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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마을 뒤편에서 시작한다. 매년 개최되는 철쭉제로 인해 화장실과 넓은 주차장, 그리고 관광안내도 입간판 등이 있는 곳이다. 바래봉 유래와 철쭉군락지 형성 과정이 적힌 안내판도 옆에 서 있다. 등산로는 왼편의 국립종축장 울타리를 따라 이어진다. 넓은 초지인 국립종축장 뒤편으로 흥부가 살았다는 운봉읍내가 낮게 깔린 짙은 구름 아래 꽃처럼 옹기종기 정답다.
이번 지리산 서북능선 산행에는 부산에서 달려온 본지 사진편집위원 임대영(41세·부산의료원)씨와 서울에서 내려온 고영분(25세·삼성생명), 김선희(28세·회사원), 위유성(32세·아트만 프로덕션), 남궁철승(40세·회사원) 씨가 동행했다.
아침 여섯 시 반이라 아직은 사방이 고요하다.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다운 아침 진주이슬 머금은 들풀들로 마음이 상쾌하다.
바래봉까지는 4륜구동차 한 대가 올라갈 만한 넓은 길이 이어진다. 등산길이 아니라 목장 작업용의 멋스럽지 못한 길이 지루하다. 15분 가자 바래봉과 운지사 갈림길이다. 바래봉은 통제소가 있는 왼쪽, 아주 작은 절집 운지사는 오른쪽 다리를 건너 솔 숲 속에 있다. 여기서 바래봉까지는 3킬로미터 조금 넘는다.
10여 분 가면 왼쪽으로 이동식 화장실이 나타나고, 다시 7분이면 운봉산악회에서 만든 ‘철쭉샘’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 양옆으론 온통 철쭉밭이다. 샘을 지나자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이는데 왼쪽에 또 이동식 화장실이 있다. 5분 더 오르자 오른편으로 일본잎갈나무숲이 나타났는데, 짙은 운무 속에 가려 신비로운 풍경이다.
김선희씨가 며칠 밤 동안 얼려 온 단술을 꺼내 놓았다. 여름 날 산행에서 얼린 단술만한 마실거리가 또 있으랴! 모두들 한 모금씩 맛있게 먹었는데도 1.8리터 페트병에 가득 채운 단술은 줄어들 줄 몰라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10분 오르자 길은 평탄해진다. 탐방로 포장공사가 진행중인 이 곳은 폭 3미터가 넘을 정도의 넓은 길에 커다란 화강암 박석을 깔고 길 양옆으론 배수로와 토사유출을 막기 위한 통나무 칸막이를 설치해 놓았다.
빗속의 지리산, 신비로운 풍경 속으로
‘바래봉 0.8km, 운봉 4.2km’ 이정표를 지나 5분 더 가니 오른쪽에 텐트 10동은 칠 정도의 넓은 잔디밭이다. 여기서 바래봉 삼거리까지는 금방이다. 삼거리에 배낭을 두고 수통을 꺼내 ‘바래봉샘’으로 향했다. 부슬비가 내려 시야가 온통 희뿌옇다. 그 속에 쭉쭉 뻗은 낙엽송들이 환영인양 늘어 서 있다. 바래봉 100여 미터 아래 있는 ‘바래봉샘’은 운봉로터리클럽에서 만들었는데, 물맛도 좋고 수량이 언제나 풍부하다. 서북능선 종주를 위해서는 여기서 꼭 수통을 꽉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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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봉에서 시작해 팔랑치 너머 무명봉(1122.8m)까지 약 30만평 넓이의 철쭉군락지는 옛날 방목해서 키우던 양들의 솜씨다.
몸에 좋은 나무들은 양들이 죄다 뜯어먹고 ‘꿀을 따던 벌이 기절할 정도’로 독성이 강한 철쭉만 살아남았다. 5월 중순이 지나면 이곳은 그야말로 붉은 꽃바다가 된다.
적어도 바래봉에서만큼은 짐승들 조경 솜씨가 인간보다 훌륭하다. 긴 능선은 고도차가 별로 없어 바래봉 철쭉은 벚꽃처럼 ‘한꺼번에’ 피어난다. 자연이 만든 미학이 인공을 이기는, 천상 정원이다.
다시 삼거리로 나와서 10여 분 가면 팔랑치. 왼편 희미한 길로 내려서면 팔랑마을이다. 철쭉군락지 보호를 위해 설치해 둔 나무계단길이 군데군데 나 있고, 어떤 곳은 철쭉 숲을 두부로 자른 듯이 길이 나 있다. 팔랑치에서 20분이면 철쭉군락지 끝에 닿는다. 봄·가을 산불경방기간엔 이곳에서 등산로가 통제된다. 여기서 무명봉까지는 10여 분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한다.
넓은 잔디밭 평지를 가진 무명봉에 오르면 뒤로 바래봉 철쭉군락지가 아스라히 펼쳐지고, 서쪽으로 백두대간이 지나는 남원시 이백면 주촌리 일대와 덕산 저수지가 보인다. 바로 눈앞엔 인월 실상사에서 상무주암, 도솔암을 지나 삼각고지까지 이르는 삼정산 능선이 펼쳐진다. 그 뒤로 종석대에서 반야봉, 천왕봉을 지나 중봉, 하봉으로 연결되는 지리산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시원함, 장쾌함은 잘 알려진 주능선에서와는 또 다른 맛을 안겨준다.
서북능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또 다른 모습
5분 더 가면 잘 정비된 헬기장이 나오고 바로 앞이 부운치, 여기서 정령치까지는 6.4킬로미터다. 좌우로 남원 수철리와 산내면 상부운 마을로 내려서는 길이 있지만 희미하다. 부운치에서 세동치(1120m)까지는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 40분 가량 걸린다. ‘정령치 4.3km, 바래봉 5.3km, 청소년수련원 2.1km’ 이정표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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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동치 바로 위에 넓은 헬기장이 있다. 헬기장에서 20여 미터 가면 왼쪽으로 샛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죽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길을 따라 5분(약 70m) 내려서면 세동치샘이다. 물이 깨끗하고 차며, 맑은 맛에 수량도 풍부하다.
세동치 헬기장에서 500미터 가면 세걸산이다. 멀리 일자 능선의 만복대가 고리봉 너머로 구름에 가렸다 보였다 숨바꼭질을 하고, 주능선은 아예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서북능선은 능선길이라곤 하지만 고리봉 오르기 전까지는 숲 속 길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거대하면서도 유순하고, 도도하면서도 주변을 거스르지 않고, 머나 먼 길이면서도 가까운 마음의 산, 지리산은 그리움이다.
서북능선 양대 봉우리 중 하나인 고리봉(1304.5m)은 세걸산에서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지리산엔 고리봉이 두 곳 있다. 정령치 북쪽에 있는 이 고리봉을 일명 ‘큰 고리봉’이라 부르고, 만복대 지나 성삼재 가다 만나는 고리봉을 ‘작은 고리봉’이라 한다. 보통 고리봉이라 부를 때는 큰 고리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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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봉에 오르면 비로소 지리산은 커진다. 왼쪽 발 아래로 탁용소, 병풍소, 간장소 등을 품고 수려한 풍광으로 이어지는 뱀사골과 그 너머 일곱 사찰을 품고 앉은 삼정산능선, 그리고 주능선상에서 볼 때와는 달리 예의 그 덕스러운 모습은 감추고 가파른 북사면을 보이며 포효하듯 우뚝 솟은 반야봉이 감탄을 자아낸다. 때마침 비 그치고 주능선을 감쌌던 구름이 군데군데 걷혀 구름 위로 펼쳐진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탄을 연발하며 모두 사진 찍기 바쁘다.
표고점이 있는 고리봉 정상엔 ‘정령치 0.8km, 바래봉 8.6km, 고기삼거리 3km’라는 이정표가 섰다. ‘공원내 흡연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은 가건물 뒤로 고기리로 내려서는 백두대간길이 있다.
산불감시초소와 성터를 지나 15분 가면 개령암지와 마애불상군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이정표를 따라 200미터 가면 숲 속에 텅 빈 개령암터가 나오고, 그곳에서 다시 100미터 가면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이 모여 이룬 ‘개령암지마애불상군(보물 1123호)’이 나온다. 하지만 일반인의 눈으로 12구의 불상을 모두 찾기란 매우 어렵다. 삼거리에서 정령치휴게소까지는 300미터다.
비박하려면 정령치나 만복대 헬기장이 좋다
정령치에는 넓은 주차장과 전망대가 있고,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인기 있는 곳이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매점이 있으며, 식수를 구할 수 있다. 이곳은 자동차를 이용해 지리산 자락을 돌아보는 관광객이 적잖게 몰리는 곳이다. 비에 흠뻑 젖어 휴게소 광장으로 들어서는 취재진이 이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다. 화장실 앞 샘에서 식수를 보충했다. 여유 있게 서북능선 종주를 하려면 정령치휴게소에서 하룻밤 자는 게 좋다.
정령치휴게소 앞에는 성삼재에서 산내면으로 이어지는 861번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와 주천면 주천리까지 연결되는 737번 지방도가 지난다. 도로 너머로 만복대로 오르는 나무계단길이 보인다. 계단길을 따라 1시간 남짓이면 지리산 최고의 억새능선을 자랑하는 만복대(1433.4m)에 이른다. 만복대는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 유일하게 초원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정상엔 이정표와 함께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 많은 산악회들이 시산제나 종산제를 하고, 또 백두대간길을 나서는 이들이 무사종주를 위한 제를 올리기도 한다.
가을날 피아골에서 출발해 돼지령을 지나 성삼재, 만복대, 정령치를 잇는 산행은 유명한 직전단풍과 만복대 일원의 황금빛 억새, 그리고 지리산 서쪽 자락으로 떨어지는 낙조까지 볼 수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는 환상적인 가을산행이 된다.
지난해 봄까지만 하더라도 만복대 정상의 이정표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 편의 시가 적힌 조그만 금속판이 붙어 있어 만복대 오른 산꾼들의 마음을 붙들곤 했다.
눈꽃으로 부서지는 그대 / 눈꽃으로 피어나는 그대
눈꽃이나 볼까하여 / 겨울 만복대에 올랐다가
눈꽃은 대충보고 / 진진이 생각만 실컷하고 / 내려오니
저무는 섬진강이 / 눈물되어 흐르네
만복대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100리길 주능선은 가슴 깊은 감동이다. 한민족의 정서를 이토록 잘 보여주는 산줄기가 또 있을까 싶다. 10분 내려서면 억새능선 상에 ‘만복대 1km’ 이정표가 비목처럼 스산하게 서 있다. 중간에 또 다른 헬기장을 지나 30분 정도 가면 능선에서 움푹 들어간 곳에 키를 재는 억새 속에 가려진 헬기장이 있는 묘봉치다. 묘봉치에서 우회해야 하는 작은고리봉(1248m)을 지나 성삼재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린다. 성삼재 내려서기 전에 또 하나의 헬기장을 지난다.
지리산이 주는 적막함과 능선길을 걸어오던 황홀함은 성삼재가 가까워지며 깨지고 만다. 환경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리산 파괴의 주범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관광도로가 지나는 성삼재는 늘 시끄러운 엔진 소리로 가득하다. 성삼재 화장실 앞에는 종석대 쪽에서 흘러내리던 샘이 있는데 지난해부터 어찌된 영문인지 말라 버렸다.
가슴 뚫리는 시원한 조망 선사하는 코재
성삼재 주차장에서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서는 코재까지는 쉬엄쉬엄 걸어서 40분이면 닿는다. 호박돌이 깔린 포장도인 이 길은 지리산 종주길에서 손꼽히는 고난의 길. 하지만 얼마 전 새로 지은 코재전망대에 올라서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화엄사 계곡과 차일봉능선, 월령봉·형제봉능선이 더없이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이기도 했던 이 아름다운 풍경의 끝자락으로 구례와 섬진강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역시 지리산이다. 코재에서 노고단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무냉기 전망대가 나오는데 그 바로 옆으로 노고단에서 흘러내린 계곡이 흐른다. 여기서 물을 구할 수 있다.
코재에서 화엄사로 내려서는 길도 지리산 등산로 가운데 악명 높기로 유명한 곳. 만일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른다면 정말 코가 땅에 닿도록 가파른 길을 입에 단내가 나게 4시간 가량 걸어 올라야 하는 힘든 길이다. 성삼재 길이 뚫리기 전에는 화엄사에서 시작하는 이 길은 지리산에서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 가운데 하나였다. 옛날 지리산 종주를 계획하는 이들은 화엄사를 들머리로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노고단까지만 오르는 산행객들도 많아 언제나 붐비던 길이었다.
코재에서 가파른 길을 10여 분 내려서면 작은 바위의 전망대가 나오는데 눈썹바위다. 여기서 지그재그로 가파른 길을 따라 20분 가면 작은 폭포가 예쁜 집선대가 나오고, 다시 10분 내려서면 국수등 돌계단길이다. 국수등에서 25분 내려가면 천오백여년 전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 산내암자인 연기암휴게소다. 이곳부터 가파른 길은 다소 완만해져 한결 걷기 수월하다. 계곡길이 그렇지만 울창한 숲으로 인해 조망이 트이지 않아 답답하다.
시멘트 포장도를 따라 조금 내려서면 야영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철다리 건너 40분쯤 가면 지리산을 대표하는 큰 절 화엄사다.
출처 "사람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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