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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칭의의 증거 / 아더 핑크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다음에 아브라함의 사례를 제시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한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바로 그 아브라함의 사례로부터 판이한 결론을 도출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 _약 2:24
이것은 불신자들이 자신의 불신앙을 옹호하는 근거로 내놓는 "성경의 모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명백하게 상충하는 구절들을 조화시키는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믿음은 거룩한 책의 무오성을 흔들림 없이 확신한다. 믿음은 겸손하여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한다(욥 34:32). 믿음은 나태하지 않다. 믿음은 믿는 자를 재촉한다. 당혹스럽게 만들고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열심히 검토하고 근면하게 조사하여, 각 책의 주제, 각 저자의 관점, 각 구절의 전후관계를 찾아내도록 몰아댄다.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 진술을 한 의도는 그 문맥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엄청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사람이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사람이 각자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각자 자기자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행함에 의해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이 밝히고 있다. 바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칭의는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서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의 논증은 만일 19절부터 28절까지 전체 구절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휠씬 결정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크게 중시하였기 때문에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어떤 행위와는 관계없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라는 그 방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의 칭의에 의해 피조물의 교만은 끌어내려지고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받는다.
사도 야고보의 관점은 매우 상이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오류에 대응하여 서신을 작성하였다. 타락한 인류는 극단적인 피조물이다. 인류는 자신이 의를 신뢰한다는 거짓된 도피처를 빼앗기는 즉시 그 반대쪽 극단의 오류로 달아난다. 그 오류는 인류는 자신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선행을 할 필요성이 전혀 없고 불경건한 삶과 실천은 어떤 위험도 초래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위험천만한 오류에 다음 아니다.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즉시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바꾼 자들이 많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신약성경 자체가 매우 명확하게 증거한다. 이 오류를 신속하게 이론으로 뒷받침하는 동시에 거침없이 실행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의 서신서를 작성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불경건한 실천은 몹시 사악하고 무섭도록 위험하다는 점을 밝혀주는 것과 선행의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사도 야고보는 공허한 신앙고백을 폭로하는 데 서신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특히, 야고보는 2장에서, "믿음"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진 자들 즉, 복음이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는 비록 마음이나 기질이나 행위에 영적 영향력을 전혀 미치지 않더라도 구원 받기에 충분한 "믿음"으로 간주하는 관념에 안주하는 자들을 거론한다. 야고보는 그들의 소망이 헛것이며 그들의 "믿음"은 마귀들이 소유한 믿음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밝힌다. 칭의의 믿음은 공허한 고백자들의 "믿음"과는 매우 다른 것임을, 아브라함의 사례로부터 입증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종행위를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까지도 순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은 지 여러 해후에 일어났다. 이 순종행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와 본성을 나타냈다.
위의 언급으로부터 매우 분명해진 사실은, 바울이 거론하는 "칭의"와 야고보가 거론하는 "칭의"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바울의 입장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만한 존재로 바꿔주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반면에 야고보의 입장은 이러한 믿음은 혼자 다니는 법이 없고 모든 선한 행실을 동반하며 선행이 없는 경우에는 칭의의 믿음이 존재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칭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낳는 열매를 나타냄으로써 바로 그 믿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바울은 우리의 이신칭의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인지에 관해 썼고,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어떤 것인지를 썼다. 이신칭의를 바울은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야고보는 우리의 고백이라는 측면에서 다룬다. 바울의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고, 야고보의 칭의는 사랑으로 역사하고 순종을 낳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방금 언급한 구별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독교 신학자가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단언할 때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는 오직 믿음만 존재한다는 취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칭의의 믿음은,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이 나눠주는 다른 모든 은사를 항상 동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는 취지로 하는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과 더불어 회개와 회심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행 3:19). 오히려 기독교 신학자가 그렇게 말하는 취지는 성경은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원인을 죄인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에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의를 받는 것에 대해 믿음이 맺고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혹은,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결과를 낳을 때 어떤 우발적인 영향력 혹은 도구적 효력을 발휘하는, 다른 어떤 것도 죄인에게 요구하거나 죄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윌리엄 커닝햄으로부터 요약).
반면에 의롭다 함을 얻어주는 믿음은 빈둥거리고 효력이 없는 원리가 아니라 마음을 정결케 하고(행 15:9) 사랑으로 역사하는(갈 5:6) 원리이다. 믿음을, 공허한 고백자의 단순한 지적 신앙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야고보가 매우 강력하게 역설한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검증이다.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도록 만드는 근거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고 하셨음을 입증하는 증거를 알리는 것이 야고보의 저술의도이다. 야고보의 입장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즉, 의로운 자란 의의 길로 행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듣기만하는 자"는 자기기만 즉, 망상에 빠진 자라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신다. 이 두 축복은 불가분리적이며, 결코 분리되어 발견된 적이 없다.
야고보서의 주제와 관점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야고보서의 많은 부분을 잘못 파악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은혜를 부인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오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다른 어느 곳 이상으로 바로 이 부분에 호소하여 이 위대한 진리에 즉, 행위 없이,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반기를 든다.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인간을 높이고 복음을 폐기하는 율법주의자들은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자신들의 오류를 뒷받침해줄 근거를 야고보서에서 찾았다. 온갖 공로주의자들은 야고보서 2장을 인용하여 성경에서 의를 가르치는 다른 모든 구절을 반박한다. 로마교도들과 그들의 배다른 형제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4절)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일체의 논의를 결말짓는다.
따라서 나는 야고보서 2장 14절~26절을 다루고 몇 가지 논평을 하겠다. 14절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도 야고보는 "믿음이 있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런 식의 명제는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이와 같은 명제는 실질적인 믿음이 존재하는 모든 경우에도 선행은 반드시 뒤따를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야고보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무슨 유익이 있으냐"라고 말한다. 신자가 아니면서도 신자인척 말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입지를 확보하고 도덕적 및 사회적 품위를 높이고 어떤 "교회"에서 교인자격을 획득하는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가?
신자인 척하는 공허한 고백자들 전부가 (어쩌면 많은 이들이) 위선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고 있다. 비극적인 사실은 의식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고 있다. 비극적인 사실은 많은 경우에 이들을 기만할 의도가 전혀 없는 설교를 통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의 기만성을 더욱 강화시켜줄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많은 사람들은 그저 고백일 뿐인 것에 만족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교리 해설을 청취하고 지적 동의를 하였다. 그리고 그 지적 동의를, 진리를 아는 구원적 지식으로 착각한다. 그들의 지성은 진리를 알지만 그 마음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고 그 삶은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정서와 방법은 여전히 세상적이다. 하나님께 대한 실질적인 복종도 없고, 거룩한 행함도 없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열매도 없다. 그들의 "믿음"은 전혀 가치가 없다. 그들이 믿는다고 고백한 것은 헛되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말)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에서 "(말)하고" 라는 동사에 강조점을 두면 야고보가 어떤 사람들을 반대하여 야고보서를 쓰고 있는지 즉각적으로 알아 챌 수 있다. 복음적 종교 전체를 복음에 대한 이론적 신념으로 대체하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말로 일체의 권면과 책망에 대꾸하는 자들에 대해 야고보가 반대논증을 펴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 없을 때 신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단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 이외에 어떤 선행과 영적 열매를 그 믿음의 증거로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그 공허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도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한다. 기독교 교리를 정통주의적으로 해설하는 능력과 칭의의 믿음은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_약 2:15,16
이 두 구절을 통해 야고보는 절에서, 실천행위가 수반되지 않고 순전히 말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무가치할 뿐이라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헐벗고 양식이 없는 자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그저 말만하고 평화롭게 떠난다는 점에 주목하라. 자선행위는 하나도 하지 않은 채 자선을 베푸는 척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는가? 아무 소용없다. 주린 배는 자애로운 말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다. 헐벗은 몸은 선한 소망에 의해 따뜻해지지 않는다. 복음을 읊조린다고 해서 영혼구원이 이뤄지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따르면, 믿음은 사랑에 의해 역사한다. 거듭난 영혼의 새로운 본성이 맺는, 성령의 첫 열매가 사랑이다(갈 5:22). 성령이 참으로 마음속에 믿음을 만들어냈을 때 그 믿음은 사랑으로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 동료 피조물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도는 공허한 고백자의 "믿음"을 시험할 때 즉각적으로 그 고백자의 사랑을 시험한다. 공허한 고백자의 사랑이 거짓임을 입증하여 그 믿음의 무가치성을 증명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_요일 3:17
진정한 사랑은 효력을 발휘한다. 진정한 믿음도 그렇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_약 2:17
여기에서 야고보는 앞에서 활용한 예증에 의거해서 죽은 믿음, 따라서 효력이 없는 "믿음"의 무가치성을 입증한다. 말한 내뱉고 행함이 없는 "사랑"을 무가치하다고 즉각적으로 비난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빈궁한 사람에게 자애로운 말만하고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속지 않는다. 나의 독자여!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공허한 고백에 속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단지 말뿐이고 삶으로 확증되지 않는 그런 "믿음"은 소용없다. 진리를 아는 내 머릿속 지식이 아무리 명쾌하고 건전해도,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아무리 탁월하게 떠들어대도, 내 행함이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면 나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믿음에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살아 있고 열매를 맺는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의 믿음이 아니다. 전적으로 무가치한 즉, "죽은" 믿음이다. 죽은 것일 "뿐"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들과 모든 거룩한 정서에 대한 사랑과 결별한 것일 뿐이다.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 이 따위 "믿음"을 어찌 인정하실 수 있단 말인지! "믿음" 없는 행함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_약 2:18
여기에서 참된 신자는 공허한 고백자에게 "당신은 자신이 신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적 행실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그래서 당신이 거룩한 삶의 선한 행위로 당신의 믿음을 나타낼 때까지는 진짜 성도가 당신을 형제로 간주하기를 기대하지 말라"라고 도전한다. 18절에서 야고보의 강조점은 "보이라"에 있다. 즉, 야고보는 증거를 요구한다. 당신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만일 우리의 고백이 이 시험을 견디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무가치한 것이다. 오직 마음과 삶의 참된 거룩만이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는 고백이라고 입증해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_약 2:19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나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고 있다!" 라는 반론을 예측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수를 친다. "그래, 아주 좋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마귀들의 그 '믿음'은 어떤 열매를 맺는가? 마귀들의 믿음은 마귀들의 마음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사람을 향한 그들의 행위를 변화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_약 2:20
이 구절에서 "헛"("케노스", keno, j) 것이라는 말은 "텅 빈" 것이라는 의미이며,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순종적 행함의 증거가 없는 자의 무의미함을 폭로하는 말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_약 2:21, 22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은 적극적이며 결실을 맺는 원리이다.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여러 해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창 15:6).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드린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공연하게 입증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고백의 진성성을 드러낸 것이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그 의도된 목적에 도달하였다. 즉, 그 믿음에 부여된 목적을 성취하였다는 뜻이다.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말은 "나타났다" 혹은 "알려졌다"라는 뜻이기도 하다(고후 10:9).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_약 2:23
이 구절에서 "성경"은 창세기 15장 6절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증거 하신 구절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순종을 최상으로 입증하였을 때, 하나님의 증언이 "성취" 되었다. 혹은 그 진실성이 입증되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 구절에서 알게 된 것은 이 구절의 전체 기조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이 점은 요한복음 15장 14절의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는 말씀과 비교하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_약 2:24
이 구절에서 "이로 보건대"라는 말로 사도는 전술(前述)한 것으로부터 결론을 도출한다. 우리는 단지 머리와 입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함으로" 즉,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행위에 의해, 신자라는 우리의 고백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기독교 신자로 간주될 권리가 있음을 증명한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_약 2:25
여기에서 라합의 예를 거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사례가 결정적이며 충분하지 않았는가? 첫째, 진실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두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롬 4:3,6). 둘째, 아브라함의 경우는 예외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사례이다. 라합은 가엾은 이방인, 이교도, 창기였다. 하지만 이런 라합 역시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히 11:31). 그리고 나중에 "행위" 즉, 자신의 생명을 무릅쓰고 정탐군들을 숨겨주는 행위에 의해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였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_약 2:26
요약하자면, 숨이 끊어진 시체와 무가치한 믿음은 자연적, 영적 생명의 모든 목적에 대해 똑같이 쓸모없다. 따라서 사도는 생명이 없는 고백자들이 몸에 걸친 정통주의 복장의 무가치함을 결정적으로 입증하였다. 복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만 의지하는 자들의 오류를 즉, 마음이 기질과 삶의 기조는 입술로 고백하는 거룩한 종교에 노골적으로 상충하는데도 그런 고백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충분히 폭로하였다. 거룩한 마음과 순종적인 행실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성경적 증거들이다.
아더 핑크의 '이신칭의'에서 발췌(139-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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