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江華郡]
역사
하점면 장정리, 화도면 사기리와 동막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었고, 군 내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채집된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점면 부근리와 신삼리 등지에 분포해 있는 고인돌,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 길상면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명해 쌓게 했다고 전하는 삼랑성(三郎城)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했으나 757년(경덕왕 16) 신라가 이곳을 점령해 해구군이라 개칭했고, 790년(원성왕 6)혈구진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940년(태조 23) 강화로 개칭하고 현을 두었는데, 이 때 비로소 강화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몽고의 제2차 침입 직전인 1232년(고종 19) 고려는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강도(江都)라 칭하고 몽고에 대한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0년(원종 11)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고려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대장경의 조판, 상감청자의 제작 등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개경환도가 이루어지자 이에 반대하던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고려 조정과 몽고에 항쟁하다가 진도로 남하하였다. 이 때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각종 재물과 인질로 삼은 고관의 가족들을 싣고 진도로 남하해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해 피해가 컸으며, 충렬왕 때에는 잠시 인주(仁州 : 현재의 인천)에 병합되었다가 1377년(우왕 3)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18년(광해군 10) 부윤을 두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일시 강화로 피난했다가 환도했는데, 이 때 부윤을 다시 유수로 승격시켰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김상용(金尙容) 등에게 명해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봉림대군·인평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는 백관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을 열어서 청나라와 강화하였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뒤의 효종)은 청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북벌계획을 추진할 때 그 일환으로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작업은 숙종 때까지 이어져서 강화도에는 내성·외성·12진보·53돈대 등이 축조, 설치되어 이중 삼중의 요새화가 이루어졌다. 또 1678년(숙종 4) 강화부윤이 진무사를 겸직하도록 하고 강화만 일대를 방어하는 오영(五營)을 통솔하게 하였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 강화성을 함락하고 약 1개월 동안 머무르다가 정족산성전투(鼎足山城戰鬪)에서 양헌수(梁憲洙)에게 패퇴하자 강화도에서 철수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성이 함락될 때 전 병조판서 이시원(李是遠) 형제가 독약을 마시고 순절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 함대가 광성보(廣城堡)·덕진진(德津鎭)과 대안인 통진·덕포진(德浦鎭) 등의 포격을 받고 인천 방면으로 퇴각했다가 다시 북상해 초지진(草芝鎭)을 점령하였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국 해병대는 육로로 북상해 덕진진과 광성보를 함락시켰다.
광성보전투에서는 어재연(魚在淵) 이하 모든 장병이 끝까지 싸우다가 중상자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 두 양요를 거친 뒤 1874년에 강화도 동쪽해안에 포대를 설치해 외침에 대비했으나, 이듬해에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이 일어나 초지진과 포대가 일본군함의 포격을 받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1876년에는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는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96년에 강화부로 강등되었고, 1906년에는 다시 강화군으로 강등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교동군(喬桐郡)이 편입되었다. 1950년에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침입하자 군민들이 특공대를 조직해 그들을 격퇴시켰는데, 강화읍 입구에는 그들의 공적을 기리고 전사한 19인의 영령을 추모하는 ‘강화특공대의적비’가 세워져 있다. 1962년 10월 1일 볼음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1983년 2월 15일 하점면 양오리가 송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 6월 25일에 강화읍 신문리 일부를 관청리에, 불은면 삼동암리 일부를 삼성리에, 불은면 신현리 일부를 덕성리에 편입시켰다. 또 1991년 8월 8일에는 화도면 장화리 일부를 내리에 편입시켰다.1993년 9월 13일에는 불은면 덕성리 일부를 길상면 길직리에, 길상면 장흥리 일부와 길직리 일부를 불은면 덕성리에 편입시켰다. 이듬해에는 강화읍 대산리 일부를 송해면 신당리에, 송해면 신당리 일부를 강화읍 대산리에 편입시켰다. 1995년 3월 1일 군 전체가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1월 12일에는 송해면 양오리의 일부가 하점면 장정리로, 같은 해 4월 10일에는 하점면 망월리의 일부가 내가면 오상리에, 내가면 오상리와 구하리가 하점면 망월리에 각각 편입되었다. 오늘날 강화도에서는 강화문화제, 고인돌축제, 참성단 축제 등을 마련하여 진행되고 있다. 2005년 12월 말 기준 562개소의 문화재 내지 사적지가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83개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관광 자원이 풍부하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인천가톨릭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가천의과학대학교 등이 개교되어 교육도시로서의 모습도 갖추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8-12 작성자 명사십리