 주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주의 잔을 함께 받겠습니다.”
이 부분이 성만찬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절정입니다.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갖게 되는 위대한 부분입니다. 이런 것은 전혀 없이 빵 조각을 조금 떼가지고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어 가라사대”하면 얼마나 형식적입니까? 반성해야 합니다.
천주교에서 신부가 되려고 할 때 서품을 받습니다. 우리 말로 말하면 안수입니다. 안수받기 전까지 아까 말씀드린 성체분할 하는 연습, 잔을 드는 연습을 몇 번쯤 하느냐 하면 천 번쯤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훈련을 받지 않고 안수를 받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어느 교회에서 성만찬을 집례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카스테라를 주먹 반절만하게 잘랐습니다. 그것을 다 줍니다. 아마 아침 식사를 안 한 모양입니다.
성찬에 있어서 두 가지를 명심해 주십시오. 첫째, 무미, 맛이 없어야 됩니다. 맛이 조금이라도 있게 되면 바로 식욕이 증가되니까 안 됩니다. 두 번째, 소량, 양이 적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공회나 수녀원에서 만든 것을 갖다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제가 가톨릭에 가서 사겠다고 했더니 저를 성직자로 보지 않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바로 주의 살이 되어서 감실에 보호하는데 당신들은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여보시오. 나는 예배학 교수요.”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성공회에 아는 신부가 있어서 그 길을 터 놓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갖다 쓰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포도주를 쓰는 것은 사실입니다. 영어로 와인이지 쥬스가 아닙니다. 와인은 와인인데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에 술 냄새가 나는 것을 그대로 쓰면 모처럼 큰 마음 먹고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고 예배당에 와서 세례를 받고 집사까지 되었는데 알코올 냄새를 맡으면 아편 하는 사람과 같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죄를 짓지 마십시오.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 번만 불에 열처리하면 알코올 성분이 다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결단
감사의 찬송이라든가 결단의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의 기도도 좋습니다. 그때는 한목소리로 할 수 있도록 감사의 기도를 다 써놓고 하는 것도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위탁
이것은 ‘파송사’라고 표현도 됩니다만 이 말은 마지막 나아가서 책임 있게 주의 자녀로 살라는 부탁입니다. 길게 늘이면 안 됩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한 주간을 주의 자녀로 승리하십시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매주일 이 말만 하면 이상하니까 그 주에 사랑에 대한 설교를 했다면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이 순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명령 받들어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봉사하십시오. 서로 아끼십시오”하고 나서 손을 들어서 축도합니다.
축도
축도가 나오는데 이것은 강복선언입니다.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칼빈, 부쩌, 존 녹스, 루터 등 유럽 쪽에 가면 제일 많이 쓰는 축도는 강복선언입니다. 아론의 축도를 제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라 아론과 그 제사장들에게 가서 축복할 때에 이렇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문장입니다. 우리가 만든 문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문장이 제일 많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미국의 장로교에서는 바울의 축도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한 교단에서는 축도 때 “축원하옵나이다”라는 말은 하도록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축원하옵나이다”의 주어는 ‘나’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1인칭 단수를 안쓰는 습관 때문에 ‘나’라는 말이 빠져있을 뿐입니다. 내가 축원하는 것이 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한 기도입니다.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 성도들에게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 지어다”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하십시오. 바꾸지 마십시오.
저는 총회에서 싸우다 졌습니다. 제가 축도위원회 연구위원으로 나와서 당당하게 정상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때 1년간 보류하고 축도 연구 위원들을 보강하고 내년에 가져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복원한다고 해서 저는 많이 보충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와 위원장을 다 빼버리고 ‘축원합니다’라고 한 사람만 집어넣어가지고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교수는 앞으로 총대에 못나온다 해가지고 총대도 못나갔습니다. 노회에서 뽑아 주어도 총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3년 후에야 겨우 제가 총회에서 노회장이 되니까 자동으로 총대가 되었습니다. 머리 내밀러 갔더니 신학교 교수인데 총대가 될 수 있느냐 될 수 없느냐 이것이 왈가왈부 붙어가지고 복잡했습니다. 하필이면 총회를 열자마자 각부 위원회를 해가지고 제가 교육부 부장으로 피선되었습니다. 교육부 부장에 피선되었는데 어떻게 할 거냐 해가지고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부장직을 사임할 테니까 신학교 교수도 총대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총대로 나가게 됩니다.
저희 교단에 속하지 않은 분들은 아마 결정된 것이 한 군데도 없는 줄 압니다. 성경대로 하심이 진리입니다. 저는 지구가 둥글다고 한 갈릴레이를 사랑합니다. 저는 이 사건 때문에 갖은 불이익을 당하면서 오늘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대중 속에 있지 않습니다. 소수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는 어느 때인가 밝혀질 날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교단에서 그대로 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꼭 부탁합니다. 제발 성경대로 해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마치 칼빈처럼 제 무덤 속에서 관이 썩는 한이 있더라도 제 눈은 절대 감기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완벽한 모든 예배순서에서 세례, 성만찬까지 다 합한 순서입니다. ‘이렇게 오래하냐?’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설교만 짧게 하시면 1시간 10분만에 마친 예배순서입니다. 자기가 줄일 것은 안 줄이고 예배순서만 보고 겁내지 마십시오.
<집례자를 위한 예배순서>
이 순서는 집례자가 앞에 제시된 예배를 실수함 없이 집례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안내를 첨가한 것입니다.
예 배 순 서
예배를 위하여 나아감
전주……………………………………………………………………………반주자
예배선언………………………………………………………………………집례자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 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겠습니다.)
응답송…………………………………………………………………………성가대
예배의 말씀………………………………………………………………… 집례자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장 1, 7절)
*예배의기원 ……………………………………………………………………성가대
온 피조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어 이 예배를 드리옵니다. 먼저 주의 영이 임하시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옵고 하나님 을 예배하는 데 합당한 아름답고 깨끗한 심령을 허락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귀한 예배가 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찬양과 고백
*경배와 찬송………(9장에서 58장까지의 찬송 중에서)……………… 다같이
*언약의 확인………………………………………………………………… 다같이
(인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십계명을 함께 교독하도록 한다.)
늘 우리는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 성례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예전에 참여하기 전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맺었던 언약의 십계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스스로를 살피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마음을 가다듬고 한 목 소리로 교독합시다.
집례자: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회 중: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집례자: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회 중: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참예선언…………………………………………………………………………집례자
잔을 받음……………………………………………………………………… 다같이
감사의 기도…………………………………………………………………… 다같이
위탁과 축복
*파송의 말씀……………………………………………………………………집례자
*축도…………………………………………………………………………… 집례자
후주…………………………………………………………………………… 반주자
교회소식과 성도의 교제
*경배의 찬송……………………………………………………………………다같이
*언약의 확인……………………………………………………………………다같이
*고백의 기도……………………………………………………………………다같이
*침묵의 기도……………………………………………………………………다같이
용서의 확신…………………………………………………………………… 집례자
*영광송……………………………………………………………………………다같이
중보의 시간
기도…………………………………………………………………………… 맡은이
주님의 기도…………………………………………………………………… 다같이
말씀의 선포
구약의 말씀………………………………………………………………………맡은이
서신서의 말씀……………………………………………………………………맡은이
찬양……………………………………………………………………………… 성가대
복음서의 말씀……………………………………………………………………설교자
설교 전 기도…………………………………………………………………… 설교자
말씀의 선포………………………………………………………………………설교자
설교 후 기도…………………………………………………………………… 설교자
세례와 성례전
수세 후보자 호명……………………………………………………………… 집례자
서약………………………………………………………………집례자와 수세후보자
성령 임재를 위한 기도…………………………………………………………집례자
수세……………………………………………………………………………… 집례자
선포와 환영…………………………………………………………… 집례자와 회중
성찬 성례전
*신앙고백……………………………………………………………………… 다같이
*성찬의 찬송……………………………………………………………………다같이
*성물 및 일반 봉헌…………………………………………………………봉헌위원
제정의 말씀…………………………………………………………………… 집례자
성령 임재를 위한 기원……………………………………………………… 집례자
떡을 뗌………………………………………………………………………… 집례자
참예 선언……………………………………………………………………… 집례자
떡을 받음……………………………………………………………………… 다같이
잔을 부음……………………………………………………………………… 집례자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동일한 지체임을 확인하게 하시오니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길을 걷게 하시오니 감사합니다.
주의 살과 피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게 하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로 이 땅에 화평을 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증거하는
이 민족의 등불이 되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돌리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감사의 찬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493장) 다같이
(결단의 의미가 있는 찬송을 부르도록 한다.)
위탁과 축복
*파송의 말씀……………………………………………………………………집례자
(이제 우리는 모두가 화평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할 생명들입니다.
이제 오늘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들로 거듭나도록 하십시오.)
*축도…………………………………………………………………………… 집례자
후주……………………………………………………………………………… 반주자
성도의 교제…………………………………………………교회소식과 성도의 교제
( ) 안의 말들은 집례자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맺겠습니다.
목사로서 안수 받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첫째는 선지자의 기능을 위해서 안수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서 안수를 받습니다. 두 번째, 제사장의 기능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집례하는, 인도하는 기능을 행하기 위해서 안수 받습니다. 세 번째, 섬기는 기능입니다. 이것을 왕이라 합니다만 다스리는 기능이 아니라 섬기는 기능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선지자, 즉 말씀을 전하는 기능만을 강조해왔습니다. 목회 정도만 강조하고 다른 것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다가 전해주는 기능입니다. 제사장은 이들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간에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해 주고 이들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단을 쌓는 일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살려면 속히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업자득인 것 같습니다. 천주교는 어떠한 경우도 예배를 대체할 길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서 성만찬을 직접 떼지 않으면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석입니다. TV로 아무리 보아도 참여가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이 아프다, 차가 고장 났다, 바쁘다 해서 유선 TV로 방송해 주니까 경건하게 앉아서 드립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이 되면 그때부터는 잠옷 바람으로 앉게 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누워서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만 들으면 된다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가 내 방에 와서 설교만 해주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거룩한 곳에 나아가서 의미있는 예전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강조할 분은 바로 목사입니다.
개신교가 가면 갈수록 숫자가 줄어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지금 천주교는 숫자가 줄지 않고 늘어나는데 왜 개신교는 줄어듭니까? 예배 경시 풍조 때문에 자업자득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씀을 꾸준히 준비하시는 것만큼 예배를 철저히 준비하시고 예배와 예전다운, 누가 와서 봐도 그 예배가 ‘좋다, 의식이 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 예배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 민족은 제의적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행태 속에서 반만년 역사 동안 제의적 문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은 자연스럽게 제의적 행위를 좋아합니다. 이 민족을 가리켜서 제의적 민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배 순서를 좋아합니다.
인천의 한 감리교 목사님은 성찬예식을 매주 행합니다. 신기한 사건입니다.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감리교 교인들이 줄어드는데 그 교회만큼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최근의 보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면 예배드린 것 같지 않다고 해서 그 교회로 다시 온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이 살아있는 예배다운 예배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냄새가 난다고 해서 영 예배 안 드릴 겁니까? 어렸을 때 친구라는 것은 어른들이 부르는 얘기고 우리는 동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북에서 동무라고 부르니까 어느 때부터인가 동무라는 단어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천주교에서, 성만찬을 엄숙하게 하니까 우리는 안한다 이렇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천주교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말씀과 예전이 살아 있는 두 바퀴를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속도로 굴려서 앞을 향하여서 전진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